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99화 (199/218)

서천 만물수리점 - 아귀도(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수호는 거절하고 싶었다.

거짓말로 속인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고 잘 모르는 여자의 약혼자 행세를 할 자신도 없었으나, 그보다 이 일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싫었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하기 싫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은영을 소개시켜 준 재호가 꽤 열심을 내며 부탁한 것도 있고, 지인 소개로 들어온 일 치고는 보수도 상당했다. 게다가 하루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거절하지 못한 채, 수호는 약속한 날이 되어 은영의 가족과 함께 월출산 산자락에 있다는 당숙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가족이라야 부모님과 은영, 이렇게 셋뿐이다. 처음 보는 수호와 말을 맞추고 친척들에게 받을지도 모를 질문들을 연습하면서, 그들이 영암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께였다.

차로 갈 수 있는 것은 산성대 입구까지였고, 거기에서부터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야 했다.

“집이 산 속에 있는 거야?”

월출산 가까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숫제 등산을 하게 될 줄은 몰랐던 수호가 은영에게 속삭여 물었다. 은영이 앞서 걷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원래 절이 있던 자리라는데 불이 나서 폐허가 된 것을 당숙이 샀대요. 집을 지으려고요, 처음에는 다들 별장이라도 만들려는 줄 알았는데요, 아예 거기에 틀어박혀서 사셨다는 거예요. 전화도 없고 차도 못 들어가는 곳에 그것도 혼자서요. 일 년에 한 번씩 성묘하러 나오시니까 그때에나 살아있다는 걸 알 정도였다고 해요. 정말 이상한 분이었어요.”

“산 속에 틀어박혀서 어떻게 부자가 된 거야?”

“그거 다 상속받으신 거예요. 원래 당숙의 아버지…그러니까 우리 아빠한테는 할아버지가 되는 분이겠지만, 아무튼 그 분이 갑부셨대요. 그런데 재산을 당숙의 아버지에게만 물려주셔서 다른 형제들이 전혀 유산을 못 받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당숙의 아버지인 큰할아버지랑 형제들 사이가 정말 안 좋았대요. 그런데 큰할아버지도…”

은영은 뭐라고 더 이야기를 하려다 “어머.”하는 탄성을 냈다.

“저기 봐요. 보여요?”

은영이 발돋움을 하며 앞을 가리켰다. 나무 끄트머리 사이로 조금 튀어나온 기와지붕이 수호의 눈에도 보였다. 그런데 얼핏 보이는 추녀마루에 왕궁의 지붕에나 올려질 잡상(雜像), 흔히 어처구니라고 부르는 것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자 제법 규모가 있는 한옥이었다. 은영의 당숙은 혼자서 살았다는데 한 사람이 관리하기에는 버겁지 않나 생각될 정도의 크기다.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 양식의 구조를 가미해 지은 이층집이었다.

이미 다른 가족들이 도착했는지 집안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기 잘 해줘요.”

수호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은영이 말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수호는 한숨을 쉬며 은영의 가족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였다. 훨씬 넓고, 천장이 높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나무와 흙으로 만든 벽은 요새 흔히 짓는 황토주택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 집은 세워진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오래 된 건물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깨끗하게 보존되었으나 역시 낡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넓은 거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은영의 당숙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사촌형제가 있다. 그러니 여기에는 다섯 가족이 모인 셈이다.

은영이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을 보자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촌수를 따지면 6촌 형제쯤 되겠지만 명절에 얼굴정도는 보는 모양이었다. 한차례 인사가 오간 다음 은영이 사람들에게 수호를 소개했다.

팔을 꼭 잡고 다정하게 기대면서 약혼자라고 하자 젊은이들은 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부모들 쪽은 대번에 사나운 얼굴로 바뀌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가족이냐는 둥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이렇게 나와도 되냐는 둥 반대하는 목소리에 은영의 부모가 어차피 결혼할 거라 사위나 마찬가지인 젊은이라며 맞섰다.

약간의 고성과 설전이 오갔으나 결국 아들이 안 왔으니 그 대신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부모들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동안 젊은이들은 서로 눈짓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부터 멀리서 내려오느라 다들 피곤해서 신경이 예민합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쇼. 원래 이런 집안이 아닌데….”

