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게임의 법칙(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벨 귀신의 소문이 퍼질수록,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할수록 찬희의 힘도 실제로 강해진다는 거야?”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공포의 힘이지요. 달리 말하면 사념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발현하는 저주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념도 강해지니까요.”
“만일 그런 식으로 점점 알려져서 사람들이 모두 벨 귀신의 이야기를 믿게 되면?”
해명이 묻자 백은호는 단정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만일 그런 때가 온다면 그녀는 이미 흉신(凶神)으로, 요괴를 벗어나 신의 권속에 드는 셈이겠지요.”
오싹한 이야기였다.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는 두려운 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신의 권속에 든다는 것은 물리치거나 막을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상위의 권력은 오직 세계의 규칙뿐인 존재.
그런 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 대표적인 존재였다. 누구도 반길 리가 없고 누구에게도 도움 될 리가 없는 무서운 존재지만 신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숨거나 피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그런 신이 하나 더 생겨난다. 그렇게 생각하자 수호는 공기가 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라면 옛날에 비해 알려지는 것이야 빠르겠지만 믿는 것은 훨씬 느리지요. 그런 상황까지 가는 일도 없고, 그 전에 퇴치당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보다는 시도하는 요괴가 아예 없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찬희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는 인간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인간의 생각은 아직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투덜대듯이 말하고 백은호는 자신의 잠자리로 갔다.
찬희를 막기 위해 어떻게 할 생각인지, 동생인 찬영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지만 백은호가 잘 준비를 하자 해명도 제 자리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어쩔 수 없이 수호가 물었다.
“어쩌긴 뭐. 동생을 데리고 있으면 결국 찬희를 만나볼 수 있겠지.”
해명이 대꾸했다. 그답게 단순한 생각이다. 하긴 해명도령이니까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 찬희에게 희생당할 사람들은요?”
“그럴 틈이 없게 최대한 조이면 괜찮을 것도 같고 말이야. 백은호, 그건 네가 맡아줘. 구미호가 쫓아다니면 벨 귀신 정도라도 도망치기 바쁘겠지.”
해명의 말에 백은호가 귀찮은 듯 물었다.
“쫓아다니다 잡으면 해치워도 됩니까?”
된다고 하면 전력으로 추적해서 재빨리 없애고 집에 가겠다는 표정이었다.
“야아, 성의 없이 그러지 마라. 나도 한 번은 보고 싶단 말이야. 다른 짓 못하게 감시하면서 수리점까지 유도하는 정도로만 해줘.”
여자와 아이에게 동시에 약한 해명은 아무래도 어떻게든 찬희를 만나서 좋은 쪽으로 해결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건 꽤 오래 걸릴 것 같은 일인데, 아무쪼록 청구서 받을 때 불평하지 말아주십시오.”
시큰둥한 태도로 백은호가 승낙했다. 해명이 힘없이 웃었다.
그 뒤로 별 대화 없이, 잠시 후에는 둘 다 자는 기색이었다. 반면 수호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해명과 백은호가 온 시점에서 이제 문제는 그들 손에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쩐지 그것조차 불편한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을 생사의 경계까지 몰아붙였던 찬희가, 그들 사이에서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거나 동정할 여지조차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 쪽은 수백 년을 산 여우 요괴, 다른 한 쪽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되 신인 존재다.
그에 비해 수호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역시 안 되는 건지도 몰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어서지 못하는 건지도…’
마른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찬희를 떠올리며 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싫은 기억이지만 한 번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되살아났다. 그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모습과 무서운 힘으로 팔을 당기던 순간을 기억하자 왼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꽉 잡았다.
“몸은 완전히 나았어.”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해명이 수호에게 말했다.
“내가 낫게 할 수 있는 건 몸뿐이지만 말이야.”
덧붙여 말하며 해명이 수호 쪽으로 돌아누웠다.
“잠깐 기억난 것뿐이에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수호가 대꾸했다.
“응. 어떤 건지는 알아. 나도 인간이었던 적이 있으니까.”
