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드림 러버Dream Lover(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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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기운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 기운이 목에서 어깨로, 그리고 다시 등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미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자 등을 쓰다듬다 엉덩이로 내려가는 손길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잠기운이 어린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종원씨? 자기 왔어?”
“어어.”
대충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의 손은 미연의 잠옷을 밀어 올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느라 바빴다. 캄캄한 속에서도 능숙한 손길이 얇은 속옷을 당기자 그녀는 엉덩이를 조금 들어서 그를 도왔다.
“이불 덮어줘.”
몸에 걸쳤던 것이 모두 떨어져나가자 그녀가 웅크리며 말했다.
“왜? 내 몸으로 덮어줄 텐데.”
종원이 그녀 위로 올라오며 능글맞게 대꾸했다. 미연이 키득거리면서 키스하려고 다가온 그의 볼을 잡고 살짝 비틀었다.
“자기는 몸도 차가운 편이잖아. 추우니까 빨랑.”
종원이 아쉬운 듯한 한숨을 쉬며 이불을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목까지 덮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응…”
곧 미연이 가는 신음을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금세 달아오르게 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교묘한 손끝이 훑고 가는 곳마다 소름이 돋아나며 파르르 떨었다. 언제라도 원하는 곳을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애무하는 그의 기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남자를 많이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든 이런 사람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언제까지 나와 만나줄까. 미연은 황홀한 가운데도 초조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자신이 젊고, 운동과 절제된 생활로 몸을 가꾸고 있으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여자 나이 서른일곱은 노화의 길 앞에서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때였다.
“딴생각을 하고 있구나?”
종원이 토라진 것처럼 말하며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 달콤한 고통이 찌르르 퍼졌다. 어쩌면 이렇게 나를 잘 알고 있지. 미연은 웃으며 이불 속에 있는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기한테 미안해서.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다 와서 괜찮아?”
그녀가 변명하자 이불 속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내 피로회복제잖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줄 테니까 각오해.”
선언하듯 말하고 이불 속에서 그가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 어쩌면 저렇게 예쁜 말만 한담. 미연은 그의 몸집만큼 부풀어있는 이불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불속에서 그가 꿈틀거릴 때마다 간지러우면서도 저릿저릿한 쾌락이 등허리를 타고 달렸다.
그녀는 초조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 저항할 수없는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가물거리는 눈에 이불의 들썩이는 모양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불은 그의 움직임과 함께 파도치듯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쾌락에 반쯤 마비된 채로 그것을 멍하니 보던 미연은 문득 신경 한구석을 건드리는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채로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다시 밀려오는 황홀한 감각에 파묻혔다.
“너 아직 출가 안 했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온 과 선배 형식의 첫마디를 듣고 수호는 눈썹을 끌어 모았다
“형은 아직 입원 수속 안 밟았어요? 아는 정신과 전문의 하나 소개해 드려요?”
수호의 대꾸에 형식이 낄낄거렸다.
“말하는 거 보니까 아직 중은 안 된 모양이네. 너 임마, 여자 보기를 돌보듯 한다고 졸업과 동시에 산으로 들어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잖아.”
“아직 졸업 안 했고요. 졸업해도 산으로 갈 생각은 없어요. 형은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고 학교에 그림자도 안 보이더니 웬 일이시래요?”
“응. 너 여자 좀 만나라. 전번 줄게.”
이 형은 무슨 말만 하면 앞뒤 떼고 가운데만 던져. 수호는 참을성 있게 물었다.
“만나서 뭐 하라고요?”
“얌마, 내가 그런 것까지 코치해야 하냐? 구워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하고, 만나기나 해. 네가 좋아 죽겠어서 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꼭 한 번 보고 싶댄다. 아아, 젠장. 될 놈은 뭘 해도 되는구나. 어쨌든 그런 여자 안 만나주면 오뉴월에 서리 맞는다? 방학중이니까 아무 때나 상관없지?”
