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01화 (201/218)

서천 만물수리점 - 아귀도(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집안의 다른 전자제품들은 괜찮은지 확인해 봐. 그리고 물도. 물이 나오는지 보고, 나오면 한 컵 가져와 줘.”

수호의 지시에 은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자 수호는 책상 뒤편의 창문을 열었다.

벽의 위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이었다. 오래되어 낡은 알루미늄 창틀 위에서 문이 뻑뻑하게 밀려나갔다. 창문을 활짝 열고 상체를 내밀어 보았으나 결계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나갈 수가 있다.

‘못 나가게 막은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뭘 한 걸까. 아까의 강렬했던 기운이 그저 핸드폰을 망가뜨리기 위한 것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 바뀌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안이 어두운 수호에게는 알 길이 없었다.

잠시 후 은영이 물이 든 컵을 가지고 방으로 왔다.

“집안에 전자제품은 냉장고하고 전자레인지뿐이에요. 냉장고 안은 시원하고, 전자레인지도 작동하는 것 같아요.”

“두 개 뿐? 티브이나 선풍기 같은 것도 없어?”

수호의 물음에 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층까지 다 확인했는데 없었어요. 그리고 여기, 물요.”

은영이 내민 유리컵 안에는 맑은 물이 찰랑찰랑 담겨 있었다. 수호가 그것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았다. 눈으로 보기에 깨끗하고 약간의 물비린내가 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수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도로 뱉었다.

“왜 그래요?”

은영이 긴장하며 물었다.

“상했어. 썩은 물이야.”

수호가 침을 뱉어 입 안을 씻어냈다. 산에서 수련할 때는 물만 마시며 며칠을 보냈던 때도 많았다. 물이라면 땅 속에서 갓 솟아나 감로처럼 단 것에서부터 비온 것이 몇 달 고인 것까지 안 먹어본 것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수도에서 바로 받아 온 걸요.”

물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으니 상수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하수인 셈인데 가뭄도 아니고 산속 깊은 이런 곳에서 지하수가 상했을 리는 없었다. 물을 탱크에 보관해 두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 물은 지나칠 정도로 맛이 안 좋았다.

봄이지만 아직 덥다고 할 날씨는 아니다. 겨울에서 봄까지 안 쓴 채로 몇 달을 탱크 안에 담겨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려면 물탱크를 봐야 하겠지만 지금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고.

그때 거실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가져올 때 확인 안 했어?”

“뭘 확인할 게 있어요. 마트에서 산 거 그대로 싣고 왔는데. 누가 박스 안을 뜯어보나? 주는 대로 가져오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냄새도 안 났어? 거기는 어떻게 이런 걸 팔아? 제정신이야, 그 사람들?”

아마도 오는 길에 샀을 과일박스를 두고 벌어진 소동이었다.

“큰어머니가 귤을 사왔는데 박스를 열어보니까 완전히 썩어 있었대요. 곰팡이 나고 썩은 물 뚝뚝 떨어지고 난리가 아니에요.”

은영이 와서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조금 전 수돗물이 썩었다는 말을 들은 후라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이 얼룩져 있었다.

“너도 아까 올 때 가방에 먹을 것 챙겨오지 않았어? 그거 확인해 볼래?”

수호의 말에 은영이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울상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오빠. 어떡해요. 음식이랑 과일이랑 완전히 다 썩었어요. 분명히 오늘 아침에 엄마하고 제가 같이 만든 거예요. 가방도 이층의 난방이 안 되는 시원한 방에 뒀고요. 그런데 꼭 한 달은 방치해 놓은 것 같이 상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봐. 먹을 것을 가져왔는지, 가져왔다면 무사한지.”

은영이 시키는 대로 거실로 갔다. 잠시 후 거실에서 중년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캐묻고 다니는 거니? 보니까 풀 방구리에 쥐새끼 드나들듯이 제 남자친구 있는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말이야. 왜? 네 남자친구가 그러라고 시키든? 뭐가 그렇게 궁금하대?”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니까 그렇잖아요. 고모는 안 이상해요? 사람들 핸드폰이 갑자기 다 고장 나질 않나. 멀쩡하던 음식이 썩어 있질 않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고 있잖아요. 난 무서워 죽겠다고요.”

여자의 말에 대항해 은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끌고 가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그래? 그렇게 무서우면 너나 네 남자친구랑 같이 나가지 그러니? 여기서 누가 죽는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집안에 남아있는데?”

그리고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은영의 어머니가 말리는 소리와 누군가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는 뒤섞여 들려왔다. 잠시 후 은영이 화가 나서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다들 상대를 안 해줘요. 고모는 저렇게 나무라고. 하지만 다른 식구들도 짐 가방이 꽤 크거든요. 분명히 음식을 가져왔을 거예요. 하루 동안 집에서 못 나간다고 했으니까요. 먹을 거 마실 거, 다 챙겨왔을 거예요.”

