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세제일(當世第一)의 기린아(麒麟兒)
옥황궁(玉凰宮).
궁륭마천부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호화로운 궁성이다. 바로 부주(府主)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정전(華政殿).
부주가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대전이다.
지금 화정전의 널따란 대전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비범절륜한 기도의 금의인(錦衣人)이 앉아 있었다.
사해를 포용할 듯 심유한 눈동자, 일신에 어려 있는 그 지고무상한 대지존(大至尊)의 기도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제 막 사순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는 분명 제왕(帝王)의 풍도(風度)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파세무황(破世武皇) 우문환탑(宇文幻塔)>
바로 궁륭마천부의 당대 부주였다.
천하무림의 무상전권자(無上全權者)라고나 할까?
중원을 한 손에 움켜쥐고 풍운을 질타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파세무황 우문환탑은 약관 이십 세에 궁륭마천부의 제사대(第四代) 부주직에 올랐다.
그의 능력과 경륜과 야망은 역대 부주를 훨씬 능가했다.
철혈공포시대(鐵血恐怖時代)!
당금 무림을 표현하는 이 한 마디는 그의 무림통치가 무서운 패도(覇道)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문환탑이 기침을 한 번 해도 산하(山河)가 숨을 죽이고 수목(樹木)이 몸을 떨었다.
그는 하늘 아래 유일한 당대의 무림천자(武林天子)였다.
그러면 우문환탑과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금령밀전의 전주였다.
<구문철인(九門鐵人) 동일비(銅逸飛)>
그는 궁륭마천부의 공식 서열 제삼십위(第三十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부주 직속으로서 무림의 막중한 대사(大事)를 처리한다.
천하의 운명에 관계되는 무림중대사(武林重大事)에는 반드시 그가 관계한다.
구문철인 동일비는 우문환탑의 유능한 오른팔이었다. 완벽하고 비정하게 움직이는 철수(鐵手)였다.
그의 능력은 무림의 절정고수들을 훨씬 초월한다.
구문철인 동일비야말로 보이지 않는 지하무림(地下武林)의 대부(代父)였다.
우문환탑과 동일비는 독대(獨對)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중대한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대전에는 우문환탑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팔대금위령(八大禁衛令)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우문환탑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동일비는 여전히 냉철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 가닥 그늘을 감추지는 못한다.
문득 우문환탑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축왕자 아극타가 밀비천전의 소재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오."
아아, 천축왕자 아극타라면 최근에 중원에 출현하여 심상치 않은 난기류(亂氣流)를 일으키고 있는 그 신비의 인물이 아닌가?
천축사대법왕과 수많은 절정고수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바로 그 인물.
그런데 그가 중원무림 최대의 수수께끼인 밀비천전을 추적하고 있단 말인가?
우문환탑의 말은 무겁게 이어졌다.
"또한 아극타는 천축제일밀문(天竺第一密門)인 천룡밀궁사(天龍密宮寺) 출신이 틀림없소."
천룡밀궁사!
당금 천축무림의 지존문(至尊門)이다.
천룡밀궁사가 출현한 것은 불과 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거에 천축무림을 제패하여 절대적인 지존문이 되었다.
천룡밀궁사가 단시일에 그런 대업(大業)을 성취한 것은 실로 불가사의였다.
그들은 어떤 신비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동일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아극타는 분명 밀비천전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원사도무림(中原邪道武林)을 접수하려고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사도무림!
궁륭마천부가 천하를 지배하면서 일제히 몸을 숨긴 사도고수(邪道高手)들의 무림세계를 말한다.
동일비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수많은 사도고수들이 아극타에게 포섭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 희생된 금령밀전의 고수들도 아극타에게 포섭된 혈라오사불(血羅五邪佛)에게 당했습니다."
혈라오사불, 이들이 누구인가?
이들은 백 년 전에 사라진 극사밀종(極邪密宗)의 고수들이다.
