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소리(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천왕문 너머로 뻗은 길을 따라가자 곧 경내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좌우에 높은 돌담이 쭉 이어졌고, 담장의 기와 너머로는 길쭉한 지붕과 버선코처럼 맵시 있게 휘어진 처마 끝이 드러났다.
태백에 갔을 때는 밤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건물들의 전경이 이제는 환히 보였다.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몇 그루의 나무가 있을 뿐인 널찍한 공간 너머에 가을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사한 건축물의 자태가 드러났다. 회색으로 빛바랜 기와며 알록달록한 단청과 붉은 기둥이 선명했다.
인적이 없어 적막한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던 내 눈에 대웅전 뒤에 있는 탑과 같은 건물이 들어왔다. 가로로 널찍하니 지어진 대웅전 뒤편 산기슭에, 규모는 작아도 이곳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듯한 3층의 건축물이 도도하니 서 있었다. 그 3층의 처마 밑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그것에 집중했다. 눈 안에서, 마치 카메라를 줌 인 한 것처럼 상대방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희끗한 머리를 세련된 펌으로 손질한 중년의 남성이 거기에 있었다. 옥색 한복을 정갈하게 입고, 뒷짐을 지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친근한 것도 아닌 것도 같은 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인다.
‘윤병완.’
그를 알아보자 금세라도 다리가 땅을 박차고 내 몸을 건물 지붕 위로 날려버릴 것 같았다.
“도령.”
백은호가 나직이 경고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들끓어 오르던 기운이 한 풀 꺾였다. 아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거였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고 환도 말했었다.
“참으로 곤란한 분이 아니신가. 남의 굴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 여우인 체하는 도령의 개가 가르치지 않더이까.”
3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윤병완이 말했다. 거리상 들릴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집중하고 있는 나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리고 들은 것은 백은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가 입술 바깥으로 송곳니를 삐죽이 내밀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나더러 조심하라고 한 주제에 전신에서 요기가 훈김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데려간 여자는 내 것이다. 돌려받으러 왔다.”
나 역시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대꾸했다. 멀지만 그 역시 알아듣겠지.
과연 윤병완의 입매가 가늘어진다.
“부른 것은 어린 요괴요, 따라온 것은 도령의 부인일 터인데 그것이 웬 누명이오. 제 서방도 구분 못하는 부인을 찾아 여기까지 오셨으나, 불청객도 객인지라 주인이 손님 대접을 안 할 수는 없겠구먼. 부인은 숲에 계시니 얼마든지 찾아보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휙 돌아서서 뒷모습을 보였다. 돌아선 그의 손짓에 창문이 탁 닫히자 뒷모습조차도 감추어져 버린다.
도대체 저 자가 한 말은 무슨 뜻이람. 유하가 숲에 있다고?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계략이 있을 겁니다.”
백은호가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눈동자를 재빨리 움직여 산사 바깥의 숲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어차피 계략이 있다고 해도 유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똑같다.
이곳에서 숲이라고 하면 건물 바깥, 담 너머 사방 어디라도 포함하는 말이었다. 밖은 온통 나무였다. 산속이니까 당연하겠지. 하지만 정말로 유하가 저기에 있을까? 아니면 뭔가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백은호, 유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나비 녀석은?”
“냄새로도 기운으로도 쫓을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은 윤병완이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설혹 냄새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부인의 것인지 윤병완의 미끼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말은 여기 들어오기 전에도 들었던 것이다. 윤병완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 그의 굴이자 작은 왕국.
“그래 봐야 결국 눈에는 띄겠지. 기운을 믿을 수 없다면 일일이 돌아다니면 될 일 아닌가?”
산과 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얼마든지 뛰어다니며 찾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말에 백은호는 한숨을 쉬었다.
“도령, 이곳에 온 후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한 거리의 범위를 사방으로 찾는 것은 우리 둘만으로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말씀드렸듯이 이곳은 윤병완의 지배하에 놓인 땅. 우리가 지나간 곳을 그가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지, 우리 앞에 있는 공간을 그가 어디와 맞바꾸어 방해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가 멋대로 조립했다 분해하는 레고로 만든 세상 위에 서 있는 겁니다.”
