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돌아갈 곳(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소나무 가지가 우수수 흔들렸다. 3월이면 슬슬 겨울도 끝나갈 때인데 밤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피부에 감기는 바닷바람으로 목덜미에 소름이 오스스 돋자 박광석은 외투 없이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다.
건물 안은 슈트의 재킷을 벗어도 될 정도로 따뜻한 온도에 맞춰져 있어 가끔 생각 없이 나올 때마다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서 옷을 껴입는 대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추운 것보다 호기심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직장으로부터 걸어서 5분쯤 거리에 있는 해안이었다. 이곳에서 5분만 걸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다와 멀어지는데 반대로 직장에서 5분만 걸으면 모래사장과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해변이었다. 그곳에 서면 멀리 수평선과 띄엄띄엄 자리 잡은 작은 무인도들이 보였다.
그러나 박광석이 추운 밤에 바닷가를 걷고 있는 것은 물론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눈보다 귀 때문이었다. 그는 소리를 따라 나온 것이다. 그것도 꽤 묘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휘파람 소리처럼 들렸다. 높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가 유성처럼 꼬리를 끌며 휘이익 울렸다. 한 번이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아도 잘 알 수 없었다. 결국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 소리는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뿐만 아니라 휘파람 뒤로 누군가의 허밍인 것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노래라고 하기에는 멜로디가 없었지만 그냥 소리라고 하기에는 일정한 음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걷다보니 결국 바닷가에 도착한 것이다.
소리는 점점 가깝고 커졌다. 이제는 이따금 “라라라~”라고 노래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닷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직 멀어서인 걸까. 목소리는 어딘지 뿌옇게 느껴졌다. 이불 한 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바닷가를 걸은지 얼마 안 되어서 박광석은 그 묘한 노랫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해변이 잠시 낮은 언덕과 바위 무더기에 끊어지는 지점에서였다. 모래사장이 끝나고 울퉁불퉁한 바위가 일어난 자리에서 노랫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향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3월이라지만 겨울바람이 부는 한밤중에 얇은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옷자락이 감길 때마다 S자를 그리는 몸의 곡선과 원피스 안의 까만 속옷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기는 모래사장이 꽤 훌륭한 바닷가라 여름만 되면 근처에서 비키니 수영복이나 비치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휴가 시즌이면 바닷가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도 대담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많았다. 직장 때문에 5년 가까이 이곳을 오가는 박광석에게 시스루 원피스 정도는 대단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여자의 모습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요염한 데가 있었다. 특히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하얀 팔과 그 팔위에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그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로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 혹은 아예 노래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박광석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바위 바로 옆까지 도착하자 그제야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았다. 달빛 아래에 하얗게 드러난 얼굴을 보자 박광석은 심장이 짓눌린 기분으로 얕은 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달빛이 흐르는 살갗에는 아주 작은 티 하나도 없었다. 크고 선명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면서도 요사했다.
여자의 시선을 받은 박광석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으로 그 눈을 마주보았다. 그 때 여자가 아주 조금, 웃었다. 그리고 바위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이런 추위에 드러내놓고 있으면 피부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하얗고 작은 발이 모래사장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박광석은 아주 잠깐 그 발자국이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여자의 뒷모습에 다시 정신을 빼앗겼다.
그녀는 가는 허리를 조금씩 흔들면서 한발 한발 바다를 향해 걸었다. 박광석이 뒤를 따라갔다. 문득 찬 기운이 발에 스며들자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와 정장 바지 아래쪽까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밀려나 있던 이성이 그를 일깨웠다. 가죽구두가 바닷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든가, 이 옷이 젖으면 야근하는 동안 입을 다른 옷이 없다든가. 그러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일깨우는 순간 앞에서 걷던 여자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박광석을 쳐다보았다. 빛을 조금도 반사하지 않는 까만 동공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박광석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면이 점점 올라와 무릎을 넘고 허리에 닿고 가슴까지 와서 찰랑거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보며 살짝 입술을 당겨 웃는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동굴과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으로, 그리고 그녀를 지나쳐 붉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덥고 습한 바람이 동굴 안에서 불어왔다. 캄캄해서 발 앞에 뭐가 있는지도 보이지 않지만 박광석은 걸음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한발, 또 한발 내딛은 순간, 그의 몸은 갑자기 동굴 안으로 쑥 사라졌다.