한때 중원의 불문(佛門)을 끔찍한 악마(惡魔)의 피로 물들였었다. 정종(正宗) 불문에서는 더 이상 기억하기조차 두려운 공포의 대사불(大邪佛)들이다.
그렇다면 금령밀전의 아홉 고수는 천축왕자 아극타를 추적하다가 혈라오사불에게 희생됐단 말인가?
우문환탑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금령밀전이 손을 쓰지 못할 정도라면 아극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소. 궁륭마천부는 건립 이래 최대의 강적(强敵)을 만난 것 같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동일비가 무겁게 말했다.
"그러나 금령밀전은 아직 아극타를 추적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번에 금령밀전에서는 가장 유능한 고수들이 희생당했지 않소?"
"이번에 실패를 한 것은 특출한 통솔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전주가 직접 나설 생각이오?"
동일비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금령밀전에는 속하보다 열 배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나서야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요?"
"무린(武麟)이라는 소년 문생입니다."
"무린……?"
"그 소년이야말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문환탑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어떤 내력을 지녔기에 그토록 놀라운 기재란 말이오?"
동일비가 대답했다.
"그는 조광화원(朝光花園) 출신입니다."
"음, 조광화원이라면 본좌도 알고 있지."
조광화원!
무림에도 알려진 신비로운 장원(莊園)이다.
원주(園主)인 청유수사(淸柳秀士) 무군(武君)은 고고한 학자였다.
그의 학문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꽃 가꾸기를 몹시 즐겨 화도(花道)에 있어서도 단연 천하제일(天下第一)로 알려졌다. 그래서 장원 전체가 온통 천 가지 꽃이 만발한 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공에 대해서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한 번도 무림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일신 무공이 중원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불가사의한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러 있다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동일비가 말했다.
"무린은 조광화원 원주(園主)의 아들로서 부친을 오히려 능가하는 초인(超人)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으음."
"속하가 감히 단언하건대 그는 당대 최고의 기린아(麒麟兒)입니다."
우문환탑이 미소를 지었다.
"전주가 남을 그토록 칭찬하는 것은 처음 보았소. 전주는 본래 천하의 절세기재들을 모두 발 아래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지 않소?"
동일비의 냉철한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우문환탑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동일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무린에 대해서는 속하의 설명이 아직 부족합니다."
"그에게 또 무엇이 있단 말이오?"
"사실 속하는 그에 대해서 일말의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
"그에게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도(氣度)가 있습니다. 속하는 부주님 외에 그런 절세적인 천인(天人)의 풍도(風度)를 지닌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문환탑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전주가 그토록 다양한 미문(美文)을 구사하여 남을 칭찬할 줄은 미처 몰랐소."
동일비의 어조가 약간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그는 다섯 달 전에 금령밀전에 입전(入殿)할 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일 년이 지나면 조광화원으로 되돌아간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음……."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일곱 달 후에는 금령밀전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문환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가 금령밀전에 입전한 이유는 무엇이오?"
"부친의 명을 받들어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궁륭마천부에 계속 충성할 생각은 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음……."
우문환탑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나 그도 세상의 영화를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게 아니겠소?"
동일비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세상의 영화를 추구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만 그는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信義)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곱 달 동안은 궁륭마천부를 위해 능력을 다할 것입니다."
"……."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문환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세상은 나를 일컬어 천년패도천하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모르지. 천하가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기로에 서 있는지를……."
무거운 독백이었다.
"밀비천전이 열릴 때, 잘못하면 이 세상은 무서운 천년멸절천하(千年滅絶天下)가 되고 말 것이다."
천년멸절천하란 어떠한 세상인가?
도대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인가?
문득 우문환탑의 눈동자가 형형한 신광을 폭사했다. 그는 동일비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본좌가 무린이라는 그 소년을 만나 보겠소."
* * * *
무린과 사원.
두 사람은 참정수옥의 어두운 통로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때 무린이 주춤 신형을 멈췄다.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으으음……."
몹시 고통스럽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였다.
문득 무린의 시선이 통로의 한쪽에 가서 멈췄다.
