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70화 (170/218)

약속(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래서요?”

차갑고 담담한데 어쩐지 짜증이 들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백은호가 되물었다.

“그래서요는 뭐가 그래서요야. 지금까지 내내 설명해 줬잖아.”

너 대충 듣고 있었냐?

“지금까지 내내, 신혼인데 아내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다는 내용을 단어와 문장구조만 바꿔서 열한 번쯤 말씀하신 것 외에 설명은 아무것도 안 하셨습니다만.”

아냐. 설명도 했어. 다섯째 형이 돌아와서 “나한테는 귀찮은 일만 잔뜩 안겨놓고 너는 팔자 좋게 신혼이란 말이냐. 그 꼴은 못 봐주겠다.”며 내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괴롭힌다고.

한 번 더 설명해 줬더니 백은호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아직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지금 시각은 아침 8시 27분이고 제 침실에는 12분째 저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습니다.”

어…방해였냐? 어쩐지 백은호치고는 머리카락도 단정치 않고 셔츠 단추도 대충 꿰고 있더라.

“아아, 미안한데. 잠깐 흐린 틈에 나온 거라 지금은 집에 못 가. 흐려질 때까지만 있으면 안 될까?”

오늘 날씨는 곳에 따라 비 오거나 흐림. 그런데 내가 나올 때만 해도 두껍던 구름이 백은호의 가게에 도착할 때쯤엔 점점 옅어져서 하늘이 보이기 전에 간신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오후에는 확실히 비가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여기에 숨어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 대꾸에 백은호의 눈이 잡아먹을 듯이 번득였다. 위층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나 팔 하나쯤 먹혔을지도 모르겠다.

“은호씨? 잠깐 다녀온다더니…어머.”

웬 여자가 계단 뒤에서 머리만 내밀고 그를 부르다 뒤늦게 나를 보고 후다닥 계단 뒤로 숨었다. 저 아무것도 안 봤어요. 어깨까지밖에 안 보였는걸 뭐.

그런데 어깨 위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예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누구지? 손님은 아니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백은호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대답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갔다.

야, 화내지 마. 미안해지잖아. 내가 딱히 염치없는 녀석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밖에 나갈 수없는 상황이라 할 수 없이 여기 있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러나 확실히 신경 안 쓰고 있는지 잠시 후에 2층에서 매우 사적인 소리가 들려와 나는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조용히 취소했다.

저 자식, 고의야. 분명히 고의야.

가만히 있으니까 어쩐지 고등학생 아들 방문에 귀를 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돌아다니며 진열된 물건들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들린다. 나는 아무 것도 안 들린다.

겉에서 보면 오래 되어 낡은 건물인 골동품점 은호당의 내부는 밖과 달리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신고전주의 양식 구조에 와인색 천과 골동품을 절묘하게 배치한 이곳은 어딘지 대한제국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지고 슬프게 우아했던 그 때를.

생각해 보면, 백은호는 그 무렵에 우리에게 돌아왔었다. 도망치듯이 떠나서 꽤 오랫동안 혼자 돌아다녀 다시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한밤중에 여우의 모습으로 찾아와 대문 앞에 엎드려 있던 것을 달님이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보통 때라면 달님이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멀찍이 도망쳤을 백은호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는 지쳐 있었다. 본래 눈처럼 희고 아름다웠던 털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까맣게 말라붙어 엉기고 그 위에 흙과 풀물로 얼룩덜룩 했다.

나는 그가 며칠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산과 산을 가로질러 내게 왔다는 것을 알았다. 품에 안아주자 잠들어서 하루를 꼬박 깨어나지 않았다. 깨어난 뒤로도 한동안은 여우의 모습으로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어른스러운 체하는 어린 여우였으나, 돌아왔을 때는 어린 체하는 어른 여우가 되어 있었다. 그가 떼를 쓰는 척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척했다. 내가 인간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을 천천히 메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인간이 된 후로는 반대가 된 것 같은데.

“그거, 떨어뜨리면 420만원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내 뒤에서 평소와 같은 백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잖아!

쬐끄만 주제에 쓸데없이 비싼 백자 연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돌아서자 백은호가 여느 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 친구는 소개시켜 주지 않을 거야?”

금방 씻고 나와서 약간 젖은 머리카락을 보자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아니라 약혼녀예요.”