“잡아먹힌다고요?”
“시체도 안 나온다니 그런 게 아닐까? 뭐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
“어딘가에 갇혀 있다거나, 냉동식품이 되었다거나, 새끼를 기생시키기 위한 숙주가 되어 있다거나…”
“요새 SF로 취향이 바뀐 거냐?”
해명이 진지하게 물었다.
“학생으로 신분이 바뀐 거죠. 저 개강했거든요? 이제 며칠씩 나돌아 다닐 수가 없다고요. 그런데 이 일 맡으려면 적어도 이틀 이상은 걸리잖아요. 그나마 이틀 안에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수호의 대꾸에 해명이 어깨를 으쓱 모았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는 거지. 너 바다에 가본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은 나냐?”
“저 친가가 바닷가라서요. 수평선 보면서 가슴 뛰는 일 같은 거 없어요.”
“인생 참 삭막하네. 수평선이 아니라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바다 괴물을 보러 가자는 거야.”
‘그건 삭막한 걸 넘어서 냉혹한 것 같은데요.’
해명의 당당한 항의에 수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강의중에 메시지를 보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에 급한 일인가 싶어 전공 수업 빼먹고 달려왔더니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일을 의뢰해 왔다면서 신이 난 해명이 있었다.
해명이라면 좀처럼 수리점을 벗어나지 않으니까 바다에 갈 일도 없을 터라서 신이 난 건 알겠는데
“왜 저까지 데려가요? 바다 괴물 정도는 아저씨 혼자서도 얼마든지 때려잡을 것 같은데요.”
“같이 가면 더 재미있잖아. 기쁨도 두 배. 보수도 두 배.”
“은호 아저씨도 있고.”
“백은호는 애인하고 여행가기로 했단다.”
“그럼 기쁨과 보수를 좀 덜 받는 걸로…”
“그러니까 그게 곤란하다고.”
정말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해명이 말했다.
“난 수영 못한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바다괴물을 잡냐?”
그럼 의뢰를 받지 마시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수호는 참았다.
“나도 집 떠나서 오래 있기는 싫거든. 금요일 저녁에 가서 일요일까지는 꼭 돌아올 테니까. 응? 응?”
“십 년 전부터 나보다 어른이었던 주제에 귀여운 척 하지 마요.”
수호가 인상을 썼다.
“오케이. 그럼 열차표 예약해 놓을게.”
방금 한 말의 어느 부분이 승낙으로 들렸는지 몰라도 해명은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무슨 천왕이 수영도 못해…”
수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결국 이틀 뒤인 금요일 저녁, 수호는 해명과 함께 부산으로 떠나는 기차에 탔다.
열차 안은 한적했다. 해명은 기차 여행도 오랜만인지 한동안 들떠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좁고 긴 열차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식당칸을 구경하고 오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30분이 한계였다. 결국 좁은 좌석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거나 자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저씨. 저한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면서 사람 잡아먹는 바다 괴물을 잡으러 가자는 말만 했거든요?”
멍하니 졸음에 빠지려는 해명을 깨우며 수호가 말했다.
“어, 그랬어?”
‘어, 그랬어는 뭐가 어, 그랬어냐고.’
불평을 삼키며 수호는 인내심을 갖고 수호의 설명을 기다렸다.
“근데 나도 그거 말고 들은 게 없어.”
“…예?”
“가서 듣기로 했지.”
태평한 얼굴로 해명이 말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