젊은이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성이 민망한 표정으로 수호에게 말했다. 그는 이 가운데 유일한 기혼자였다. 결혼한 지 아직 세 달밖에 안 된 신혼이라고 은영이 알려주었다.

다른 형제들은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가야 했지만 그는 큰아버지의 아들이어서 은영에게는 유일한 사촌 형제이기도 했다.

“도대체 유산이 얼마나 되기에 다들 저러셔? 야, 우리 아빠 화내는 거 봤어? 와, 난 저러시는 거 처음 봐.”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가 저보다 어려 보이는 사내애들에게 소곤거렸다. 사내아이들은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체격 차이라든가 분위기를 봐도 한 명은 10대 중반쯤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어 살 연상인 것 같다.

“몰라요. 한 백억쯤 되나? 그 정도나 되면 모를까. 몇 억 가지고 사람 머릿수대로 나눠봐야 한 집당 얼마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은데.”

쌍둥이 같은 형제 중 형 쪽이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두 형제는 각자 침대와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숙이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큰할아버지가 물려받은 게 워낙 많았다고 하니까. 어른들 모두 굉장히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더라.”

은영의 사촌오빠가 태연한 체하며 설명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열기가 스며서 그 역시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수호는 알아차렸다.

“난 당숙 얼굴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은영이 중얼거렸다. 사촌오빠가 쓴웃음을 지었다.

“괴상한 분이셨잖아.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 년 내내 이런 산속에 틀어박혀 살지 않나. 명절 때도 묘에만 들리고 형제들과는 인사도 나누지 않으셨다니까. 어쩌다 마주쳐도 별로 대화도 없었다고 해. 하긴 선대부터 사이도 별로…”

말하다 말고 그는 수호를 힐끗 보며 입을 다물었다. 집안의 안 좋은 이야기를 남 앞에서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아…하루면 여기에 내일 오후까지 있어야 하는 거지? 이런 데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 아까 둘러봤는데 티브이도 없고 이 집 근처에 다른 사람은 살지도 않는 것 같아. 완전 산속이야. 진짜 아까 등산로 타고 올라오는데 다리 아파 죽을 뻔했어.”

스무 살 가량의 여자가 투덜거렸다. 은영이 웃으며, 뭐라고 위로라도 하려는지 그녀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유리나 사기류의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것에 이어 단단한 것이 땅을 때리는 소리, 지붕으로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연달아 울렸다.

“뭐야?”

사내애들조차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밖으로 나가보는지 문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있던 젊은이들이 거실로 나가보자 어른들 중 몇 명이 밖에 있었다. 누군가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뭐야! 어떤 놈이야?”

소리치는 사람은 은영의 큰아버지였다. 그의 앞에는 산산조각이 난 장독대가 하나, 그리고 그렇게 만든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은영의 큰아버지가 허리를 숙이고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얼음?”

골프공보다 조금 큰 크기의 울퉁불퉁한 얼음덩어리였다.

“여기도 하나 있어요.”

그의 아들이 현관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비슷한 것을 집었다.

“지붕 위에도 떨어진 소리가 났는데. 대체 뭐예요, 그거?”

“얼음이라니까. 니들 중에 누가 한 거지? 응?”

은영의 큰아버지는 젊은이들, 특히 가장 어린 사내애들을 쳐다보며 험상궂게 물었다.

“우리는 방에 있었어요. 누나들이랑 형도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래요.”

사내애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아이참, 오빠는.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애들이 얼음을 만들 시간이 있어. 그거 정말 얼음 맞아?”

“아, 만져 봐.”

휙 던져주는 것을 받은 중년의 여성이 “에그.”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진짜 얼음이네. 이런 것이 어디서 날아왔담? 지나가던 등산객이 장난친 거 아니야?”

“장난도 정도가 있지. 이 크기 좀 봐. 사람 맞으면 어디 하나 부러질 크기 아냐. 어떤 놈인지 진짜 걸리기만 해봐.”

“등산객 장난이면 찾을 수도 없지. 이미 어디로 도망가 버렸겠지.”

“뭘 쓰지도 않을 장독 깨진 거 갖고 그래요. 장도 없는 빈 독이네. 당숙은 이런 걸 뭐 하러 담 밑에다 두셨담.”

“그래. 그래. 액땜 했다 치고 참아요.”

