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육대성승(天佛六大聖僧)
하나의 지하폐전(地下廢殿).
전내(殿內)에는 죽음 같은 무거운 고요가 질식할 듯 흐르고 있었다.
칠각석탁(七角石卓) 주위에는 육노일녀(六老一女)가 엄숙히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육노(六老)는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승(老僧)이었다.
그들의 신색은 한결같이 탈속비범했다.
일신에는 은은한 법광(法光)이 어려 있고, 눈동자의 혜광(慧光)은 부처의 것 그대로였다. 나이는 추측할 수조차 없어 모두 백 세가 훨씬 넘어 보였다.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일녀(一女)의 존재는 매우 특이했다.
그녀는 일신에 흑색승포(黑色僧袍)를 입었고, 머리에는 방립(方笠)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다.
방립으로 가려진 얼굴은 조금도 보이지 않으나 젊은 여승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여승에게서 풍기는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할까?
소박한 승포와 방립으로 가려진 몸에서 풍기는 기이한 염기(艶氣).
여승이 어찌 그토록 짙은 염기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단순한 염기만이 아니었다.
무한히 성결하고 고아한 기품(氣品)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천상의 선녀(仙女)처럼 지고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뿐인가? 일신에는 측량할 수 없이 심오한 혜지(慧知)까지 깃들어 있는 듯하니 진정 무한히 신비로운 여승임에 틀림이없었다.
여섯 노승과 흑의여승은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고요 그 자체였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한 노승의 입이 무겁게 열려졌다.
"우리 천불육대성승(天佛六大聖僧)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소이다."
오오, 분명 천불육대성승이라 했는가?
<불정광음선사(佛頂曠陰禪師)>
<무무공공신승(無無空空神僧)>
<묵주불존(墨珠佛尊)>
<파계광승(破戒狂僧)>
<대비대법사(大悲大法師)>
<화세존(華世尊)>
그들은 바로 지난 이백 년 이래 중원불문(中原佛門)이 배출한 최고기승(最高奇僧)들이다.
그들의 정법불력(正法佛力)은 하늘을 움직일 정도라고 했다.
천기(天機)를 통달한 반신인(半神人)들. 그들은 지난 백 년 동안 무림에는 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여기에 모두 모여 있는가?
침묵을 깨뜨린 불정광음선사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사사혜니(絲絲慧尼)에게 우리의 모든 공력을 전해 주어 밀비천전으로 보내는 것이오."
밀비천전이라고 했는가?
삼백 년 전에 원세무황 상관무륭이 건립한 뒤 중원이 배출한 아홉 명의 무신이 은밀히 들어가 있는 곳.
천불육대성승이 세상이 모르는 그 밀비천전의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인가?
대나무처럼 앙상한 무무공공신승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노납의 의견도 같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공동전인(共同傳人)인 사사혜니뿐이오."
묵주불존이 무무공공신승의 말에 동의하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납도 사사혜니만이 그 중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소. 아미타불……."
<사사혜니>
흑의여승을 일컫는 말이 분명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내력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녀가 밀비천전으로 가서 해결할 증대사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불정광음선사가 결연히 말했다.
"그러면 천불미극전진금법(天佛彌極傳眞禁法)을 시행하도록 합시다!"
이어서 그는 사사혜니를 향해 엄숙하게 명했다.
"사사(絲絲), 준비를 갖추어라!"
흑의여승 사사혜니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석탁 위로 올라갔다.
몸을 일으킨 그녀의 체형은 의외로 늘씬하면서도 풍염했다.
그녀는 석탁 위에 단정히 정좌를 했다. 조용하고 우아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미미한 움직임에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교염(嬌艶)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혹시 무의식중에 심혼(心魂) 속으로 무섭게 파고드는 사사혜니의 염기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사사혜니는 천불육대성승에게 둥그렇게 에워싸였다.
불정광음선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사사… 천불미극전진금법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즉시 미아범천심공(彌阿梵天心功)을 운행하라!"
