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소리(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꼬리군요.”
연락을 받고 수리점으로 온 백은호는 유하의 방 안을 보고 나서 말했다. 꼬리?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백은호는 피식 웃었다.
“이 자리에 없는 자의 요기가 아직까지 이렇게 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으로부터 그 자가 있는 곳까지 요기가 이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따라갈 수 있도록 꼬리를 남기고 간 겁니다. 도령의 눈이라면 그 틈새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지간히 얼이 빠져 있었군요.”
이어져 있다고? 그러니까 이 요기를 따라가면 나비 녀석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백은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집중하자 과연 그랬다.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휘돌고 있는 기운은 분명 그 끝이 어딘가에 집중되어 그곳으로부터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기를 통해서 따라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 작은 틈새가 양쪽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억지로 벌려졌다. 공간을 세로로 찢어 가르며 틈이 커졌다.
방금 내 의지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내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땅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도령이라도 그렇게 쉽게 낚이지 말아주십시오.”
손끝에 묻은 부적의 재를 털어내며 백은호가 말했다. 그의 짓이다. 내 발을 바닥에 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거 풀어, 백은호.”
어디까지나 태연한 여우 요괴를 향해 나는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유하가 나비 요괴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의 흔적까지 남아있는 마당이다. 아무리 유하와 사이가 안 좋다지만 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데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쫓아가는 것도 방해하고 있었다.
“풀지 않으면 내가…”
“부인은 도령을 움직일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미끼가 아닙니까. 고기를 낚기도 전에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백은호가 말했다. 그의 냉정한 말에 본능적인 반발심이 솟아났지만 한 편으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입을 다물자 백은호는 손짓으로 묶어놓았던 내 발을 풀었다.
“뒤쫓아 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알아두어야 할 일도 있는 것 같고요.”
귀찮은 듯 머리를 흔들며 백은호는 이어서 말했다.
“여기 오기 직전 환에게 들은 것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모여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데 도령이 먼저 연락을 한 겁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리점의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백은호의 “양반은 아니군요.”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환의 모습이 보였다. 3층까지 순식간에 올라와 버린 그가 방안을 재빨리 둘러보고 미간을 모았다.
“무슨 일이…?”
“네가 말한 낚시질, 생각보다 일찍 시작한 모양이다.”
환의 중얼거리는 듯한 질문에 백은호가 대답했다. 환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환을 돌아보자 그쪽에서도 내게 시선을 돌렸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도령.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그러나 나는 사과 같은 것을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환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윤병완이라는 자를 기억하십니까? 작년에 한 번 만나셨습니다.”
뜻밖의 이름을 들었다고 생각한 것에 이어 아차 하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안효정의 부탁으로 태령 윤문의 본거지에 뛰어들었던 그 때에, 나는 거기에서 그와 마주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루기 힘든 수준의 능력을 가진 그를 확실히 경험했던 것이다.
내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환은 이어서 말했다.
“윤병완은 그 일로 윤문의 가주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추종자도 적지 않고 그 자신의 능력 또한 두려울 정도로 강한지라 일신이 자유로운 채 태령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후로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하여 일각에서는 그가 이대로 세속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지만…”
환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신년의 산신제에서 저는 그에 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태령의 늙은 범을 조심하라는 짧고 단순한 내용이어서, 저는 그것이 저 자신에게 내려진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규희는 몇 년 동안 태령 윤문으로부터 노려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감시는 게을리하지 않아서 최근에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마…”
죄스러워 하며 환의 이야기가 잠시 멈칫거린 틈을 타서 백은호가 입을 열었다.
“윤병완이 태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가까운 산에 은신했다는 것까지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무진 산군의 보호를 받고 있고 저도 있으니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을, 지난 번 도령이 벌인 일로 상황이 악화된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일이라면 내가 꿈인 줄 알고 천왕의 능력을 마음대로 써버렸던 때의 일이다.
