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륭추밀탑(穹隆樞密塔) (6/37)

궁륭추밀탑(穹隆樞密塔)

궁륭추밀탑.

지하 사층의 거대한 비밀석탑이다.

궁륭추밀탑에서 무린을 영접한 것은 풍모가 비범한 세 백발노인과 한 아름다운 중년미부(中年美婦)였다.

그들은 무린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노신(老臣)들 추밀사사(樞密四師)가 대존야를 뵙습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구행자(九行子)>

<혈륜자(血輪子)>

<화극자(化極子)>

<영겁신녀(永劫神女)>

이들은 궁륭마천부 부주의 연공을 보좌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학문과 무공은 만류달통(萬流達通), 무불통소(無不通所)라고나 할까?

무림천자를 탄생시키는 무귀(武鬼)들이었다.

무린은 추밀사사에게 답례를 한 뒤 말했다.

"본인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여기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무공을 견문한 뒤 필요한 것을 선택하도록 하겠소."

무린이 궁륭추밀탑에 머물기로 한 것은 불과 한 달이었다.무림중대사가 그만큼 급박하게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추밀사사는 일제히 복명했다.

"노신들은 대존야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어서 구행자가 앞으로 나섰다.

"대존야께서는 먼저 구행전(九行殿)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구행전.

지하 일층에 있는 대전이었다.

이곳에는 중원 정종무학(正宗武學)의 최고정화(最高精華)만이 소장되어 있었다.

구행자는 먼저 고색창연한 일곱 권의 비급을 무린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이 정종칠대신서(正宗七大神書)입니다."

무린은 책을 한 권 한 권 살펴보았다.

<수미패엽원불진경(垂彌貝葉元佛眞經)>

<무상구궁검경(無上九宮劍經)>

<상고천유진해(上古天儒眞解)>

<오행혈경(五行血經)>

<무자화결(無字畵訣)>

<겁겁불세연화비공(劫劫佛世蓮花秘功)>

<만법전(萬法典)>

정종칠대신서는 구파일방 등 정도무림에서 꿈 속의 천서(天書)로 불린다.

단 한 번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평생 소원인 무림인이 대부분이다. 과연 무림천자의 연공실에서나 볼 수 있는 희세비급들이었다.

그런데 정종칠대신서를 하나하나 훑어보는 무린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차라리 무감동하다고 할 정도였다.

옆에 시립해 있는 구행자는 내심 괴이함을 느꼈다.

'대존야께서는 정종칠대신서에 대해 별다른 흥미를 느끼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는가?

천하무림인들은 모두 정종칠대신서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뒤집힐 지경인데…….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무린은 정종칠대신서를 구행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정말 무한한 현기(玄機)를 지닌 기서(奇書)들이오. 그런데 다른 것은 없소?"

구행자는 안색이 변했다.

무린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무한한 현기를 지녔다고 칭찬을 하고 돌려주며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구행자는 급히 장서고(藏書庫)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가장 난해하고 기괴한 이서(異書)들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다!'

구행자는 곰팡내가 물씬 풍기는 네 권의 이서를 가지고 나타났다.

무린은 그것을 받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계천기비록(宇界天機秘錄)>

<고금의총(古今醫叢)>

<유유만진원원경(幽幽萬陣元元經)>

<천세혈향염정록(千世血香艶情錄)>

우계천기비록은 일종의 역술서였다.

천하의 삼천 년 운명이 낱낱이 예시되어 있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고, 태양은 영원히 동쪽에서 뜨리라는 에언으로 ㄱ을 맺고 있었다.

저자(著者)는 대허풍존자(大虛風尊者)였다.

고금의총(古今醫叢)은 희귀한 의술서(醫術書)였다.

고금을 통해 가장 유명한 천 명의 의원에 대해 기술되어 있었다.

신의(神醫)라 추앙받는 화타와 편작은 의외에도 십 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서열 일 위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혀 있고, 책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세상의 병(病)이 모두 없어지면 의원들은 굶어 죽는다. 천하의 의원들은 그 점을 경계해야 된다.

