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돌아갈 곳(8)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와 함께 잡힌 팔에서부터 열기가 솟구쳤다. 그 순간 이 요괴의 또 하나의 능력이 떠올랐다.
‘피해야 해.’
위험을 직감한 본능과
‘다른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묻는 목소리가 교차했다.
대답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하고 있었다. 요괴에게 잡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손은 불길이 오르는 순간 간신히 차돌을 잡았다.
“쳐라, 석!”
외치는 그의 얼굴 앞으로 요괴의 화염이 치솟았다. 묵직해진 차돌이 스스로 손을 떠나 요괴에게 부딪쳤다. 물질과 물질이 충돌하는 소리가 아닌, 기운과 기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터엉 울렸다. 수호는 그 힘에 떠밀려 마당 가장자리까지 굴러가버렸다.
차돌과 부딪친 순간 여자였던 요괴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것은 뭐라 형태를 정할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라면 천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허공에 펼쳐진 채로 하늘하늘 움직이는 모양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나 물을 따라 흘러가는 얇은 비단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차돌을 피하거나 부딪쳐 공격했다.
구르며 긁히고 쓸린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난 수호가 두 장 남았을 뿐인 부적을 재빨리 꺼냈다. 양손에 부적을 들고 손끝을 뿌리자 불꽃과 함께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고작 종이 한 장을 태운 것 치고는 터무니없이 많은 연기였다. 그 연기는 부적이 모두 타서 사라진 후에도 점점 늘어나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정말 구름인 듯이, 시커멓게 두꺼워진 다음 굵은 빗방울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비는 삽시간에 집과 주변을 온통 젖게 만들고도 바닥에 찰랑찰랑 물이 고일 정도로 쏟아졌다. 그것과 함께 요괴의 움직임도 현저히 약해졌다. 차돌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팡팡 두드려대자 마침내 요괴는 힘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힘없이 라고 해도 차돌이 미처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날쌘 속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 녀석은 또 뭐야?”
하늘하늘 날아가는 요괴를 허공에서 휙 낚아채 한 손으로 들고 흔들어보는 해명이 있었다.
“보자기 요괴가 여기는 왜 들어와 있는 거래?”
“그건 황연…아니 됐고,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 온 거예요?”
허겁지겁 뒤따라갔던 수호가 힘없이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해명 때문에 맥이 빠지기도 했고, 연달아 술법을 써서 기운이 바닥이기도 했다.
해명이 요괴를 한 손에 잡은 채로 휘적휘적 다가왔다.
“진조말산 산신이, 네가 바다에 빠진 걸 당로장구가 덥석 삼켰다고 말해주더라고. 방향을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운을 읽기가 힘들었어. 그런데 조금 전부터 갑자기 읽히더라. 너 꼴은 또 왜 그러냐? 새 옷이 엉망이 되었잖아.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여러 가지요.”
피곤한 얼굴로 수호가 대충 대꾸했다. 수호의 상태가 영 안 좋다고 생각했는지 해명은 손에 쥐고 있던 요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보자기. 너 대화가 통하는 거 다 아니까 보자기인체 해도 소용없어. 사람들을 유인한 건 너였지?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잖아, 너.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야?”
요괴가 해명의 손 안에서 하늘하늘 몸부림쳤다. 조금 전까지 차돌과 무서운 기세로 싸우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약한 모습이었다. 몸부림치며 무어라고 말했는지 해명이 요괴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기운을 읽을 수 없었던 거구나. 그건 누구한테 받았어?…뭐? 진짜? 왜?”
수호 쪽에서는 해명의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어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몰랐지만 뭔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찡그린 얼굴로 요괴의 말을 듣고 있던 해명이 문득 손을 폈다. 요괴는 해명의 손에서 풀려나자 하늘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멀리 가지는 않고 그 위에서 흔들흔들 떠다녔다.
수호가 요괴를 올려다보며 미심쩍은 듯 물었다.
“저거 놔줘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당로장구가 보내주기 전에는 못 나가는걸 뭐. 불을 다루는 힘이 있기는 하지만 잘못 썼다가 바다에 토해놓기라도 하면 오히려 제가 위험해질 테니까 섣부른 짓은 안 할 거야.”
