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서 가장 겸손한 도객(刀客)
밤이 깊어가는데 금령밀전 총찰 노노경은 아직도 탁자 앞에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냉철한 표정은 석고상 같았다.
이때 한 소녀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빠……."
십삼사 세쯤 되었을까?
동그스름한 얼굴에 곱슬머리, 체형은 날씬한데 사내옷을 깡총하게 걸쳤다.
바지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붙어 있다.
용모에서 특이한 건 코였다. 조그마한 코가 살짝 치켜들렸는데 그 각도가 약간 높다. 조금만 낮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대로 귀엽고 앙증맞다.
소녀의 어깨에는 한 마리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얼마나 늙었는지 머리털이 듬성듬성 빠진 대머리였다.
대머리 앵무새!
조금도 귀엽게 보이지 않았다.
또 소녀의 허리춤에는 큼직한 곰방대 하나가 꽂혀 있다.
그녀는 탁자 위를 재빨리 훑어보더니 노노경 앞에 우뚝 서서 싸늘하게 추궁했다.
"오빠, 술 마셨지?"
노노경의 누이동생인가?
노노경은 약간 당황한 눈치다.
"아… 아니다. 무린형님께 술을 몇 잔 대접했을 뿐이다."
소녀의 눈빛은 매섭게 반짝였다.
"하지만 여기 잔이 두 개 있는걸! 술을 따라 마신 흔적도 있고!"
증거가 있는데 어쩌랴.
노노경은 더듬거렸다.
"사… 사실은 나도 한 잔 마셨다. 꼭 한 잔……."
그는 누이동생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소녀의 힐문은 추상과도 같았다.
"오빠는 아직 술 마실 나이가 안 됐다는 걸 몰라?"
"아… 알고 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
"쯧쯧… 내가 조금만 감시를 소홀히 하면 오빠는 곧 나쁜 길로 빠지니까 정말 한심스럽군!"
"……."
노노경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녀는 계속 당당하게 오빠를 몰아세운다.
"그래서야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어."
노노경은 슬며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누이동생의 훈계를 듣기가 매우 거북한 눈치였다.
이때 소녀가 탁자 위의 술병을 재빨리 집어들더니 한 모금 꼴깍 마셨다.
콧등을 살짝 찡그린 뒤 또 한 모금 꼴깍 마신다. 그리고는 술병을 내려놓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흠흠……."
그녀는 태연한 헛기침을 발했다. 그 모습이 여간 깜찍스럽지 않았다.
"……?"
문득 노노경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코를 바짝 치켜들고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노노경의 시선이 그녀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곰방대에 가서 미쳤다.
"그 곰방대는… 뭐냐?"
그러나 소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요즈음 한 가지 암기수법(暗器手法)을 수련하고 있어. 거기에 필요한 거지."
"암기수법……?"
"으응… 곰방대 팔만사천대법(八萬四千大法)!"
"……?"
노노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껌벅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녀가 갑자기 물었다.
"무린형은 어디 갔어?"
"형이라고 하지 말고 오라버님이라고 불러라."
"아무려면 어때! 형은 어디 갔어?"
"새를 구경하러 가셨다."
"흐흥! 형은 언제나 그렇다니까. 언제나 철이 들려고 그러는지……."
이렇게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는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오빠, 앞으로 무림에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게 사실이야?"
노노경은 무겁게 대답했다.
"너는 몰라도 된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출현한다고 하던데?"
"……!"
"흥흥, 이 노노아(魯魯兒)가 한 번 나서면 단번에 천하의 형세가 크게 변할 텐데… 오빠, 내가 무림에 출도를 하면 안 될까?"
노노경의 태도가 갑자기 엄숙하게 변했다.
"노아(魯兒)야, 너는 요즈음 매우 게을러진 것 같다!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것은 물론 청소나 빨래도 엉망이다! 우선 이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도록 해라! 그리고 빨래감이 잔뜩 쌓여 있으니……."
소녀 노아는 찔끔한다.
"으응, 알았어! 나 소피 좀 보고 올께."
이렇게 대꾸한 그녀는 휭하니 한 줄기 바람처럼 밖으로 사라졌다.
'녀석…….'
노노경은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그는 누이동생이 도망쳐 버린 것을 안다. 그 자신이 누이동생을 쫓아낼 때의 상용수법(常用手法)을 썼으므로.
그러면 소녀는 어떠한 존재인가?
노노아!
노노경의 유일한 핏줄이다. 또한 금령밀전 최대최고의 골칫덩어리이기도 하다.