만고제일신의(萬古第一神醫) 동전(銅錢)>

유유만진원원경은 진법서(陣法書)였다.

무린의 일만 가지 진식(陣式)이 상세히 해설되어 있었다.

진식을 통과하는 최선의 방책은 우회(迂廻)라고 적혀 있었다.

저자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스승이라는 태갈공명(太曷公明)이었다.

미소를 띤 채 세 권의 괴서(怪書)를 하나하나 훑어본 무린은 마지막 책자를 집어 들었다.

이름부터가 흥미를 끌었다.

천세혈향염정록(千世血香艶情錄)!

이것은 고금무림을 통해 별처럼 명멸해 간 수많은 절세영웅(絶世英雄), 천향미색(天香美色)들의 애정(愛情), 혼인(婚姻), 정사(情事)에 대한 책이었다.

거기에는 세상이 모르는 비사(秘事)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내용 속에 빨려 들어갔다.

'이 책의 내용은 의외로 사실적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일찌기 동해제일검녀(東海第一劍女) 백봉(白鳳)은 동방에서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청년의 이름은 고구웅(高句雄)이었다.

그러나 두 남녀의 사랑은 처절한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백봉은 애검(愛劍)을 자신의 심장에 꽂고, 청년은 동해의 푸른 물에 몸을 던졌다.

그것은 지난날의 무서운 은원(恩怨) 때문이었으니, 중원과 동방에는 본래 처절한 천년지원(千年之怨)이 얽혀 있었다.>

아득한 옛날 동방에서 일어난 사랑의 애화(哀話).

현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무린은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구행자는 무린이 천세혈향염정록에 빠져드는 것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으흠, 역시 대존야께서는 젊기 때문에 그런 방면에 취미가 있으셨군.'

그는 즉시 장서고에서 또 한 권의 두툼한 책자를 가져와 무린에게 바쳤다.

"대존야! 이 책에는 더욱 진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린은 책자를 받아 살펴보았다.

제자(題字)부터가 지극히 화려했다.

<운우환락무궁진경(雲雨歡樂無窮眞經)>

과연 책자엔 진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천 가지 묘방(妙方)에 대한 상술서(詳述書)였다.

눈에 띄는 대로 소제목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전희삼백기(前戱三百技), 음양체위일백식(陰陽體位一百式), 무아황홀대법(無我恍惚大法) 등등이었다.

돌부처라도 몸이 화끈 달아오를 성애(性愛)와 정사(情事)의 비술(秘術)이 가득했다.

무린은 내용을 살펴본 뒤 정중하게 책자를 돌려주었다.

"재미는 있지만 지금은 한가한 때가 아니니 읽어 볼 여유가 없구료. 구행자께서는 자세히 읽어 보았을 테니 취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구행자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린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천세혈향염정록이나 좀더 읽어 보아야겠소."

결국 무린이 흥미를 느끼고 선택한 책은 그 한 권뿐이었다.

구행자는 문을 나서는 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해졌다.

"……."

도대체 무린은 정종무학의 최고정화가 무수히 소장되어 있는 구행전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아니, 그는 그 모든 것을 이미 통달하고 있단 말인가?

혈륜전(血輪殿).

지하 이층에 있는 대전이었다.

이곳에는 궁륭마천부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 소장되어 있었다.

혈륜자는 한 권의 홍첩(紅牒)을 무린에게 바쳤다.

"이것이 궁륭마천부의 종사록(宗社錄)입니다."

무린은 홍첩을 받았다. 표지엔 황금빛 제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궁륭마천부종사록(穹隆摩天府宗社錄)>

무린은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장부터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백 년 전, 중원에는 유사 이래 절대천인(絶對天人)이 한 분 출현하셨다. 그분은 구유은천자(九幽隱天子) 등화경(鄧化卿)이니, 궁륭마천부의 위엄은 바로 그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무린의 미간이 가볍게 좁혀졌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구유은천자 등화경이라면…….'

구유은천자 등화경!

그는 정도(正道)와 마도(魔道), 사도(邪道)의 무공을 통합하여 가공할 패도무공(覇道武功)을 연성해 낸 천출기인(天出奇人)이었다.