요괴의 약점이 물이라는 것은 조금 전 부적으로 불러낸 비를 통해 수호도 확인했었다.
“그보다 날이 새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네가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덕분에 누군가 단단히 화가 났을 거야.”
계획이라는 것은 아마도 당로장구의 포획이리라고 수호는 짐작했다.
실종되었다던 다섯 명이 모두 이 안에 있었고 그동안 해명은 당로장구의 위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명 해안 가까운 바다에 숨어있었는데도 기운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다섯 명의 몸 안에 뭔가가, 분명 주술이나 영안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어떤 것이 있어서이리라.
그러나 조금 전 부적이 변한 불덩어리들이 사람들 몸 안에서 삿된 기운을 태워버렸고 그것으로 인해 방해는 사라진 것이다. 해명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당로장구를 포획하려고 계획하던 자에게는 크나큰 방해였다.
여기까지는 수호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짐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인가.
‘안명훈은 아니야. 단순히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정도의 지식으로는 여기까지 할 수 없어.’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도사 정도가 아니면 안 되었다. 물론 안명훈이라면 그런 도사를 포섭할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는 지금, 어째서 그 도사를 한 번도 못 본 걸까.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일단 직감은 꽤 뛰어난 편인 해명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감쪽같이 숨어서 일을 꾸미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수호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 해명은 실종자들에게 가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거나 몸을 쓰다듬어주거나 하며 기력이 쇠한 그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다섯 명 모두 말끔하게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기분까지 훨씬 좋아져서 해명과 함께 분위기 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이 해명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 해명도 그들을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본능이라는 건 천왕에게도 있는 거겠지?’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아니, 사람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사람도 요괴도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몰랐다.
해명은 건강해진 사람들과 수호를 안내해서 당로장구의 입 쪽으로 갔다. 말랑말랑한 혀 위에 닿자 해명이 먼저 달려가서 벽처럼 보이는 막다른 곳을 통통 두드렸다. 그러자 벽이 위아래로 쩍 벌어지며 푸르스름하니 미명에 잠긴 바깥 풍경이 드러냈다.
그곳은 해명과 수호가 조사하던 바로 그 바닷가였다. 아직 밖은 가로등이 켜진 새벽이었고 찻소리가 멀리서 이따금 들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자 해명은 입을 다문 당로장구를 쓰다듬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준 것도 잘 했어. 다음에 또 보자.”
당로장구는 커다란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고는 몸을 천천히 돌려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확실히 커다란 고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 어두운 길을 걸어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아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안명훈의 뒤를 봐주고 있는 도사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수호가 불안한지 해명에게 속삭여 물었다. 그러나 해명은 태연했다.
“괜찮아. 괜찮아. 당로장구는 주박에서 풀려나 이미 멀리 떠나버렸어. 저 사람들은 이제 있어도 없어도 매한가지라고. 굳이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우리를 불러온 진짜 목적도 당로장구랑 같이 떠나버렸고.”
“진짜 목적이요?”
“보자기 말이야. 안명훈과 계약을 했었대.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안명훈이 사업에 써먹었던 모양인데. 그게 항상 좋은 결과만 불러올 수는 없는 거니까. 이쪽이 요괴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안 만만찮은 상대에게 걸려서 조금 고생하고 있었던 것 같아. 요괴와 헤어지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대.”
해명이 히죽 웃으며 설명해줬다.
“그렇다고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고. 요괴들과의 거래는 그게 무서운 거야. 어떤 사소한 약속이든 일단 하고 나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거든. 그래서 우리를 데려와 저절로 마주치게 했던 것 같아. 실종자들을 찾다보면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퇴치해 버리면 안명훈은 어디까지나 계약을 어기지 않고 요괴를 떼어낼 수 있는 거고. 그런데 요괴를 보냈을 뿐 아니라 당로장구까지 같이 보내버렸으니까 기뻐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의뢰인은.”
“표면상 의뢰 내용은 요괴 퇴치와 부인의 보호였어요. 우리에게 불평할 수는 없겠죠.”
