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시계 소리(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수호는 울컥 올라오는 숨을 눌러 참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하고 몸속에서 피가 거세게 돌았다. 자세가 흐트러지려는 것을 버티면서 호흡을 다스렸다. 잠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차츰 가라앉았다.
부적을 잡은 손끝은 아직 조금 떨고 있었다. 염매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대비한 것이지만 차돌이 돌아온 뒤로도 아직 기척은 없었다. 그는 발밑으로 굴러온 다음 얌전히 멈춰 있는 차돌을 주웠다. 가장자리에 약간 금이 가 있었다.
차돌을 이렇게 만드는 순간에 염매가 내뿜은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몸 안에서 커다란 종이 울린 것 같은 충격에 잠시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직접 갔더라면 무사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으면 안 된다. 그는 염매술사가 있는 곳으로부터 언덕 하나 정도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아직 오지 않는 것은 술사가 염매를 달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염매는 생전에 중독되다시피 좋아했던 음식에 유인되어 움직이는 원혼이었다. 마치 물개에게 생선을 주며 재주를 가르치는 사육사처럼 술사도 염매에게 상을 줘야 했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다음 번 충돌의 승패를 좌우했다. 수호는 가빠지려는 숨을 다스리며 최대한 빨리 걸었다.
가야 할 곳의 방향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염매술사의 눈에 띄겠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이대로 정면으로 부딪쳐서 싸운다면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것을 조금 전 확실히 깨달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다시 한 번 염매와 부딪쳐도 무사할까.
마음속에서 불안이 꿈틀거렸다.
‘아니. 의심하지 마. 이대로라면 문제없어.’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찾고 있는 장소는 가까웠다.
끊어질 것처럼 약한 기운을 읽어내며 수호는 걸음을 재촉했다. 잡풀과 관목으로 우거진 산 속이었지만 수호는 별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스승까지는 아니라도 함께 산에서 수련하는 동안 제법 산사람처럼 움직일 정도로는 능숙해진 것이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나무 뒤로 숨어 이동하면서도 속도는 빨랐다.
‘있다.’
어둑해진 속에서도 수호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 비탈 조금 위쪽이었다. 관목의 앙상한 가지 위에 곰 인형이 걸려 있었다. 염매의 힘에 날려가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천과 솜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인형이라 그만한 힘의 폭풍에 휩쓸렸어도 오히려 무사한 것이다.
인형을 손에 넣기 위해 수호가 비탈을 올랐다. 급한 걸음을 크게 떼었다가, 수호는 돌연 비탈 아래로 몸을 굴렸다.
어디선가 가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수호가 있던 자리에서 흙과 썩어가는 낙엽이 튀어 올랐다. 땅과 함께 근방의 관목들도 메마른 가지가 잘려나가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염매술사가 보였다. 깡마른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직까지 도망 안 가고 있었냐? 아니면 길이라도 잃었냐.”
술사는 어두운 산속을 평지처럼 걸어 다가왔다. 저쪽도 산에 익숙하다. 사람들의 눈을 개의치 않는 옷차림을 보면 속세보다는 산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몰랐다.
수호는 손안에 부적을 숨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염매가 위협하듯 수호의 주변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술사는 염매의 능력을 믿는지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다가왔다. 간격이 10미터 정도로 좁혀지자 수호 쪽에서도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술사가 그것을 보고 염매에게 명령했다.
“해치워 버려.”
주변을 돌고 있던 염매의 기운이 다가왔다. 수호는 숨겼던 부적을 펼쳐 흔들었다. 동시에 그가 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호는 산비탈 위쪽에, 술사가 아래쪽에 있다.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격이었다. 거리는 10미터지만 속도와 중력에 겹쳐 발을 다시 디딜 필요도 없이 곧장 그 몸이 술사에게 날아갔다.
가는 울음소리를 내며 염매가 움직였다. 무거운 힘이 수호의 몸을 정면에서 후려쳤다. 그러나 그 힘은 허깨비인 것처럼 수호의 몸을 통과해 뒤편의 나무를 크게 흔들었다. 술사가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수호가 술사에게 부딪쳤다. 술사가 뒤늦게 옆으로 피했지만 수호가 내민 손에 더플백이 잡혔다. 가방을 잡고 버티는 술사의 힘을 축으로 삼아 방향을 바꾼 수호가 낮은 발차기로 그를 후려 찼다.
술사가 넘어져 뒹굴었다. 쓰러진 그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그도 만만치 않게 반응했다. 팔 안쪽으로 섬뜩한 느낌이 스쳤다. 수호는 본능적으로 피하며 물러났다. 외투의 오른쪽 소매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가방을 고쳐 메면서 일어나는 술사의 손에서 한 뼘 길이의 칼날이 번득였다.
