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소리(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윤병완!’
보자마자 그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태백에서 맞선 적이 있으며, 여기에 와서도 한 번 마주쳤었다.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부끄러움 없이 오만한 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산짐승의 모습이되, 비탈진 산자락을 빈틈없는 자세로 밟고 있는 그는 위풍당당한 산의 주인이요 두려움 없는 백수의 왕이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우리를 휙 쓸고 지나갔다. 그것에 반응하듯 백은호가 먼저 움직였다.
날렵한 하얀 몸이 화살처럼 날아가 호랑이와 부딪쳤다. 금세라도 달라붙어 물어뜯을 것 같은 속도였지만 호랑이는 쉽게 피하고 희롱하듯 꼬리를 저었다. 백은호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가 피한 자리로 호랑이의 꼬리가 철썩 부딪치자 어지간한 봉분 크기의 화강암이 쩍 갈라지며 파편이 튀었다.
호랑이와 여우.
한쪽은 최강의 포식자이며 다른 한 쪽은 피식자이겠고, 실제로도 그들은 도사와 요괴라는 결코 상생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호랑이에 맞먹는 크고 날렵한 몸의 구미호가 산중의 왕과 어울려 겨루는 광경은 오싹한 한편 감탄스러운 데가 있었다.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낼 때마다 이쪽의 세상을 온통 뒤흔드는 것 같은 윤병완에 맞서, 실로 요사한 기운을 서리서리 감고 번득이며 움직이는 백은호의 모습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나
“한낱 짐승이!”
쾅 터뜨리는 것 같은 포효와 함께 윤병완이 외쳤다. 동시에 호랑이의 등을 덮치려던 구미호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나갔다.
우우우우우 -
사방의 나무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야유하는 것도 겁을 주는 것도 같은 소리였다. 백은호가 재빨리 몸을 뒤집어 착지했으나 그것과 동시에 발밑의 땅이 쩍 갈라졌다. 과연 구미호라도 날지는 못하는 몸이었다. 갈라진 틈으로 미끄러지던 몸을 재빨리 빼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옮겨가자 다시 그 자리에서 새파란 대나무들이 죽창처럼 땅을 뚫고 솟구쳤다. 그것을 이리저리 피하는 동안 나무 위로 무성히 자라던 칡넝쿨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마치 그물 같았다.
그 성긴 그물 사이로, 백은호의 몸이 보통 여우처럼 작아져서 쏙 빠져나갔다. 기다린 듯이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이제는 비교할 수 없게 작고 약해진 몸을 앞발로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에 지진이 난 것 같은 충격이 확 퍼졌다.
“도령!”
금세 구미호의 모습을 되찾은 백은호가 외쳤다.
아아, 호랑이의 앞발치기가 그냥 치는 게 아니라 할퀴는 거였구나. 쇠몽둥이로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더해, 팔 위로 쭉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멋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내 상대입니다.”
백은호가 으르렁거렸다. 눈은 호랑이에서 떼지 못하지만 입은 자유로우니까 말인데.
“그럼 맞지나 말든가.”
“맞은 적 없습니다.”
“내가 막았으니까요.”
“덕분에 반격의 기회를 날렸습니다.”
“입만 살았지.”
내 대꾸에 백은호가 코웃음 치며 아홉 개의 꼬리를 펼쳤다.
분명 아까 호랑이와 싸울 때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강맹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5분도 안 되었지만 취소해야겠다. 백은호의 하얀 몸으로부터 살갗이 간질거릴 정도의 요기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구미호의 살기에 척추가 저릿저릿 해왔다.
하지만 윤병완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뒤 먼 산자락에서부터 이상한 광경이 천천히 다가왔다. 먼 산이 흐려졌다. 다음에는 그 앞의 산이. 안개 같은 것이 밀려오는가 싶었지만 그 광경이 다가올수록 안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라지고 있어.’
말 그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산이, 아니 산뿐만이 아니다. 산이 있던 공간 자체가 없어진다. 산 밑의 땅도 산 위의 하늘도 흐릿하니 먹혀버린다. 그것과 함께 호랑이의 몸을 한 윤병완으로부터 어둡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밀려왔다.