바로 무림사상 가장 강한 패도무공이라는 혈혈패천만백공(血血覇天萬魄功)의 완성자였다.

그러나 그는 무림에 나서지 않고 평생 은거를 했다. 말년에는 마침내 밀비천전의 청첩을 받았으니…….

우비잠천전의 초대!

그것은 그의 일신 무공이 무심사의 최고봉(最高峰) 중 하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뒤 등화경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궁륭마천부종사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구유은천자께서는 밀비천전의 청첩을 받았으나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무림천하에 대도(大道)를 펼칠 큰 뜻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었으니, 그 뒤에 그분이 길러 낸 제자가 바로 개사제일영(開史第一英) 우문황(宇文凰)이시다.>

무린은 내심 놀랐다.

'구유은천자가 밀비천전의 초대에 불응하고 길러 낸 제자가 바로 개사제일영 우문황이었구나!'

개사제일영 우문황!

명호 그대로 무림개사 이래의 영웅이다.

중원에 홀연히 출현하자, 우문황은 한 자루 무천팔황신검(無天八荒神劍)으로 천하를 파죽지세로 휩쓸기 시작했다.

당시는 특히 사마도(邪魔道)가 융성할 때였다.

마도지존문(魔道至尊門)인 흑태양성(黑太陽城), 사도지존문(邪道至尊門)인 지저사황부(地低邪皇府)!

무적공포시대를 구가하던 흑태양성과 지저사황부가 우문황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세세삼왕(世世三王), 흑령오무제(黑靈五武帝), 혈혼역천궁(血魂逆天宮), 만독대(萬毒臺), 환사루(幻邪樓) 등 일세를 풍미하던 패자(覇者)들도 무천팔황신검 아래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무림출도 십 년 만에 우문황은 마침내 정도와 사도, 마도를 완전히 제패했다.

그리고는 동백산에 거대한 궁성을 건립하니, 바로 궁륭마천부였다.

개사제일영 우문황은 궁륭마천부의 초대 부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문황은 곧 아들 우문개로(宇文介路)에게 부주직을 넘겨 주고 자신은 은퇴했다.

우문개로 역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궁륭마천부의 일개 분파(分派)로 만들고, 중원 동서남북(東西南北)에 사대분궁(四大分宮)을 건립했다.

궁륭마천부를 거대한 패도무황조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것이다. 후에 그는 휘황한 명호를 얻었으니…….

<개세천무황(凱世天武皇)>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천자의 탄생이었다.

현재의 부주 우문환탑에게는 조부(祖父)가 된다.

무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궁륭마천부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궁륭마천부의 건립은 장엄하고 위대한 근세 중원무림사 바로 그것이었다.

무린은 다시 종사록을 읽어 내려갔다.

<우문황 초대부주께서 궁륭마천부를 건립하고 곧 은퇴하신 것은 한 가지 검공(劍功)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칠십 년의 고련 끝에 검공을 완성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혼혼폐황신검공(  閉荒神劍功)이다.

후대(後代) 부주는 구유은천자의 혈혈패천만백공과 함께 이 혼혼폐황신검공을 연성하면 궁륭마천부의 위업을 영원히 지속하게 되리라.>

종사록은 끝났다.

무린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혈혈패천만백공>

<혼혼폐황신검공>

이 두 가지 무공이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천년패도천하를 추구하는 궁륭마천부의 핵심무공인 것이다.

누가 이 두 가지 무공 앞에 맞설 수 있으랴!

혈륜자는 무린에게 하나의 금합(金盒)을 바쳤다.

"여기에 혈혈패천만백공과 혼혼폐황신검공의 비급이 있습니다."

무린은 금합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두 권의 붉은 책자가 들어 있었다. 문제의 두 비급이었다.

무린은 책자를 향해 손을 뻗쳤다. 그런데 문득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금합의 뚜껑을 닫아 도로 혈륜자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일곱 달이 지나면 이 궁륭마천부를 떠날 사람이니 이 두 가지 무공에는 손대지 않는 것이 사리(事理)에 맞을 것 같소."