형식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지금 이 형이 뭐라고 한 거야. 수호는 혀를 차면서도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과 전화번호, 그리고 오정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약속 시간은 이틀 뒤 정오였다. 형식의 말마따나 방학중이라 딱히 스케줄도 없었던 수호는 문자로 정연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약속을 확인했다. “이대리님이 수호씨 이야기를 자주 하셔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이대리님이란 형식일 테니까 그녀는 아마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형식이 형이 내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재학중에 형식은 과대표에 성격도 시원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어서 늘 주변에 누군가가 있었다. 사람을 적당히 상대하고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않는 수호가 형이라고 부르는 몇 안 되는 선배 중 하나이기도 했다.
확실히 수호 쪽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친하게 지낸 편이었지만 형식에게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야기꺼리가 있다고 해도…
“아아, 여자는 무슨.”
수호는 형식이 정연을 소개시켜 준 이유를 알아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틀 뒤 그는 학교 근처의 커피숍에서 정연을 만났다. 직장인이니까 말끔한 수트에 어른스러운 외모의 여성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터틀넥 스웨터에 짧은 치마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의외로 앳되었다.
그녀는 커피숍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수호를 알아보고 곧장 다가왔다. 형식이 보여준 사진을 통해서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며 말을 꺼낸 그녀는 붙임성 있는 태도로 대화를 이끌었다.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앳된 얼굴과 달리 사회생활을 경험한 사람 특유의 연륜이 느껴졌다. 귀엽게 보이는 미소와 수줍은 표정을 섞어 싫지 않을 정도로 재잘대는 그녀를 대충 상대하며 수호는 본론을 기다렸다.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호감을 가진 남성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용건을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사정이 있어서 이대리님께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던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수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 모았다.
“본인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누구 때문이에요?”
수호의 대꾸에 정연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어, 언니요. 큰언니인데. 아아, 알고 계셨구나.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저기, 이대리님이 수호씨는 아무나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셔서…친한 사람이 아니면…그런데 제가 정말 힘들어서요.”
‘이 형은 내 이야기를 자주 했다더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한 거야.’
언제 형식을 만나서 따져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호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호록 마셨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그게…”
그런데 막상 물어보자 정연은 꾸물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양손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수호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언니가…남자친구가 있는데요…그 사람이 좀 이상해요.”
정연의 집안은 딸만 다섯인 딸부잣집이었다. 막내인 정연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맏인 미연만은 아직도 혼자였다. 정확히는 과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동거하던 남자가 있었으나 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자녀도 없어서 가족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그 후로 쭉 혼자였다. 가끔 사귀는 남자가 있다가도 오래가지 않았다고 정연은 말했다.
“그런데 반년 전부터 동거하는 남자가 생겼어요. 전과 달리 언니도 내놓고 자랑할 정도로 좋아하고, 저도 몇 번 봤는데 인상도 좋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 같더라고요. 좀 불편한 건 늦게까지 일하는 직업이라, 한밤중에나 집에 온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언니가 너무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잘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연은 말하다말고 입술을 깨물면서 멈칫거렸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가 회식 때문에 취해서, 시간도 늦고 하숙집까지 너무 멀고 해서 가까운 언니 집에서 잔 적이 있어요. 그날 자다가 밤중에 목이 말라서 깼는데 언니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며 정연이 말을 더듬었다.
“남자랑 있는, 그런 소리가 들려서,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들어가다 얼핏 현관을 보니까 남자 신발이 없는 거예요. 신발장에 정리해 뒀겠지 생각하다가도, 그동안 가끔 언니 집에 들르면 남자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게 생각나서요. 이상하잖아요. 남자랑 같이 살면 칫솔이라든가 건조대에 남자 옷도 걸리고 그러는 법인데…”
정연은 더 작아진 목소리로, 거의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베란다 쪽에서 살짝, 창문으로 언니 방을 들여다봤거든요. 혹시나 하고…그런데 유리창이 불투명한 거라 정확히는 안 보였는데…방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그게 꼭…”
빨갛던 얼굴이 이번에는 노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정확한 건 아닌데 길쭉한 게 사람처럼은 안 보이고 꼭…무슨…커다란 뱀처럼요. 그렇게 보였어요.”