‘답답해…’
그 기운에 둘러싸이자 깊은 물속에 내려가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온 몸이 짓눌렸다. 그것은 단순한 기운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이 공간의, 윤병완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이 세계의 우리에 대한 혐오였다. 미움이었고 증오였다. 그것에 피부가 물들고, 숨을 쉬면 폐를 적실 것 같았다.
크르르…
대항하듯이 백은호가 털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윤병완이 내뿜는 기운은 그 역시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 이상인가? 인간의 모습일 때 도사 명혜 때문에 다친 손목이, 아니 지금은 앞발이지만 그 발목의 상처에서 새롭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백은호의 상처 뿐 아니라 호랑이에게 긁혔던 내 팔도 낫고 있었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압박하던 윤병완의 기운이 묽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유로워진 숨을 들이쉬고 윤병완을 쏘아보자 호랑이의 모습을 한 얼굴이 주름을 지으며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자신의 기운을 쉽게 밀어내 버린것에 화가 난 표정이었다.
으르르르…
천둥이 구르는 듯한 숨을 내쉬며 윤병완이 한 걸음 다가왔다. 등 뒤로 자신의 세계를 집어삼키면서, 그것을 먹이로 삼아 무겁고 끈적거리는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한 발, 한 발, 걸었다.
“당신은 천왕이면서…이 열두째 하늘의 주인이면서, 어째서! 어째서! 한낱 요물과 계집 따위에 매여 이 천박한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가!”
호랑이의 입으로 으르렁거리듯 외치는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우우우우우 -
나무들이 그의 외침에 화답하여 응했다. 주변의 기운이 다시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것을 떨쳐내듯이 손끝을 털자 뭉클, 기운이 밀려났다.
“저거, 내가 어디 하늘나라나 도원경 같은 데라도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인데. 맞아?”
윤병완에게 대답하는 대신 백은호에게 묻자 여우 요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꼬리를 저었다.
“도령도 슬슬 눈치라는 것이 생기고 있군요. 좋은 일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동의해주면 안 되겠냐? 어쨌든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저 작자의 바람이라면 청개구리는 아니지만 반대로 하고 싶어지잖아. 게다가…
“백은호는 요물이 맞는데 말이다. 유하에게는…”
마치 윤병완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그의 머리가 있을 법한 공간에 팔을 휘둘렀다.
짝 - !
살과 살이 맞부딪쳐 나는 소리가 경쾌하게 터졌다.
“예의를 갖춰라.”
조금 기분이 상한채로 내가 말했다.
“천왕인 나의, 부인이다.”
내 말이 놀라웠는지 아니면 호랑이로 변신해 있던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고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 것에 놀랐는지 윤병완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내게 맞은 뺨이 금세 부어올랐지만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령…에게 부인…이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 그럴 수는 없어! 무슨 말인가! 당신은 해명 도령이야!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어린 아이다! 자라지 않고 철들지 않는 아란 어미의 막내야! 당신은! 당신은! 영원히 혼자다! 그렇게 태어났어!”
그랬던 것 같기는 하다. 유하를 만난 후로도 수백 년 동안 그랬던 것 같다. 천왕이었던 때의 나는 확실히, 옆에 누가 있어도 혼자였다.
“그런데 좀 바뀌었어. 뭐, 불만이라도?”
불만이 있어도 말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이쪽 세계의 붕괴가 점점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의 뒤쪽뿐 아니라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속도가 빨라진 만큼 윤병완의 기운도 무섭게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 몰려오는 기운을 윤병완의 몸이 채 감당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만들어진 기운이 아우성치듯 그에게로 몰려갔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못하자 길을 잃고 날뛰었다.
“도령, 윤병완이 이곳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곧 무너질 겁니다. 나가야 합니다.”
백은호가 천천히 뒷걸음치며 말했다. 내게도 그렇게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유하가 입구 앞에서 초조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찢어진 공간 너머에서도 환이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도령?”
움직이지 않는 내게 백은호가 재촉했다.
잠깐만. 저 놈도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 두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여기는 위장천. 흐르는 곳이 아니라 고이는 곳이다, 양이천왕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아홉째 하늘이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저승에도 못 갈 터였다.
욕심 많고 멋대로라 놀이터를 제 맘대로 차지하고 아이들을 내쫓는 못된 꼬맹이라도, 영원히 혼자 남는 건 불쌍하잖아.
“도령!”