은영의 말을 들으며 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멀쩡하던 물건들이 고장 나고, 물과 음식이 썩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위협이 되는가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느낄 괴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핸드폰이 없어도, 음식이 없어도 하루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큰돈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낼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이 죽을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정도로 끝나지는 않겠지.’

그것이 문제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어떤 괴이한 일이 또 생길 것인가.

그러나 수호의 걱정과 달리 늦은 밤이 되도록 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신경전 벌이는 것도 지쳤는지 가족들끼리 뭉쳐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는 서재를 포함해 다섯 개의 방이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방을 차지해서 은영의 가족은 거실에 남았고 유언집행자인 김한석도 갈 곳을 못 찾았는지 거실에 있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동안 수호는 잠들지도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밤을 새웠다. 만약을 대비해 차돌을 거실에 남겨두고 부적 하나를 소비해 2층도 감시하고 있었지만 허탈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누군가 설사라도 생겼는지 밤중에 몇 번이나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어떤 밤을 보냈는지 몰라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서로 마주쳐도 말을 나누는 일 없이 지나쳤다. 그나마 씻거나 용변 때문에 욕실을 드나드는 것 외에는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정오 가까워질 때까지, 열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집안은 말소리도 별로 없이 조용한 채였다. 그러다 처음으로 대화가 오가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 거실장 위에 놓인 술병을 꺼냈을 때였다.

그것은 길쭉하고 커다란 유리병이었다. 노르스름한 액체 안에 도라지가 빼곡하니 들어있었다.

“이거 당숙이 담그신 건가?”

술병 안을 들여다보며 물은 사람은 체격이 건장한 중년 남성이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김한석이다. 그가 술병을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사셨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아들인데 그런 것도 몰라?”

타박 같은 대꾸에 김한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양자이지만 아들이라기보다는 후원받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같이 산 적도 없고 자주 만나지도 않았고요. 뭐 전 친어머니도 계시니까요. 저희 집은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사정이 안 좋았고 양아버지는 자식이 없어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지원받는 대신 호적에만 올렸을 뿐 사는 건 따로였어요.”

“아아, 그런 일이 가끔 있지. 난 또…”

대화는 그렇게 끊어지는가 싶었지만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은영의 당고모가 술병을 보고 다가오면서 다시 이어졌다.

“뭐야? 이거 인삼주야? 아니, 도라지구나. 어머, 도라지 실한 거 봐. 이거 자연산인가 보다. 한석아, 이거 먹어도 되니?”

그녀의 질문에 술병을 내려놓았던 남자가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모처럼 식구들 모였는데 술 한 잔씩 하는 것도 좋지. 술 한 병쯤은 괜찮지 않냐? 뭐 별 것도 아니고 담근주 한 병 열자는데.”

말은 질문이었지만 손은 술병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김한석도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다른 분들도 괜찮다고 하시면 다 함께 한 잔씩 마시는 것도 좋겠지요.”

사람들은 금세 한자리에 모였다. 잔이 부족해서 밥그릇과 국그릇까지 가져왔지만 다들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왜 두 잔만 줘요? 용진이하고 용석이도 마셔야죠.”

“쟤들은 미성년자잖아.”

“어머. 부모가 괜찮다는데. 애들 것도 줘요.”

“그런데 임산부가 술 마셔도 되나?”

“한 잔 정도는 아무 문제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니 각자 한 잔씩의 술을 받으려고 자신의 컵과 그릇을 들이밀었다. 그럴 법도 했다. 이들 모두 어제 점심 이후로는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이제 정오가 넘었으니 거의 24시간 동안 굶은 셈이다. 게다가 여기에 들어온 후로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을 것이었다.

도라지의 향기로운 냄새가 퍼지자 너도나도 모여드는 것이 당연했다. 은영도 침을 꼴깍 삼키며 그쪽으로 가자 수호가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먹지 마. 집안의 음식이 모두 썩었는데 저 술만 무사한 게 의심스러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하며 은영을 끌어당기자 술을 마시려던 사람들이 수호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은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네. 먹기 싫으면 댁이나 먹지 마쇼! 꼴보기 싫게 어제부터 재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아 저 사람 내보내면 안 되는 거야? 아직 결혼도 안 해서 어차피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큰 소리로 불평하자 은영의 부모가 도끼눈을 떴다.

“오빠. 들어가요.”

은영이 허둥지둥 수호를 방안으로 떠밀었다. 어머니가 화난 얼굴로 뒤따라 왔으나 은영이 문 앞을 가로막고 비키지 않자 욕설을 퍼부은 다음 가버렸다.

은영이 속상한 얼굴로 서재에 들어왔으나 수호는 위로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5시까지는 4시간 정도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 별다른 낌새가 없다. 도라지 술이 수상하기는 했어도 술 한 잔을 마셨다고 취기가 돌아 이성을 잃을 리는 없었다. 떠나도 되는 시각이 다가오는데 아직까지 아무 일이 없다. 그것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나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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