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88화 (188/218)

서천 만물수리점 - 시계 소리(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수리점으로 돌아온 수호는 작업장에서 뭔가를 고치고 있는 해명과 마주쳤다. 수술실에 들어간 의사처럼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한 손에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해체된 전기밥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수호를 보자 반색을 했다.

“야, 최수호. 잘 왔다. 내가 이거 열어서 선이 끊어진 거 발견했거든. 그런데 어디를 어떻게 이어야…어라?”

말하다 말고 해명이 수호에게 다가갔다.

“넌 어디서 뒹굴다 온 거야?”

가까이 온 해명이 수호의 등을 툭툭 털었다. 그것뿐이었지만 어쩐지 몸이 가벼워져서 수호는 해명을 힐끗 쳐다보았다.

옷에 묻은 덤불이라든가 흙 같은 것은 충분히 확인한 뒤였다. 얼굴에 조금 긁힌 자국이 있는 것과 외투 소매에 잘린 부분 외에는 눈에 띄는 데가 없었다. 외투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벗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으니까 봤을 리 없다. 그러니 아마도 해명이 털어낸 것은 보통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하는 중이었어요?”

수호가 해명의 질문에는 대답 않고 작업 선반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아, 좀 전에 손님이 맡기고 갔는데 취사가 안 된대. 보온은 되거든. 그래서 밥통 바닥을 일단 분해는 해 놨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네.”

“모르면서 일 벌이지 마요. 그리고 전자제품 수리는 내 담당이잖아요.”

“그러니까 너 일 하기 쉬우라고 준비해 놓은 거야.”

“마이크로 스위치만 바꾸면 될 걸 납땜까지 해야 하도록 준비해 놓으셨네요. 커버 벗길 때 도대체 얼마나 힘껏 당긴 거예요?”

“오오, 척 보고 아는 거냐? 과연 공대생!”

“내 전공이랑 아저씨 행동을 예측하는 거랑은 별로 관계없네요. 드라이버나 주세요.”

한숨을 쉬며 수호는 작업 선반 앞에 앉았다. 수호가 스위치를 교체하고 떨어진 선을 도로 잇는 동안 해명은 옆에 서서 신기한 것을 보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야말로 다친 사람을 순식간에 멀쩡하게 고친다든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을 손으로 툭툭 털어 없애버리는 신기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안에 물 넣고 취사버튼 눌러봐요.”

수호가 조립까지 끝낸 밥통을 해명에게 밀어주었다.

“야아, 너 공부는 대충 하는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도 수업 열심히 듣나봐?”

“학교에서 밥통 수리 같은 걸 가르칠 리가 없잖아요. 원리, 이해, 응용. 그리고 경험.”

“그래, 너 똑똑하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서 무슨 경험을 하고 왔는지 안 가르쳐 줄 거냐?”

해명이 끈질기게 물었다.

“그건 왜요?”

염매술사 이야기 같은 것을 했다가는 같이 가겠다고 나설 것이 분명해서 수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싫은 내색 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해명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물이 묻었으면 물가에서 논 거고 흙이 묻었으면 땅바닥에서 논 건데, 너한테 묻은 건 독한 사념에다 뭔지 지독한 요기라서 말이야. 어쩐지 달님이 먹이가 잔뜩 쌓인 곳 같거든. 다음에 갈 때 데려갈래?”

“남의 중요한 일을 애완동물 키우는데 이용하지 마시죠.”

수호가 울컥해서 대꾸하자 해명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일이 뭐냐고.”

그제야 자기도 모르게 실토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수호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이 아저씨는 평소엔 둔해빠져서, 왜 이럴 때만 여우같은 거야.’

“아저씨와 관계없어요. 도사로써의 문제니까.”

“사장으로써 직원을 관리하는 문제거든?”

“직원의 사생활까지 관리할 필요 없어요.”

“네 사생활이 내 집까지 요기랑 사념을 끌고 들어오잖아.”

“알았어요. 나가드릴 테니까.”

“아니, 그보다 아저씨로써 버릇없는 중2를 관리하는 문제다!”

“말 바꾸지 마요. 그리고 누가 중2라는 거야? 아저씨나 유하 누나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시죠.”

“여기서 유하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러니까…”

두 남자의 주고받는 말싸움이 유치해졌다. 몇 번을 더 그런 공방이 오간 끝에 결국은 한심하다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소리가 언성을 높인 목소리보다 선명하게 작업장을 가로질렀다. 두 남자는 말싸움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출입문 쪽을 돌아보았다.