“그 일로 산신들이 바빠져서 경계가 느슨해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도령 자신에게 막대한 대가가 돌아올 상황이었던 것을 윤병완이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진 산군의 경계를 뚫고, 신령들과 저를 속이고 도령의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보통 때라면 불가능했을 터이나…”
힘의 사용에 대한 응보가 있을 거라는 말은 그때 백은호에게도 들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그것도 내가 아니라 유하나 나비 요괴에게.
“그자가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내가 물었다. 내 질문에 환은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고 백은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태령에서의 일로 내게 원한을 품었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생각일까.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천왕인 내게 해를 입힐 작정인 걸까? 아니면 나를 대상으로 복수할 수 없으니 내 주변을 괴롭힐 셈일까. 아니, 그 남자라면…
일 년 전 태령 윤문에서 마주쳤던, 처음 보았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만들었던 그를 떠올리자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목심의 실험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주의 비호 없이 목심 혼자서 그런 큰일을 벌이는 것은 힘들다. 윤병완이 배후였다면, 그는 나 때문에 수포가 된 계획을 다른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두려움 없던 그의 참람함. 선악을 구분하면서도 거리낄 것이 없던 그의 무치함. 아이와 같은 잔인함.
그런 그의 손 안에 유하가 있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결과물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영원한 젊음과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것을 위한 오랜 시간이나 수행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로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목심은 그렇게 말했었다.
- 도령의 선례가 없었다면 어찌 그런 생각을 해내겠습니까. 한낱 인간이 천왕의 규칙에서 벗어나고, 요괴와 같은 능력을 가지며, 인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니. 그것을 최초로 해내서 세계의 규칙에 틈을 만들고 예외를 허용한 도령이 아니었다면.
“유하를 찾아야 해.”
몸 안에서 두려움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것이 의지가 되어 나도 모르게 천왕의 능력을 끌어내버릴지도 몰랐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려운 나머지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그녀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의 이성은 아직 남아있었다. 두려움을 필사적으로 떨쳐버리며 말했다.
“찾으러 가야 해. 백은호. 지금…”
“그렇게 할 겁니다. 도령이 진정하신다면 언제라도 말입니다.”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백은호가 대답했다.
“진정할 수 있겠어? 넌 도대체…”
“그러시다면 저는 물론, 도령도 갈 수 없습니다.”
내 말을 자르며 백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백은호!”
“어리광 부리지 마십시오!”
백은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환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짜증을 낸 적도, 으르렁거리거나 조용히 화낸 적도 있지만 이렇게 감정이 폭발하듯 소리친 적은 없었다. 백은호 자신조차 스스로 한 행동에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백은호는 할 말을 찾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당황했어…? 백은호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환이었다.
“도령, 섭의 말이 맞습니다. 부인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어찌 가벼이 움직이겠습니까. 더욱이 상대는 윤병완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도 부족합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 돕겠으나, 무엇보다 도령께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도령이 흔들리면, 그것이 바로 윤병완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의 말도, 그리고 백은호의 말도 맞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응. 미안….”
“내려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뒤쫓기 전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도령. 부인은 안전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물에 완전히 걸렸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그분께는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나를 진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는 아직까지 방안을 휘휘 돌며 유혹하듯 꼬리치는 요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말이 맞다. 윤병완의 장단에 맞춰 춤 출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돌아서자 백은호가 나를 보며 우물거리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큰 소리를 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는 아직도 당황한 상태인 것 같다. 전혀 백은호 같지가 않잖아.
그런 그를 보고 환이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백은호가 노려보자 환은 손을 저었다.
“별로, 놀리는 건 아니라네. 그저 내 옛 생각이 나서 말일세.”
“네 옛일 따위는 추호도 관심 없다.”
“그래도 가끔 물어보게. 자네 상황에 도움이 될 걸세.”
“내 상황이 뭐가 어쨌다는 거지.”
“슬슬 배우고 있지 않나. 당황할 것 없네. 인간의 감정은 복잡하지.”
네 헛소리는 여우일 때부터 별 볼 일없었다는 둥 대꾸하는 백은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다른 때였다면 환과 함께 백은호를 놀려대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머리도 마음도 너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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