수호가 대꾸했다.
저택은 어느새 가까워졌다. 그들이 오는 것을 cctv로 보고 있었는지 정문이 열리며 김상민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주집사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걸음으로 나와서 돌아온 실종자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섯 명 모두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아마도 주집사와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비밀에 붙이는 대신 두툼한 봉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수호는 예상했다.
김상민은 처음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두 사람을 대했다.
“이렇게 쉽게 찾아내서 데려오다니 놀랐습니다. 경찰은 물론 기자들도 슬슬 냄새를 맡고 있어서 저희도 큰일이었습니다. 사장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수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김상민은 어쨌든 진심이었다.
“사장님은 점심 전에 돌아오실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생하셨을 테니 그때까지 푹 쉬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인터폰으로 주문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숙소인 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필요한 것이라면 물론 해명 쪽에서는 먹을 것, 수호에게는 갈아입을 옷이었지만 둘 다 인터폰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 것이다.
수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누군지는 모르고 있지만 상대방은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입막음을 하려고 하겠지. 혹은 계획을 망쳐서 화가 난 나머지 쫓아올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대로 두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온다면 지금이다.
이 밤이 완전히 끝나기 전, 피로가 채 풀리기 전인 지금이었다.
해명을 힐끗 보자 태연한 체 하지만 약간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수호가 쳐다보자 그도 마주보았다가 픽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옷을 네가 입게 될 줄은 몰랐는걸.”
그가 새삼 수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보니까 확실히 닮은 것도 같고.”
덧붙인 해명의 말에 수호가 눈썹을 모았다.
“누구 이야기예요?”
“그 옷과 부적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 그게 한 150년쯤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오래 보관해야 할지는 몰랐지.”
“그 사람이 누군데요?”
해명이 대답하려는 듯 입을 떼었다가 출입문 쪽에서 들려온 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
먹을 것이 놓인 쟁반을 들고서, 방에 들어선 사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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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만물수리점 - 돌아갈 곳(9)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아니, 사람 같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쪽은 어디까지나 장미토, 요괴인 것이다. 그러나 영안이 어두운 수호의 눈에는 그냥 평범하고 뚱뚱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40대 남성일 뿐이었다.
“야아, 과연 집사님은 다르시네. 마침 딱 뭔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해명이 반색하며 쟁반을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고소한 냄새를 훈김과 함께 솔솔 풍기는 전복죽이 두 그릇, 동치미와 함께 담겨 있었다.
“가볍게 드시고 푹 쉬십시오. 내일 아침은 평소보다 늦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먹으면 아주 오래오래 푹 쉬어버리는 거 아닌가? 죽을 때까지.”
죽 그릇을 내려다보며 해명이 물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지만 수호는 두루마기 뒤편에 숨기고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부적이 바삭거렸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주집사가 통통한 얼굴 속에서 작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해명이 그를 힐끗 보고 씩 웃었다.
“아니 뭐, 딱히 소금 대신 독으로 간을 맞췄다든가 파 대신 독초를 썰어 넣었다든가 전복 대신 복어살을 넣었다든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요.”
해명의 말에 주집사가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주집사의 몸에서는 수호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진한 요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해명의 얼굴에서 슬슬 웃음기가 사라지고 수호는 천천히 뒷걸음해서 주집사와 거리를 벌렸다.
지금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바로 주집사라니. 수호는 놀란 한편 당혹스러웠다.
해명의 말대로라면 그는 장미토였다. 사람으로 변신할 정도로 오래 산 장미토이니 그 지식이라든가 주법에 관한 기술에서도 웬만큼 유명한 도사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확실히 능력은 있었다.
하지만 장미토란 성정이 착하고 온순하며 순진해서 속기도 잘 하는 요괴였다. 남을 속인다든가 해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애초에 그 역시 안명훈의 수집품 중 하나로 보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명이 주집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장미토는 원래 착한 녀석들 아니었어? 누구도 해치지 않고, 도와주는 거 좋아하고, 싸우는 거 싫어하는.”