마치 지금은 아니라는 듯이 해명이 말했다. 수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해명이 스스로 말해주고 있었다. 몇 번이나 물었지만 농담으로 이리저리 피하면서 대답해주지 않던 것을. 어째서 마음이 바뀌었을까 생각하면서도 수호는 곧장 물었다.
“유하 누나는 어떻게 된 거예요?”
“가장 궁금한 게 그거냐? 참 일관성 있네.”
해명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픽 웃어버린 다음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에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것이라고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 것이 되어줘야 한다고. 어쩌면 신인 내게 사랑받는 것은 인간으로써 행복한 일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는지도 몰라. 그런 오만이 유하를 괴롭게 만들었어. 오랫동안. 하지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겨우 깨달아서, 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둔거야.”
캄캄한 방안에서 해명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유하는 없어. 요괴의 몸으로 재가 되어서 사라졌으니까. 영혼조차 남지 않았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했더니 나를 떠난 거야. 나는 채인 주제에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찌질한 남자의 전형이지 않냐?”
유하가 재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수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영혼조차 남지 않았는데 기다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렇지?”
멋없이 대꾸한 다음 해명이 조금 웃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니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거지만. 잠시나마 인간이었던 나도 아직 인간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네. 기다리는 건 내게 남아있는 인간의 마음이 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거나 인간 핑계 대지 말아요.”
수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둘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에야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찬영을 데리고 그 집을 떠났다. 백은호는 그들을 수호의 차가 있는 곳까지만 데려다 주고 나서 혼자 찬희를 찾아 갔다.
수리점으로 돌아가는 수호의 차에서 해명은 찬영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더니, 도착할 때쯤에는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 게임을 할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어제의 두려워하던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그들을 수리점에 데려다 놓고 학교로 가자 경율이 어떻게 알았는지 득달같이 쫓아왔다.
“내가 형 때문에 명이 줄겠어요.”
경율의 말에 수호는 태연히 대꾸했다.
“넌 천수 누릴 테니 걱정 마라.”
“형이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리네요. 어쨌든 말한 거 확인해 봤어요. 형 말대로 손 탄 흔적이 있던데요. 메일로 위장한 해킹 프로그램인데 그걸로 벨을 울리게 만들고 화면이나 소리를 조작한 거예요. 거기까지는 짐작했던 거지만 특이한 게 하나 나왔어요. 이미지파일인데 뭔지 알겠어요? 문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고. 이런 게 몇 개 들어있더라고요.”
말하며 경율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들여다보던 수호의 눈이 커졌다.
“이거 어떻게 기동하는 거야?”
“원격으로요. 단순하니까 화면에 그림만 띄우는 거면 컴퓨터 필요 없이 핸드폰 하나만으로도 가능할 거예요.”
“거리는?”
“블루투스나 마찬가지에요.”
“컨버터 사용해서 통신거리를 늘릴 수도 있다는 거네.”
“예. 프로그램만 잘 짜 놓으면 통신거리 내에서 여러 대를 동시에 띄울 수도 있어요. 물론 마킹이 된 핸드폰만 해당하는 거지만.”
“네 핸드폰 좀 빌리자.”
수호는 경율이 내놓는 핸드폰을 받자마자 통화 버튼을 누르는 한편 뛰기 시작했다. 신호가 울리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번호를 바꾸어 다시 통화를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다.
“둘 다 뭐하고 있는 거야!”
분통을 터뜨리며 수호는 난폭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몇 번이나 교통신호를 위반하면서 20분 만에 수리점에 도착한 수호가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차를 세웠다.
그곳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도로는 한적했고 길가의 건물들도 조용했다. 아직 하교할 시간이 아니어서 아이들도 안 보이고 천변을 천천히 걷는 사람만 몇 있었다. 수호는 수리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그것에 익숙해지자 작업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선반과 거기 놓였던 물건들이 부서진 채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벽에도 바닥에도 깨지고 부서진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업장 한가운데 허공에, 마치 매달린 것처럼 고정되어 있는 해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공중에 결박되어 있었다. 그 몸을 밧줄처럼 묶고 있는 것은 뱀이었다. 살아있는 뱀이 몇 마리나, 꿈틀거리며 사지를 조이고 있었다.