말하고 나서 정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힐끗 수호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 그 남자를 보면 어딘지 오싹하고, 걸어갈 때도 왠지 스르르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언니한테 몇 번 물어봤는데 남자 물건이 없는 건 집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 왔다 갔다 하는 거라 그렇다고 해요. 그런데 집이나 직장이 어디냐고 물어도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않고, 어떻게 만났는지 그런 것도 전혀 이야기 안 해줘요. 물어보면 왜 꼬치꼬치 캐묻느냐고 화내고요.”
정연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 남자가 이상한 건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잠결에 뭘 잘못 본 게 아닐까 싶다가도 그 남자를 보면 너무 기분이 안 좋고 무서워서요. 언니가 그 남자를 정말 좋아해서, 전 그냥 제가 잘못 본 거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한 번 확인만 해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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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만물수리점 - 드림 러버Dream Lover(2)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본능이든 여자의 직감이든, 보통 사람이라면 잘못 봤다고 무시할 수도 있을 기억을 근거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수호의 생각에 그녀의 의심은 일리가 있었다.
뱀과 과부, 밤에만 나타나는 정인. 이것만으로도 금세 요괴의 이름이 두어 개 떠올랐지만 그는 섣불리 단언하지 않았다. 어쨌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신중해야 했다.
수호는 그녀와 함께 언니의 집에 찾아갈 시간을 정한 다음 커피숍을 나왔다. 졸지에 일을 떠맡게 된 셈인데 공짜로 할 생각은 없었다. 형식에게 전화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받는다.
“밥 사요.”
수호가 대뜸 말하자 형식이 허허 웃었다.
“기사 식당, 학교 근처 식당, 그런 거 취급 안 해요. 제대로 사요.”
“살 테니까 일이나 잘 해줘. 무슨 사정인지 나한테 말 안 하던데 심각하냐?”
“의뢰내용은 발설 금지입니다, 고객님. 제가 누구랑 달리 공과 사는 구분하는 사람이라서요.”
“야야, 최수호. 화내지 마라. 그리고 걔 진짜 괜찮지 않냐? 같이 일해 봐서 아는데 차분하고 야무지고 성격도 좋아. 얼굴은 봐서 알 테고.”
형식의 달래는 말에 수호는 코웃음을 쳤다. 이 양반이 어디서 약을 팔아.
“하긴 이야기 해보니까 말도 잘 통하고 귀엽던데요. 외모도 취향이고.”
“어어, 그랬냐?”
어딘지 낭패한 기색으로 형식이 재빨리 대꾸했다. 수호는 웃음을 참았다.
“금요일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어요. 직장이 상무지구에 있다면서요? 이제 보니 가까웠네. 근처에서 보려고요. 거기 술집도 많고…”
“야, 걔 술 잘 못해! 회식 때마다 얼마나 고생하는데. 그, 나도 같이 갈까? 내가 진짜 괜찮은 곳 아는데…”
수호는 결국 낄낄거리며 웃었다.
“일 때문에 만난다고요. 야아, 형식이 형, 아직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무게 잡고 아저씨 티내요? 그러면 안 된다니까.”
인간관계는 좋은데 관심 있는 여자 앞에서만 근엄해지는 선배에게 수호가 놀려댔다.
“너 이 새…아아, 됐다? 너나 잘해, 인마.”
형식이 당황해서 전화를 끊었다.
“저도 잘 하고 싶긴 한데요…”
피식 웃으며 수호는 중얼거렸다.
형식의 스님 운운하는 그 소문은 수호도 알고 있었다. 이따금 주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악재나 살이 낀 것을 충고해준 일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족집게 같이 점을 보는 녀석이 있더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애정운이나 직업운 같은 걸 묻는 사람도 있었다.
지족선사를 유혹하는 황진이 같은 호기로 대시하는 여학생도 심심찮게 있고, 그런 여자들을 거절하면 “너 고자냐?”고 묻는 친구도 있으니까 이쯤이면 게이라고 오해받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수호 쪽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 지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줄 길이 없고, 설명해 줘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인연이 아니면 또 어때? 오히려 좋네. 적당히 사귀다 헤어져도 된다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연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줄 기운도 안 났다.
