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소리(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잡혔어. 잡혔어.]
[잡혀버렸다.]
소곤소곤. 목소리에 이어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까르르 메아리쳤다. 산과 산에 부딪치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흩어졌다.
“백은호?”
그는 우리를 밀어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를 뚫고 지나갔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백은호.”
다시 한 번 부르자, 얼어붙은 것 같은 그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숙여졌던 몸을 쭉 펴고 팔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잠깐 거기에 낯선 요괴가 서 있다고 느꼈다.
나를 힐끗 본 백은호는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때에.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서 환에게 연락해서 여기를 나갈 문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뭐라고 말을 걸려는 순간 그가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더니 소매를 끌어올렸다. 내 손목에 남은 것과 같은, 환이 만들어준 문양이 드러났다.
“아아, 이런 곳에 있었군.”
백은호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백은호가 아니다. 문양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전에 본 적 없는 끈적한 요기가 번졌다. 그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 사지로 퍼졌다. 피부가 물결치듯 흔들렸다가 손끝에서 불쑥, 손톱이 튀어나왔다. 백은호의 몸이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은 분명 그 여자다. 나비를 속여 유하를 유인하게 만들었던, 인형을 다루며 그것을 특기로 하는 태령 윤문의 여도사, 윤병완의 제자인 명혜.
손톱이 휙, 손목 위를 스쳤다. 그 궤적을 따라 얇게 저며진 살점이 날아가며 피가 솟구쳤다.
“백은호!”
저 몸을 움직이는 자는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소리치고 말았다. 손톱을 칼처럼 사용해 손목의 껍질을 벗겨내 버린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도령에게도 있겠지요? 이와 같은 부적.”
고통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낯설게 끈끈한 시선이 내 몸을 훑더니 정확히 내 손에서 멈추었다.
“거기 있군요. 도령의 손목에. 그것을 주세요. 주지 않으면…”
그가 피로 얼룩진 손톱을 들어 제 목을 가리키자 품 안에서 유하가 가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 요괴의 목을 잘라버리겠어요.”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손톱 끝으로 목덜미를 꾹 눌렀다. 마치 칼날 끝처럼 손톱이 목을 파고들자 붉은 피가 실처럼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손을 막으려고 움직인 나보다 먼저 날아간 것이 있었다. 팔…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가늘고 메마르며 딱딱한, 나무의 가지가 백은호의 손에 뱀처럼 휘감겼다. 나뭇가지가 뻗어 나온 곳은 유하의 어깨였다. 그녀는 어깨와 팔뿐 아니라 다른 곳도 점점 요괴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잔뿌리처럼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부스스하니 흩어지고, 딱딱해진 피부 위로 수실 같은 잔가지가 자라났다. 낭창하니 길게 늘어진 잔가지에서 날렵한 이파리가 돋아나며 그녀의 몸을 덮었다.
실로 나무 여자의 모습이 되어서, 그녀는 길게 뻗은 나뭇가지로 여우 요괴의 몸을 휘휘 감고 있었다.
백은호의 몸을 차지한 여도사 명혜가 유하를 보며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인간도 요괴도 아닌 몸으로 이 저를 상대하시겠다는 건가요?”
말하며 팔을 비트는 순간 우둑!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백은호의 몸을 감았던 나뭇가지가 휘어졌다. 유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통을 참는 얼굴 위로 식은땀이 돋아나 반질거렸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몸 안에서 꿀렁꿀렁 흔들리는 것을 토해내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백은호는!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아요. 해명. 알잖아요.”
도사에게 점령당한 백은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유하가 내게 말했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안 해요. 그러니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 도사의 술법으로도 그런 마음까지 완전히 묶을 수는 없어요. 그렇지요?”
그녀의 질문은 내가 아닌 여도사에게 한 것이었다. 백은호의 몸을 움직이고 있던 여도사 명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정말인가?
“그렇게 믿고 있나요? 애기님.”
요사한 눈을 가늘게 뜨며 명혜가 대꾸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알아요. 본래 인간이었던 당신이 어떻게 요괴가 되었는지 알아요. 그 몸이 흉측한 나무 요괴로 바뀐 것은 이 여우의 배신 때문이 아닌가요. 천왕의 부인으로, 신선의 몸이 되어 하늘을 날 수도 있었던 당신이 태양을 피해 수백 년 동안이나 숨어서 살아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여우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저를 믿고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진심을 말해 보십시오.”
명혜의 속삭임은 점점 어두워졌다가 끝에 이르자 백은호 자신의 말처럼 들려왔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있지요.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당신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동안 내 죄는 점점 깊고 단단해졌습니다. 아무리 속죄하려고 해도, 당신이 살아있는 이상 내 죄는 더욱 쌓일 뿐입니다. 아아, 이 얼마나 편리한 복수입니까. 죄 없이 가련한 당신은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데도 오히려 동정을 받고 있으니!”
백은호의 말에 유하의 딱딱한 몸이 파르르 떨었다.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진 얼굴이 주름을 지으며 일그러졌다. 나무에 가까워진 눈이 눈물 대신 진득하고 끈끈한 액체를 흘렸다.