방립 밑으로 보이는 빙옥(氷玉)같이 희고 아름다운 턱이 미미하게 끄덕였을 뿐, 사사혜니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천불육대성승은 일제히 쌍수를 앞으로 뻗었다.
그들의 십이 장(掌)이 사사혜니의 십이요혈(十二要穴)에 정확하게 대어졌다.
다음 순간 열두 개의 장심(掌心)에서 괴이한 무형강류(無形 流)가 발출되기 시작했다.
후류류류류-!
투명한 무형강류는 순식간에 사사혜니를 휘감고 맹렬히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일순 사사혜니의 교구가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무형강류의 회오리가 커다란 원구(圓球)를 이루자, 사사혜니의 전신에서는 신비로운 은빛 서기(瑞氣)가 뻗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들은 무슨 비법(秘法)을 전개하고 있는가?
천불미극전진금법!
이것은 불문밀전(佛門密傳)의 비법이다.
천불미극전진금법을 전개하는 쌍방간에는 일신공력은 물론 뇌력(腦力)과 지력(智力) 일체가 남김없이 이전된다.
시전자의 전능력(全能力)이 피시전자에게로 완전히 옮겨지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비법이 아닌가!
하여 이것은 함부로 시전할 수 없는 금법(禁法)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천불육대성승의 안색은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전신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렸다.
후류류류류류-!
투명한 무형강류는 사나운 소용돌이처럼 사사혜니를 휘감아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뻗치는 은빛 서기가 점점 찬란해지더니 홀연 눈부시게 휘황한 금채대환(金彩大還)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금채대환!
그 눈부신 금빛의 대환은 그녀의 전신을 완전히 가리고 마침내 전내를 가득 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아, 이해할 수 없는 장엄한 광경이여!
이윽고 휘황한 금채대환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를 때, 돌연 천불육대성승이 털썩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신색은 이미 무섭게 변해 있었다.
흑빛이 된 피부는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탐스럽던 백염과 백미가 뭉텅뭉텅 빠져서 바닥에 휘날리고 있었다.
일신의 전력이 완전히 고갈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득의의 빛이 넘치고 있었다.
보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석탁을 내려서는 사사혜니의 놀라운 모습을!
그녀의 전신에는 무한히 신비로운 광휘가 은은히 어려 있어 마치 세존(世尊)의 현신(現身)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직도 머리 위에는 휘황한 금채대환이 환영처럼 어려 있다.
불정광음선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사… 천불미극전진금법은 십이 성 성공했다. 이제 그대는 무림사 이래의 초인(超人)이 되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천불육대성승의 공력과 뇌력, 지력을 모두 이전받은 사사혜니의 전능력은 과연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불정광음선사가 다시 말했다.
"사사… 이제 밀비천전으로 가라. 그리하여 동방에서 올 응징자를 맞이하라!"
오오, 동방에서 올 응징자!
삼백 년 전 원세무황 상관무륭이 동방대장정에서 범한 천죄(天罪)를 심판하기 위해 온다는 동방의 응징자가 아닌가!
사사혜니가 밀비천전으로 가는 것은 그 응징자를 맞기 위해서란 말인가?
무무공공신승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우리의 할 일은 모두 끝나고 중원의 천년대운명은 이제 사사혜니에게 달렸다!"
이때 아직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화세존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소! 우리의 할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
중인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세존은 안광을 번쩍이며 말을 이었다.
"동방에서 올 응징자는 밀비구대무신과 사사혜니의 힘으로 막기 힘드오. 이 세상에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소!"
중인은 아연했다.
불정광음선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화세존은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중원에 내려질 거대한 재앙을 막아야 하오. 그러나……."
그는 중인을 심유하게 쓸어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지난 날 원세무황이 범한 천죄를 참회하고 하늘에 자비를 빌어야 하오. 아미타불……."
중인은 숙연해졌다.
무무공공신승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세존…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화세존은 품속에서 하나의 단도(短刀)를 꺼냈다.