백은호가 반대하듯 외치는 것을 무시하고 윤병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미 붕괴가 거의 등 뒤까지 다가왔다. 서두르지 않으면 나까지 휩쓸린다. 급하니까 좀 거칠어도…
힘껏 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는 순간 번쩍, 노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그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감히 나를, 이 윤병완을 동정해?”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양손을 내게 내질렀다. 손바닥이 가슴위에서 팡 터지는 소리를 냈다. 숨을 참으며 손을 꽉 움켰지만 나는 찢어진 그의 옷깃만을 잡은 채로 날아가 버렸다.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몸을 백은호가 붙잡는 것과 함께 공간을 찢어 만든 입구로 뛰었다. 나는 여우 요괴의 등에서 자신의 세상과 함께 붕괴되는 윤병완을 보았다. 그가 회색의 공간 안에 흐릿하니 잡히는 순간 찢어져 있던 공간의 틈새 역시 아물어 사라졌다.
“해명!”
틈새가 사라지기 직전에 간신히 돌아온 우리에게 유하가 달려들었다. 나는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는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내 손에는 아직 찢어진 윤병완의 옷자락이 있었다. 유하를 품에 안고 안도하면서도, 그것을 내려다보자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 자가 거절했습니다.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백은호가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윤병완은 나를 입구가 있는 쪽으로 힘껏 떠밀어 버렸다. 내게 달려오던 백은호가 놓치지 않고 나를 잡았고, 그리고 곧장 뛰었기 때문에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형편없는 짓을 해오기는 했지만 붕괴하는 공간 안에 천왕을 봉인할 수도 있었던 순간 그것을 거부할 정도의 양심만은 남아있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아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나는 울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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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 소리(8)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윤병완이 만든 공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다시 열 수는 없을 거라고 환은 말했다. 애초에 그쪽에서 입구를 열어두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 지금은 그 문을 다시 열어야 할 윤병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죽었을 수도 있고, 위장천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그 역시 쉽게 이곳으로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환의 의견이었다.
나비 녀석은, 백은호의 말대로 꽃이 핀 화분 옆에 천을 두었더니 잠시 후 천을 들썩이며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러나 사람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은 채 꽃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나나 유하에게 아는 체도 않고 나비인 것처럼 구는 걸 보니 당분간은 그 상태로 지낼 모양이었다.
유하는 청단애기에게 받은 방울이 마음에 들었는지, 실에 걸어 그것을 목에 걸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조용 걸어서 방울 소리가 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유병완의 소굴에서 돌아온 후로, 나와 유하는 별로 달라지지 않고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같이 있는 시간이 전보다 더 늘고, 그럼에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줄어든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둘 다 말하기 싫은 것이 하나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말해야 하는 때가 왔다.
그날은 보름이었다. 바로 어제 비가 와서 대기를 씻어준 덕분에 하늘이 맑았다. 날씨도 좋아서, 밤이 되자 하늘에 제법 별이 떴다고 유하가 알려주었다.
“달도 밝고요. 보고 싶어요?”
그러나 나는 밤하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보고 싶은 거라면 내 앞에 있는걸. 실컷 봐둘까.”
나는 그녀를, 보고 또 봤다.
웃는 모습, 말할 때의 모습, 입술을 삐죽이며 토라진 모습을 보았다.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종종거리며 계단을 걷는 모습을 보고, 허리에 손을 얹고 잔소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을 하나하나 내 손으로 벗길 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을 나누면서 몽롱해진 모습을 보고, 품 안에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비비적대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것도 빠짐없이 사랑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지켜보고 싶었다.
“해명.”
유하가 나를 부를 때 슬프면서도 다정한 얼굴을 보았다. 이 순간에 시간이 멈춰서 영원히 슬프고도 다정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해도, 그래서 가슴이 아픈 채로 끝없는 시간을 견뎌야 한대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 줘.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용감하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보다 현명했다.
“해명, 이제 내 심장을 돌려주세요.”
그녀는 잠시 맡겨 놓았던 모자나 장갑을 돌려받듯이, 혹은 그렇게 들리기를 바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줘야 하는 것은 모자나 장갑이 아니다. 그것은 선녀의 날개옷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주는 옷을 입고 분명 나를 떠날 것이다.
대답을 못하고 있자 유하는 달래듯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나는 오래 전에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해야 할 말을 미루고, 당신의 뒤에 숨어있었어요. 당신이 바라고 있으니까. 내가 떠나면 당신이 슬퍼할 테니까.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니까. 그렇게 변명하면서 나는 당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용기를 낼 테니까, 당신도 그렇게 해줘요.”