무린은 중요한 문제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무린이 궁륭마천부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을 익히는 것은 바로 궁륭마천부에 입문(入門)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일곱 달 후에 어떻게 궁륭마천부를 떠날 수 있는가?

무린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

미련없이 문을 나서는 무린을 바라보며 혈륜자는 그만 멍해졌다.

화극전(化極殿).

궁륭추밀탑의 지하 삼층에 있는 대전이었다.

이곳에는 고금무림의 여러 가지 광세기보(曠世奇寶)가 소장되어 있었다.

무린은 화극자의 안내를 받아 그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번째 기보는 하나의 괴도(怪刀)였다.

<한혈묵철도(汗血墨鐵刀)>

천오백 년 전, 계외비래마(界外飛來魔) 극악기(極岳奇)가 사용하던 공포의 마도(魔刀)였다.

이 거무튀튀한 묵철도는 항상 붉은 핏방울 같은 땀을 뚝뚝 흘린다.

그것은 한혈묵철도 아래 피이슬로 사라진 수많은 생령(生靈)이 흘리는 원한의 눈물이라고 한다.

계외비래마 극악기는 평생을 통해 사천사백사십사 고수의 생명을 빼앗았다고 한다.

무린은 철합 속에 들어 있는 한혈묵철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과연 한혈묵철도의 거무튀튀한 도신(刀身)에는 핏방울처럼 붉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기이한 형상이 아닌가?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전율을 느꼈다.

'저주받은 지옥의 마도(魔刀)다!'

무린은 철합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두 번째 기보, 그것은 놀랄 만큼 거대한 호로병이었다.

어느 위대한 주신(酒神)께서 가지고 다니던 물건인가?

<사해만취주호(四海滿醉酒 )>

호로병의 이름이다.

구백 년 전, 무림에는 상취매옹(常醉梅翁)이라는 괴노인이 있었다.

그는 술과 매화가 아니면 죽고 못 사는 인물이었다. 매화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것이 오직 하나의 인생지락(人生之樂)이었다.

사해만취주호는 바로 그가 매화를 찾아다닐 때 차고 다니던 호로병이다.

한데, 이 거대한 호로병이 무슨 광세기보인가?

무린은 이 호로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호로병의 쩍쩍 갈라진 표피에 이상한 문자(文字)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이것은……."

분명 어떤 무공의 요결이었다.

화극자가 말했다.

"상취매옹은 백이십 년 평생에 매화파라수(梅花巴羅手)라는 한 가지 기공(奇功)을 완성했습니다. 호로병에 새겨져 있는 것은 그 매화파라수의 요결이라고 합니다."

무린은 요결을 살펴보는 동안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은 일반 장공(掌功)이나 지공(指功)과는 전혀 다르다. 일찍이 본 일이 없는 전수공(全手功)이다!'

<매화파라수>

상취매옹은 이 기공을 완성했으나 평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에 딱 한 번 매화파라수를 펼쳤는데, 그 때 천공에는 거대한 홍매화(紅梅花) 한 송이가 피어나며 그 아래 석산(石山) 하나가 완전히 녹아서 용암처럼 흘렀다 한다.

무린은 매화파라수의 요결을 머리 속에 새겨 놓았다.

'분명 사상 최강의 전수공이다!'

계속하여 무린은 무림기보 하나하나를 살펴 나갔다.

문득 무린의 발길이 한 조그마한 목합 앞에서 멈췄다.

목합 속에는 수정(水晶)으로 만든 호접(蝴蝶)이 한 마리 들어 있었다.

크기는 손바닥의 반만 한데 실물(實物)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화극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정비혼접(水晶飛魂蝶)이며, 주인을 만나야만 날 수 있다는 전설 속의 이물(異物)입니다. 아직까지는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수정으로 만든 나비가 어떻게 날 수 있는가?

<수정비혼접>

천칠백 년 전, 호소자(胡小子)라는 희대의 보석장인(寶石匠人)이 만들어서 어느 신비로운 공포대마종(恐怖大魔宗)에게 바쳤다는 이물이다.

