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돌아갈 곳(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도 관계는 있을 것 같다…묘한 말이네요. 공범이라는 뜻이에요? 아니면 이용되었다는 뜻이에요?”
수호의 질문에 해명이 어깨를 으쓱 모았다.
“굳이 정하라면 후자? 그건 그렇고. 너도 말해줘야지. 아까 인어가 너한테 갑자기 친절해지던데. 정말 어떻게 한 거야?”
일부러 다시 묻다니 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뭘 어떻게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준 것뿐이죠.”
“원하는 대로?”
모르겠다는 듯이 해명이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느낌 못 받았어요? 자신이 인어라는 이야기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거. 무리와 떨어져서 혼자 인간들과 살고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아닐까 여겼지만, 방을 보고 생각을 바꿨어요.”
“방이 뭐? 그냥 보통 여자들 방이던걸.”
“그 말이에요. 인어의 방이라고 생각될 여지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욕실도요. 넓은 욕조와 바닷물 빼고는 온통 사람이 관심을 가질 물건들 밖에 없었거든요. 인어가 그런 걸 좋아해요? 책을 읽는다든가 컴퓨터라든가 화장을 한다든가.”
해명은 수호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어는 밤눈은 밝은데 빛에는 좀 약할 걸. 책이나 컴퓨터는 물속에서 보는 거라면 모를까. 화장은 당연히 싫어하지. 피부에 그런 거 묻히는 건 안 좋아해. 뭐 화장 안 해도 예쁘니까 아예 할 생각이 없겠지만. 그런데 그러고 보니 방이나 욕실이나 인어가 좋아할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사육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해도 사소한 취미나 작은 물건 한두 개 정도는 가질 자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안명훈이라면 사람보다 인어에 가까운 쪽을 더 좋아할 지도 모르죠. 그런데 결벽적일 정도로 자신이 인어라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공간이었어요.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그래서 그렇게 대해줬어요. 미묘한 차이였지만 대번에 알아차리고 반응할 정도였으니까 어감이나 단어 선택에 그 정도로 민감했던 거예요.”
“호오.”하고 감탄하며 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저씨 생각대로라면 그런 식으로 구분된 사람을 괴물에게 잡혀가게 하는 게 무슨…”
말하다 말고, 수호는 “어어…”하며 조금 놀랐다. 뭔가 알아차렸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호가 그런 얼굴로 해명을 쳐다보자 사람인 것도 같고 요괴인 것도 같은 천왕이 씩 웃었다. 자신의 생각에 그가 동의한다는 것을 알고 수호가 미간을 모았다.
“요괴에게 준 거예요? 그러니까, 요괴가 좋아할만한 사람을?”
“요괴들은 본능적으로 아니까 말이야. 인어의 본능을 이용해서 요괴가 좋아할만한 사람을 골라내 선물해 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 안명훈이 컬렉션에 새로 추가하려는 입이 큰 괴물에게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우리를 불러온 이유가 뭐죠?”
“글쎄 어떨까. 괴물을 물리쳐 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괴물에게 선물로 줄 사람을 찾는 거라기에도 위험부담이 있고. 우리가 정말로 괴물을 퇴치해 버린다거나 하면 곤란하잖아. 그런데도 우리를 불러놓고 괴물퇴치와 부인의 보호를 맡겼다면…”
해명이 말끝을 흐리며 힐끗 수호를 보았다. 평범한 인간인 청년도사는 모르는 체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해명이 말을 이었다.
“그 괴물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 뭐 애초에 그 녀석은 사람을 유인해서 삼키는 일 같은 건 잘 안 해. 그런데도 사람을 잡아먹었다면 이유가 있을 걸.”
입 큰 괴물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투로 해명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괴물이 도대체 뭔데요?”
결국 수호도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해명이 씩 웃었다.
“당로장구 혹은 장구당로(長口當路).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놓았던 모양이야.”
“당로장구?”
수호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 이름은 커다란 입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의미였다. 말 그대로 입이 큰 괴물이라는 것인데, 입을 크게 벌리면 윗입술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는 묘사가 있었다. 그것이 과장이라도 어쨌든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삼킬 수 있는 크기라는 셈이다.
사람을 해치는 괴물은 아니지만 길에 버티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주는 정도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대하면 조용히 물러나며 청의 동자의 모습으로 변해서 그 사람을 돕기도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괴물을 만난 사람의 이야기로는 신숙주가 가장 유명했다.
“신숙주 이야기는 믿지 말고. 만난 적 없거든?”
해명이 투덜거리듯 덧붙였다. 수호는 그의 말에 문득 깨달았다.
“괴물이 변했다는 청의동자가 아저씨였어요?”
“내가 괴물로 변한 게 아니고! 그 녀석 몸 안이 넓고 따뜻해서 겨울에는 지낼만 하거든. 그래서 안에 집을 한 채 지어놓았어. 겨울용 별장이랄까. 가끔 거기에서 지내다 겁 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놀곤 했지.”
과거에 그는 해명도령이었으니까. 열 살 가량의 푸른 옷을 입은, 자라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었던 그를 상상하자 수호는 어쩐지 눈앞의 남자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속세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후로는 그 녀석과 만날 일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다시 봤지 뭐야. 반가웠지만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러 가려고. 그녀석이 대낮에 밖으로 나오면 대소동이 일어날 거야. 뭐 하긴, 요즘에는 사람들 기운도 탁해서 녀석이 잘 안 보이겠지만 또 모르잖아.”