계단 위에서 태연한 여자의 목소리가 백은호 대신 답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은호를 쳐다보았다.

너 약혼했어? 혹시 혼인 빙자…

백은호의 것이 분명한 셔츠만 하나 달랑 입은 여자가 맨발로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왔다. 어쩐지 시위하는 것 같아서, 나는 눈치 없이 남의 신혼집에 쳐들어 간 남편 친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신혼은 나잖아!

“김해명씨죠? 한지예라고 해요. 은호씨에게 자주 들어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와 악수하려고 손을 잡았을 때야 나는 여자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용아의 비늘이었다. 상여봉 뒤편 연못에 사는 용아. 그가 일흔세 번째로 잡아먹은 뒤 다시 일흔세 번째로 살렸다는 그 여자다. 백은호가 보고서 본성을 드러낼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나도 궁금했다고.

백은호는 우리가 악수할 때부터 맞잡은 손을 따라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악수한 후에도 손을 잡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자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우리 주위를 뱅뱅 돌았다. 야아, 백은호가 어쩐지 짐승같…

“와아, 손을 잡고 있어도 해명씨는 가만히 두네요. 두 분은 정말 친한가 보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쫓아버렸을 걸.”

한지예가 웃으며 말하더니 백은호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백은호…너 그런 캐릭터였냐? 독점욕 강한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완전 쿨할 것 같았는데.

“옷이나 제대로 입고 와.”

백은호가 이를 갈 듯한 얼굴로 한지예에게 말했다. 백은호야, 그렇게 요기를 서리서리 뽑아내면서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좀 무서웠는데 한지예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서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그녀는 셔츠를 아슬아슬하게 팔랑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어딜 보고 계시는 겁니까.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드려야 합니까?”

백은호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딱히 뭐 안 봤거든요? 게다가 탐내긴 뭘 탐내? 내가 너냐? 그리고 네 약혼녀보다 유하가 훠얼씬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거든요?

“여기 온 용건이나 말하십시오. 양이천왕이 괴롭혀서 도망쳐 왔다느니 하는 핑계 말고요.”

아니 형이 괴롭히는 건 사실인데. 하긴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뭐 겸사겸사, 알려줄 것도 있고.”

여우답게 눈치 빠른 녀석이니까 어차피 할 말은 다 하는 게 좋겠지만…

“바로 얼마 전에 우리가 땅 속에서 데려온 마술사 할아버지 있잖아. 그 할아버지가 이런 걸 보냈더라고.”

부서지지 않게 상자에 넣어 온 것을 백은호에게 내밀자 그는 눈길만 힐끗 줄 뿐이다.

“저도 받았습니다.”

역시, 백은호에게도 갔던 거구나. 마술사 민치현이 우리에게 보낸 것은 나뭇잎이었다. 생생한 푸른 잎은 아니고 낙엽이었는데 그 누렇고 메마르게 변한 잎에다 먹으로 날과 시를 적어서 보낸 것이다.

나뿐 아니라 유하와 창고의 도깨비들에게도 오고, 달님이도 반쪽으로 찢어진 잎이 털 사이에 묻혀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이 날짜, 무슨 뜻이야? 도깨비들은 초대장이라고 하던데 어디로 오라는 말도 안 적혀 있고 날짜와 시간만 달랑 있잖아.”

“장소는 때가 되면 알 수 있습니다. 나뭇잎을 가지고 계시면 적혀있는 날과 시에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이것도 도술 같은 건가.

“일종의 야유회입니다. 민치현이 해마다 열고 있습니다. 인간과 요괴들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만든다며 아는 사람과 요괴들에게 모두 보내는 것 같습니다만 별로 호응은 없었습니다.”

어? 그런 거였어?

“야유회라면 역시 맑은 날 밖에서 하는 거겠지?”

그럼 나는 무리인데. 유하에게 부적을 빌려달라고 해볼까?

내 질문에 백은호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인간과 요괴가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아마 위장천에 터를 잡았을 겁니다. 낮도 밤도 없고 신령도 악귀도 없는 곳이지요.”

그런 곳이라면 나도 갈 수 있잖아?

“백은호, 너도 갈 거지?”

신나서 묻자 백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령이 가는 것은 상관 않겠습니다만 저는 아무나 가리지 않고 모여서 뒤섞여 노는 자리를 애초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야,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너 도깨비 연회 안 가봤지?

“아무나 마구 모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자들을 굳이 만나겠습니까.”