“그래서 오늘날, 이 땅에 남아있는 장미토는 몇이나 됩니까.”
남자치고는 높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에 어딘지 짐승의 울림이 섞여서 흘러나왔다. 그의 말에 해명의 낯이 조금 굳었다.
“그게 네 변명이냐? 자신을 지키려고 남을 해칠 수도, 돕는 것을 그만둘 수도, 싸울 수도 있어.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정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네가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게 아니잖아?”
“장담하지 마십시오.”
주집사 아니, 장미토가 말했다. 경고하는 말투였다. 해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지? 무엇 때문에 안명훈을 도와 이런 짓까지 하는 거냐. 장미토가 인간의 욕심에 부응하여 요괴를 포획하고 사람을 이용하고 해치려 한 전례가 없다.”
“뭘 안 다는 겁니까, 도사 따위가!”
장미토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장미토는 이렇다 저렇다, 멋대로 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지식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더라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과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헤치며 보는 세상은 분명코 다릅니다.”
“그런 비슷한 핑계라면 자주 듣고 있다만…보통은 인간이 하는 말이었지.”
해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구나.’
수호는 문득 깨달았다.
인어인 연화뿐만이 아니다. 장미토인 주집사도 상황은 그녀와 같았다. 그 역시 자신의 종족과 떨어져 홀로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말과 생각은 장미토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인간에 훨씬 가까웠다. 혹은 안명훈에.
‘아니, 생각해보면 오히려 안명훈은 인간치고 요괴와 비슷하지 않았나.’
수호는 그와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때를 떠올렸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는 이따금 어딘지 상식이 결여되었다고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해명이나 스승처럼, 백은호처럼.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 같지 않은 곳을 발견하고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요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해명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명훈이야말로 인간이되 요괴와 같은 자로써, 그 역시 인간들 사이에 홀로 섞여 있었던 셈이 아닐까. 연화나 주집사처럼.
그 묘한 동질감이 그들 사이의 연대감으로 변한 걸까?
“그래서 우리를 어쩔 셈인데?”
대화하는 것은 포기했는지 해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장미토가 작은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다. 그렇게 저와 약속하진다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요괴와 약속을 하라는 말이었다.
“싫다면?”
“당신들이 실력 있는 도사라는 것은 알겠지만, 도사가 총알도 피할 수 있습니까?”
장미토의 말에 수호가 힐끗 창밖을 보았다. 아직 밖은 어둡고 방안은 환하니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릿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장미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도사라고 총알까지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미리 도술을 써둔 후라면 총에 맞아도 충격을 덜 받는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런 것을 지금 당장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수호는 부적 든 손을 다시금 움찔거렸다. 그의 말이 정말일까. 경호원들이 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나? 불법적으로 구입한 거라면 가능은 하다.
그러니 바깥에 대기시켜 둔 사람이 정말로 총을 가지고 있다면 도사는 잠자코 양손을 번쩍 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왕은 어떨까.
“도사의 일은 도사에게 물어보시고.”
해명이 턱짓으로 수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미토의 시선이 잠깐 수호에게 옮겨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해명에게는 충분한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수호를 당겨 쓰러뜨리는 것과 함께 다리는 장미토에게 날아갔다.
해명은 장미토와 수호의 사이에 있었다. 거리는 충분했다. 다리의 각도가 직각이 되는 뒤차기에 장미토의 큰 몸이 공처럼 날아갔다. 그의 몸은 침대 옆의 붙박이장 문을 부순 다음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뭐야, 뭐야?”
오히려 당황한 쪽은 해명이었다.
“허풍이었어?”
“경호원들이 와요.”
바닥에 엎드린 수호가 나직이 경고했다. 붙박이장이 부서지는 엄청난 소리를 듣고 밖에서 대기중이던 직원들이 게스트 하우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수호의 부적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환한 방안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허둥댔다. 눈이 안 보이는 이상 손에 든 총은 쓰지도 못할 쇠뭉치였다. 장님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해명이 쉽게 제압했다.