그는 단도를 허공에서 치켜들며 엄숙하게 말했다. 보기에도 섬칫한 새파란 날이 선 단도였다.
"우리는 이 단도로 스스로 심장을 갈라 하늘에 사죄해야 하오. 청원서(請願書)를 써야 하오!"
중인은 일제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화세존이 말하는 청원서란 무엇인가?
불정광음선사가 비감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불수(佛壽)를 다한 몸… 그렇게 해서 중원이 무사할 수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소?"
다른 중인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것이 천불육대성승인 우리가 해야 할 최후의 일인 것 같소."
"노납도… 그렇게 생각하오!"
결국 비장한 결정은 내려지고 말았다.
화세존은 품속에서 한 장의 화선지(畵宣紙)를 꺼내어 석탁 위에 펼쳤다.
이어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 엄숙하게 고했다.
"하늘이시여… 우리는 원세무황이 범한 천죄를 참회하고 사죄하기 위하여 스스로 심장을 가르나이다!"
푸욱-!
불호가 끝나는 순간, 단도는 그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참으로 무섭고 비장한 행동이었다.
단도를 뽑자 선혈이 왈칵 솟아났다.
화세존은 심장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듬뿍 찍어 화선지에 한 줄의 글을 썼다.
그리고는 단도를 불정광음선사에게 넘겼다.
불정광음선사도 하늘을 우러러 엄숙히 고했다.
"아미타불… 천죄를 참회하나이다!"
그리고는 심장을 단도로 푹 찔렀다. 다음에는 심장의 피를 찍어 화선지의 글을 이어 썼다.
작업을 마친 그는 숨이 끊어져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나머지 네 노승도 차례로 똑같은 의식을 행한 뒤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비장한 최후(最後)!
석탁은 붉은 피로 물들고 전내에는 짙은 혈향(血香)이 가득 찼다.
처절하고도 무서운 비극은 겨우 막을 내렸는가?
그러나 화세존은 아직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피로 얼룩진 화선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동방에서 올 응징자여!
부디 중원을 용서하시오!
천하가 초토로 변할 대재앙(大災殃)을 거두어 주시오!
노납들이 스스로 심장을 갈라서, 그 선혈로 쓴 이 청원서를 그대에게 바치오!
천불육대성승 백>
장렬한 내용의 혈서였다.
화세존은 화선지를 둘둘 말아 조그마한 금합(金盒)에 넣었다.
그는 금합을 사사혜니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사사, 동방의 응징자가 나타나면 먼저 이 청원서를 바쳐라. 그리하여 그의 용서를 받지 못할 때에만 중원은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
사사혜니는 빙어(氷魚)처럼 희고 아름다운 손으로 금합을 받았다.
그녀의 태도는 놀랄 만큼 조용했다.
비록 방립에 가려진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물처럼 고요한 신색, 너무나 고요하여 오히려 요기(妖氣)까지 느껴진다.
모든 일을 마치자 화세존은 마지막으로 사사혜니를 똑바로 정시하며 말했다.
"사사, 그대는 지금 무한한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천년대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몸이다. 어서 밀비천전을 찾아가서 중대사를 처리하라!"
여기까지 말한 화세존은 고목처럼 옆으로 조용히 쓰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일막의 기괴한 비극은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이다.
사사혜니는 바닥에 널려진 천불육대성승의 시체를 쭉 둘러보았다.
여전히 물처럼 고요한 신색이다.
문득 방립 밑으로 혼(魂)을 앗아갈 듯 영롱하고 맑은 교성이 흘러나왔다.
"당신들은 본녀의 뜻과 비밀을 십분지일(十分之一)도 알지 못하오."
무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말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사혜니는 문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이제 머리를 기를 때가 되었군."
또 한 마디의 영롱한 교성이 울렸을 때, 사사혜니의 모습은 이미 전내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 중원 대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사혜니.
그는 도대체 어떤 여인이란 말인가?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중원을 휩쓸 천년대운명의 장(章)은 이렇게 그 장엄한 막을 열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