“뭐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까 안 가겠다니. 그보다는 마음에 드는 이들이 더 많이 올 거잖아. 그 사람들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냐?”

“도령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애초에 없지 않습니까.”

조소가 섞인 목소리였다.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정도야 있지만, 그 사람들이 온다고 해도 싫을 것 같진 않은데.”

“도령은 항상 그런 식이어서…!”

갑자기 백은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울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가 자신이 하려던 말에 놀란 것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나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았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을 알았다. 하고 싶지만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나와 한 약속 때문에 못하는 말을 알았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백은호는 끔찍하게 괴로운 얼굴이어서 나는 차라리 그가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식으로…저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때도 그는 가끔 괴로워보였다.

- 걱정 마라, 명아. 막내야. 형이 알아서 해주마. 나를 믿어라.

그렇게 말한 둘째 형의 계획이 뭔지 나는 몰랐다.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채로, 단 한 번만 외면해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단을 먹은 유하가 요괴로 변했을 때 후회했다. 백은호가 와서 내게 고백했을 때는 한 번 더 후회했다.

- 천왕께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 하시고 주머니를 주셨는데, 너무나 향기로워서…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향기로워서…향기만 맡아 보려고 했는데…

너는 내 동생이 사랑하는 여우가 아니냐. 너를 믿으마. 둘째 형이 그렇게 말했다고 백은호는 울면서 고백했다. 선단의 신묘한 향기는 어린 여우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무런 대비도 없이 주머니에 넣고 유하에게 전해달라며, 둘째 형은 백은호에게 맡겼다.

백은호는 선단의 향기에 홀려 그것을 꺼내보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로 넣었지만 요괴의 손에 닿아 더럽혀진 선단은 그 효용마저 변이하여 유하를 요괴로 만들어버렸다. 백은호가 내게 용서를 구했지만 나는 용서한다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그 화제를 피했다.

하지만 내가 인간이 된 후 기억을 잃자, 그래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유하와 백은호를 통해 들어야만 하게 되자 백은호는 매년 내 과거와 함께 자신이 한 일도 말해야 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벌을 주십시오. 어째서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까.”

내가 그에게 내 과거를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내 어리석은 선택을 듣기 싫어서였을까.

“왜 제 죄를 갚지 못하게 하십니까.”

원망이 어린 목소리로 백은호가 말했다. 어느 쪽이 더 괴로웠을까, 그는.

“건방지네.”

나보다 큰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어린 여우에게 했던 것처럼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그건 내 죄야. 남의 걸 탐내면 안 된다며. 멋대로 가로채지 마.”

화난 적 없었다.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용서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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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마침내 낙엽 초대장에 적힌 날과 시가 되었다.

나와 유하, 나비 요괴는 물론 창고의 도깨비들까지 모두 낙엽을 하나씩 들고 작업장에 모였다. 달님이 녀석은 낙엽을 받자 아무 생각 없이 씹어 먹어 버렸는지 반쪽만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들어서 안았다.

시간이 되자 뭔가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도깨비들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제자리에서 한 걸음을 옮겼고, 그 걸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냥 한 걸음만 디디면 되는 건가? 도깨비들을 따라 나도 한 발을 옮겼더니 갑자기 주변의 전경이 뒤집어진 것처럼 바뀌며 넓은 벌판과 나무가 드문드문한 숲이 나타났다. 이미 도착한 야유회의 참석자들이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아…이건 꼭…”

사실 처음 주변 풍경을 보고는 초등학교 소풍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초대받고 온 사람 및 요괴들을 보니 코스튬 플레이 행사장이 생각난다.

바깥에서라면 인간인 체하고 있었을 요괴들이 모두 제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물 모양의 요괴, 물건 모양의 요괴, 연기나 바람처럼 흐릿하여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고 바위나 돌인 줄 알았는데 혼자 데구르르 굴러다니지, 언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슬그머니 일어나 쿵쿵 걸어갈 때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인간들 쪽은 평범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 야유회의 주최자인 민치현은 마술사 아니랄까봐 검은 턱시도에 실크햇, 손녀인 소영은 처음 봤을 때의 치파오 대신 오늘은 바니 걸이었다. 그 외에도 한복이나 삼국시대 옷처럼 고전적인 의상은 흔한 편이고 자다 나온 것 같이 파자마에 맨발인 사람이 있질 않나 하와이에 있다 소환된 것처럼 비키니에 꽃목걸이를 걸고 있는 할머니 한 분도 계셨다.

