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홉 개의 관(棺)이 돌아왔다 (3/37)

아홉 개의 관(棺)이 돌아왔다

돌연 중원에 무서운 소문이 터져 나왔다.

- 천축(天竺)의 한 왕자(王子)가 천축사대법왕(天竺四大法王)과 무수한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을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왔다!

중원의 무수한 전대마인(前代魔人)과 사극고수(邪極高手)들이 속속 그에게 투항하고 있다는 소문도 번졌다.

중원의 기류는 기이하게 파동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천하무림에 살벌한 긴장이 깔렸다.

과연 천축왕자는 어떤 목적으로 중원에 출현했는가?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아직 이름밖에 없었다.

<아극타(阿極他)>

그러나 그가 초절한 능력이 없다면 어찌 천축사대법왕을 거느릴 수 있겠는가?

<범아법왕(梵亞法王)>

<가납법왕(伽納法王)>

<나랍법왕(那拉法王)>

<아수법왕(阿修法王)>

그들은 중원에도 널리 알려진 희대의 공포고수들이다.

백 년 전부터 천축무림(天竺武林)을 석권하고 있는 초강고수였다.

그들 하나하나의 무공은 가히 일파지존(一派之尊)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그런 그들이 천축왕자 아극타의 휘하에 든 것이다.

또한 아극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면 중원의 전대마인이나 사극고수들이 속속 투항을 하겠는가?

분명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무서운 대변겁(大變劫)의 전조(前兆)였다.

천축왕자 아극타가 일으킨 파문은 점점 크게 번져 가고 있었다.

동백산(桐柏山).

언제부터인가?

이 수려하고 준험한 산은 대중원(大中原)의 중심이 되었다.아니,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그것은 동백산 사방 백 리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궁성(宮城) 때문이었다.

<궁륭마천부(穹隆摩天府)>

사람들은 궁륭마천부라는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이름은 이 세상 최고의 영화(榮華)와 존엄(尊嚴), 그리고 공포(恐怖)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백 년 이래, 궁륭마천부는 천하무림의 절대적 존재로 군림해 왔다.

중원의 무상전권자(無上全權者)!

구대문파(九大門派)를 비롯한 대소(大小) 천이백 문파의 유일한 지배자였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공동(  ) 등이 궁륭마천부의 일개 분파(分派)로 전락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다음과 같은 말을 부인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 궁륭마천부는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패도무황조(覇道武皇朝)를 건립했다!

이 말에서는 짙은 피와 강철의 냄새가 풍긴다.

패도무황조!

궁륭마천부는 피와 강철로 이루어진 철혈궁성(鐵血宮城)이었다.

궁륭마천부의 십만 개 돌기둥에는 검붉은 피의 역사가 새겨져 있고, 백 리에 펼쳐진 웅장한 성곽에는 십만 개의 부러진 도검(刀劍)이 박혀 있었다.

그리하여 궁륭마천부는 지금 천하무림의 태양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은은한 핏빛 햇무리를 뿌리며.

사람들은 숨을 죽여 은밀히 말한다.

- 궁륭마천부는 천년패도천하(千年覇道天下)를 추구하고 있다.

석양(夕陽).

피가 묻어날 것만 같은 짙붉은 석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궁(一宮), 이궐(二闕), 삼전(三殿), 사각(四閣), 십이루(十二樓), 이십사원(二十四院), 사십팔탑(四十八塔), 삼백육십대(三百六十臺), 궁륭마천부의 거대한 궁성이 불그레한 석양빛에 물들고 있었다.

이미 오색등롱(五色燈籠)은 수없이 밝혀지고, 무수한 불빛의 편린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궁륭마천부의 궁성 전체에 서서히 야정(夜情)이 꽃 피어날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 거대한 불야성(不夜城)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음울한 기류가 흐르는 한 밀전(密殿)이 있었다.

금령밀전(禁令密殿).

금령밀전은 궁륭마천부의 삼전(三殿)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곳이다.

음산하고 육중한 회색 석조물에 항상 이상한 적막이 흐르는 곳.

이곳은 부중(府中) 사람들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금역(禁域)이었다.

석양조차 스러지고 짙은 어둠이 깔릴 무렵.