영악하고 당돌하기가 천하무쌍(天下無雙). 경천할 자질은 오히려 오라버니 노노경을 능가하고, 기상천외의 가지가지 특기(特技)를 지니고 있다.
금령밀전의 날고 기는 고수들도 그녀가 나타나면 일단 긴장한다. 갖은 방법으로 지독한 골탕을 먹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그녀가 한 번 나서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생초(野生草)!
그녀는 음산하고 살벌한 금령밀전에서 자라나는 한 포기 상큼한 들풀 같은 존재였다.
소녀 노노아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무린형은 어디 갔을까?'
정원은 밤의 적막에 싸여 있었다.
이때 숲 속에서 고금(古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딩딩딩- 딩딩딩-!
음울하고 단조로운 음률이었다.
노노아는 콧등을 찡그렸다.
"저 진절머리나는 위혼곡(慰魂曲)이 또 시작되는군."
그녀는 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숲 속, 한 사내가 고금을 안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고금은 본래 칠현(七絃)이었으나 줄이 세 가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음률이 단조로운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디딩딩- 딩디딩-!
한데 그 음률은 듣는 사람을 이상할 정도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노노아는 사내의 무릎을 발로 툭 찼다.
"당유기(唐唯奇)! 그 진절머리나는 고물 삼현금(三絃琴) 좀 내버릴 수 없어?"
사내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십오륙 세쯤 되었을까?
넓적하고 평범한 얼굴인데 동굴처럼 깊은 눈동자에 괴이한 허무가 깃들어 있다.
노노아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고금 소리를 들으면 어제 먹은 완자(完子)가 뱃속에서 도로 튀어나올 것 같단 말야!"
사내는 히죽 웃었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돌아왔으니 밤새도록 위혼곡을 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허무는 그의 웃음 속에도 깃들어 있었다.
노노아는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의 고금 소리를 들으면 시체들도 편히 잠들지 못할걸!"
이어서 그녀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유기, 당신은 무린형을 못 보았어?"
당유기는 머리를 저었다.
"못 보았다."
노노아는 사내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제기랄… 형은 언제나 혼자만 쏘다닌다니까."
그녀는 품속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쌈지였다.
노노아는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곰방대를 빠끔빠끔 빨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기를 훅 뿜어 내더니 눈을 스르르 감으며 중얼거렸다.
"술을 한 잔 걸친 뒤의 담배맛이 일미(一味)라더니… 과연 그렇군."
사내는 묵묵히 고금을 뜯고 있다.
딩딩딩- 딩딩딩-!
문득 노노아가 눈을 반짝 뜨며 말했다.
"당유기, 나는 아무래도 삼현금 탄주법을 배워야겠어!"
사내가 물었다.
"왜냐?"
"당신이 죽으면 위혼곡을 들려 줄 사람이 없잖아!"
"그도 그렇군."
사내는 히죽 웃었다. 허무가 물씬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는 어떠한 사내인가?
당유기!
금령밀전에서 가장 한가로운 사내다.
그는 하루 종일 고금을 뜯으며 시간을 죽인다.
전주도 그에게는 아무런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무서운 명호를 지니고 있다.
만폭왕(萬爆王)!
바로 이러한 명호다.
그는 가공할 화약암기(火藥暗器)에 정통한 귀재(鬼才)였다.
때로는 폭음(暴飮)을 통해 광기(狂氣) 번뜩이는 주귀(酒鬼)로 변하기도 한다.
그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모두 조심해야 한다. 세상이 일순간에 초토로 변할지도 모르므로.
노노아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말했다.
"당유기, 당신은 요즈음 무림에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알지?"
당유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앞으로 금령밀전의 고수들이 모두 죽게 될 거라더군."
"……."
"당신도 곧 죽게 될 거야."
"……."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어. 무덤은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묵묵히 고금을 뜯고 있을 뿐 당유기는 여전히 한 마디 대꾸가 없다.
딩딩딩- 딩딩딩-!
문득 노노아의 시선이 앞에 서 있는 고목의 높은 가지에 미쳤다.
거기에는 커다란 벌집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노노아는 살며시 곰방대를 치켜들었다. 순간 곰방대가 벌집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퍽-!
곰방대는 정확하게 벌집에 격중했다.
벌집은 가지에서 떨어져 당유기의 머리를 향해 낙하했다.
다음 순간 퍽 소리를 내며 벌집과 당유기의 머리통은 정통으로 부딪쳤다.
벌집이 확 깨어지며 수많은 대봉(大蜂)들이 말 그대로 벌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왱- 왜왜왜왱-!