그곳에는 어린애 머리통만한 자물쇠가 붙어 있는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다.
신음 소리는 그 철문 안에서 들려 왔다.
무린은 철문 앞으로 걸어가서 자물쇠를 두 손으로 잡았다.
우드드득-!
그가 가볍게 힘을 주자 자물쇠는 이내 두부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무린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고 음습한 석실 안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희끄무레한 물체가 뒹굴고 있는 게 보이자 무린은 그리로 다가갔다.
그 물체 앞에 멈춰 섰을 때, 무린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그 물체들은 사람이었다. 팔다리가 절단되어 시체처럼 뒹굴고 있는 세 괴인(怪人)들.
그들은 코와 귀가 베어지고 얼굴 가죽까지 홀랑 벗겨져 있었다. 사람의 몸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깃덩어리라고 하는 게 나으리라.
진정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모습이었다.
"으으음……."
신음 소리를 듣고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을 뿐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지와 코, 귀가 없는 세 괴인은 무린이 나타나자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아아, 그 핏발선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처절한 증오와 원한이여!
무린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당신들은… 누구요?"
한 괴인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 음성에는 무한한 원한과 증오가 깃들어 있었다.
무린이 대답했다.
"나도 수인(囚人)이오."
"수인이라고? 여기는 왜 들어 왔느냐?"
"나는 수옥을 탈출하다가 신음 소리를 듣고 들어왔소."
"탈출……?"
"그렇소."
"그러면 어서 가라!"
"당신들은 어쩌다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되었소?"
"흥! 동정하는 척하지 마라!"
무린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인가? 자신들을 동정하지 말라니.
다른 괴인이 이를 우드득 갈며 말했다.
"우문환탑이 온갖 방법을 다 쓰는구나! 그런다고 우리가 속을 것 같으냐?"
무린은 의혹을 느끼며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오?"
괴인이 핏발선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우문환탑 그 필부가 너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비밀을 캐내려는 게 아니란 말이냐?"
"비밀……?"
무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괴인은 병든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우리를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무린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속이는 게 없소."
"더 말할 필요 없다! 어서 우리를 죽여라!"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을 속이는 게 없소."
"크흐흐, 우리를 죽여 준다면 그 말을 믿겠다!"
무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죽는 게 소원이란 말이오?"
"보고도 모르느냐? 우리의 유일한 소원은 한시라도 빨리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음……."
무린은 침음성을 토했다.
괴인의 말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들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참혹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도대체 처참한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몸뚱이에 무슨 생(生)의 미련이 있겠는가?
무린이 침중하게 말했다.
"소원이라면 내가 당신들을 죽여 주겠소."
"그게 정말이냐?"
"그렇소."
"그러면 제발 빨리 죽여 다오! 또 고문의 시간이 다가온다! 지옥이 이곳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런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로 가겠다! 크흐흐흐……!"
처절한 비원(悲願)이 깃든 음성이었다.
무린이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방법으로 죽는 게 좋겠소?"
괴인들은 무린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자 매우 기뻐했다.
"정말 고맙네! 우리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을 수 있게 되었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단숨에 우리의 사혈(死穴)을 짚어 주게!"
죽는 걸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니. 무린은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을 죽여 주는 게 인간의 도리다.'
그는 천천히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이때 한 괴인이 처연하게 물었다.
"젊은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을 한 가지만 더 들어 줄 수 있겠는가?"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괴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쩍였다.
"만약 백상회(白象會)의 인물을 만나면 한 마디만 전해 주게! 물건(物件)은 무영수련장에 있다고!"
"……?"
무린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백상회(白象會)>
당금 무림에서 궁륭마천부의 패도(覇道)에 대항하고 있는 유일한 지하세력이다.
백상회의 조직과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정도천하(正道天下)를 추구하는 백도고수(白道高手)들과 전대기인(前代奇人)들로 비밀리에 조직되어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하얀 코끼리로 상징되는 백상회는 정도무림의 지하 비밀결사(秘密決社)였다.
