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74화 (174/218)

요령 소리(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백은호와 환은 몇 시간 후 다시 나를 3층으로 불렀다.

들인 시간에 비해 방안의 풍경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방 한가운데에 금줄과 부적, 촛대와 물이 담긴 그릇 따위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방을 휘감듯이 감싸고 있는 기운이나 부적이 만들어 놓은 결계에서 꿈틀거리는 힘, 아까까지 방 안을 휘휘 돌고 있던 소용돌이 같은 요기가 지금은 압축된 것처럼 좁혀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는 윤병완이 다스리는 공간입니다. 여우의 굴과 같은 것이지요. 들어가는 것도 힘들겠지만, 나오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힘듭니다.”

환이 금줄 안에서 벌어져 있는 틈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 안 해도 이미 몇 번은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안다.

“손을 제게 주십시오.”

돌아올 때를 대비해 부적이라도 주는가 싶었지만, 내가 손을 내밀자 환은 손끝으로 스치듯이 그어서 내 손목에 상처를 냈다. 단순히 긁은 상처가 아니다. 모양을 갖추고 있는 어떤 문양이었다.

좀처럼 상처가 나지 않는 내 피부를 다치게 한 것에 놀랄 틈도 없이 그가 자신의 약지 끝을 물어뜯었다. 그가 “조금 아플 겁니다.”라고 말한 다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피가 뚝뚝 흐르는 자신의 약지를 내 상처에 갖다 댔다.

“윽…!”

달궈진 인두가 손목에 닿는 것 같았다. 아니 실지로 그의 손가락과 내 손목 사이에서 피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까지 들렸다. 손을 빼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고통을 견디고 나자 내 손목에는 조금 전 그가 그린 상처 그대로의 문양이 좀 더 선명하게, 그리고 은은한 기운을 띠며 자리 잡았다.

“부적보다 이 편이 나을 겁니다. 도령이 들어가고 나면 여기에서 제가 입구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섭, 몸에 새긴 부적이니 여간해서는 연결이 끊어지지 않겠지만 저 안에 있는 동안 정신을 잃거나 잠들지 않도록 조심해주게.”

환의 말에 백은호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한 상황까지 일일이 가정해서 충고하다니 악취미군. 지루해지기 전에 돌아올 테니 너야말로 문 앞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할 거다.”

평소의 도도한 모습 그대로 대꾸하는 백은호에게, 환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럼….”

한 때 여우 요괴였던 남자의 손짓과 함께, 금줄 안에서 일렁이던 틈새가 조금 더 크게 벌어졌다. 그 위에서 나비의 것을 닮은 요기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백은호가 먼저 틈새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윤병완이 만든 공간 안으로 들어간 그의 몸이 물그림자같이 흔들렸다. 놓칠세라 나도 뒤따라갔다.

물속에 잠기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온 몸을 죄었다가 이윽고 천천히 사라졌다. 주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자 내가 어딘지 낯익은 곳에 있다고 느꼈다. 어디지? 가을처럼 울긋불긋 단풍이 든 산과, 이 산 허리를 빙 두르며 만들어진 아스팔트 길. 나와 백은호는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중앙선이 있는 이차선 도로였지만 찻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백은호가 산을 타고 기울어진 도로의 위쪽을 가리키며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도로를 따라 걷다가 산모퉁이를 돌고 나서 멀리 보이는 일주문(一柱門)에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났다. 여기는 태령 윤문이 있는 태백산이었다. 아니…정확히는, 윤병완이 위장천에 태백산을 흉내 내어 만든 공간이었다.

산문을 연상시키는 일주문의 모습이나 그곳을 지나고 나자 다시 앞에 나타난 절의 중문을 닮은 건물까지 똑같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고.

“문전에서부터 이런 대접이라니, 윤병완이 손님을 맞는 예의를 아는 것 같군요.”

백은호가 즐거운 얼굴로 말하는 것과 함께 그 다른 부분이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번 태령 윤문에서는 저 건물의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있어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있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이 건물을 벗어나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불꽃같은 눈썹 아래 부리부리한 눈, 그 눈으로 무섭게 이쪽을 노려보는 것만으로 벌써 기가 죽는데 우락부락한 몸집이며 단단한 몸을 덮은 견고하고 화려한 갑옷까지. 거기에 더해 다가올수록 확실히 느껴지는 몸의 크기는 거의 2층 건물의 높이다.

그러나 거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거인들이 어디로 보나 사천왕(四天王)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

보탑과 삼차극(三叉戟)을 든 다문천왕, 용과 여의주를 양손에 나눠 잡고 있는 광목천왕, 키보다 큰 장극(長戟)을 비껴든 증장천왕, 비파를 들었어도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지국천왕까지. 점점 가까워지는 네 명의 천왕은 확실히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코앞까지 온 증장천왕의 극이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백은호와 내가 동시에 양쪽으로 피했지만 극은 허공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서있던 자리를 케익 자르듯 베고 지나갔다.

“사천왕더러 죽이라고 시키는 게 무슨 놈의 예의야!”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며 뒤쫓아 오는 증장천왕의 극을 피하며 내가 소리치자 백은호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불쑥 자라나는 것이 보였다.

백은호가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볍게 수 미터 위로 떠오른 몸이 증장천왕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장극이 백은호를 향해 날아갔다. 떨어지는 몸을 그대로 후려 갈겨서 홈런이라도 쳐 버릴 기세였지만, 백은호의 날렵한 몸은 극에 맞고 날아가는 대신 미끄러지듯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 증장천왕의 팔에 매달렸다.