사람들은 다시 하나둘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화가 안 풀린 은영의 큰아버지가 찌푸린 낯으로 마지막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나무 대문을 열고 새로운 손님이 발을 들였다. 그 손님이 은영의 큰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들어서자 가족들의 표정이 일제히 바뀌었다.

새로 온 손님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산에 오르는 사람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손에는 서류가방이 하나 들려있었다. 그는 가벼운 인사를 나눈 다음 가족들 전원을 거실로 모이도록 했다. 그는 바로 죽은 사람의 유언집행자이자 양자인 김한석이었다.

“총 인원은 저를 포함해서 열여덟 명. 맞습니까?”

김한석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나 더 있어요.”

느긋한 목소리가 사람들 뒤쪽에서 울렸다. 젊은이들 축에 끼기에는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어른들 사이에 끼기에는 젊은 남자였다. 아마도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멋을 낸 머리 모양이나 옷 입은 것을 보면 젊어 보이려고 꽤 애쓰고 있었다.

그가 옆에 있는 여자를 끌어당기더니 사뭇 다정하게 허리에 팔을 둘러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여기 안에요.”

“뭐야, 임신했다는 소리야?”

그의 맞은편에 있던 체격 좋은 남자가 물었다. 갑자기 거실 안이 시끄러워졌다.

“뱃속에 있는 아이도 넣는 거야? 그런 말은 없었잖아.”

“안 된다는 말도 없기는 한데…”

“정말 애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증거 있어?”

누군가의 말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초음파 사진이었다.

“5개월이고요, 진단서도 있어요.”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머릿수에 넣어도 되는 거야? 응? 한석이 네가 말해 봐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망자의 양아들이며 유언집행자인 김한석에게로 쏠렸다. 열일곱 명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졌지만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김한석이 대답했다.

“아버지의 사촌형제 다섯 분의 가족이며 이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속권이 있습니다. 태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약간의 술렁거림이 있었지만 더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산은 얼마나 되는 거냐?”

더 중요한 관심사가 있었던 것이다. 김한석이 가방 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사람들의 눈이 잠시 서류에 닿았다가 김한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커다랗게 뜨였다.

“자산 합계는 대략 291억입니다. 정확한 내역은 여기 서류를 참고해 주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291억이라면 간단히 계산해 봐도 한 사람당 15억 이상이 분배된다는 뜻이었다. 머릿수대로 받으니까 한 가정에 적어도 45억. 웃어넘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김한석이 흔들림 없는 태도로 유언장을 공개했다. 내용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유산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머릿수로 나누어 똑같이 분배한다. 단, 집안에 하루 동안 머물러야 하며 하루가 되기 전에 밖으로 나가면 상속권을 상실한다.

“시작 시각은 출입문 위의 시계가 5시가 되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문을 닫고 출입을 통제하겠습니다. 완료 시각은 내일 오후 5시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한 번씩 출입문 위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현재 시각은 4시 58분. 긴 바늘은 정각까지 두 칸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김한석이 유산의 분배와 세금에 관해 알려주는 동안 수호는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분이 안 좋았다.

아까부터 뭔가가 간질거리는 것처럼 자꾸만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 찾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까지 신경이 쓰이면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지금은 눈으로만 찾을 뿐이지만 정 모르겠다면 부적이라도 쓸 셈이었다. 그 정도로 거슬렸다.

두리번거리던 수호의 눈에 자기처럼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 명이 보였다. 쌍둥이 같은 형제 중 동생이다. 그는 김한석의 설명에 관심이 없는지 지루한 표정으로 손에 든 작은 공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설명 안 듣는 거야?”

수호가 슬쩍 다가가서 지나가듯 물었다.

“들어서 뭐하게요. 내 이름으로 돈 들어와 봐야 어차피 엄마 아빠가 가져가실 건데요.”

소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긴 옳은 말이었다. 수호는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소년의 손에 시선이 닿는 순간 사라졌다.

수호의 손이 낚아채듯 소년의 손에서 그것을 빼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번졌다.

“이거 어디서 났어?”

소년에게서 낚아챈 얼음 덩어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수호가 물었다.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소년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밖에서요. 마당에 떨어져 있던데요. 지나가던 누가 던졌다고 하잖아요.”

‘아니야.’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소리가 어디에서 났었지?

“모두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순간 달칵 하고, 시계 바늘이 움직였다.

5시 정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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