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80화 (180/218)

서천 만물수리점 - 반달빗(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문을 열자 악기 소리는 더욱 커졌다. 한 음 한 음이 굵은 빗방울처럼 떨어져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수호는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안방의 문은 현관과 마주보는 방향에 있었다. 안방 왼쪽에 거실이 있으니 문을 여는 것까지는 들키지 않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면 현관을 통해야 하고, 거실에서 현관까지는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트여 있었다.

거리는 대략 3미터. 짧다면 짧지만 도어 클로저가 달린 무거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2초는 잡아야 했다.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수호는 벽에 바짝 붙어 커다랗게 들려오는 연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영숙은 가야금 같은 소리라고 말했으나 사실 저것은 손으로 뜯는 가야금이 아니라 살대로 현을 퉁기는 거문고다. 생긴 모습도 다르고 소리는 더욱 달랐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살대가 현에 닿아 미끄러지거나 대모에 부딪치는 자잘한 소리가 섞여 나왔다.

느린 곡이었다. 고수의 장구나 추임새 없이 거문고만 홀로 타고 있으나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처량했다.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둥실둥실 떠도는 음색이 애절하면서도 우아해서 그는 잠시 멍하니 연주를 듣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갈 기회를 노리느라 듣고 있던 연주에 취하다니 쓴웃음이 났다.

슬슬 곡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나갈 때라는 생각과 조금만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다투었으나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단단히 넣고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힘껏 몸을 앞으로 빼내어 세 걸음 만에 문 앞에 닿자마자 손잡이를 돌리면서 부딪치듯 어깨로 문을 밀었다. 바깥이 보인다 싶은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거문고 소리가 끊어졌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몸을 숙여 슬라이딩 하듯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째앵 - !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쓰러져 있는 채로 몸을 뒤집어 돌아보자 아까보다 더 열린 문에 사선으로 흠집이 나 있었다. 그 앞에서 흰 반사광이 번득였다. 칼날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도어 클로저가 천천히 문을 끌어당겨 닫고 나자, 집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별 거 아니라고 해놓고…”

눈앞에 없는 대상에게 불평을 하며 그는 힘없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영숙은 차 안에서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의 거문고 연주 때문일 것이다. 수호가 핸드폰 안의 사진들을 보여주자 어깨를 움츠리고 지켜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상한 것은 없는데…안에 정리해 두었던 물건들이 몇 가지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고가 나고 나서 경찰들도 왔다 가고 딸도 옷 가지러 한 번 들어갔었고 해서…”

그 몇 가지 물건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하나 헤아렸다.

“거실 싱크대에 있던 플라스틱 통하고, 접시들하고, 안방 침대 위에 있는 돗자리하고, 딸 방의 책상 위에 있던 상자도 원래는 옷장 위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거 전부다 높은 데에 올려두었던 거지요?”

수호가 묻자 영숙은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그녀는 자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희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장님, 그게 뭔지 아시는…아니, 뭐든 상관없으니까 제 집에서 내보낼 수는 있는 거죠? 그렇죠?”

아뇨. 예. 아마도요.

수호는 그녀의 질문에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사장은 아니었지만 집안에 있는 것이 뭔지는 안다. 그것을 내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수호 자신은 남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요괴야 퇴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단순히 빌붙어 사는 것도 아니고 집주인을 다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옆집의 사람들은 며칠째 소음으로 괴로워하는 중이니 사실 언제라도 누군가 도사나 무당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 사람 역시 자신과 비슷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결론이 마음에 안 들 한 남자가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좀처럼 화내지 않는 그 남자가 화를 낼만한 일은 아무래도 피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는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고 해결이 되는대로 연락을 주겠다는 말로 영숙을 안심시켰다. 출근 전에 시간을 낸 그녀를 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수호는 곧장 자신의 직장으로 돌아갔다.

아파트 상가 건물들이 쭉 서있는 길가의 3층 건물 1층에다 ‘만물수리점’ 같은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간판을 걸어놓고, 수리보다는 괴이하고 은밀한 일들을 맡아 하는 곳이 그의 직장이었다.

직장이라고 하기에는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은 알바, 사장 쪽에서는 부하 직원으로 생각하는 동상이몽의 관계였지만 대충 2년 정도 크게 어긋나거나 부딪치는 일 없이 각자 일을 분담해오고 있었다.