위장천에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저러고 다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민치현이 아는 인간들 취향이 원래 다 저런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꽤 평범하잖아? 라고 생각했는데 나비 요괴 녀석이 등 뒤에서 붕붕 날고 있더니 내 어깨 양쪽에 나뭇잎 날개를 만들어 놓고 먹지 않은 채로 날아가 버렸다.

“그거 뭐 코스프레 한 거예요?”

나 말고 평범한 한 명, 수호 녀석이 교복 차림에 책가방 멘 채로 와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코스프레 아니거든. 이 녀석은 어떻게 여기 왔니 싶었는데 환과 규희 부부가 멀리 보였다. 규희는 아마도 길상과의 봉인용일 것 같은 각시탈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각시탈을 쓴 사람이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요사하게 시끌벅적 휘황찬란했다.

“백은호 말로는 호응이 별로 없다던데 의외로 많이들 왔잖아?”

얼핏 봐도 인간은 백 명이 넘고 요괴는 그 두 배 정도?

“일주일동안 떨어지는 모든 낙엽이 초대장이었는 걸요.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나 요괴라면 모두 다 초대받은 셈이죠. 어서 와요, 언니. 어서 오세요, 해명 도령.”

민치현의 손녀, 소영이 어느새 다가와 있다가 내 중얼거리는 말에 대꾸해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언제 유하랑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냐. 소영은 꼬리가 있다면 살랑살랑 흔들 것 같이 애교 넘치는 얼굴로 유하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둘이서 숙녀들의 예의바른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왕왕 짖으며 뛰어다니는 달님이를 핑계로 야유회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나무 밑에 자리 편 사람들 말고도 넓은 벌판 쪽에서는 여러 가지 게임이나 작은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항아리 안에 화살을 던지는 투호 놀이라든지 팽이치기라든지 널뛰기 같은 설날에나 볼 수 있는 놀이도 하고 있었다.

다만 항아리 대신 커다랗게 주둥이를 벌린 물고기 요괴 입 안에 화살을 던진다든가 -물고기 요괴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던지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 같다- 팽이 대신 도토리를 돌린다든가 널뛰기로 별이 될 만큼 높이 올라간다든가 할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까지 장사치가 온 건지 모르겠는데 좌판 깔고 엿이며 사탕이며 여러 가지 달콤한 것을 파는 너구리 요괴가 있질 않나 잔치 국수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질 않나. 오오, 솜사탕도 파는데. 그런데 솜사탕을 샀더니 구름이네요. 이거 사기 아냐? 따지려고 했지만 솜사탕 장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해명아, 해명아. 우리 저거 하자.”

어디선가 놀고 있던 나비 요괴가 나를 데려간 곳은 커다란 나무 밑이었다. 나무 같기는 한데 어째서인지 박 덩이가 열매로 매달려 있었다. 박은 넝쿨이잖아? 나무가 아닌데요? 게다가 그 크기라는 게 흥부전에서 나오는, 톱질해서 열어볼만한 정도였다.

“콩 주머니를 던져서 박을 떨어뜨리면 가질 수 있대. 해보자. 해보자.”

옆을 보니 박을 떨어뜨린 사람들을 위해 톱도 빌려주고 있었다. 오오, 흥부가 탄 박에서는 집도 나오고 금은보화도 나오고 미인도 나왔다던데.

그런데 콩 주머니가 공짜가 아니었다. ‘콩 주머니 백 개에 한 명.’이라고 적은 푯말 옆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백 개에 한 명이라니 뭔 소리야.

나비 요괴가 나를 데리고 할머니에게 가더니 “콩 주머니 백 개 주세요.”라며 기운차게 외쳤다.

“오냐.”

할머니가 대답과 함께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을 슬쩍, 악수하듯 흔드는 순간 나는 백 개의 콩 주머니가 되었다? 내가? 백 개?

자신이 백 개로 나뉘는 기분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그것도 콩 주머니가 되어서 바구니에 담기는 그 기괴한…

나비 녀석은 신나서 바구니를 들고 가더니 나를, 아니 백분의 일의 나를 하나 집어든 다음 박을 향해 힘껏 던졌다.

‘우아아악!’