금령밀전의 대정전(大正殿) 앞에 한 대의 마차가 소리 없이 도착했다.

칠흑처럼 검은 사두마차(四頭馬車)였다.

한데 마차에서 풍기는 음울한 죽음의 냄새는 무엇인가?

대정전 앞에는 십여 명의 남의인(藍衣人)이 묵묵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한결같이 비범했다.

이목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즉시 느낄 수 있으리라. 그들이 모두 경인할 일류고수(一流高手)라는 사실을.

그들은 어두운 얼굴로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이때 전문(殿門)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자의중년인(紫衣中年人)과 자의소년(紫衣少年)이었다.

자의중년인은 철인(鐵人)처럼 냉막한 인상이었다.

면도날처럼 일자(一字)로 굳게 다문 입은 인간의 사사로운 정감(情感) 따위를 추호도 용납할 것 같지 않았다.

자의소년의 인상도 그와 흡사했다.

십칠 세 정도 됐을까?

어떤 면에서는 소년은 자의중년인을 능가하는 괴이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남의인들은 일제히 옆으로 물러서서 예를 표했다.

자의중년인이 마차 앞에 멈추어 서더니 입을 열었다.

"마차 안에 든 것을 내전(內殿)으로 옮겨라."

무겁고 건조한 음성이었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안에 든 것이 밖으로 들려 나왔다.그것은 모두 아홉 개의 목관(木棺)이었다.

목관은 내전으로 옮겨져서 석대(石臺) 위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자의중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 전주(殿主)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영결(永訣)할 시간을 주겠다."

이어서 그는 자의소년에게 명했다.

"총찰(總察)은 관의 뚜껑을 열어라."

자의중년인은 금령밀전의 전주였다.

자의소년은 총찰이라는 직위(職位)인가?

전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의소년은 묵묵히 관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관 속에는 시체가 들어 있었다.

셀 필요도 없었다. 아홉 개의 관에는 모두 시체가 한 구씩 들어 있었다.

첫번째 관, 시체의 미간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하나 뻥 뚫려 있었다.

피는 동결(凍結)되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시체 위에는 붉은 글자가 새겨진 은패(銀牌)가 하나 놓여 있었다.

<금령제삼호(禁令第三號)>

두 번째 관의 시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다만 두 눈이 공포로 부릅떠져 있고, 이마에 가느다란 십자(十字) 혈선(血線)이 뻗쳐 있었다.

그 위에는 역시 은패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금령제육호(禁令第六號)>

그러고 보니 모든 시체 위에는 은패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은패에 새겨진 글자는 주인의 죽음을 증언하듯 섬뜩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령제칠호(禁令第七號)>

살(肉)은 미세한 분말처럼 흩어져 있고, 해골과 뼈만이 석고의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금령제십호(禁令第十號)>

일신(一身)이 두부처럼 반듯반듯하게 이십사등분(二十四等分)되어 있었다.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모두 개성 있게 죽었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또 중얼거렸다.

"사공(邪功)은 본래 화려한 일면이 있지."

"시체에도 미학(美學)이 있군."

그들은 지극히 무감동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은은한 공포까지 느끼는 듯 모두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남의인들은 시체를 향해 묵묵히 영결의 예를 표했다.

시체는 그들의 동료였던 것이다.

이윽고 남의인들은 모두 밖으로 사라지고 내전에는 한 사람만이 남았다. 바로 자의소년이었다.

자의소년은 침착하게 관뚜껑을 닫기 시작했다. 관뚜껑을 모두 닫은 그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다."

이때 옆에서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

자의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한 사내가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암천장공(暗天長空)을 응시하고 있었다.

헐렁한 백의와 흩어진 머리. 두 손은 소맷자락에 깊숙이 찌르고 있다.

그의 인상은 기이했다. 철저히 무심(無心)하다고나 할까?

관 속의 시체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수려한 윤곽의 음영(陰影)이 짙은 얼굴, 입술은 아름다울 만큼 단아하고 서늘한 속눈썹에 콧날은 조각처럼 우뚝하다.

후리후리하고 건장한 체형은 헌헌기남아(軒軒奇男兒)의 풍모를 지녔지만 아직 청순한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문생(文生)으로도 보인다.