쿠득! 하는,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증장천왕의 팔에서 들려왔다. 백은호의 손이 아름답게 채색된 증장천왕의 갑옷 소매를 꿰뚫고 팔꿈치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쩌억 갈라지더니 칼을 든 한쪽 팔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증장천왕의 커다란 몸을 다람쥐처럼 타고 내려간 백은호가 이번에는 무릎 아래에 손톱을 꽂아 넣었다. 검은 수염이 험상궂은 얼굴이 무색하게, 한쪽 다리가 부러진 증장천왕의 커다란 몸은 기우뚱 쓰러졌다.

“들어가기 전에 준비 운동을 시켜주지 않습니까. 도령도 조금 몸을 풀어 두십시오.”

단번에 사천왕 중 하나를 쓰러뜨리고도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백은호가 말했다.

몸 풀다가 뼈도 못 추릴 일 있냐.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백은호더러 혼자서 남은 셋을 상대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나도 하나쯤은 맡아볼까? 기왕이면 좀 덜 무서워 보이는 지국천왕으로.

비록 얼굴은 험상궂지만 비파를 들고서 천천히 걸어오는 지국천왕에게 갔다. 커다란 몸이 가까워지자 어쩐지 땀이 바짝 나면서 숨이 좀 가쁜 것 같기도 하고. 좀 더운 것 같기도 했다. 용을 부려서 백은호를 공격하는 광목천왕이라든가, 삼차극을 휘두르는 다문천왕에 비해 이쪽은 비파를 안고 다가와서는 내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무기 대신 악기를 들고 있는 사천왕이라 공격하지는 않을 모양이다…라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 순간의 착각이었다. 느긋이 현을 고르던 손이 갑자기 비파를 거꾸로 잡더니 물방울 모양의 아름다운 몸통을 골프채처럼 휘둘렀다.

이 양반아, 악기를 그렇게 쓰면 안 되지! 그런 건 락 페스티벌에서 팬 서비스로나 보여주는 거고!

본능적으로 물러난 몸이 생각보다 훨씬 멀리,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위험한 요괴들과 상대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잖아. 물론 이정도로 무식하게 큰 상대는 없었지만.

위협을 느낀 몸이 간질간질, 잠들어 있던 신경을 일으켜 세웠다. 피가 조금씩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몸속으로부터 피부 바깥의 솜털까지 예민하게 곤두서자, 평소보다 몇 배나 확장된 감각이 내 앞의 거대한 적을 단숨에 읽어서 알려왔다.

생명 없는 몸은 나무로 이루어졌고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이 만들어진 공간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힘을 잘라낼 길은 없으니 저 쓸데없이 커다란 몸을 잘라내는 수밖에.

나는 악기를 휘두르는 난폭한 악사를 피해 펄쩍 펄쩍 뛰다가, 백은호를 흉내 내어 땅을 내려친 비파를 밟고 지국천왕의 몸 위로 뛰어 올랐다. 다행히 창에 비해 움직임이 둔한 비파가 따라잡기 전에 지국천왕의 어깨에 매달릴 수 있었다. 비파를 들지 않은 손이 나를 잡기 위해 덮쳤으나 그보다 빨리 내 발이 지국천왕의 짧은 목을 후려 찼다.

딱딱한 것이 우둑 부서지는 느낌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러나 몸을 조금 비틀거릴 뿐 아직 머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뭐 이렇게 단단해. 다시 한 번 공격하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내 몸을 꽉 잡았다. 그리고 마치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치려는 것처럼 높이 들어올렸다. 지국천왕의 어깨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들린 그 순간, 허공을 저은 내 손이 지국천왕의 하얀 수염을 붙잡았다.

분명 나무로 만들어졌을 테지만 수염은 마치 진짜인 것처럼 늘어지며 유연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팔에 돌려 감는데 몸이 위로 휙 올라간다. 그런 다음 팔매질 하듯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내 몸은 무서운 속도로 땅과 충돌했다.

부딪치는 순간 몸 아래에서 포석이 깨지며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가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것에 이어 커다랗고 무거운 것이 내 옆에 쿵 떨어지는 소리와 진동도.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진 기분이었지만 떨어진 것은 사실 지국천왕의 머리였다. 엄청난 힘으로 나를 내리꽂을 때 내 팔에 감겨있던 수염이 당겨졌고, 당연히 그 수염이 붙어있던 머리도 함께 당겨졌다. 내 공격으로 반쯤 갈라져 있던 목이 그 충격에 부러져 떨어진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부러뜨린 지국천왕의 몸은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 이윽고 서서히 기울어졌다. 커다란 나무 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서진 몸은 조금 전의 아름다운 색채와 살아있는 것 같던 빛을 잃고 낡고 오래 묵은 채색된 나무 조각상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팔에 감긴 지국천왕의 수염을 비틀어 부순 다음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백은호는 어떻게 되었나 돌아보았더니 미남자의 모습을 한 여우 요괴는 가로로 누운 광목천왕의 몸에 걸터앉아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먼저 해치웠으면 좀 도와줘도 괜찮잖아.

“몸은 풀렸습니까? 도령.”

백은호가 물으며 일어났다.

몸이 풀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커다란 적을 하나 잡고 나니까 어쩐지 좀 기운이 나는걸. 예민해진 감각도 그대로이고 몸 안을 도는 기운의 운행도 다소 빠르다 싶을 정도로 활발했다. 그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슬슬 윤병완에 대한 투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지 않고도 백은호는 씩 웃었다.

“그럼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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