콩 주머니에 입이 없어서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녀석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내 몸이 박에 탁 부딪치는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이며 세상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 충격에서 헤어날 틈도 없이 두 번째 내가 날아갔다. 연달아 세 번째, 네 번째 나도 박을 향해…

‘잠깐! 잠깐! 이건 아니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할머니! 본인 동의도 없이 사람을 콩 주머니로 만들면 어떡해요! 나비 이 자식아!’

그렇게 나는 백 번을 던져졌고 나비는 커다란 박을 얻었다. 녀석이 톱을 가지고 박을 써는 동안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은하수 같은 별무리 속에서 내가 콩인지 콩이 나인지 모를 물아일체의 경지를 누리고 있었다.

“해명? 괜찮아요?”

유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별빛 사이로 들려왔다.

“유하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부르자 그녀가 나를 야유회장의 북새통에서 좀 떨어진 소나무 밑으로 데려갔다. 나무 밑에는 돗자리가 깔렸고 어느새 준비했는지 모를 도시락과 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뭘 했는데 이렇게 힘이 없어요? 잠깐 누워요.”

그녀가 내준 무릎에 머리를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멀리서 사람과 요괴들이 섞여 놀고 이야기하고 웃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따뜻한 공기에 실려 달콤한 흙과 상쾌한 나무와 싱싱한 풀 냄새가 난다. 머리에 닿은 유하의 몸은 따뜻하고 꽃향기 같기도 나무 향기 같기도 한 좋은 냄새가 났다.

눈을 감은 채로 조금 웃자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유하가 몸을 기울여 물었다.

“왜요?”

그냥. 좋아서.

멋없는 대답만 떠올라 뭐라 말하는 대신 그녀의 목을 끌어당겼다. 살구처럼 보들보들한 뺨이 입술에 닿았다. 입술을 모아 새가 쪼는 것처럼 입을 맞추니 유하가 눈을 휘며 웃는다.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 같은데 어째서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 다음에 또 오자.”

“그래요.”

별 일 아닌 것 같은 내 말에 그런 일이 당연한 것처럼 유하가 대답했다.

“약속해줘.”

“약속할게요.”

지키기 쉬운 것처럼 내가 말하자 그런 것처럼 그녀도 대답했다.

볼에서 입술로 옮겨가 입을 맞추자 그녀가 부드럽게 응했다. 유하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더듬거나 혀끝이 이를 스칠 때마다 몸 안에서 정전기 불꽃이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야유회고 뭐고 그냥 집에 갈까.

“해명아. 해명아. 나 박 타서 인형 받았다? 인형이 엄청나게 나왔어!”

나비 요괴의 목소리와 날갯짓 소리가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야, 넌 눈치도 없냐?

불평할 틈도 없이 녀석은 우리 위로 날아와서는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와르르 떨어뜨렸다. 그런데 인형들 이거 뭐야. 곰방대 물고 있는 영감 도깨비 인형, S자로 구부러진 뱀 인형, 여우 인형, 여자애 인형, 강아지 인형에 빗자루 인형? 물레 인형? 아니 이건 인형이 아니라 미니어처라고 해야 하잖아? 뭐 별 귀엽지 않은 모양을 한 인형들이 잔뜩, 돗자리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바닥에 닿는 순간 인형들은 펑 하는 효과음과 오색구름 속에서 커다랗게 변했다.

“일 년에 한 번 쯤은 이런 곳도 괜찮구먼.”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퐁퐁 띄워 올리는 영감 도깨비

“좋은 이들과 함께 즐기니 더욱 유쾌하외다.”

상체를 세우고 흔들흔들 움직이는 뱀

“도령 때문에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잖습니까.”

백은호 너 안 온다며?

“…….”

노앵설아, 반갑다는 이야기 정도는 글로 쓰지 말고 말을 해.

“명. 명. 놀자. 같이 놀자.”

“어머나, 도령은 여기까지 와서도 각시랑 꼭 붙어 있는 게요?”

“신혼이잖소. 모르는 체 합시다, 그려.”

“그럼 우리끼리나 가서 놀아 볼까?”

갑자기 나타나서 실컷 방해한 주제에 인심 쓰는 체하며 그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갔다.

“우리도 갈까요?”

유하가 웃으며 말했다.

어쩌겠어.

“가자.”