세계에는 엄정하고 정교한 규칙의 흐름이 있다.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잠시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 흐름은 조용하고 느리므로, 눈앞의 일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들에게 이해하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 수호 자신도 그 범주에서 그리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 앞이나 겨우 볼 수 있는 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얼마 전 청군여귀의 일을 겪고 보니 심지어는 그마저도 못 되는가 싶었다.
“아아…찝찝하게.”
간신히 잊고 있던 일이 다시 떠오르자 그는 머리를 휘저었다.
정연과 만나기로 한 금요일은 이틀 뒤였다. 한동안 내리던 눈이 그쳐서 하늘은 맑았지만 기온은 영하에서 맴돌았다. 정연은 두툼한 패딩점퍼에 스커트라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따뜻하게 입든 예쁘게 입든 하나만 하라고 권하고 싶은 차림으로 약속장소에 왔다.
“빨리 가야 해요. 언니도 금방 퇴근할 테니까요.”
정연이 서두르며 말했다.
그들은 미연이 없는 동안 집안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찾는 것은 속이 비어있는 커다란 통이다. 항아리가 가장 적합하지만 아니라면 비슷한 것도 좋았다. 그 안에 요괴가 숨어있으리라고 수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뱀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는 전설이나 야담에 드물지 않았다. 이무기가 과부의 모습으로 선비를 유인한다거나, 뱀이 밤이 되면 사내의 모습으로 처녀의 방에 찾아온다거나, 신의 권속에 가깝지만 집안의 재복을 담당하는 업왕신도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대선사사(大禪師蛇)라는 요괴였다.
그것은 낮 동안 뱀의 모습으로 항아리 안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여자를 찾아갔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꿈속에서 여성을 희롱하기도 하는데, 주로 과부를 대상으로 한다. 이를 테면 서양의 몽마(夢魔)와 비슷한 셈이다.
퇴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음의 빈틈을 노리는 부정한 요괴일 뿐이라 인격이나 도력 높은 사람이 꾸짖기만 해도 부끄럽게 생각하며 달아났다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민간에서는 관으로 유인해 장사를 지내는 방법을 사용했고, 부적으로 봉인하는 정도로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연의 집으로 가서 정연이 가지고 있는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연의 집은 한적한 주택가의 마당이 좁은 2층 양옥이었다. 좌우로 높은 담을 세워 옆집과 경계를 지은 비슷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2층은 원래 세를 내주고 있었지만 작년부터 세입자를 내보내고 비워뒀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을 거라는 정연의 말대로 위층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집에 항아리를 둔다면 보통 옥상이나 담 밑이겠지만, 수호가 돌아다니며 꼼꼼히 확인했어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1층뿐이다.
전실을 지나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공기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은 수호가 걸음을 멈추고 안을 둘러보았다.
정연은 이곳에 남자 물건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막상 집안을 본 수호는 생각이 달랐다. 이상한 것은 같으나, 이상한 이유가 틀린 것이다.
“정연씨, 이 집에 얼마나 자주 오세요?”
수호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그의 뒤에 서있던 정연은 그의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글쎄요. 언니가 늘 바쁘고, 저도 직장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주 오지는 못했어요. 음…몇 달에 한 번 정도? 왜요?”
“낮에 온 적은?”
정연이 되묻는 것을 무시하고 수호가 한 번 더 질문했다. 정연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네요. 음…보통은 언니가 퇴근하고 나서 만나니까 밤이나 저녁 이후였던 것 같아요.”
대답하고 나서 정연이 영문을 몰라 불안한 얼굴로 수호를 쳐다보았다. 수호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일단 내 차로 돌아가 있어요. 혹시 언니가 돌아오면 밖에서 시간 좀 끌어줄래요? 그동안 내가 집안을 확인해 볼게요.”
수호의 말이 자신을 내보내는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정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밖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수호는 주머니 안에서 부적 뭉치를 꺼내 몇 장을 골랐다. 그것을 접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고, 그는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숨기지 못한 요기가 몸서리치며 흔들리는 것을 눈으로 본 듯 느낀 것이다.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바로 옆에 찾던 것이 보였다. 쌀독 크기의 항아리였다. 손잡이가 있는 뚜껑이 덮여 있었다. 수호는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쉬이잇 - 쉿
컴컴한 항아리 안에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먹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항아리 밖으로 꼿꼿이 쳐든 대가리가 흔들거렸다.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렁이는 수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얌전히 있으면 나도 해치지 않겠다.”