채 약관에 이르지 못한 나이에 이상한 분위기를 지닌 백의문생.

휘이이익-!

그의 아름다운 주홍빛 입술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직하면서도 우울하고 고독하게 들리는 휘파람 소리였다.

자의소년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형님……."

백의문생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심유하도록 투명한 시선이었다.

자의소년이 말했다.

"형님, 오늘은 제가 형님께 술 한 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백의문생은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술이라니… 너도 술 생각이 날 때가 있느냐?"

"형님, 제 방으로 가시지요."

백의문생은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서 걷는 자의소년을 따라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정실(淨室).

방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백의문생과 자의소년은 간단한 주효(酒肴)를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백의문생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 방에 술이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의소년이 공손히 응답했다.

"형님께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백의문생이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의소년은 단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더 들지 않았다.

백의문생 앞에서 그의 태도는 매우 공손하고 단정했다.

백의문생의 얼굴에는 희미한 도홍(桃紅)이 떠올랐다.

그는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술대접도 받았으니 할 얘기가 있으면 서슴치 말고 해도 좋다."

"제가 약소한 술대접을 하는 것은 꼭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하하, 그러나 너의 눈빛은 무언가 간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자 자의소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형님, 그러면 우제(愚弟)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 금령밀전은 궁륭마천부 내에서도 가장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령밀전이 지금 무서운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금령밀전!

궁륭마천부의 절대적인 비밀조직이다.

금령밀전은 부주(府主) 직속으로 무림의 최고중대사(最高重大事)에만 관계한다.

금령밀전의 인물들은 삼십 명 미만이나 무림의 운명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가공할 고수들이다.

추적(追跡), 살인(殺人), 사찰(査察)!

그들은 무림에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공포의 사신(死神)들이었다.

금령밀전이야말로 광대한 무림천하를 통치하는 궁륭마천부의 촉수였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지배자의 거대한 손이었다.

자의소년이 말을 이었다.

"금령밀전의 고수들은 당대의 귀재(鬼才)로서 모두가 초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습니다."

"……."

백의문생은 묵묵히 듣기만 한다.

자의소년의 어조가 약간 고조되었다.

"그런데 오늘 금령밀전의 고수 아홉 명이 시체로 변해 돌아왔습니다. 파견자 중 한 명은 실종이 되었습니다."

"……."

"그들은 모두 전설적인 극사공(極邪功)에 당했습니다. 광전빙강지(光電氷 指), 단백혈폭공(斷魄血暴功), 사혼청염기(邪魂靑焰 ) 등……."

광전빙강지!

단백혈폭공!

사혼청염기!

모두가 공포스런 절전사공(絶傳邪功)이다. 지난 수십 년 이래 중원에는 출현한 일조차 없었다.

자의소년의 표정이 좀더 어두웠다.

"무림에 무서운 사극고수(邪極高手)들이 출현했다는 증거입니다. 중원에 떠도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

백의문생은 여전히 지루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듣기만 한다. 눈을 스르르 감고 있어 과연 듣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자의소년의 안광이 예리하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들과 제일 먼저 부딪칠 우리 금령밀전은 막대한 희생을 치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희망이 하나 있습니다."

"……."

"그 희망은 바로… 형님입니다."

비로소 백의문생은 스르르 눈을 떴다.

그의 주홍빛 입술 사이로 물처럼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항상 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의소년은 머리를 저었다.

"우제(愚弟) 노노경(魯魯卿)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노노경!

불과 십칠 세의 소년으로 금령밀전의 제이인자(第二人者)인 총찰의 직위에 있다.

그는 금령밀전에서 이상(理想)으로 삼는 살아 있는 살인병기(殺人兵器)였다.

그의 백사십 가지 살인수법(殺人手法) 하나하나는 무공의 경지를 넘어 예술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

비정냉혹한 죽음(死)의 예술!

금령밀전의 날고 기는 살수들도 노노경 앞에서는 한 수 양보했다.

쪼로롱- 쪼롱-!

창 밖에서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려 왔다.

백의문생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노노경을 향해 물었다.

"노경, 너는 내가 새를 좋아하는 걸 아느냐?"

남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 하찮은 새(鳥)라니. 그러나 노노경은 공손히 대답했다.