수호를 보자 해명이 얼굴을 찡그렸다.
“수업 듣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니야?”
“배울 게 많은 사람은 아저씨 같은데요.”
대꾸하면서 수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으로부터 비스듬히, 벽을 향해 이동하자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해명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있는 여자의 마른 몸이.
그녀는 마치 해명의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달라붙어 있었다. 수호가 해명의 측면에 서자 그녀는 고개를 조금 돌리고 노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계유생 최수호.”
여자, 찬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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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만물수리점 - 게임의 법칙(8)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실력 좋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반대편으로 이동하며 수호가 말했다.
“그 아저씨가 꽤 허술해 보여도 상대하면 의외로 까다로운 타입이거든.”
“응. 잡아놓았지만 언제 풀려날지 몰라.”
여자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해명의 등을 기어올랐다. 마치 벽을 타는 거미 같았다. 나뭇가지처럼 가는 손가락으로 해명의 팔을 잡으면서 그 위를 살금살금 기어갔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해명의 어깨까지 올라간 그녀가 거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나뭇가지에 도사려 앉은 까마귀처럼 보였다. 거기에서 수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노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너를 먹을 시간은 충분할 거야.”
사무실에서의 기억이, 머리보다 먼저 몸에서 되살아났다. 수호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들어야 해. 계속 묻는데 이 사람은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 곤란했어. 최수호, 혹시 네가 알고 있어? 내 동생 어디에 있는지.”
해명의 꼴을 봐서는 묻기만 한 것 같지 않았다. 긁힌 상처 정도지만 꽤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수호가 태연히 대꾸했다.
“나도 찾는 요괴가 하나 있는데. 잘난 체하는 잘생긴 여우 요괴 아저씨 어디 있는지 혹시 알아?”
키잇 -
날카로운 숨소리가 찬희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그녀로부터 피부가 간질거릴 정도로 농도 짙은 요기가 느껴졌다.
“여우 주제에.”
그녀가 나직이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백은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꽤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금세 부드러워졌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은 변화였다.
“그 여우는 여기 못 와. 내가 가둬버렸거든. 거기에서 절대 못 빠져나와.”
“아아, 봤어. 아수라 봉인의 다섯 가지 포승. 핸드폰을 이용해서 결계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해봤는데. 정말 대단해.”
수호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찬희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너, 멀리 도망갈 줄 알았는데 다시 와줬네.”
“끈질긴 남자 싫어해?”
“너라면 좋아.”
입술을 핥으며 찬희가 대답했다.
“너라면 말이야. 먹기 전에 내게 넣게 해줄 수도 있어. 남자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찬희는 다시 해명의 몸을 타고, 이번에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해명의 몸에 붙어서 거꾸로 기어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바짝 마른 몸 때문에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저기, 공공장소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말은 말아줬으면 하는데요.”
해명이 결박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 직원은 말이야, 아직 숫…”
“시끄러워요.”
해명의 말을 자르며 수호가 손목을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확 터졌다. 번개가 친 것처럼 한 순간 작업장이 밝아졌다. 그때 해명의 몸에 붙어있었을 찬희의 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생각한 찰나에 몸이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휙 쓸려갔다.
벽에 부딪치고 바닥에 나뒹군 후에야 강한 힘이 옆구리를 후려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때였다면 갈비뼈와 척추가 함께 부서졌을지도 몰랐다. 조금 전 사용한 부적으로 강화된 몸인 덕분에 뼈나 근육에는 문제없었다.
“이 정도로는 안 되나? 조금은 다칠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의 왼쪽에서 나타났던 찬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죽일 정도로 후려쳐 놓고 조금 다치게 할 생각이었다면 그녀도 이미 부적의 효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 부적이 좀 쓸 만해.”