사람에게 하듯이 수호가 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봉인한 다음 여기에서 내보낼 거고, 절차대로 장사를 지낼 거다. 본래 사람이었으니 가야 할 곳으로 가도록 해.”
뱀은 수호의 말에 한 차례 꿈틀거렸으나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풀죽은 모습으로 대가리를 내려뜨렸다.
“잘 생각했어. 그럼, 뚜껑을 닫고 봉인 할 테니…”
“무슨 짓이에요!”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호의 말을 잘랐다. 수호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 미연이 서 있었다. 그녀가 화나서 굳은 얼굴로 수호를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예요? 무슨 권리로 남의 집에 맘대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당장 나가요! 경찰 부르기 전에!”
“오미연씨.”
“나가지 못해요?”
“오미연씨, 당신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태도에 미연의 낯색이 초조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듣기 싫어요. 내 집에서…”
“이것은 대선사사라고 불리는 요괴입니다. 뱀의 모습을 하고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타나 여성을 희롱하지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수호가 이야기했다. 그리고 덧붙여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지요?”
예상 못한 공격을 받은 듯이 미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체가 뭔지는 몰랐을지라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동생분의 말로는 반년 정도라지만, 제 생각에는 훨씬 오래 전부터일 것 같군요. 처음에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 어느 순간부터는 눈치를 챘을 겁니다. 그러나 외면했겠지요. 어쩌면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수호가 말하는 동안 미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속이면서 서로에게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위해서요.”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뭘 속였다는 거예요?”
미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억울하고 화가 난 사람의,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호는 생각했다.
“오미연씨,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지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하던 그녀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가 생각하려다, 그것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나한테…그, 그런 말…”
“생각하세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수호가 말했다. 미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가 두려워하며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조금 전에, 집안에 누군가 들어와서 항아리에 손댄 것을 알고 눈을 떴을 때, 그때 나는…어딘지 어둡고…좁고…아늑한 곳에서…거기에서 일어나…
“아아…아…”
둥근 입구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내 몸은…
“아, 아아…”
미연의 몸이 떨기 시작했다. 추운 것처럼 바르르 떨다가 점점 더 거세게 몸이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빠르고 격렬하게 좌우로 비틀어 흔들리는 몸이 잔상을 남겨 마치 원기둥처럼 보였다. 아니, 그 몸은 실제로 기둥처럼 변해 있었다.
둥글고 긴 몸통이 철썩 바닥을 쳤다. 손도 발도 없이 오직 머리와 몸통뿐인 길쭉한 몸이었다. 그 몸이 바닥을 괴로이 뒹굴었다.
“기억이 납니까? 당신은 벌써 오래 전에 뱀이 되었어요.”
수호가 그녀에게 말했다.
정연은 이 집에 남자의 흔적이 없다고 했지만 수호가 본 집안은 그렇지 않았다. 이 집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이미 수 년 전에 인기척이 사라진 집이었다.
“상사뱀…사랑하는 마음이 집착으로 변해 죽은 사람은 그런 요괴가 됩니다. 당신이 집착한 대상이 어딘가에 살아있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괴롭혔겠지만, 여기에 남은 걸 보니 아마 그 대상은 죽은 남편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꿈틀꿈틀 뱀이 된 미연이 바닥을 기었다. 그녀는 안방으로 기어들어가더니 항아리를 타고 스르르 올라가서 그 안의 먹구렁이와 엉켰다. 두 마리의 뱀이 목과 목을 비비며 밧줄처럼 꼬였다.
어쩌면 죽은 남편이 대선사사가 되어 그녀에게 왔던 것은 아닐까. 수호는 문득 생각했다. 요괴가 되어 돌아온 남편과 요괴가 된 부인. 그리고 그들은 잠시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나 짧고 황홀한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규칙은 지엄하니.
수호는 항아리 위로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부적으로 항아리를 봉인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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