"미처 몰랐습니다."

"새는 무한한 하늘의 자유를 누리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새를 좋아한다."

"……."

"나는 새 구경을 가야겠다."

말이 끝났을 때, 백의문생은 벌써 창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신형은 유연하게 창 밖으로 흘러나갔다. 일견하기에도 평범하고 느릿한 신법(身法)이었다.

그러나 노노경은 순간적으로 경탄의 빛을 띠었다.

'아! 저 신법… 역시 무린(武麟) 형님은 중원과는 다른 불가사의한 무공을 지니셨다!'

무린!

그것이 백의문생의 이름인가?

노노경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나 노노경을 일컬어 금령밀전 유사 이래의 기재(奇才)라고 하지만 형님에 비하면…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형님은 입전(入殿)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으나 분명 불이무쌍(不二無雙)의 절대기재(絶對奇才)다. 그러나……."

노노경은 하던 이야기를 미처 끝내지도 않고 나가 버린 백의문생에 대해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움직이지 못한다.

그 백의문생은 금령밀전에서 어떠한 존재인가?

백의문생 무린은 정원에 서 있는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쪼롱- 쪼로롱-!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아 울고 있었다.

무린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천진하고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였다.

"청관조(靑冠鳥), 밤에 길을 잃었구나."

새는 귀엽고 아름다웠다.

무린이 좀더 다가가자 새는 저쪽 나뭇가지 위로 포로롱 날아갔다.

이때 무린의 검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상처를 입었구나.'

청관조의 한쪽 날개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 고통의 호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새의 다리에는 똘똘 말린 종이쪽지가 하나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무린은 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포르르릉-!

청관조는 안간힘을 다하여 숲 너머로 날아갔다.

무린은 그쪽으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숲을 지나자 육중한 붉은 석담이 앞을 막아 섰다. 이 장 높이의 홍장(紅牆)이었다.

이것은 궁륭마천부에서도 외부인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성역(聖域)을 의미한다.

"……."

무린은 석담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쪼로롱-!

그러나 안에서 청관조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 오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한 줄기 바람처럼 석담 안으로 번쩍 날아들고 있었다.

넓고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청관조는 가까운 화목(花木) 위에 앉아 있었다.

무린은 새를 향해 우수(右手)를 쭉 뻗었다. 순간 새는 손 안으로 빨리듯 끌려 왔다.

신비기공(神秘奇功)!

무린은 청관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연약한 작은 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심한 상처였다.

무린은 새의 다리에 매달린 종이쪽지를 떼어 냈다. 그것을 펼쳐 보니 괴이한 글이 적혀 있었다.

<저는 무영수련장(無影水蓮莊)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장주(莊主)는 무서운 비밀을 지닌 대마녀(大魔女) 같습니다. 그녀는 일백 명의 동정미동(童精美童)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밤 그녀의 기이하고 끔찍한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명주(明珠) 필(筆)>

이상한 내용이었다.

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명주라는 여인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서찰이다. 그러나 무영수련장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로서는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새 청관조는 숨이 끊어져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무린은 땅을 파고 청관조를 묻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이 서찰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생각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화원 건너편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하나의 백영(白影)이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이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녀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대리석처럼 흰 이마, 짙고 선명한 눈썹, 빙옥(氷玉)으로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

눈처럼 흰 무복(武服)을 입었는데, 그것이 늘씬한 체형에 썩 잘 어울렸다.

머리결은 붉은 홍대(紅帶)로 묶여 있었고 손에는 한 자루 검(劍)이 쥐어져 있었다. 싸늘한 예광(銳光)을 발산하는 삼 척 보검(三尺寶劍)이었다.

무린은 그녀를 유심히 주시했다.

여인이 보검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파앗-!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은 가볍게 땅을 차고 천공으로 솟구쳤다.

환영(幻影)인가?

여인은 허공에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까마득하게 백 장이나 떠오르더니 보검을 수평으로 쭉 뻗었다.

츠츠츠츳-!

눈부신 일섬광(一閃光)이 암공(暗空)을 새파란 뇌전처럼 갈랐다.

찰나지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앗-!