상상만 해도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방법이 있어? 없는 거야? 백은호.”
그가 잘난 체하는 얼굴로 “없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을 기대하며 나는 물었다. 그러나 백은호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단은 나비를 먼저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곳으로 우리를 불러들인 것도 그 요괴이고, 정황을 보아하니 부인을 여기에 오게 만든 것도 그 아이 같습니다.”
“나비 녀석이 왜?”
“왜냐고 물으셔도 저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뭐라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묘하게 변이된 나비의 기운을 생각해 보면, 본의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맞겠지요.”
그야 녀석이 유하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이런 짓을 고의로 할 리가 없다고는 나도 생각한다. 백은호의 말대로 이용당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윤병완이 다스리고 있어 기운을 읽는 것도 그다지 의미가 없을 이곳에서 유하도 아닌 나비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이지? 백은호에게 방법이 있는 건가?
“제가 아니라 도령입니다.”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내게 백은호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나더러 찾으라고? 어떻게? 설마 이제 와서 천왕의 능력을 사용하라든가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애초에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인데.
내가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지 백은호는 한숨을 섞어 알려줬다.
“그 요괴는 매일같이 도령의 생기를 빼앗아 그것을 양식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 몸의 근원은 도령의 생기에 있으니 도령 자신의 분신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는 열두째 하늘을 벗어난 다른 세상입니다. 부인을 이런 곳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백은호의 말은 윤병완이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나라고 생각하고, 나비 녀석을 따라왔다는 거야?”
유하가 사라지던 때에, 나를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는 도움을 요청하던 것이 아니었던 걸까? 그녀는 그때 뭘 본걸까.
“나비를 부르십시오. 응보는 그 요괴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가 값없이 도령의 생기를 취하고 있었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입니다.”
백은호가 담담히, 그러나 서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대가를 받을 생각으로 생기를 내주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녀석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백은호가 시키는 대로 나비 요괴를 불러들였다. 나의 부름은, 어느 하늘에 있어도 절대로 어긋날 수 없는 규칙에 의해 거침없이 윤병완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가로질러 마땅히 응보를 받아야 할 대상인 나비에게로 전해졌다. 전해지는 순간 나는 거짓말처럼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비가 대답했다. 내 부름에 응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소리친들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멀리 있어도 나는 알았다.
“저쪽이다.”
가리키며 내가 먼저 뛰어가자 백은호가 나란히 달렸다. 우리는 순식간에 경내를 벗어나 담장을 뛰어넘고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나비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갔다. 산자락 두 개를 넘고 나서야 녀석이 보였다.
그것은 수리점에서의 어린 나비 요괴가 아니었다. 성인이 된, 게다가 기분 나쁠 정도로 나와 닮은 모습이었다.
녀석은 낙엽이 수북한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기대지 않으면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마치 화가 난 아이의 손에 있던 약한 장난감 같았다. 팔이 굽힐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져 꺾이고 다리는 무릎 아래가 짓이겨져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긁히거나 베인 상처가 무수히 있었지만 어느 것도 치명상은 아니었다.
죽이지 않고 어디까지 괴롭힐 수 있나 시험해본 것 같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본 녀석의 눈이 고장난 것처럼 깜박거렸다. 입을 달싹거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대신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다려. 치료해 줄 테니까….”
“너 해명…”
발음이 새서 어눌한 목소리로 나비가 말했다.
“너는 진짜 해명이지. 나는 알아…”
“입 다물어. 금방 나을 거야.”
“유하…”
불규칙한 숨을 쌕쌕 내쉬며 나비가 말했다.
“유하는 나무가 됐어. 무서운 남자가 잡으려고 해서, 나무가 되어 숨었어. 그 남자는 못 찾아.”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린 눈을 깜박이며 나비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해명이가 찾아…해명이가 찾아…”
물론 찾을 거다.
가련한 요괴의 참혹한 모습을 보며 나는 측은한 마음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찾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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