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시계 소리(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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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는 양동시장 복판의 좁은 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설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평소라면 한적했을 시장 안이 활기 찬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의 앞에서는 모처럼 만난 수민과 세희가 장바구니를 들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둘 다 선예원을 나온 지 몇 년 되었지만 설날이 다가오자 아이들에게 옷이라도 사줄 생각으로 시장에 들른 것이다. 오랜만이니까 같이 가자고 전화한 쪽은 수민이었다.
그래놓고 둘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이나 실컷 하면서 데이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부른 거냐고 항의하고 싶은 것을 수호는 몇 번이나 참는 중이었다.
‘그래도 보기는 좋네.’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한 사람과 한 요괴의 뒷모습을 보며 수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세희는 선예원에 있을 때 좀처럼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였다. 그야 당연하다. 그녀는 어린아이의 모습인 요괴, 노앵설인 것이다.
보육원에서는 성장이 느린 희귀병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지만 정작 병원에 데려가거나 검사를 받게 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 모습인 것 외에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들 역시 세희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비록 인정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수민이 나이가 차서 보육원을 떠날 때쯤이 되자 세희는 갑작스럽게 성장했다. 엄밀히 말하면 큰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로 쭉 그녀는 수민에게 겉모습을 맞추었다. 그래서 20대 초반이 된 세희는, 지금 도도하니 고양이 상을 한 미인의 모습으로 시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너희들 옷 고른다고 하지 않았냐?”
뒤따라 다니는 데 질려서 말을 걸자 수민이 미안한 얼굴로 돌아보며 “아, 이제 그쪽으로 가려고요.”라고 대답하고 세희는 홑눈꺼풀의 속눈썹 긴 눈매로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수민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버릇은 지금도 여전해서 아예 사람들 앞에서는 수화를 쓰며 언어 장애인 흉내를 내고 있었다. 노앵설의 목소리는 늦봄의 꾀꼬리가 아름답고 빼어난 기교로 우는 소리에 비견된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수민인 셈이다.
어릴 때는 부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유일한 한 사람이 된다는 게 정말 좋은 일인가 생각해볼 정도로 회의적이 되었다. 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인인 요괴가 애인인 것은 별개로 치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놀았던 주제에 둘은 단 5분 만에 아이들에게 선물할 옷을 사버리고 배고프다며 식당을 찾아갔다. 백반이 되는 곳을 찾아내서 주문을 한 다음, 그제야 수민은 오늘 수호를 불러낸 이유를 꺼냈다.
“형, 정신병도 전염이 되는 걸까요?”
갑자기 무슨 질문이 그러냐고 불평하는 대신 수호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게 바이러스로 발병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면 스트레스는 받겠지만 전염되는 건 아니지 않냐?”
수민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좀처럼 밝은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수민이 이야기했다.
“제가 요새 알바로 아이들 가르치는 거 아시죠? 성적 비슷한 아이들 네 명씩, 요일 별로 두 팀을 맡고 있거든요. 방학 중에 잠깐 하는 거지만 벌이도 좋고, 아이들도 의욕이 있어서 잘 따라오고요. 학부모님들도 굉장히 신경써주시고 그래서 저도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2주 전에 아이들 부모님 중 한 분이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 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디가 아프거나 다친 게 아니라 발작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더래요.”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학생의 어머니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가족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바로 다음 날 일어났다.
“다음 날 수업을 하려는데 학생 중 하나가 안 온 거예요. 전화해 보니까 아버지가 갑자기 병원에 가셔서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따라갔다고…문제는 그 아이의 아버지도 사고나 병이 아니라 발작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말을 잇는 수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며칠 있다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알았는데, 그런 식으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사람들이 더 있었다는 거예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중 가족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더라고.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정신병을 일으키는 전염병이 번진다는 소문이 돌고요. 그러다 그저께,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하나가 아예 모임에서 빠진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학생 어머니와 통화를 해 봤는데 입원했다는 말만 하고 자세히는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그게 발작 같은 그 병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물을 헤집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호가 무심히 물었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거였어요. 직접 찾아가서 알아봤거든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 가운데 세 명이나 그 이상한 병과 관련된 셈이잖아요. 아무래도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세희가…”
수민은 말하다 말고 힐끗 노앵설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수민의 이야기에 관심 없다는 듯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나와도 모르는 체하며 젓가락으로 고등어살을 발랐다.
“저더러 그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해요.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고. 그냥 가까이 가지 말라고만….”
수민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세희를 쳐다보자 수호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희는 작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밥 먹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수민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이니까 수호가 물어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공부는 어디에서 하는 거야? 아이들 집?”
“예. 돌아가면서요.”
“학생 엄마가 병원에 갔다는 그 집에서는 무리겠네? 그 후로 가본 적 있어? 뭐…병문안이라든가.”
수호의 말에 오물거리던 세희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 집에 가면 안 되는 거냐?”
그녀의 시선을 태연한 낯으로 받아넘기며 수호가 물었다. 세희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저런다니까요. 설명도 안 해주고…. 어떡하죠, 형?”
수민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수호는 피식 웃었다.
“어떡하긴 인마. 여자 말을 잘 들어야지. 시키는 대로 해.”
“예? 그 일 놓치면 다음 학기 등록금 진짜 힘들어요.”
“인생이 힘들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아니면…뭐라도 핑계를 대서 학생들을 네 집으로 불러서 공부시키든지. 그건 괜찮지? 당분간 그렇게 하는 동안 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볼 테니까.”
수호가 세희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수호의 질문에 토라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대놓고 화내지 않는 걸 보니 그 정도는 허락할 모양이었다.
수민에게 문제가 생긴 학생들의 집주소를 받은 다음 수호는 그들과 헤어졌다. 둘과 함께 있는 동안 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웃는 얼굴은 헤어지는 것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수민에게 받은 메모를 확인하며 차로 세 집을 모두 돌아다녔다.
집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하면 부적을 써서 목신이나 영들을 불러내기도 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돌아다닌 끝에 그는 처음보다 훨씬 어두워진 얼굴로 차를 돌려 스승의 집으로 갔다.
그의 스승은 서재의 늘 있던 자리에서 수호를 맞았다.
“연락도 없이 왔구나.”
목소리에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지만 수호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스승이 고요히 수호를 바라보았다. 수호는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염매술사가 온 것 같습니다.”
스승의 온화한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확인은 했고?”
“예.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를 봤다는 사람도 있고, 목신으로부터 도사 하나가 요괴를 가지고 다니더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병자들은 아직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하나같이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고요. 2주 동안 적어도 여섯 명의 병자가 생겼는데 사는 곳이 가까운 걸로 봐서 단기간에 돈을 벌어서 떠날 작정인 것 같습니다.”
수호의 말이 끝나자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것인지 동의한다는 것인지 모호했다.
“제가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스승이 별다른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수호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말하고 나서 후회하는 얼굴로 스승의 눈치를 살폈지만 의외로 웃는 얼굴이 보였다.
“상대는 필경 도사일 텐데?”
“예. 하지만 염매술은 금지된 술법입니다. 누구든 발견하면 막아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금지된 이유는 그 수법이 악랄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심장에 독을 품은 사람이 아니면 하지 못할 짓이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라고, 부드럽게 휘어진 스승의 눈이 묻고 있었다. 수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락하신다면…”
“허락하마.”
수월하게 승낙이 떨어지자 수호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요?”
사실은 거의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스승이 직접 나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은 약간 얼빠진 것처럼 보이는 수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네 입으로 말해놓고 뭘 다시 묻는 거냐. 다녀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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