“이 새끼가…”
거친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그가 칼을 휘둘렀다.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운 적 없는 것처럼 마구잡이였으나 기세가 흉흉했다. 멈칫거렸던 수호가 틈을 노려 팔을 뻗었다. 칼을 잡은 손이 그의 손과 함께 얽혔다. 얽힌 손을 당기며 몸을 던지듯이 술사의 품안으로 파고든 수호가 그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메쳤다.
비탈진 곳 아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술사가 기울어진 산비탈을 두어 바퀴 구르는 동안 수호는 재빨리 곰 인형을 향해 달렸다. 이제 부적의 효력이 오래 남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염매는 쉬지 않고 수호를 향해 효과 없는 공격을 계속했다.
구르다 나무에 부딪친 술사가 험상궂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수호는 되찾은 곰 인형을 손에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인형의 뒤편에는 새로 꺼낸 부적이 한 장 붙어 있었다.
그것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플라스틱 통을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손 안으로 시침핀 여러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진주 모양의 장식까지 달린, 엄마의 반짇고리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그것을 수호는 망설임 없이 곰 인형의 주둥이 부분에 꽂았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술사의 험상궂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시침핀이 한 번 더 주둥이에, 첫 번째 것과 십자 모양을 이루며 꽂혔다. 술사가 입을 움찔거렸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술사의 시선이 수호의 태연한 얼굴에서 그가 들고 있는 곰 인형으로 내려갔다. 거기에 어딘지 낯익은 것이 보였다.
술사가 자기도 모르게 제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점퍼의 가슴 부분이 뜯겨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아까 수호가 멱살을 잡아 메쳤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잡아 메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도 낡아서 약간 너덜거리고 있던 앞섶의 천을 뜯어내 간 것이다.
그것이 인형에게 붙어 있었다.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저도 사정을 봐드릴 입장은 아닌 것 같아서요. 염매를 내려놓고 가주시죠.”
수호가 말했다.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나 신체 부위의 일부를 넣은 인형으로 그 사람을 저주하는, 일종의 저주인형 같은 것이었다. 이 경우에는 술사의 옷자락이 그 매개가 된 셈이다. 의식의 기원은 저주보다 액받이 쪽이 먼저였겠지만 주술이라는 것도 어차피 양날의 검이었다.
술사의 입을 봉해서 더는 염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거리도 10미터 정도는 되니까 허튼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곰 인형의 오른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수상한 움직임만 보여도 시침핀을 인형에 꽂을 작정이었다.
술사는 이를 가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말 한 마디 하는 정도로 염매를 내놓을 리가 없다. 수호는 들고 있던 핀을 인형의 왼쪽 어깨에 푹 꽂았다. 술사가 고통을 느끼고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한 번 더 핀을 꽂고 인형을 옆으로 구부리자 술사의 허리가 함께 기울어지며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술사가 칼을 들고 있던 오른 손으로 가방을 잡았다. 가방끈에 팔을 돌려넣고 단단히 잡는 모양이 결코 쉽게 내주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수호는 피곤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인형을 이용해 고통을 가하는 정도로는 겁먹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니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괴롭히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염매의 공격을 막고 있던 부적도 이제 한계였다.
수호는 손 안의 핀들을 모두 단숨에 인형의 몸통에 쑤셔 박았다. 염매술사를 상대로 동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술사의 입이 벌어지면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술사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보는 것 이상의 무엇도 할 힘은 없었다. 그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염매가 들어있는 가방이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수호가 그것을 가지러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발 앞의 땅이 팍 패며 낙엽과 잘려진 나뭇가지가 날았다. 수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맴도는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가 위협인지 아니면 슬퍼하는 것인지 모르게 꼬리를 끌었다.
수호가 멈추자 염매도 더는 공격하지 않는다. 부적의 효과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제 염매의 공격을 받으면 그도 분명히 타격을 받았다. 수호는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팍 - !
다시 한 번 발밑의 땅이 패었다. 이번에는 신발 끝에 흠집이 생겨나 있었다. 울음소리가 한 번 더 길게 이어졌다. 수호가 움직이지 않자 역시 염매 쪽에서도 공격은 하지 않으나, 한 발만 더 움직이면 이번에는 자신에게 직접 타격이 올 것이다.
‘염매가 술사를 보호하고 있어.’
미리 명령을 내려둔 걸까? 만일 그렇다면 명령의 효력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술사를 제압하고 염매를 가져가면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간단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수호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쓰러졌던 술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깨어난 것이다. 주머니 안에는 아직 핀이 더 있으니 다시 한 번 충격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염매에게 공격을 받으면 이쪽도 무사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꿈틀거리던 술사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수호를 쏘아보더니 가방을 끌어당겨 안고 비틀비틀 뒷걸음쳤다. 더 싸울 의사는 없어보였다. 그것은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술사가 산비탈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수호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얕보고 있던 쪽은 나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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