밤톨만한 대봉들은 당유기를 향해 무섭게 덤벼들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이때 고금이 한 가닥 예리한 파공성을 울려 냈다.
티잉-!
그 바람에 기류가 미묘하게 파동치며 벌 떼가 우수수 떨어졌다.
노노아의 어깨에 앉아 있던 앵무새가 푸드득 솟구치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개자식!"
이 대머리 앵무새는 지독히 머리가 나쁘다. 평생 배운 게 개자식이라는 한 마디밖에 없다.
그래서 이름이 견자(犬子)였다.
이미 무수한 대봉의 무리는 모두 땅바닥에 떨어져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찰나간에 기(氣)가 끊어진 수천 마리의 벌 떼가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유기가 히죽 웃었다.
"노아가 나에게 꿀을 선물할 줄은 몰랐군."
그는 깨진 벌집을 헤쳐 쭉쭉 꿀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멀찍이 물러서 있던 노노아는 콧등을 잔뜩 찡그렸다. 당유기를 혼내 주려고 벌집을 떨어뜨렸는데 맛좋은 꿀만 안겨 준 셈이 된 것이다.
"재수가 없군."
그녀는 침을 퉤 뱉더니 어슬렁어슬렁 멀어져 갔다.
"도대체 무린형은 어디 갔을까?"
어두운 숲 속에서는 다시 고금의 음률이 울리기 시작했다.
딩딩딩- 딩딩딩-!
역시 사람을 무한히 우울하게 만드는 진절머리나는 음률이었다.
* * * *
참정수옥.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공기는 눅눅했다.
무린은 석실에 갇혀서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심스런 신세가 되었군.'
그는 돌침상 위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했다.
'어쩌면 가장 속편한 신세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천정에 갑충(甲蟲) 한 마리가 벌벌벌 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갑충은 멈춰서서 무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린도 갑충을 빤히 쳐다보았다.
'초면이로군. 서로 인사나 할까.'
결국 무린은 갑충과 인사나 나눌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어디선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흑… 흐흐흑……."
여인의 흐느낌 소리였다. 그 울음소리는 환청(幻聽)처럼 아련하게 들려 왔다.
무린은 중얼거렸다.
"유령(幽靈)이 운다면 저렇게 울겠지. 하지만 미녀(美女) 유령인 것 같군."
무린은 몸을 일으켜 석벽 앞으로 다가갔다.
석벽에 귀를 대자 울음소리가 약간 또렷해졌다.
"흐흐흑……."
무린의 미간이 가볍게 좁혀졌다.
그는 쌍장을 치켜들어 장심(掌心)을 석벽에 대었다.
다음 순간 그의 쌍장이 불그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어진 손은 이내 푸르게 변했다. 다음에는 두 손이 투명한 옥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장심에서는 눈부신 옥섬(玉閃)이 뻗쳤다.
치이이잇-!
그러자 단단한 석벽이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흩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 무슨 괴공(怪功)인가?
그것은 가공할 열양강기공(熱陽 功)이었다.
잠시 후 두 자 두께의 화강암 석벽에는 구멍이 뻥하니 뚫렸다.
무린은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도 컴컴한 하나의 석실이었다.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어떤 여인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때 구멍에 번쩍이는 두 개의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한 쌍의 눈이었다. 냉전처럼 싸늘하게 빛나는 눈!
무린이 물었다.
"당신이 울었소?"
뜻밖에도 정중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생은 네 살이 넘은 후로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소."
젊은 사내의 음성이었다.
"……."
무린이 검미를 찌푸리자 이번에는 사내가 물었다.
"여자의 울음소리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인데, 귀하는 새로 들어왔소?"
무린이 대답했다.
"그렇소."
"울음소리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소. 습관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 말이오."
"……."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석벽을 뚫었소? 암서구 뚫는 기계라도 있소?"
사내가 의아한 듯 물었으므로 무린은 덤덤하게 대꾸한다.
"그렇소."
한 쌍의 눈동자는 더욱 예리하게 번쩍였다.
"그렇다면 잘 되었소. 나와 합작(合作)을 해서 탈출을 하도록 합시다."
"탈출……?"
"나는 칠 년이나 갇혀 있었기 때문에 참정수옥의 구조와 통로의 방향에 대해서는 손바닥을 보듯 훤히 알고 있소!"
"……."
무린이 아무 말도 않자 사내가 물었다.
"내 말을 듣고 있소?"
무린이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내 이름은 사원(史元)이오."
무린은 흠칫했다.