예리한 파열음이 울리며 허공을 날아가던 커다란 야행조(夜行鳥) 한 마리가 피이슬(血露)로 변하여 흩어지는 게 아닌가?

후두두둑-!

갈기갈기 찢어진 야행조의 살과 뼈가 화원에 비처럼 뿌려졌다.

눈앞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무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반 검강(劍 )보다 한 단계 높은 뇌류검강(雷流劍 )이다!'

뇌류검강!

백 장까지도 뻗칠 수 있는 가공할 초검강(超劍 )이다.

중원의 검객들 중에는 이런 초검강을 수련한 자는 없다.

무린이 시선을 들었을 때, 여인은 놀랍게도 그의 앞에 환영처럼 내려서 있었다.

무린은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인은 더욱 절미절염(絶美絶艶)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찌르는 듯 예리하게 빛났고, 그린 듯 짙고 선명한 눈썹엔 싸늘한 위엄이 엿보였다.

결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영웅의 기상을 지닌 경세미녀(驚世美女)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용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여인은 싸늘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영롱한 음성의 추상 같은 힐문이었다.

무린이 대답했다.

"나는 무린이라고 하오."

"너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다. 정체를 밝혀라!"

"정체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오."

"어디서 왔느냐?"

"담 밖에서 왔소."

여인의 수미(秀眉)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어느 문중(門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무린의 대꾸는 덤덤했다.

"문중 같은 건 없소."

"그럼 여기 침입해 온 이유가 뭐냐?"

"새를 따라왔을 뿐이오."

"새? 무슨 새냐?"

"파랑새요."

여인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계속 추궁하나, 무린의 대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계속 덤덤하다.

여인이 검을 뻗어 무린의 목을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너의 생명은 여기서 끝난다!"

무린은 태연했다.

"거짓이 있으면이 아니라 거짓이 있다고 판단되면이 아니겠소?"

그건 여인의 판단이 문제라는 뜻이다.

여인은 냉소를 지었다.

"너의 혀가 제법 예리하구나."

"예리한 건 나의 혀가 아니라 낭자의 검인 것 같소."

여인의 검은 무린의 목 앞 두 치까지 다가왔다.

"본녀의 검이 예리한 것을 안다면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좋다!"

"본인은 별로 거짓말을 즐기지 않소."

"좋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묻겠다. 여기는 무슨 목적으로 침입했느냐?"

"같은 질문을 두 번 할 필요는 없소."

"역시 새를 쫓아왔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러면 너는 새 한 마리를 쫓다가 생(生)을 마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허공을 날아가던 야행조는 아무것도 쫓지 않았건만 생을 끝마쳤으니……."

무린의 이 말에는 분명 여인이 죄없는 야행조를 살상한 데 대한 힐난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다.

"너의 대담성을 가상하게 여겨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순간 보검이 무린의 목을 푹 찔렀다.

쾌잔(快殘)!

한 줄기 검광이 번쩍 빛났다.

선혈이 확 뿌려지는가?

그러나 무린은 어느 새 옆으로 살짝 비켜서 있었다.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신법이었다.

여인의 봉목(鳳目)이 크게 떠졌다.

"대담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보검은 번개처럼 삼검(三劍)을 신랄하게 내리찔렀다.

치치칙-!

독랄한 쾌검초(快劍招)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검은 무린을 찌르지 못했다.

무린은 유유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삼검을 가볍게 피해 냈다.

진정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아닌가?

여인의 눈부시게 흰 옥용(玉容)이 노기로 붉게 변했다.

"본녀의 삼검을 모두 피해 낼 줄은 몰랐다!"

무린은 씨익 웃었다.

"처음 것까지 합치면 사검(四劍)이오."

여인은 대노했다.

"감히 본녀를 놀릴 셈이구나!"

여인은 살검초(殺劍招)를 계속 전광처럼 펼쳐 냈다.

슈슈슈슛-!

연속 십팔검(十八劍)이 무자비하게 펼쳐졌다.

검광의 난무 속에 화원의 꽃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져 날아가며 무서운 검기의 파도가 회오리쳤다.

장내 십육방(十六方)은 완전히 검세(劍勢)에 사로잡혔다.

이 가공할 검초를 피해 낼 사람이 있을까?