해명은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들떠서 말했다.
당로장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건 해명이 인세에 있어서, 혹은 인간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로장구가 돌아왔다는 건 이제 다시 그가 해명도령으로 돌아갔다는 뜻일까? 수호는 그런 생각을 하다 자신이 예전의, 지금보다 인간에 가까웠던 때의 해명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그 후로 잡담을 나누거나 저택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주집사가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했지만 넓은 식당에 밥을 먹는 사람은 달랑 둘 뿐이었다.
“사장님은 일 때문에 밖에서 저녁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이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정말로 안명훈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집사는 두 사람에게 그렇게 전했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자 해명과 수호는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늦은 시각이라 저택의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다. 담장 근처의 등만 환하게 켜졌을 뿐이다.
두 사람은 저택을 벗어나서 곧장 해변으로 갔다. 아직 밤이면 추운 때라 바닷가에 사람은 전혀 없었다. 먼 곳의 도로에 이따금 차가 지나가고 가로등 불빛이 서늘하게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해변은 쓸쓸할 정도로 어둡고 조용했다. 천천히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전부였다.
“어라….”
그런데 막상 바닷가에 나오자 해명이 난처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녀석이 없는걸. 분명히 저쪽 바다 속에 숨어있었는데.”
해명이 가리키는 곳은 바위가 있는 곳 너머의 가까운 바다였다.
“저 정도 거리라면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지 않아요? 숨을 생각이었다면 더 깊은 곳에 있었겠죠.”
“어…그럼 썰물 때 깊은 데로 가버렸나? 아아, 거기까진 생각 못했네. 미안.”
해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아뇨. 아저씨를 아무 생각 없이 믿고 따라온 제 잘못이죠. 반성하겠습니다.”
“뭐냐, 넌? 기분 나쁘잖아!”
“아뇨. 그냥 진지한 자아 성찰일 뿐이에요. 그보다 당로장구를 찾을 다른 방법은 없나요? 어쨌든 사람을 삼킨 게 사실이라면 그것부터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요. 전에는 어떻게 찾아냈어요? 그 안에 집도 한 채 지어 놨다면서요.”
“산신들에게 물어보면 알려주던걸. 자기들끼리 연락망 같은 게 있나 봐. 가서 물어보고 올게.”
말하자마자 해명은 달렸다. 아마도 가까운 산으로 갈 모양이었다.
‘천왕씩이나 되어서 직접 산까지 뛰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호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방금 대책 없이 해명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참이라 그는 잠자코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주머니 안에서 부적 뭉치를 꺼낸 수호는 그 중 한 장을 골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보통의 괴황지보다 얇고,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나비처럼 오려진 것이었다. 그것을 입 앞으로 가져가서 가만히 숨을 불어넣자 노란 종이의 양쪽이 날개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요기를 따라 날아, 내 길잡이가 되어라.”
수호가 속삭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부적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파닥파닥 날개를 움직이며 나비처럼 날아오르더니 허공을 맴돌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윽고 부적 나비는 방향을 정하여 날기 시작했다. 목을 젖히고 나비를 보고 있던 수호가 그 뒤를 따랐다.
나비는 바닷가를 따라 날아갔다. 해명이 당로장구가 숨어있었다고 말한 바위 근처였다. 그곳에서 잠시 맴을 돌더니 방향을 바꾸어 바위 뒤쪽의 낮은 언덕 위로 날았다. 수호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비라면 직선으로 날아서 언덕을 넘어버리겠지만 수호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일일이 밟아야했다. 급한 발길에 땅이 패며 모래와 흙이 함께 튀었다.
언덕 위로는 해송 한 무리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 사이가 드문드문 멀었고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었다. 여름이었다면 사람들이 이곳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깔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적하니 어두워서 소나무 사이를 달리던 수호는 불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불안한 것은 어둡거나 조용해서가 아니라…
‘맴돌고 있어.’
밖에서 본 언덕은 자그마했다. 나무는 기껏해야 서른 그루 정도. 이 속도로 달리고 있다면 1분도 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나비의 뒤를 따라 그는 이미 몇 분간을 달리고 있었다.
수호는 어두운 바닥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운 모래 위로 발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비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소매 속의 부적을 손끝으로 당겼다.
손가락 사이에 부적이 잡히는 순간 그가 손을 털었다. 노란 불길이 확 오르며 주변이 밝아졌다.
“읏!”
그가 숨을 들이키며 급히 걸음을 멈췄다. 바로 앞에 텅 빈 허공이었다. 그 아래로 파란 바다가, 15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해송 사이를 맴돌다가 언덕의 서쪽 끝, 절벽까지 달려와 버린 것이다. 두어 발만 더 갔어도 절벽 아래에 떨어졌을 참이었다.
한숨을 쉬고 돌아선 순간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누군가 돌아선 가슴팍을 힘껏 떠민 것이다. 잠깐 허공에 떠올랐다가 중력에 끌어당겨져 추락하는 수호의 눈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얼굴을 보며 수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일 리가 없어…
그러나 그의 생각은 뒤통수와 등이 차가운 수면에 충돌하는 순간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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