우리는 손을 잡고, 먼저 간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뱀의 말대로 좋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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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긋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가 꿈인 줄 알고 벌였던 일의 뒤처리 때문에 바쁘다던 양이천왕은 사실 말하고 있는 것만큼 바쁜 것 같지 않다.

바쁘다는 분이 내가 유하와 좀 붙어있으려고만 하면 시시로 수시로 때때로 불쑥 불쑥 나타나서 방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한테 센서라도 붙여놨어요? 핸드폰에 유하가 내 반경 50센티 안으로 들어오면 문자 보내주는 앱이라도 깔았어요?

걸핏하면 나타난 다음 생활정보지를 펼쳐놓고 매번 새로운 메뉴를 짚어주며 배달 시켜달라고 하는 걸신인지 사신인지 구분 안 가는 형님께 결국 나는 말했다.

“형이 돈 내고 직접 시키라고요. 사신인데 월급 안 받아요? 게다가 천왕이시라며. 품위 유지비 그런 거 안 줘요? 하다못해 잘 나갈 때 비자금이라도 안 만들어 놨어요?”

내 말에 형님은 불쌍한 얼굴로 형수가 용돈을 안 준다고 대답했다. 그게 다 나 때문이라나 뭐라나. 나를 감시한다고 출장 나가 있다가 오랜만에 돌아가서도 내가 벌인 일의 뒤처리 하느라 바빠서 집에 안 들렀더니 형수님이 화가 나셨다는데 저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그런 이유로 한 푼도 없으니 어쩔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니 아깝지만 어렵게 모은 수집품이라도 팔아볼까?”

라며 나를 힐끗 보는 얼굴은 분명 흥정할 수 없는 거래를 하자는 표정이었다. 이 양반이…

“내가 머무는 동안 매일 여섯 번, 한 번에 세 가지 메뉴로 주문해 줄 것.”

강도 같은 조건을 내밀며 그가 품속에서 어렵게 모았다는 수집품을 꺼냈다. 무슨 헛소리를 맑은 정신으로 하시냐고 물으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나무토막이었다.

여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나나 도깨비들을 귀찮게 한 끝에 달라고 했던 창고의 나무토막이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입을 다물자 양이천왕은 흡족한 얼굴로 턱을 까딱였다. 승리의 포즈 같은 그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항복의 의미로 손을 내미니 그가 내 손에 나무토막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것과 이것과 이것을…그리고 쿠폰이 있으니 음료수도 같이…”

메뉴를 주문한 양이천왕이 기분 좋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동생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중요한 물건을 갈취하질 않나 그걸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거래에 써먹질 않나. 무슨 형이 저래. 저승에서 살더니 성격이 이상해졌어. 아니, 저 형은 원래 좀 이상했나.

“하아…”

그러나 어쨌든 다시 돌려받아서 다행이었다. 나로서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더라도 다른 이의 손에는 넘기기 싫은 것이었다. 그래서 창고 안,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두고 있었으나 양이천왕의 귀신같은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어서 제자리에 돌려놔야 했다. 이것을 유하가 보기라도 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창고로 가려했지만 창고 문보다 먼저 계단에서 내려오는 유하가 보였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시선을 떨어뜨려 내 손을 쳐다보았다.

무슨 바보짓이야. 그냥 태연히 창고로 갔으면 될 걸. 멍청하게 서 있으니까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잖아. 이제 와서 숨길 수도 없고. 뒤늦게 태연한 체 할 수도 없고.

그러나 오히려 유하 쪽이 태연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나비가 여기 오지 않았나요? 오늘은 내내 안 보이네요.”

“응? 그 녀석이라면 아침부터 나가던걸. 요즘 어린애들 모아놓고 마술 보여주는 데 재미 붙였어.”

그래봐야 책에 나온 기초 마술 정도지만.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무토막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잊어버린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런 일을 잊어버릴 리가.

모양도 질감도 나무토막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을 들고 있는데, 그런데도 이것이 손에 잡혀있는 것만으로 기억과 함께 가슴이 서늘해질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 자신이 잊어버릴 리가 없다.

그것은, 기억을 잃고 두 번째 돌아온 여름의 일이었다.

첫 해와 마찬가지로 유하는 기억을 잃은 나를 하나하나 가르쳐서, 한여름이 될 무렵에 나는 기억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첫 해에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맴돌았던 유하의 심장도 그 무렵에 내 안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스스로의 기억은 아니었지만 나는 꽤 자신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힘을 사용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있어도 천왕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더욱이 내 몸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 심장은 요괴가 된 유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목천왕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와 유하는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나는 두려움 없이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다.