주도세력은 이미 궁륭마천부에 의해 해체된 개방( 幇)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무린이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전해 달라는 말의 내용이었다.
- 물건은 혈영수련장에 있다!
물건이라니 대체 무슨 물건이란 말인가?
그리고 무영수련장이라면 무린이 상처난 새의 발목에서 떼어 낸 종이쪽지에 쓰여 있던 그 이름이 아닌가?
명주라는 여인이 누군가에게 구원을 청하던 종이쪽지.
무린은 내심 생각했다.
'무영수련장에는 어떤 중대한 비밀이 있다.'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백상회의 인물을 만나면 그 말을 꼭 전해 주겠소."
괴인들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우리 선도삼개(仙道三 )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오오, 선도삼개라 했는가?
그들은 전설적인 개방고수( 幇高手)들이다.
정도무림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이인(異人)들, 대의(大義)가 아니면 결코 따르지 않는 협사(俠士)들이다.
무린은 세 괴인이 바로 선도삼개라는 것을 알자 마음이 약간 착잡해졌다.
그들의 협명은 익히 들어서 내심 호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린은 그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의 우수에서 삼지강(三指 )이 뻗치자, 선도삼개는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죽은 뒤에야 그들의 표정은 평온해졌다.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고통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이다.
"……."
무린은 착잡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려 석실을 나섰다. 그는 어두운 통로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의 마음은 밝지 않았다.
'부주는 역시 철혈공포(鐵血恐怖)의 주인공인가?'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랑십자도 사원은 이미 탈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통로를 나서는 순간, 무린은 저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
앞에는 여덟 명의 홍포인(紅袍人)이 산악처럼 늘어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여덟 홍포인!
그들에게서는 절세적인 첨극고수(尖極高手)의 기도가 심장을 짓누를 듯 뻗쳐 왔다.
무린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부주의 팔대금위령이군!'
팔대금위령!
부주 우문환탑을 그림자처럼 호법(護法)하는 초강고수(超强高手)들이다.
그들의 합공(合攻)을 파해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들의 합공은 무림의 무적일절(無敵一絶)이었다.
팔대금위령 옆에는 파랑십자도 사원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도 역시 탈출에 실패한 것이다.
사원의 옆에는 구문철인 동일비가 우뚝 서 있었다.
우정소녀 빙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는가?
그녀 말대로 하늘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장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무린이 동일비를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전주(殿主)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소이다. 소생은 참정수옥에서 탈출하더라도 전주께 사죄할 생각이었소."
동일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린,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닐세. 자네는 지금부터 팔대금위령의 합공삼초(合攻三招)를 받아 내야 하네."
무린의 검미가 가볍게 치켜졌다.
팔대금위령의 합공삼초를 받아 내라니, 동일비의 신색은 엄숙했다.
"합공삼초를 파해하지 못하면 자네는 참정수옥의 규율을 깨뜨린 죄로 죽음을 당하네."
"……!"
"그러나 그것을 파해하면 자네는 부주님의 특별한 명(命)을 받게 될걸세."
무린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팔대금위령은 부주가 무린을 시험해 보기 위해 보낸 것이다.
무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팔대금위령의 합공삼 초에 생사(生死)가 달린 것이다.
무린은 장내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합공삼초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팔대금위령은 무린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돌연 장내에는 긴박감이 흘렀다. 기류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나 무린의 신색은 물처럼 담담했다.
팔대금위령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린의 주위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긴장이 점점 고조되는 순간, 장내를 쩌렁 울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파황합벽공(破荒合霹功)!"
팔대금위령의 쌍수가 무린을 향해 쭉 뻗쳤다.
구구구궁-!
기류가 진탕하는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찰나지간 무린의 신형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촤아아아-!
그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은광(銀光)이 무지개처럼 뻗쳤다.
다음 순간 엄청난 강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콰아아아-!
장내를 선풍처럼 쓸어 나가는 강기의 파도였다.