“저 왔어요.”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잠시 후에 2층 계단에서 사장이 난간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수호,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확인만 하고 오랬잖아.”

호적상으로는 50대이고 생물학적으로는 30대 중반이어야 할 주제에 자신과 별로 다름없이 2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남자의 태평한 얼굴이 보이자 수호는 잊고 있던 짜증이 되살아났다.

“예. 그래서 제 모가지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고 왔어요. 잘릴까봐 무서웠던 거 보니 원래 붙어있긴 했던 모양이네요.”

사장은 수호의 대꾸에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태연히 지었다.

“청군여귀(靑裙女鬼)였다고요! 별 거 아니니까 부적 안 가져가도 된다면서요! 도서관에서 바로 가라면서! 정초부터 요괴한테 칼침 맞을 뻔했다고요!”

울컥 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미안했는지 재빨리 계단을 달려 내려온다.

“어어, 그랬어? 미안. 다쳤냐? 괜찮아?”

다친 곳은 없는지 재빨리 살펴보며 사과하는 그는 진심이 분명해서 수호는 더 짜증이 났다.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착하면 화를 낼 수도 없다.

“됐고요. 청군여귀가 뭔지는 알고 계시죠?”

수호의 말에 사과하던 착한 남자가 입을 조금 벌리고 눈을 껌벅거렸다. 설마….

어쩐지 뻣뻣해지는 뒷목을 주무르며 수호가 말했다.

“제가 읽으라고 드린 거…”

“그게! 지금 내가 딱 ㅈ자로 시작되는 데를 보고 있거든! 한두 페이지만 더 보면 청군여귀가 곧 나올 거 같기는 한데…”

“그거 작년에 드렸는데요.”

“그러니까…좀 바빴어.”

“네. 낮에는 산책한다고 천변 돌아다니고 밤에는 창고에서 도깨비들이랑 노느라 바쁜 거 알아요.”

수호의 대꾸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말아야지.

“청군여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 귀신이라는 뜻이에요. 1미터 정도의 작은 몸이고, 여자의 모습이지만 날래고 칼을 잘 다뤄요. 거문고 연주를 좋아해서 사람이 없는 곳이나 폐가 같은데서 연주하다 가끔 사람들 눈에 띄고요. 호전적인 성격은 아닌데 사람에게 친절한 편도 아니니까 방해나 위협을 받으면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요. 이번 손님도 그래서 다친 것 같고요.”

“폐가에서 연주하는 걸 봤다고 공격한 거야?”

“아뇨. 그게 좀 이상해요. 거기는 사람이 사는 집이거든요. 그것도 아파트 7층 가운데에 위치한 집이라고요. 집주인이 있을 때는 조용하다가 사람들이 나가고 빈집이 되면 거문고를 탔던 모양이에요. 소리가 밖으로 울리니까 결국 알게 되어서 주인이 낮에 찾아갔더니 갑자기 공격했다고 하네요. 운 좋게 팔에 좀 스치기만 한 것 같지만요.”

사람이 다쳤다는 말에 착한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자 요괴라는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수호는 미간을 모으며 약간 후회했다. 그런데 어차피 이름이 청군여귀라 속일 수도 없고.

사장은 전부터 성격이 무르고 특히 아이들에게 약했지만,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여자에게까지 약해졌다. 요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일 다시 가 볼 건데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아서요, 일단 말로 해보겠지만 저쪽에서 공격하면 저도 어쩔 수 없거든요. 그렇게 아시라고요.”

“그 요괴는 갑자기 공격한다면서? 대화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의문이라기보다 의심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사실 대화할 생각은 없고 연주할 때 가서 또 공격하면 반격할 생각이었던 수호는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사장을 마음속으로 쥐어박았다.

“약점이 있거든요. 청군여귀는, 심장이라고 해야 하나…생명을 보관하는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어딘가에 숨겨둬요. 하루 동안 그걸 찾아보려고요. 그걸로 협상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귀찮으니 못 찾았다고 하고 그냥 갈 생각으로 수호가 둘러댔다. 그런데 대충 둘러댄 말이 뜻밖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래? 잘됐다. 같이 찾으러 가자.”

저 게으른 사장이 반색을 하며 당장 따라나설 기세로 말한 것이다.

“같이…아저씨가요?”

수호는 약간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만물수리점의 주인이자 아이와 여자에게 약한 착한 남자 해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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