거짓말처럼 무린은 모든 검초를 무형인(無形人)처럼 피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신법이라기보다 차라리 환술(幻術)이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분명 꿈 속의 환각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결국 무린은 생사(生死)의 위기 앞에 몰리고 말았다.

붉은 석담이 뒤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검은 정확하게 무린의 목 한가운데에 닿아 있었다. 여인이 조금만 힘을 가하면 붉은 피가 뿜어지리라.

여인은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네가 놀라운 초극고수(超極高手)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본녀는 너의 유언(遺言)을 들어 주겠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낭자가 놀라운 초극검수(超極劍手)라는 것을 인정하오. 그러면 유언을 남기도록 하겠소."

"말하라!"

"나의 의제(義弟)에게 한 마디만 전해 주시오. 먼저 죽어서 미안하다고……."

"의제가 누구냐?"

"노노경이오."

여인의 수미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금령밀전의 총찰 노노경 말이냐?"

"그렇소."

"너는 금령밀전 소속이냐?"

"그렇소."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궁륭마천부에서 부주(府主)의 특명이 없는 한 전주(殿主)나 총찰 외에 금령밀전의 고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인의 노기는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무린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힐문했다.

"너는 여기가 금역(禁域)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무린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았지만 새가 몰랐소."

천진하고 담담한 미소였다.

일순 여인은 할 말을 잃었다.

"……."

이때는 여러 명의 시녀가 이미 무린을 엄중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허리춤에 화려한 은문패검(銀紋佩劍)을 차고 있었다.

여인이 가벼운 한숨을 토하더니 차갑게 말했다.

"네가 새를 쫓아왔다는 말은 믿겠다. 그러나 금역을 범한 죄는 결코 면할 수 없다!"

이어서 그녀는 시녀들에게 엄숙히 명을 내렸다.

"이 자를 참정수옥(斬情囚獄)에 넣어라!"

참정수옥!

궁륭마천부의 중요하고 특수한 수인(囚人)들이 갇히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일단 생명은 보장된다. 그러나 다시 햇볕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상 늙어 죽을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종신수옥(終身囚獄)이었다.

여인의 명은 지엄했다. 결국 무린은 시녀들에게 끌려 참정수옥으로 향했다.

그런데 무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향해 문득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여인이 물었다.

"무엇이냐?"

"낭자는 이름이 무엇이오?"

여인은 갑자기 의외의 허(虛)를 찔린 듯 곤혹의 표정을 지었다.

"……!"

너무나 뜻밖의 질문인가?

여인에게서 대답이 없자 무린은 덤덤하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 두구려. 예뻐서 한 번 물어 본건데……."

한 시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가 감히 대군수(大軍帥)께 무례를 범할 셈이냐!"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우문(宇文)낭자였구료. 우문낭자는 앞으로는 새를 좀 사랑하는 게 좋겠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인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구인가?

천부대군수 우문검지(宇文劍芝)!

당금 천하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신분을 지닌 여인이다.

궁륭마천부 부주의 일점 혈육이며 부중(府中)의 십만의 무적대군단(無敵大軍團)을 통수하는 대군수이기 때문이다.

그녀야말로 중원무림사를 찬란하게 장식할 절세여걸(絶世女傑)이 틀림없었다.

삼 년 전, 그녀가 삼만의 무적대군을 지휘하여 서역(西域)과 동해(東海)를 관통하는 동서대장정(東西大長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천하인들은 오직 한 마디 영송(迎頌)을 그녀에게 바쳤다.

- 천부대군수시여! 무림사에 휘황하게 명멸해 간 일만 영웅(英雄)도 그대의 한 영광을 따르지는 못하리라!

천부대군수 우문검지는 중원의 한 떨기 화려한 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상에 피어난 꽃처럼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위엄은 추상과 같고, 그녀의 성품에는 얼음과 불꽃의 양면성이 공존했다.

천하의 내노라 하는 영웅들도 그녀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무린이 그녀에게 말한 것이다.

예뻐서 한 번 이름을 물어 봤다고, 앞으로는 새를 좀 사랑하라고.

우문검지는 화원에 홀로 서서 어두운 천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에는 보일 듯 말 듯 고소(苦笑)가 피어났다.

'세상에 그런 사내도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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