외출은 힘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나가지 않으면 반대로 다른 이들이 나를 찾아오면 될 뿐이다. 해명 도령이었던 옛날과 다름없이 인간과 요괴를 가리지 않고 사귀었다. 아무 일에나 뛰어들고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내 집에 가리지 않고 아무나 드나들게 되자 그 가운데에는 해명 도령이 갖고 있을 진귀한 보물에 욕심을 내는 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욕심을 가진 자 중에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나 요괴도 드물게 있었다. 그리고 그 드문 자들 중 하나가 실제로 욕심을 드러냈다.

무서운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겼다. 보물을 탐내어 창고에 숨어든 자를 유하가 막으려고 했다. 내가 알아차리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유하는 자제력을 잃었고 도둑은 요괴의 모습을 한 유하에게 사로잡혀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유하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도둑을 휘감아 꿰뚫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잘랐던 것이다. 요괴의 몸이어서 유하의 팔은 순식간에 다시 자라났지만 어쩌면 그것조차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을지 모른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팔은 사람과 비슷했던 모습을 잃고 평범한 나무토막처럼 변해버렸다. 유하는 자신이 도저히 인간일 수 없다는 증거를 눈앞에 남긴 것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어도 사라지지 않는 증거였다.

그녀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상상하는 것조차 나는 두려웠다. 그녀는 넋을 잃고 울었고 나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도.

내 바보짓은 신령들의 저지로 겨우 멈추었지만 우리들은 그때, 아마도 뭔가를 하나씩 잃거나 얻은 것 같다.

유하는 요괴로 변한 자신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녀는 사람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자신을 동요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두려워했다. 그녀의 심장은 다시 나를 거부했다.

나는 다음 해 또 기억을 잃었지만, 그 날의 두려움만은 잃지 않았다. 그것은 기억보다 강한 흔적으로 내게 남겨졌다. 그 흔적은 잃어버린 기억을 따라가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서,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나 사슬처럼 나를 제한했다.

그러나 올해, 유하의 심장은 다시 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두려운 흔적을 넘어 기억을 되찾았다.

유하의 기억 속에서 만난 나의 말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인 천왕에게 있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을 나는 인간이 된 후 길다면 긴 시간에 걸쳐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똑같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나는 여전히 자라지 않고 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되 내가 아닌 그의 말은 맞는지도 모른다. 나의 본성인 해명 도령은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아이이며 어리광쟁이 막내이지만 인간이 된 후로 25살이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14년 동안 나는 해명도령이었던 때에 바란 적 없는 것을 바라고, 하지 않았던 일을 하려고 한다.

“잠이 안 와. 자장가 불러줄래?”

밤이 되어 유하와 함께 누웠을 때, 나는 어리광 피우듯이 요구했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가만가만 옛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잠잘 적에 앞집 개야 짖지 마라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잠잘 적에 뒷집 닭아 우지 마라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자장 자장

하늘과 땅이 열두 조각으로 찢어지기 전에, 저승으로 가던 아란 어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렀을 때, 나는 잠들며 알게 되었다. 이제 어미는 떠날 것이고, 우리는 볼 수 있어도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세상에 따로 따로 흩어진다는 것을.

그녀의 세상은 나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잠에서 깨고 나면 내가 고아가 된다는 것을. 그녀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미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기다릴 거야.”

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유하가 자장가를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알아듣지 못해서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었는지 결국 내게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나는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당겼다. 팔 안에 갇힌 유하가 싫지 않은 얼굴로 버둥거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견딜 수 없이 달콤하고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아무리 빨아도 녹지 않는 사탕 같았고, 세포 대신 사랑스러움으로만 결합된 미지의 생명체 같았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짓누르며 나는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보자 그녀의 감춰진 살결도 붉게 물들이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서부터, 손톱 끝, 발톱 끝까지, 온몸의 구석구석을, 사탕처럼 녹아서 사라질 때까지 핥고 싶었다.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녀가 수줍어하는 얼굴로 속삭이듯이 물었다.

“나쁜 생각.”

유하의 볼에서 피어오른 복숭아색 홍조가 귓불까지 번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은 것은 그만 두고, 나는 그녀의 달고 혼미한 몸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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