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72화 (172/218)

요령 소리(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이른 손님이 찾아와서 날씨만큼 우울한 소식을 들려줬다.

“죽었어? 청단애기가? 어떻게?”

청단애기는 아마 예순쯤 되었을 나이의 처녀 보살이었다. 그러니 노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와는 작년에 단 한 번 만났을 뿐 그 후로 특별히 연락도 없는 사이지만 되찾은 기억 속에서 그 존재감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병이라고 합니다만 수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까요. 또 그 아이라면 제 수명을 깎는 짓도 이따금 했을 것 같고….”

말끝을 흐리며 백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 앞에서야 전혀 다르지만 둘만 있을 때는 인간을 무시하는 백은호 치고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아무튼 도령에게 이것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말하며 백은호가 내민 것은 작은 주머니였다. 안을 보니 은박지로 싸인 구슬 같은 것이었다.

“정확히는 도령이 아니라 아기님께 드리는 겁니다만.”

백은호가 덧붙였다. 유하에게? 구슬에서 눈을 떼고 그를 힐끗 보자 백은호가 문득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약간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이제 혼인을 하셨으니 예전처럼 부르면 안 되겠지요.”

딱히 그것을 나무란 건 아니지만 백은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유하를 이름으로만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예 이름을 부르는 일도 없었나? 생각해 보면 전부터 그는 유하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여자라면 누가 되었건 대체로 친절하게 대하는 백은호에게 드문 예였다.

대놓고 물은 일은 없으나 유하는 선단을 오염시킨 백은호를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유하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둘은 전에도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고 다투는 모습을 한 두 번 보기도 했다.

보통은 데면데면한 정도였고 어차피 자주 만날 일도 별로 없어 내버려 두었지만 그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청단애기가 유하에게 이것을 주라고 했다고?”

“예. 갑자기 불러서 갔더니 이것을 주면서 자신이 죽으면 도령께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받으시는 대로 곧 아기…부인께 먹이라고 하더군요. 이것을 받아온 다음 날 죽었으니 유언이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청단애기가 죽기 전에 준 것을 먹으라고 가져왔다는 말이다. 물론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게만 생각하자 어딘지 기분이 으스스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뭔데?”

“모릅니다. 받은 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곧 가져왔으니까요.”

백은호가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하기 전 잠깐 얼굴이 굳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일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린 것 같다. 둘째 형이 줬던 주머니 안의 선단, 그리고 이 주머니 안의 둥근 어떤 것. 그래서 스스로에게 상처받은 눈으로 태연한 체하는 여우 요괴로부터 나는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주머니 안에 은박지로 싸인 작고 동그란 것.

은박지를 펴자 그 안에는 하얀 구슬과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본래는 하얀 색이 아니었다. 슈가 파우더 같은 하얀 가루가 묻어 있을 뿐이다. 만져보니 딱딱한 것이나 냄새도 어쩐지 사탕 같고.

백은호를 힐끗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함께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탕 같군요.”

여우의 후각으로 그렇게 봤다면 사탕이 맞겠지. 그런데 청단애기는 무슨 생각으로 유하에게 사탕을 준 거야. 그것도 죽음을 앞두고서 이런 식으로….

청단애기가 굳이 백은호를 불러서 이것을 보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염목도에서 본 반백의 처녀보살을 떠올리자 나로서도 그녀가 죽기 전에 보내준 이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유하에게 가져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자 짐작한 반응을 보였다.

“백은호에게 이것을, 맡겼다고요?”

사탕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묻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 사실대로 말해도 되나 하고 나는 고민했었다.

“응.”

하지만 숨길 수는 없었다.

평범한 주머니와 은박지. 사탕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어볼 수 있었다. 그때처럼.

“그 무당은 이것을 왜 내게 먹으라고 한 거죠?”

“말해주지 않아서 백은호도 모른다고 하네.”

내 대답에 유하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고 있으면서 왜 이것을 제게 가져온 거예요?”

말문이 막혔다.

청단애기가 이것을 받는 대로 먹이라고 했으니까. 그것이 가져온 이유였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신경한 일인지를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염목도에서 만났던 청단애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받은 느낌이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의 감정을 어떻게든 유하에게 전하려고 했다.

유하는 내 두서없는 말을 듣고 있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입을 다물자 비로소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백은호를 믿고 있군요.”

그녀의 어조에 담긴 감정을 나는 잘 읽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질투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건지.

나는 그 말에도 할 말이 없었다. 유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백은호도 변하지 않았다면요?”

백은호도 변하지 않았다면.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어린 여우 요괴인 그때와 같다면. 그렇다면 이것을 먹어도 괜찮은가?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정당한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시 백은호가 본의 아니게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나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를 믿고 있지만…그렇지만 그녀에게 똑같은 신뢰를 요구할 권리도 없다. 무엇보다 사탕을 먹어야 할 장본인은 그녀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유하는 나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해명, 내 방에서 나가줘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한 마디도 더 붙여보지 못하고 나는 그녀의 방에서 쫓겨났다.

유하는 단단히 화가 나버린 것 같았다. 그 후로 점심을 훨씬 넘긴 시각까지 그녀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도 못하고 안절부절 내 방과 작업장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그녀니까, 무엇보다 식사시간이면 반드시 나를 부르게 될 테니까 다시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그렇지만 저 사탕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무당이, 영문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로 보낸 물건. 그것을 가져온 백은호는 유하를 요괴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녀로서는 불길한 이유만 덕지덕지 붙은 것 같은 사탕을 입 안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나로서도…

백은호나 청단애기에 대한 신뢰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 역시 누구나 내가 깊이 믿는 이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자신에게 묻는다.

믿어도 돼? 그들을.

하나는 유혹에 빠져 나를 배신했던 요괴, 다른 하나는 잠깐 만나봤을 뿐인 인간.

믿어도 돼?

어리석다고도 불길하다고도 느껴지는 생각에 빠져서,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해명!”

유하의 목소리가 분명한 날카로운 외침이 위층에서 울렸다. 거의 동시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비단실로 묶어서 꽉 당기는 것 같은 통증이 가슴속에서 퍼졌다. 문을 부수듯이 열고 위층으로 달려갔다. 눈 깜짝할 새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유하의 방 문은 활짝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없어? 아무도? 유하는?

별로 넓지도 않은 방안을 여기저기 뒤지고 뒤늦게 기운을 읽어 보았지만 그녀는 없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떻게?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뭔가가 남아있었다.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요기가 유하의 기운과 섞여 방안을 휘휘 돌고 있었다. 유하의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여기에 있던 요괴의 것이다. 사라진 후에도 금세 흩어지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기운을 흘리면서,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운을 읽으며 나는 한 번 더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있던 요괴는 모르는 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 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정확히는 한 가족과 같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혼란한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기운은 비슷하지만, 나비 녀석이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적은 없어. 그리고 이렇게 어두웠던 적도. 또 이렇게 차가웠던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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