"파랑십자도(波浪十字刀) 사원(史元)이란 말이오?"
"그렇소."
파랑십자도 사원!
천하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겸손한 도객(刀客)이다.
그는 무림의 일류도객이나 검인(劍人)들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존경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말했다.
"평소 귀하를 지극히 존경해 왔습니다."
그것은 매우 겸손한 대결신청이었다.
단천오검(斷天五劍), 무적쌍도(無敵雙刀), 광세구유검(曠世九幽劍), 파선생(巴先生), 선계검옹(仙界劍翁) 등 기라성 같은 절정도검인(絶頂刀劍人)들이 파랑십자도 아래 계속 피이슬로 변해 사라졌다.
사원의 지극한 존경을 받으며 말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 파랑십자도 사원의 존경을 받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의 저주를 받겠다!
한데 칠 년 전 사원은 무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궁륭마천부의 부주에게 존경을 표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무린은 다시 석벽에 쌍장을 대었다.
'홍단태극신공(紅丹太極神功)!'
치리리릿-!
괴이한 음향과 함께 장심에서 눈부신 옥섬이 뻗치며 석벽은 계속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푸시시시-!
이내 석벽에는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무린은 구멍을 통해 건너편 석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강팍한 인상에 매부리코, 허름한 누더기를 걸친 몸은 마치 한 자루 기도(奇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뻗쳤다.
그가 바로 천하의 도검인(刀劍人)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파랑십자도 사원이었다.
나이는 삼십 미만으로 보인다.
사원의 얼굴에는 놀란 빛이 가득했다.
'중원에 암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가공할 극강열양공(極强熱陽功)이 있었던가!'
그는 무린을 정시하며 말했다.
"귀하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소. 그러나 지금 내 손에 파랑십자도가 없는 게 유감이오."
무린이 대꾸했다.
"훗날 기회가 생길 것이오. 당신의 존경은 그 때 받아도 늦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의 시선은 전류처럼 부딪쳤다.
파르릇-!
불꽃이 작렬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난생 처음 대하는 절대고수(絶對高手)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사원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타올랐다.
"귀하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기를 바라겠소."
그것는 치열한 호승심과 전의(戰意)로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이렇게 응답한 무린은 석실을 둘러보았다. 문득 시선이 한쪽 석벽에 가서 미쳤다.
거기에는 기이한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정교한 선(線)과 원(圓)의 교차로 이루어진 도형이었다.
밑에는 이해하기 힘든 요결이 적혀 있었다.
사원이 안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저 도형은 한 가지 도식(刀式)을 나타내는 것이오."
무린은 도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원의 얼굴에는 은근한 자만(自慢)이 나타났다.
"불초가 단언하건대 저것은 고금제일(古今第一)의 무적도식(無敵刀式)이오."
"……!"
"저 도식이 한 번 펼쳐지면 천하의 도검인들은 비로소 진정한 도법(刀法)의 최극경(最極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오."
도법의 최극경!
사원은 어떻게 감히 그런 광오한 단언을 하는가?
하지만 무린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다. 저 도형은 불가해한 환상도식(幻想刀式)을 나타내고 있다!'
무린은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저 도식의 이름은 무엇이오?"
사원이 대답했다.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七十二萬滅魄破世刀法)이오."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
기괴한 명칭이었다. 이름만 보아도 결코 범상한 도법이 아니다.
무린이 다시 물었다.
"저것은 어느 고인(高人)의 도식이오?"
"바로 불초의 도식이오."
"귀하의……?"
"나는 여기서 지난 칠 년 간의 고심연구(苦心硏究) 끝에 마침내 저 일도식(一刀式)을 완성했소."
"……!"
사원의 음성에는 귀기(鬼氣)까지 느껴졌다.
"내 손에 다시 파랑십자도가 쥐어질 때,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은 분명 천하를 덮을 것이오."
무린은 석벽에 새겨진 일도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사람은 분명 무림사에서도 희귀한 천재적 귀도(鬼刀)다!'
이때 여인의 흐느낌 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 왔다.
"흐흐흑……."
무린은 시선을 돌렸다.
사원이 한쪽 벽을 가리켰다.
"저 창문 밖에 통로가 있소. 여인은 통로 끝방에 있소. 그러나 나도 그녀를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왜 우는지도 모르오."
무린은 그가 가리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팔뚝만한 굵기의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무린은 무언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우뚝 멈춰 서서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았다.
"……?"
사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나타났다.
무린은 두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옆으로 벌렸다.