수호는 잠깐 숨이 막혀서 콜록거리면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찬희가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아프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럼 이건 어때?”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세운 다음 앙상한 다리를 한껏 벌렸다. 본래의 색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지저분해진 낡은 원피스가 벌어지는 다리를 따라 밀려 올라갔다. 컴컴하게 그늘진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이 좌우로 미끄러지며 기어 나왔다.
그것을 본 수호가 본능적인 혐오로 오싹 떨었다.
기어 나온 것은 뱀이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까만 비늘을 반짝거리는 먹구렁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나온 뒤로는 자기 증식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뱀들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늘어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마리가 일제히 수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뱀들은 빨랐지만 수호 쪽이 더 빨랐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바닥을 휩쓸었다. 달려들었던 뱀들이 불길에 휩싸여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뱀의 수가 너무 많았다. 불길이 채 다 태우기도 전에 더 많은 수의 뱀들이 몰려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부적을 사용할 때까지도 찬희의 주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뱀의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저씨 언제까지 쉬고 있을 셈이에요!”
부적을 쓸 때마다 한걸음씩 물러나던 수호가 외쳤다.
“독촉하지 마라, 인마. 집중력 떨어진다.”
해명의 대꾸가 들린 순간 수호의 등은 벽에 닿았다.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염화부도 동이 났다.
공격할 무기가 떨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뱀들이 일제히 수호를 향해 몰려왔다. 마치 검은 파도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수호는 주머니 속의 차돌을 움켜쥐었다. 뱀의 파도가 코앞까지 닥쳐온 순간이었다. 지잉 하고 귀가 울렸다. 아니, 몸 전체를 음파가 쓸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미처 뭔가의 조각이 작업장 사방으로 뿌려졌다.
“키앗!”
찬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아 정말, 요괴의 도술이라니 두 배로 골치 아프네.”
어느새 바닥에 내려온 해명이 붉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불평했다. 흩어진 것은 그를 묶고 있던 뱀의 파편이었다.
작업장 안을 한바탕 쓸고 지나간 힘의 파문에 밀려났는지, 찬희의 뱀들은 배를 드러내며 나뒹굴었다가 한 마리씩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찬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찬희를 보며 해명이 빙긋 웃었다.
“그런데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준비 없이 계속해서 도술을 쓸 수 있는 건 아닌가 보지? 나한테 다 쏟아 부어서 그런지 슬슬 밑천이 딸리는 것 같다?”
해명이 찬희에게 한 말에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만큼의 인과가 없어서 그래요. 저녀석, 저주술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도술 지식에 밀교와 민간주술이 뒤섞여 있어요.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과가 부족하면 술법을 쓸 수 없는 거예요. 보응을 피하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응.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찬희가 말했다.
“얼마든지 넣게 해줬는데 실컷 즐기고 나서 하찮은 것만 가르쳐줬어.”
그러나 그 하찮은 것만으로 그녀는 백은호를 따돌리고 여기에 온 것이다. 수호는 새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식으로 여자를 이용하는 놈들이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도술은 그런 식으로 배워서는 안 돼. 이 길은 그렇게 걷는 게 아니야.”
수호의 말에 찬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길은 피투성이인걸.”
그녀가 천천히 둘을 향해 걸었다. 발을 떼자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붉은 덩어리가 철썩 떨어졌다. 핏덩어리 같기도 하고 살덩어리 같기도 한 것이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한 덩어리씩, 그녀는 붉은 자취를 남기며 다가왔다.
“내 동생은 어디에 있어? 그 애를 줘.”
다가오며 그녀가 말했다.
“너는,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해명이 나직이 물었다. 찬희는 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노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열다섯 살이 되어도 죽지 않으면, 그 몸을 내가 빼앗아 가려는 거야. 분명히 나쁜 몸이 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
“열다섯 살이 되면, 나쁜 거야. 외삼촌이 그랬어. 내 몸이 나쁜 거라고. 하지만 외삼촌은 나쁜 내 몸을 좋아했는걸. 날마다 나를 만졌어. 그리고는 내가 잘못한 거라면서 때렸어. 하지만 요괴가 되니까 나를 만지지 않았어. 이제 이 몸은, 나쁜 몸이 아니니까.”