유하가 간청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녀를 마주볼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결국에 그녀가 말하게 될 거라는 것은. 그 순간을 조금만 더 늦추고 싶어서, 선녀 옷을 훔쳐서 숨긴 나무꾼처럼 나는 그녀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도 나는 알았다.
수백 년이나 그녀를 괴롭게 했으면서, 다시 한 번 슬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도 용기를 내야 했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내 안에서 해명 도령이 발버둥 치며 우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울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내가 고집을 부리면, 애원한다면,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다면, 그녀는 거절하지 못한다. 조금만 더, 그녀가 허락하는 동안…
떠나는 어미의 뒤에서 그 발걸음을 붙잡았던 때처럼 유하를 붙잡고 싶었다.
“응…”
하지만 나는 신음 같은 대답으로 해명 도령을 뿌리쳤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 만에, 아주 조금, 나보다도 그녀가 더 소중해져서, 이 짧은 대답의 결과로 영원한 기다림 속에 남겨진다고 해도, 고통 속에 그녀를 잡아두기는 싫었다.
대답을 들은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내게 응했다. 우리는 바뀌었던 심장을 되돌려 주고 되돌려 받았다. 십 수 년 만에 자신의 것을 되찾고, 나는 낯선 박동으로 뛰는 내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근두근. 내 심장이 울었다.
요괴의 심장을 돌려받은 유하는 낭창한 가지와 나뭇잎을 늘어뜨리고, 풋풋한 냄새가 감도는 나무 여자가 되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요괴가 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변해도 그녀는 똑같이 사랑스러웠다.
“해명, 다녀와도 될까요?”
고개를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한 번만 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움켜잡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로 손을 내밀어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유하가 말했다.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럼 영원히 기다리지, 뭐.”
“바보네요.”
치맛자락 같은 넝쿨을 끌면서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가,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경칩에 무게가 실려 접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한 번 더, 하나, 둘, 셋, 넷…그리고 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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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만물수리점을 읽기 전에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니입니다. (물론 말씀드리지 않아도 저인줄 아시겠지만…)
전부터 말씀 드렸었는데 의외로 서천 만물수리점이 연재된다는 데에 놀라는 분들이 계셔섴ㅋㅋ(작가의 말 안 읽으셨군요! 저 삐침!) 안내해드릴 겸 잠시 잡담입니다. ^^
오늘부터 연재 될 서천 만물수리점(이후로 서천)은 동만의 스핀오프로 8화 정도의 분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동만을 쓸 때 매일연재에다 마감 임박해서 허둥지둥 쓰다 보니까 미처 회수하지 못한 떡밥이라든지, 모호하게 쓰기 좋아하는 제 성격 때문에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싶은 일들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든지 그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사실 서천은 전적으로 저를 위해 쓰는 글입니다.
동만을 쓰며 달콤말랑에 편향된 저를 중화시키기 위한 어둠의 작업?인 거지요. 뭐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막상 또 뚜껑을 열어보면 그동안 동만이 쓰느라 어둠의 평균치가 떨어져서 제대로 중2중2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동만의 스핀오프라고 하지만 일단 주인공은 당연히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글 쓰는 목적도 다르고, 다르다 못해 정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천을 읽어주시는 분들 대부분은 동만의 독자님이실 테니까, 아마도 동만의 따뜻하고 유유한 분위기를 즐기시는 분들일 것 같아요. 그런데 서천은 절대로, 따뜻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데다 소재에서의 수위도 아슬아슬한 곳을 넘나들게 될 테니까요.
(수위 이야기를 하니까 1%에 해당하는 10대 독자님들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별로 기대할 거 없습니닼ㅋㅋㅋ)
저는 동만을 좋아해 주셨던 따뜻하고 순수한 독자님들이 서천 때문에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혹은 “마니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하실 것 같기도 하고….
만일 해명과 유하의 결말이 궁금해서 보려는 분이라면 그냥 기다리셨다가 서천의 마지막 편만 보셔도 될 거예요. 굳이 저와 함께 어둠의 나락에 빠지실 필요는 없습니닼ㅋㅋㅋ
뭐…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였습니다만 서천을 보러 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에도 어쨌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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