이때 팔대금위령의 제이초(第二招)를 알리는 폭갈이 터졌다.
"멸천만폭공(滅天萬暴功)!"
콰우우우웅-!
고막을 파열시키는 굉음이 대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팔대금위령과 무린의 신형이 허공 십 장 높이에서 번개처럼 뒤집혀 교차되는 모습이 보였다.
동일비의 냉철한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무린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저것은 결코 중원의 무공이 아니다!'
그러나 팔대금위령의 세 번째 폭갈이 터졌을 때, 동일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태양자전기(太陽紫電 )!"
햇살 같은 혈광(血光)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투명한 자주색 기주(氣柱)가 뇌전처럼 하늘로 뻗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추아아아악-!
사람의 모습은 눈부신 혈관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쏟아지던 빗발만이 일제히 거꾸로 솟구쳤다.
팔대금위령의 합공삼초가 끝났다.
장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팔대금위령은 무린을 에워싸고 석상처럼 늘어서 있었다.
합공이 개시되기 전의 상태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크게 변해 있었다.
팔대금위령의 안색은 모두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무린을 제압하기 위해 혼신의 진력을 소모한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콩알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편, 무린은 어떤가?
그의 의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휘날리고 있었다. 참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색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했다. 숨결도 물처럼 고요했다.
아아, 믿어지지 않게도 무린은 팔대금위령의 합공삼초를 파해한 것이다.
천하가 경악할 놀라운 일이었다.
동일비가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다행이다!'
그는 약간 격동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린! 이제 됐네. 부주님을 뵈러 가세."
시험은 끝난 것이다. 무린은 동일비와 함께 옥황궁으로 향했다.
파랑십자도 사원은 팔대금위령에 의해 도로 참정수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 * * *
옥황궁의 화정전.
무린은 우문환탑과 독대(獨對)하고 있었다.
우문환탑은 무린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부중(府中)에 이런 천세재화(千世才華)가 있는 것을 몰랐다니…….'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 우문환탑은 무린이 무림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절대기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우문환탑의 눈동자가 형형히 타올랐다.
'나는 오늘 찾고 있던 사람을 드디어 찾아 냈다!'
무슨 뜻인가?
하지만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물처럼 담담했다.
당대의 무림천자 앞에서 이토록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천하에 몇이나 될까?
이윽고 우문환탑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제 본좌가 부여하는 막중한 중대사를 맡아 줄 수 있겠나?"
무린이 대답했다.
"소생은 금령밀전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역시 담담한 어조였다.
우문환탑은 무린을 똑바로 정시했다.
"이번 중대사에 따라 중원은 일천 년의 운명이 결정되네."
"……."
무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우문환탑이 말을 이었다.
"밀비천전이 만약 사마(邪魔)의 손에 넘어 간다면 그 때 이 세상에 닥쳐올 대변겁은 상상할 수도 없네."
"……."
"물론 우리 궁륭마천부도 아직 밀비천전의 위치를 모르고 있네."
"……."
"그런데 천축왕자 아극타가 돌연 수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중원에 출현하여 밀비천전의 소재지를 추적하고 있네. 그들은 밀비천전의 주인이 되어 천하무림을 지배할 야망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네."
그렇다. 밀비천전에는 중원무학의 최정화, 최정수가 있다.밀비천전의 주인이 된다면 천하무림을 지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문환탑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천축왕자 아극타를 제거하고 밀비천전을 찾아 내야 하네. 그리하여 본좌는 그 중대사를 자네에게 맡기려는 것이네."
지금 우문환탑은 밀비천전에 대한 모든 대사를 무린에게 일임하려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무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일곱 달 후면 조광화원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우문환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전주에게 들었네. 그래서 본좌는 자네가 이번 중대사를 빠른 시일 안에 처리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조치를 취하겠네."
"두 가지 조치라면……?"
"첫째로 본좌는 자네에게 대존야(大尊爺)의 직위를 제수하겠네."