“싸움은 손발로 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을 텐데요.”

클래식한 디자인의 카키색 겨울 슈트 세트를 갖춰 입은 백은호가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왔다.

“너, 백은호 인마. 네가 수호 녀석한테 이상한 걸 가르쳐 놓으니까 저게 겁 없이 아무데나 돌아다니잖아.”

해명의 불만이 백은호에게 튀었다.

“제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도록 가르쳐 두라고 주문하신 분이 도령이십니다만.”

무심한 목소리로 해명의 불만을 반사시킨 다음 백은호는 서늘한 눈으로 수호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그의 시선이 작업 선반에 내려놓은 외투 쪽으로 가자 수호가 움찔했다.

“요즘 태평하고 긴장감 없는 누군가와 너무 어울린 나머지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군요. 조만간 특훈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야, 남의 제자 데려가서 멋대로 가르치려고 하지 마.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환한테 혼났다고.”

“그렇다니 일석이조가 되겠군요.”

태연히 대답한 다음 백은호가 수호를 쳐다보았다.

“네가 요즘 내 먹이를 건드리는 것 같던데, 최수호.”

“요즘 만나는 여자 없는데요.”

수호가 비꼬듯이 대꾸했다.

“애 딸린 남자라고 해두지.”

백은호의 말에 해명이 “뭐어? 백은호 너는 남자와도 사귀는 거냐?”고 외치고 수호는 입매가 굳었다.

“시끄럽습니다, 도령. 손님에게 차라도 대접해 주시지요.”

백은호가 차갑게 말했다. 눈치 없는 해명이라도 이 말이 축객령이라는 것은 알았는지 주인인 주제에 객 취급을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우에게 먹이는 둘 중 어느 쪽이죠?”

위에서 문소리가 난 후에야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당돌한 질문에 여우요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근본 없는 도사는 내 것이다. 염매 따위는 네가 갖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일인가요?”

수호가 다시 물었지만 백은호는 미간을 좁힐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염매술사를 죽일 생각이에요?”

수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에도 백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의뢰한 일인지도 말 안 해 주겠죠?”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면 어디에라도 원한을 쌓기 마련이지.”

염매술사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이나 그 가족이라는 뜻이다.

“부자들만 노린다면서요. 돈 좀 잃었다고 아저씨를 고용할 정도로 복수하고 싶어 한다니 웃기네요. 이쪽에 들어가는 돈이 더 많을 텐데요.”

“그건 그렇겠지.”

피식 웃으며 대꾸한 백은호가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내 쪽의 의뢰인은 돈보다 목숨이 달린 문제라서 말이다. 일을 어설프게 하는구나, 최수호. 네 사냥감이 어떤 물건인지 정도는 확실히 알아보도록 해.”

“무슨…”

더 물으려고 했지만 위층에서 문소리와 함께 바쁘게 내려오는 해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녹차.”

뜨거운 물에 녹차 티백만 달랑 넣은 채로 두 잔을 만들어 와서 내놓은 해명이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한 사람과 한 요괴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저씨 이야기요.”

“도령 이야기입니다.”

수호와 백은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남의 뒷담화 했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지 마!”

불평하는 해명을 무시하고 수호가 일어났다.

“전 좀 쉴게요.”

수호는 제 몫의 녹차를 챙겨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멀어지는 동안 계단을 쳐다보고 있던 해명은 문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백은호에게 말했다.

“너희들 대놓고 나를 왕따 시키는데 말이야. 그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 알아? 심각하거든?”

“본인의 오지랖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티백을 위아래로 흔들어 우리며 백은호가 대꾸했다.

“옷에 칼자국을 내오는데 오지랖 떨지 않고 배기겠냐.”

해명이 작업 선반에 놓인 채로 잊힌 수호의 외투를 힐끗 보았다.

“검상 정도야 저와 수련할 때 항상 생기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때는 나도 같이 있었잖아. 그렇다고 저 녀석을 애 보듯이 하루 종일 따라다니라는 거냐. 백은호 너, 수호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모르지? 걔 여동생은 또 어떻고. 힘이 장사거든요. 수리점 왔다갔다만 해도 문이 부서진다고.”

“수리점을 걱정하는 건지 수호를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도령. 도령보다 녀석을 걱정하는 자들이 허락한 일에 나서는 것이 오지랖입니다. 환의 허락 없이 녀석이 움직일 리가 없잖습니까.”

백은호의 말에 해명이 입을 다물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