“백은호! 그만 해!”
내가 나서려고 했지만 유하의 팔에 가로막혔다. 그녀는 나무뿌리 같은 발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긴 잔가지들을 치맛자락처럼 끌고 천천히 걸어서, 백은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내가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었다면, 당신이 가져온 것을 삼키지 않았을 거예요. 해명이 들은 소리를 당신도 들었나요?”
그녀의 말에 백은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놀람은 명혜의 것이 아니다. 여도사가 아니라 백은호였다.
내가 들은 소리.
짤랑…
그녀를 찾아오게 만든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짤랑 짤랑. 바로 그녀의 안이었다. 그녀 안에 있었다. 동그랗고 작은, 얇은 금속판 안에서 작은 금속이 데굴데굴 구르고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내 눈에 작은 방울이 보였다.
아아, 그거였어. 청단애기가 전해 준 사탕은.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그 처녀 보살은 자신이 쓰던 무령(巫鈴), 무당방울이라고도 부르는 요령에서 떼어낸 방울을 그녀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혼을 부르는 요령소리야 말로 윤병완의 어떤 방해에도 내게 전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은 도사의 술법보다도 먼저 세워진 세계의 규칙이었으니까.
유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두려워했으면서도 결국에 그것을 먹었구나.
그녀가 몸을 기울여, 자신보다 훨씬 큰 여우 요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어리석음이 당신을 꺼리고 두려워할지라도 내 혼이 낭군인 해명을 굳게 믿고 있으니, 그가 사랑하며 믿는 당신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부디 나를 용서하고 우리와 함께 돌아가요.”
파들파들 백은호의 몸이 흔들렸다. 목을 겨눈 손이 부르르 떨면서 꿈틀거렸다.
[놓지 마. 놓지 마.]
[도망가게 하지 마.]
속삭이는 목소리가 풀숲에서 나무 사이에서 웅성거렸다.
[잡아. 잡아.]
[여우가 도망간다.]
“시끄럽다!”
유하가 가지와 같은 팔로 허공을 휙 가르며 나직이 소리쳤다.
짤랑!
요령이 울렸다. 그 작은 방울의 낭랑한 울림이 파문을 일으키듯 퍼지는 순간, 속삭이던 목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백은호가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를 으득 물었다.
“지금부터는 뛰어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말했지만 우리 모두 망설이지 않았다. 백은호가 먼저 달리기 시작하고 나는 유하를 들어 안은 다음 뒤따라 달렸다.
“나가는 방법은 알아?”
“우선 이곳에서 멀어져 시간을 벌어야 환과 연락할 수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위험합니다. 윤병완이 우리를 찾아낼 겁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명혜의 술법에 걸려 환이 만들어준 부적을 잃은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다.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도령이다. 도령이다.]라거나 [여우다. 도망간다.]라며 우리의 뒤를 쫓았다. 이곳의 어디에나 윤병완의 눈과 귀가 있는 거라면 정말 이렇게 뛴다고 해서 달아날 수 있는 걸까. 게다가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는데, 우리는 어쩐지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
“백은호…”
아무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 불렀으나 문득 눈앞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시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시야가 가려지는 것은 안개 때문이었다. 원을 그리며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던 백은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그를 따라가자 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여기라면 당분간 괜찮습니다.”
백은호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팔을 뻗으면 손목쯤에서부터 흐릿하니 안 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이것은 아무래도 여우의 요술로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부인, 그 방울을 제게 잠시 빌려주십시오.”
백은호가 유하에게 부탁했다. 반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던 유하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요괴의 손이 다시 나왔을 때는 작은 청동방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울을 건네받은 백은호로부터 여우 요괴의 요기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이 방울과 어우러져 휘돌자 청동 방울이 허공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짤랑…짤랑…짤랑…
흔들려 울리며 저 혼자서 허공을 가로질러 간다. 백은호가 우리에게 말했다.
“소리를 따라가십시오. 우리를 문까지 안내할 겁니다.”
마치 길잡이, 상여꾼들 앞에서 혼을 이끌어 안내하는 요령잡이와 같았다. 우리는 짤랑짤랑 울리는 방울소리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방울은 금세 안개를 벗어나 어딘지 모를 산길로 우리를 데려갔다.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도망간다. 도망간다.]며 웅성거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문이 보여요!”
유하가 외쳤다. 과연 멀리, 허공을 세로로 찢어낸 것처럼 벌어진 틈이 있었다. 그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손짓하는 환의 모습도 확실히 보였다. 그때였다. 앞서 달리던 백은호의 몸이 갑자기 여우로 변하더니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우리를 펄쩍 뛰어넘었다.
“크허엉!”
동물원에서도 좀처럼 듣기 어려운 야수의 포효가 대기를 진동했다. 내장까지 울리는 소리였다. 돌아보자 구미호의 모습인 백은호 맞은편에서, 황갈색 털의 호랑이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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