오오, 대존야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대존야란 궁륭마천부의 부주와 동일한 신분과 권한을 지닌 통치대행자를 의미한다.
대존야가 출현하는 것은 또 한 명의 무림천자가 탄생되는 것과 같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다.
일찍이 궁륭마천부에 대존야가 탄생된 적이 있었던가?
백오십 년 전 칠황오후삼마(七皇五侯三魔)의 마도세력이 무섭게 창궐했을 때, 단 한 번 대존야가 제수되어 무림에 출도해서 무림천자의 권한을 대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대존야로 제수된 사람은 바로 부주의 아들이었다.
외부인에게는 대존야의 직위를 제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만약 대존야가 반역을 도모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문환탑은 무린에게 선뜻 대존야를 제수한다고 말한 것이다.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패검(黃金佩劍)을 끌러 무린에게 건네 주었다.
"이 천자인검(天子印劍)을 받게."
아홉 마리의 용(龍)이 새겨진 호화로운 패검이었다.
천자인검!
그것은 바로 무림천자를 상징하는 신물(信物)이다.
천자인검이 출현하면 부주가 출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천자인검이 무린에게 건네지는 것은 천하대권(天下大權)의 반(半)이 무린에게 건네지는 것을 의미했다.
우문환탑은 어떻게 이런 대도박(大賭博)을 단행할 수 있는가?
무린을 한 번 보고서 어떻게 이런 용단을 내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우무환탑의 초인적인 통찰력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의 바다처럼 넓은 금도(襟度)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우문환탑은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다. 무린의 능력과 천품(天品)을…….
그리하여 무린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준 것이다. 또한 그것은 앞으로의 중대사가 엄청난 대변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미 세간에는 동방에서 중원을 심판할 응징자가 온다는 소문까지 떠돌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미증유의 무림암흑기가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때는 대존야의 권한이 아니고서는 사태를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린은 천자인검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신색의 변화가 없었다.
우문환탑은 용상에서 내려와 무린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존야, 이제 대존야는 본좌와 똑같은 신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하오."
아, 우무환탑은 이 순간 무린에게 공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또 한 명의 무림천자에게 정중한 예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혼자서 용상에 앉지 않고 아래로 내려와 무린과 나란히 앉은 것이다.
가히 사해(四海)를 포용할 수 있는 대금도(大襟度)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무린은 내심 감동을 느꼈다.
'부주에게는 무림천자의 자격이 있다!'
무린은 형형한 시선으로 우문환탑을 정시하며 말했다.
"소생은 대존야의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우문환탑은 미소를 지었다.
"대존야, 본좌에게는 두 번째 조치가 있으니 심려하지 마시오. 대존야는 곧 궁륭추밀탑에 드시게 되오. 대존야가 그곳에서 나올 때는 천하의 그 누가 대존야의 능력을 따를 수 있겠소?"
무린은 희미한 격동을 느꼈다.
궁륭추밀탑!
궁륭마천부의 어딘가에 있는 지하밀탑(地下密塔)이다.
부주가 무공을 수련하는 곳으로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무림천자의 비밀 연공실(練功室)!
이곳에는 중원 일천 년 무림사의 최고신공(最高神功)과 최상기학(最上奇學)이 소장되어 있다.
무림천자의 무공은 당연히 천하제일이어야 되지 않는가.
무린은 사의를 표했다.
"소생은 결코 대은(大恩)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문환탑이 말했다.
"대존야는 어찌 자꾸 소생이라고 하시오? 또 대은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소. 본좌는 대존야와 함께 무림대사를 해결한 뒤 백 년 영화를 같이 누리고 싶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전류처럼 부딪쳤다.
무린의 검미는 가볍게 좁혀져 있었다.
돌연 우무환탑이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물론 대존야가 일곱 달 후에 조광화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잊지 않고 있소. 그러나 본좌는 결코 대존야와의 인연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무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절대영웅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언가 유현한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는 무린과 천년패도천하를 추구하는 우문환탑이 어떻게 그 장엄한 대운명(大運命)을 엮어 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