찬희는 말하며 옷깃을 벌려, 비늘로 덮인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검은 광택이 흐르는 어깨와 팔, 흰 비단을 씌운 것 같은 가슴과 배는 찬영의 변해가는 몸과 거의 비슷했다.
“내 동생을 줘.”
찬희가 속삭였다.
“그 애를 먹고, 너희를 먹고, 그리고 계속해서 먹을 거야. 나는 배가 고파…”
찬희가 갑자기 움직였다. 수호는 날카로운 이가 돋아난 그녀의 입이 쩍 벌어진 채 달려드는 것을 봤다. 봤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뱀 대가리처럼 달려든 입이 수호의 코앞에서 꽉 맞물렸다.
찬희의 입은 해명의 팔을 물고 있었다. 송곳니 끝이 피부 안으로 파고들면서 붉은 자국이 번지기 시작했다. 팔을 내밀어 공격을 막은 해명이 그대로 찬희에게 몸을 부딪쳤다. 힘에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던 그녀가 몸을 틀었다. 비쩍 마른 몸이 마치 뱀인 것처럼 휘어져 해명을 조였다.
“쳐라, 석!”
수호의 명령에, 도술로 실제보다 훨씬 커진 차돌이 찬희에게 날아갔다. 차돌의 공격은 빨랐지만 찬희는 더욱 빠르다. 피할 수도 있었으나 해명이 그것을 방해했다.
“캬앗!”
차돌에 맞은 찬희가 마른 몸을 들썩였다. 달아나려는 듯이 몸을 빼는 그녀를 해명이 더욱 단단히 얽매었다. 화가 난 찬희가 해명의 팔을 물어뜯었지만 소용없었다.
“넌 너무 빨라서 말이야. 놓치면 다시 못 잡을 것 같거든. 수호! 어떻게든 포박할 수 없어?”
“하고 있어요.”
이미 꺼내서 손가락 사이에 끼운 부적을 흔들며 수호가 대답했다. 부적에서 불꽃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흘러가더니 찬희의 주변을 에워싼 다음 다섯 개의 문양이 되어 허공에 새겨졌다.
그것을 본 찬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수호에게 돌아갔다.
“너…”
“핸드폰으로 된다면 이 변환술로도 될까? 아수라 봉인의 다섯 가지 포승.”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다섯 문양에서 오색의 포승이 날아들었다. 포승은 해명을 그림자처럼 지나쳐 찬희의 몸에 닿자 힘껏 조여졌다. 다섯 개의 포승에 묶인 채로 찬희가 쓰러졌다.
옛이야기 속에서 아수라를 사로잡았다는 이 포박은 요괴와 악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 후 포박의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서 찬희를 꼼짝 못하게 묶고 있는 동안 잔뜩 찌푸린 얼굴의 백은호가 수리점에 도착했다. 자신이 포승에 당해서 지체하는 동안 찬희가 수리점에 온 것을 알고 백은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찬희를 무진에게 데려다 주라는 해명의 말에 백은호는 순순히 따랐다. 전 같았으면 쓸데없는 짓이라며 불평했을 터였다.
“저 애는 스스로 요괴가 되었어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백은호가 떠난 다음 수호는 해명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걸.”
열두째 하늘의 천왕은 무책임하다 싶게 대답했다. 그가 수호를 돌아보며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병자를 벌하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낫기를 바라자고.”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찬영이는 어디에 숨겨놓은 거예요?”
해명이 말없이 창고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본래는 창고로 들어갈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도깨비들에게 맡기고 창고를 이 집에서 분리해 버렸어.”
“도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하는 거죠?”
“글쎄. 그냥 되던데.”
“짜증난다…”
수호는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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