장미토는 과연 요괴여서, 해명의 발차기를 제대로 맞고도 기절한 것에 그쳤다. 원래가 격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라 싸울 생각이었다면 도술을 썼겠지만, 장미토는 어떻게 변해도 장미토인 것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까 장미토다운 행동을 하네요.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요기였어요. 마음만 먹었다면 아저씨나 제가 꽤 애먹을 정도로까지는 반항했을 걸요.”
기절한 장미토를 내려다보며 수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말이지,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경향이 있거든? 아무려면 장미토에게 애먹었겠냐?”
해명이 투덜댔으나 그뿐이었다. 수호도 알아차린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둘은 번갈아 잠을 자며 안명훈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과연 점심이 되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호원들이 모두 붙잡혀 묶여 있는 것과 장미토인 주집사가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곧 정세를 파악하고 협상을 시도했다.
해명과 수호도 그 이상의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 봐야 나오는 것은 불법무기 소지 정도였다. 요괴를 포획하려고 계획한 일은 증명할 수 없다. 실종되었던 사람들도 주집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미 포섭되었을 테고.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요괴를 수집하는 일이 잘못인가? 라는 질문에조차 수호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미토와 인어는, 어딘가 비틀어졌을지 모를망정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해명이 보자기라고 부르는 요괴와는 정당한 계약관계였고 당로장구를 사로잡기 위해 사용한 사람들도 죽거나 다치거나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본인의 의지로 그 일을 함구하고 있었다.
해명과 수호는 애초에 약속했던 수리비와 감사의 의미라며 안명훈이 따로 준 봉투를 받고 그 집에서 나왔다. 다시 수리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둘 다 별로 대화는 없었다.
“맞다. 그 사람. 누구였어요?”
수리점에 도착한 후에야 수호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꺼냈다.
“옷과 부적을 준비해 두라고 했던 사람. 누구였어요?”
부적은 모두 일곱장이었다. 다섯 장은 정화부(淨化符)였으며 두 장은 구름을 모아 비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부적. 필요한 것을 필요한 장소에 필요한 만큼만 준비해 둔 셈이었다. 무려 150년 전에.
해명은 수호의 질문에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어 찾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이름은 박권, 자는 모르겠지만 호는 명안(明眼)이었고. 말 그대로 눈이 밝아서 사람들의 미래를 곧잘 점쳤다고 해. 그러다 자신의 미래를 봤는데, 마흔두 살에 병으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는 신선방술에 취미를 붙였나봐. 그래도 염라전 명부는 못 고쳤던지 마흔두 살에 결국 죽었었지. 죽기 4년 전에 당로장구에 들어와서 한 달쯤 놀다 갔어. 옷하고 부적은 그때 부탁한 거고.”
“그 사람은 150년 후의 미래를 보고 그 때부터 준비를 해뒀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 부적은…”
버선 안에서 꺼냈던 부적을 떠올린 수호가 미간을 모았다. 그것은 분명 눈에 익은 필체였다.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재미있잖아. 150년 후를 보다니. 아마 자신의 후생이니까 그렇게 정성들여 준비해 둔 거겠지. 그때 박권이 신선방술을 배운 스승이 누구인지 알아?”
해명이 어쩐지 싱글거리며 물었다. 설마 하고 수호가 쳐다보자 그가 낄낄대는 웃음소리를 냈다.
“환이었어. 넌 말이야. 환생해서 이번에는 눈이 어두운 최수호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도로 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거야.”
수호는 입을 조금 벌리고서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 거였어…’
늘 궁금했었다. 분명 시력이 좋아서 모든 것이 또렷이 보이는데도 어쩐지 늘 어둡고 흐린 기분이 들었던 이유.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을 환과 같은 도사가 제자로 삼아줬던 이유.
해명의 말대로다. 환생의 바퀴에 실려 먼 길을 돌았지만 그래도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전생의 박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스승이 있고 해명이 있었다.
‘그들도 그렇게 될까.’
수호는 문득 생각했다. 장미토답지 않은 장미토. 인어이기 싫어하는 인어도 자신과 같이 돌아갈 곳이 있을까? 있다면 그곳은 분명히 그들을 기억하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는 곳일 것이라고, 수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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