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환미(絲絲幻美) 우주향(宇宙香)>
놀랍게도 그녀는 대무후제국(大武后帝國)의 승상(丞相)이라고 했다.
대무후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대무후제국!
여인천하(女人天下)를 부르짖으며 사백 년 전에 창궐했던 가공할 대제국(大帝國)이다.
그들은 한때 중원을 반 이상이나 석권하여 천하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세상이 고금최초의 여인천하로 변할 형세였다.
그러나 중원의 운명에 위기를 느낀 모든 대소문파(大小門派)가 하나로 연합하여 십만 고수가 일제히 대무후제국을 공격하니, 대무후제국은 건립 십 년 만에 처참하게 궤멸당하고 말았다.
당시 희생된 쌍방의 고수가 수만 명. 중원인으로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무서운 대악몽(大惡夢)이었다.
그런데 그 대무후제국의 승상이라는 여인이 홀연히 출현한 것이다.
아직 사사환미 우주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전율할 정도의 절세염색(絶世艶色)을 지녔는데 항상 흑사(黑絲)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고 했다.
무공은 초절무쌍(超絶無雙), 측량할 수도 없는 신비경(神秘境)이라고 했다.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무서운 대마녀들이 모두 사사환미 우주향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풍문이 번졌다.
대무후제국은 삼백 년 전의 패망에서 불사조(不死鳥)처럼 부활한 것인가?
사사환미 우주향은 중원에 출현한 또 다른 태풍의 핵이었다.
분명 중원은 태풍전야(颱風前夜)를 맞이하고 있었다.
* * * *
금령밀전.
계절은 서서히 초하로 접어들고 있었다. 숲은 짙은 녹음(綠陰)으로 물들어 갔다.
이날따라 밀전은 매우 고요한데, 정원의 숲 속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터덜터덜 되는 대로 내딛는 발걸음이 소녀답지 않다.
그녀의 용모에서 맨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동그란 얼굴에 살짝 치켜들린 코였다.
바로 노노아였다.
여전히 허리춤에는 곰방대를 꽂고 어깨에는 늙은 앵무새 견자(犬子)가 앉아 있었다.
노노아는 사위를 재빨리 둘러보더니 커다란 바지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수건에 소중히 싸여 있었다.
노노아는 손수건을 펼쳤다.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우육완자(牛肉完子)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고급 완자였다.
때깔도 좋을 뿐더러 향기가 코를 녹일 듯 구수하다.
노노아는 완자를 하나 집어 입 속에 넣어서 오물오물 씹더니 탄성을 토했다.
"으음, 정말 천하일미(天下一味)로군! 옥황궁(玉凰宮) 주방의 완자는 언제나 내 입맛에 딱 맞는다니까."
옥황궁이란 부주가 있는 성역(聖域)이 아닌가?
노노아가 어떻게 옥황궁의 주방에 있는 완자를 손에 넣었을까?
노노아는 또 하나의 완자를 입 속에 집어 넣었다.
"쩝쩝… 술까지 한 잔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주고(酒庫)까지 들어가서 화향우로주(花香雨露酒)나 한 동이 훔쳐… 아니 가져올 걸."
그녀는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정정(訂正)까지 한다.
새 개의 완자를 먹어치운 노노아는 잠시 망설였다.
"이제 완자가 두 개 남았는데 다 먹어 치울까? 아니면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먹을까?"
매우 고민이 되는 눈치였다.
마침내 노노아는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완자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훔쳐 오면… 아니 가져 오면 되니까."
일단 용단을 내린 노노아는 두 개의 완자를 한꺼번에 입 속에 넣으려 했다. 기왕에 먹을 바에는 사정없이 먹어치울 심산이었다.
이때 웬일인지 노노아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
그녀는 완자를 재빨리 손수건에 싸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시침을 딱 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시 시작했다.
"으으응… 동방화촉 불 꺼지면… 으흥… 금침자락이 펄럭이고……."
괴상한 노래가 막 시작되는데 한 인영이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났다.
노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혀… 형(兄)!"
그녀는 그에게 와락 달려들어 매달렸다.
"형! 그동안 어디 갔다 왔어?"
나타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한 달 만에 드디어 궁륭추밀탑을 나온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신색은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눈부시게 수려하고 늠연한 모습이었다.
노노아는 일순 멍해졌다.
'형은… 변했다!'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아, 너에게서 매우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노노아는 해죽 웃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는 손수건을 펼쳐 두 개의 완자를 꺼냈다.
"두 사람이 한 개씩 먹으면 딱 맞겠군. 나도 아직 한 개도 안 먹었으니… 쩝쩝……."