순간 쇠창살은 무린의 손아귀에서 엿가락처럼 처억 휘어졌다.
사원이 나직한 신음 소리를 토해 냈다.
"오오……!"
무린이 손을 놓았을 때, 쇠창살이 축 늘어진 창문은 이미 훤히 열려 있었다.
무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가 봅시다."
그의 신형은 곧 창문 밖으로 환영처럼 흘러나왔다.
사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뒤따라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통로는 매우 어두웠다.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풍겼고 공기는 음습하고 서늘했다.
무린과 사원은 나란히 통로를 걸어 나갔다.
통로 끝에 이르자 육중한 철문이 앞을 막아섰다.
사원이 철문을 가리켰다.
"여인이 우는 감방이 바로 저곳이오."
철문에는 어린애 머리통만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무린은 두 손으로 자물쇠를 잡았다.
무린이 힘을 한 번 주자 자물쇠는 두부처럼 으스러져 떨어졌다.
사원의 표정은 이제 태연했다.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결심한 게 분명했다.
철컹-!
무린은 철문을 열었다. 컴컴한 석실이었으나 공기는 역시 음습하고도 서늘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 허여스름한 인영이 하나 보였다. 백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돌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세상에 그토록 희디흰 얼굴이 있을까?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 떠오른 하얀 달처럼 보였다. 싸늘하게 빛나는 한월(寒月) 그 자체였다.
무린은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여인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갸름한 얼굴이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이상하게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백미녀(淸白美女)였다.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이슬처럼 맺혀 있고, 몸매는 풀잎처럼 가냘프고 애잔하다.
무한한 애련(哀憐)을 느끼게 하는 절세미녀, 그녀는 희디흰 손으로 칠흑 같은 머리결을 쓰다듬으며 애처롭게 울먹이고 있었다.
무린이 물었다.
"낭자는 왜 울고 있소?"
여인은 몸을 스르르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무린 앞으로 다가왔다.
무린이 대답했다.
"불초 역시 수인(囚人)이오."
그녀는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하여 서늘한 빙호(氷湖)와 같았다.
무린은 기이한 한기(寒氣)를 느꼈다. 여인에게서 뻗치는 알 수 없는 한기였다.
여인의 파리하고 엷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당신은 무슨 일로 여기에 나타났죠?"
영롱하고 맑은 음성이었다.
무린이 대답했다.
"낭자의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오."
"그렇군요. 저는 비(雨)만 오면 항상 울고 싶어요."
"비……?"
"밖에는 분명히 비가 내리고 있을 거예요."
"……."
"제가 울고 싶을 때 틀림없이 비가 와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무린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역시 몽롱한 느낌이 들만큼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은채(銀彩)가 반짝이고 있다.
무린이 다시 물었다.
"낭자는 왜 여기에 갇혀 있소?"
"그것은 비(雨) 때문이에요."
"……?"
이번에는 여인이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내 이름은 무린이오."
"무린… 당신은 비를 좋아하나요?"
"때로는……."
"그러면 저와 함께 비를 맞으러 가겠어요."
여인은 살며시 무린의 손을 잡았다. 여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린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여인은 앞서서 문을 나서며 손짓을 했다.
"어서 와요! 비를 맞으러 가요! 나는 비를 맞아야 몸이 더워져요!"
그는 환영처럼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아, 유령처럼 현묘한 신법이 아닌가?
사원이 무린에게로 다가오며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우정소녀(雨精素女) 빙사랑(氷邪娘)이 틀림없소!"
"……!"
무린은 흠칫했다.
우정소녀 빙사랑!
그녀는 항상 비오는 날 출현하고, 그녀가 출현하면 항상 불길한 일이 발생한다.
악령(惡靈)을 지닌 저주의 사녀(邪女)인가?
강남(江南) 신풍장(神風莊)의 일천 고수가 하룻밤 새에 멸살(滅殺)되었을 때,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이천 식솔이 의문의 몰살을 당했을 때, 북천철기보(北天鐵騎堡)의 삼천 고수가 전멸했을 때에도, 우정소녀 빙사랑은 참극의 현장에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당금무림 오대불가사의인(五大不可思議人) 중의 한 명이었다.
빙사랑은 무린에게 손짓을 하며 통로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린! 어서 와요. 비가 나를 부르고 있어요!"
무린과 사원은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통로는 몹시 길었다.
사원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출구(出口)가 있을 것이오. 순찰(巡察)이 나타날 시간이니 어서 갑시다!"
두 사람은 급히 몸을 날려 갔다.
우정소녀 빙사랑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