그 공포대마종은 세상에 출현한 적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다.

- 수정비혼접이 한 번 날개를 펼치는 날, 천하인의 혼백(魂魄)은 구천에 흩어지리라!

무린은 수정비혼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이것은 기류심강(氣流心 )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암기(暗器)다!'

기류심강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반 무림인은 들어보지도 못한 무공이다.

돌연 무린의 눈동자에선 기이한 청광(靑光)이 뻗쳤다.

그 투명한 청광에 부딪친 순간, 수정비혼접은 양날개를 한 번 파르르 떨더니 허공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화극자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천칠백 년 동안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다는 수정비혼접이 지금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수정비혼접은 허공을 선회하며 무린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무린이 담담히 물었다.

"이 나비를 가져도 되겠소?"

화극자는 놀라서 더듬거렸다.

"무… 물론입니다. 대존야께서 원하신다면 여기에 있는 어떠한 기보도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소."

무린은 다른 기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극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대존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셨다!'

무린은 부친이 있는 조광화원에서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혔다.

그러면 그 조광화원의 무공은 중원의 무공을 훨씬 초월한단 말인가?

또 그것은 어느 문파의 무공이란 말인가?

무린이 마지막으로 발길을 멈춘 곳은 하나의 석판(石版) 앞에서였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백과석(白果石) 석판!

크기는 불과 손수건만하다. 석판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퍼런 이끼까지 끼여 있었다.

그런데 석판 위에는 이상한 문자가 몇 줄 새겨져 있었다.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희미한 문자였다.

화극자가 말했다.

"그 석판은 상고무림대신종(上古武林大神宗) 구양상개(歐陽上蓋)가 남긴 영원불해판(永遠不解版)입니다. 그 석판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히 없다는 뜻에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아, 놀라운 이름이었다.

상고무림대신종 구양신개!

그는 이천 년 전의 신인(神人)이다.

중원의 최고현공(最高玄功)은 모두 그에게서 파생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는 중원무림의 원세대조종(元世大祖宗)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전은 전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해석할 수 없다는 이 석판 하나가 전부였다.

무린은 영원불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안광이 심유하게 번쩍였다.

'이것은 갑골문자나 과두문자보다 더 오래된 상고문자(上古文字)다.'

무린은 화극자를 향해 말했다.

"나는 앞으로 한 달간 이 영원불해판을 연구해 보도록 하겠소."

화극자는 공손히 응답했다.

"대존야의 뜻대로 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극자는 내심 한숨을 토해 냈다.

'영원불해판은 역대 부주께서도 수십 년을 연구했지만 모두 해석에 실패했거늘… 대존야께서는 이 수많은 기보 중에서 제일 쓸모없는 것을 선택하시는구나!'

영겁전(永劫殿).

궁륭추밀탑의 마지막 지하 사층에 있는 대전이다.

그곳에는 영겁신녀가 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겁신녀는 매우 아름다운 미부(美婦)였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 그녀는 무린을 향해 단아한 태도로 말했다.

"천녀(賤女) 염류빈(艶柳彬)은 부주님의 명을 받들어 대존야께 한 가지 심결(心訣)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염류빈을 유심히 바라보던 무린은 엉뚱한 말을 불쑥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신녀(神女)는 정말 아름답구료. 나는 신녀처럼 정숙하고 기품 있는 여자를 좋아하오."

갑자기 무슨 소린가?

"……!"

염류빈은 약간 당황한 눈치다.

무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대군수 우문검지도 한 번 만나 보았는데… 아름답긴 하지만 성품이 너무 강해서 여자다운 맛이 없었소."

중원의 꽃 우문검지가 여자다운 맛이 없다니, 누가 그녀를 맛보라고 사정이라도 했던가?

염류빈은 의외의 말을 듣고 응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천녀는 다만……."

갑자기 무린이 그녀의 옥수를 덥석 잡았다.

"신녀는 정말 피부도 곱구려. 꼭 비단결 같소."

마치 시정(市井)의 건달이 여자를 희롱하는 수작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염류빈은 얼굴까지 붉어졌다.

"대존야……."

그러나 대존야 앞에서 감히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손을 잡힌 채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무린은 염류빈의 손을 쓰다듬으며 자못 흡족한 표정이다.

"아… 피부의 감촉이 정말 녹아나는 것 같군."

말려 줄 사람도 없고, 염류빈은 이제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무린이 겨우 손을 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나에게 전해 준다는 심결이 무엇이오?"

염류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색향파행심결(色香破行心訣)이라고 합니다."

"색향파행심결? 이상한 이름이군."

"대존야께서는 앞으로 무서운 혼세미녀(混世美女)들과 많이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색향파행심결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린이 씨익 웃었다.

"이제 알겠소. 색향파행심결은 미녀를 능숙하게 다루는 비결이구려."

염류빈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닙니다. 색향파행심결은 일종의 현묘한 심공(心功)입니다."

"미녀와 심공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색향파행심결은 여인들의 모든 미공(媚功)을 파해할 수 있습니다."

"미공이라……."

미공이란 여인들이 색정(色情)을 이용하여 펼치는 모든 무공을 말한다.

염류빈이 다시 말했다.

"미공이란 어떠한 사마공(邪魔功)보다도 위험한 일면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미녀의 색정적인 유혹 앞에서 바보가 되어 버리는 남자가 어디 한두 명인가? 그래서 신세 망친 절세영웅도 부지기수다.

무린이 중얼거렸다.

"미공을 펼치는 혼세미녀들이라… 정말 관심이 가는군."

무린은 오히려 기대가 되는 눈치다.

염류빈의 아름다운 얼굴에 우려의 빛이 나타났다.

'걱정된다!'

생각은 그렇게 했으되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대존야, 이 그림을 보십시오."

그녀는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쫙 펼쳤다.

그것은 실제 크기의 나녀도(裸女圖)였다.

일순간에 무린의 시선은 나녀도로 빨려 들어갔다.

귀미(鬼美), 처염(悽艶)!

그것은 진정 가슴이 섬뜩해지도록 아름답고 사요(邪妖)한 나녀도였다.

무린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어찌 일개 나녀도가 저토록 사람의 혼을 사정없이 앗아가는 것일까?

염류빈이 말했다.

"이 그림은 억만번뇌산승(億萬煩惱山僧)이 그린 열반화경나녀도(涅槃化境裸女圖)입니다."

억만번뇌산승!

구백 년 전의 밀종기승(密宗奇僧)이다. 그는 일생 동안 일천 미녀의 나신을 화폭에 옮겼다.

여체의 감상을 통해 해탈한다는 괴이한 선공수업(禪功修業)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녀도를 그린 뒤에는 곧 불에 태워 버렸다.

불수(佛壽) 백 년.

입적하기 전에야 그는 열반화경나녀도 단 한 장을 남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색향파행심결을 깨우치면 세상의 모든 여인들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이 나녀도에는 어떤 현오한 심결이 깃들어 있단 말인가?

무린은 나녀도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

나녀의 자세는 십분 오묘했다.

무릎을 꿇은 채 한쪽 다리를 세워서 살짝 벌리고 있다. 왼손은 치켜들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머리결을 받쳐 올리고, 오른손은 활짝 펴서 풍만한 가슴을 가리고 있다.

옥용(玉容)은 머리결에 반쯤 가려졌는데, 호수 같은 눈동자는 안개처럼 몽롱한 기운에 싸여 있다.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낼 듯 붉고 촉촉한 입술은 또한 어떠한가?

진정 살인적인 염기를 뿜어 내는 나녀도가 아닌가!

그런데 나녀의 양손 십지(十指)가 절묘한 각도로 제각기 어느 방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일원구궁(一元九宮)이었다.

양발은 교묘히 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음양이극(陰陽二極)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문득 무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갔다.

"음……."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정말 몸살나겠네!"

염류빈이 냉정하게 말했다.

"대존야께서는 그림 속에 깃들어 있는 심결을 깨우치셔야 합니다."

무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 속에 무슨 심결이 있단 말이오? 저 탐스러운 가슴하며… 대리석 같은 다리……."

"대존야……."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알겠소. 저 매끈한 아랫배 밑에… 하하하, 결국 인생의 모든 진리는 거기에 있다는 뜻이 아니오?"

무린은 큰 진리를 발견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염류빈은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좀더 냉정하게 말했다.

"대존야!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인생의 모든 진리는 그곳에……."

염류빈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그게 아닙니다!"

문득 무린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녀, 색향파행심결이 정말 세상의 모든 여인들을 지배할 공능(功能)이 있소?"

찰나 무린의 두 눈에서는 은은한 기광(奇光)이 뻗쳤다.

그 안광에 부딪친 순간 염류빈은 전류에 닿은 듯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은 기이하게도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녀의 손에 들려졌던 나녀도가 아래로 털썩 떨어졌다.

무린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신녀… 웃옷을 좀 벗어 볼 수 있겠소?"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런데 염류빈은 이 말이 떨어지자 서슴없이 옷자락을 풀어 헤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웃옷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희고 둥그런 어깨가 나타났다.

사르르-!

다음에는 봉긋한 가슴이 나타났다. 가슴은 하얀 비단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그것도 마저……."

염류빈은 젖무덤을 가렸던 비단천을 가슴에서 떼어 냈다.순간 한 쌍의 풍만한 유방이 출렁 흘러나왔다.

무린은 미미하게 턱을 끄덕였다.

"이리 가까이……."

염류빈은 무린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유방은 걸음을 옮기는데 따라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조그마한 꽃망울 같은 유실(乳實)이 너무나도 고혹적이다.

짙은 체향이 향긋하게 퍼졌다.

염류빈은 무린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무린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음……."

그는 염류빈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여인의 가슴에 묻었다.

잠시 동안 그는 여인의 살냄새를 맡듯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윽고 무린이 얼굴을 떼며 말했다.

"이제 옷을 입으시오."

염류빈은 비로소 옷을 입었다.

이때 돌연 무린이 그녀의 어깨를 탁 치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신녀, 나의 색향파행심결이 어떻소?"

문득 염류빈은 정신을 차렸다.

"천녀가……."

"하하… 나의 색향파행심결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쓸 만하구료. 신녀가 꼼짝없이 빠져드는 걸 보니……."

아, 무린은 벌써 열반화경나녀도 속의 색향파행심결을 깨우쳤단 말인가?

염류빈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면… 대존야께서는 색향파행심결로… 천녀를……."

무린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나녀의 젖가슴을 한 번 보고 싶었소. 살냄새도 한 번 맡아 보고……."

염류빈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놀라움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대존야의 오성(悟性)은 경천할 정도지만… 그런 짓궂은 짓을……."

이때 무린이 약간 쓸쓸한 빛으로 말했다.

"나는 어머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나를 낳고 곧 돌아가셨기 때문이오."

"……!"

"그런데 신녀를 처음 보자 문득 어머님 생각이 났소. 그래서 신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살냄새를 한 번 맡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오."

그렇다면 무린이 염류빈의 손을 잡고 짓궂은 행동을 한 것은 그녀에게서 모정(母情)을 느꼈기 때문이었던가?

염류빈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대존야께서는……."

그녀의 노여움은 순식간에 연민으로 바뀌었다.

무린의 행동은 차라리 천진한 것이었다.

염류빈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대존야, 색향파행심결은 비록 현묘한 심공이지만 더 높은 상대에게 사용하면 오히려 화(禍)를 초래하게 됩니다."

무린이 말했다.

"그 심결은 일원구궁과 음양이극의 특이한 운행에 따라 펼치는 심공이오. 그러나 공력이 높은 상대에게 사용하면 반대로 실혼(失魂)의 위험이 있소."

무린은 벌써 색향파행심결을 완전히 깨우치고 있었다.

염류빈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존야가 우연히 제수된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대존야, 이제 궁륭추밀탑의 가장 중요한 안배가 남아 있습니다. 대존야께서는 천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무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류빈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안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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