그리고는 완자 한 개를 집어 들어 재빨리 자기 입 속에 집어 넣더니 나머지 한 개는 무린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무린이 완자를 씹으며 물었다.
"맛있구나. 그런데 어디서 난 거냐?"
"옥황궁에서 훔쳐… 아니 가져온 거야."
"옥황궁에는 어떻게 들어갔느냐?"
"그냥… 들어갔지."
"옥황궁 주방의 완자를 슬쩍 집어 왔단 말이냐?"
"슬쩍 집어 온 게 아니고… 그냥 가져 왔어."
"그게 그거 아니냐?"
"으응, 그렇지만 보는 사람도 없고……."
노노아는 어물쩍거리더니 급히 얘기를 돌렸다.
"그런데 형은 어디 갔다 온 거야? 노아는 누굴 데리고 놀라고……."
천하의 대존야에게 형이라니, 데리고 놀다니…….
하긴 노노야는 대존야고 뭐고 알 바가 아니다. 부주에게 진상할 완자까지 훔쳐먹는 판국이 아닌가.
이때 노노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견자가 늙어서 어두운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다음 순간 견자는 무린의 가슴을 향해 번개처럼 덮쳐들었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무린의 가슴에는 한 마리의 투명한 나비가 앉아 있었다.
수정비혼접!
바로 그 신비로운 암기였다.
견자는 갈고리처럼 굽은 부리로 수정비혼접을 꽉 찍었다.
그러자 수정비혼접의 날개가 기이하게 파동치며 견자의 대머리를 후려쳤다.
견자는 대경하여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토해 냈다.
"개자식!"
늙은 앵무새는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쳐 버렸다.
수정비혼접은 허공으로 솟구쳐서 유유히 떠돌고 있었다. 진짜 나비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무린은 기류심강(氣流心 )으로 펼치는 수정비혼접의 운용법(運用法)을 십이 성 완성한 게 분명했다.
무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견자가 임자를 만났구나!"
노노아는 깜짝 놀라 수정비혼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건……."
문득 무린이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아, 너는 내가 떠나면 심심하겠구나."
노노아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
"형이 또 언제 떠난다는 거야?"
"곧 떠나게 된다."
"어디로 떠나지?"
"어디로 가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언제 돌아올 거야?"
"그건 모른다. 영원히 안 돌아올지도……."
노노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럼 나도 갈 테야!"
"너는 어려서 안 된다."
"흥! 나는 안 어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
그건 사실이리라. 술과 담배도 먹고 옥황궁의 완자까지 훔쳐먹을 수 있는데 뭘 못하랴.
무린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떠나기 전에는 함께 재미있게 지내도록 하자."
그는 노노아의 뺨을 한 번 쓸어 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수정비혼접은 유유히 허공을 날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노노아는 크게 마음이 상한 듯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곰방대를 꺼내어 뻐끔뻐끔 빨기 시작했다.
"곧 떠난다고…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노노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맘대로는 안 될걸! 이 노노아를 우습게 생각한다면… 흥흥! 그건 큰 오산이지.'
그녀의 오똑 치켜들린 코에는 굉장한 고집이 도사리고 있었다.
풀밭에 한 사내가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삼십 세쯤 되었을까?
갈색 피부에 완강하게 각진 턱, 좁은 이마 아래 움푹 들어간 눈, 마치 화강암처럼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왜소한 체구 또한 바위처럼 억세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내의 눈빛은 소년처럼 깨끗하다.
차라리 단순한 느낌이 들 만큼 맑은 시선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사내가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한 마리의 벌레였다.
개똥벌레, 밤이면 새파란 반딧불을 반짝이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벌레다. 물론 지금은 낮이라 불빛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사내는 개똥벌레가 매우 신기한 듯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이때 발 하나가 불쑥 나타나 벌레를 지그시 밟아 버렸다.
예쁜 가죽신을 신은 여인의 발이었다.
사내의 시선이 발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날씬하고 섬세한 교구, 눈이 부시게 화사한 절세미녀(絶世美女)였다.
요염하게 화장을 한 얼굴, 일신에 걸친 꽃무늬 홍장(紅裝)은 우아하기 짝이 없다.
최신 유행의 갈라진 치마 사이로 대리석처럼 미끈하게 뻗은 다리가 보인다.
그 다리는 눈처럼 흰 허벅지까지 살짝 드러나 있어 숨이 막힐 만큼 뇌쇄적이다.
장님이라도 이 여인을 보면 눈이 번쩍 떠지리라.
그러나 벌레를 들여다보던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의 우직한 눈빛에는 짙은 노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벌레를 밟아 죽인데 대한 분노였다.
사내가 무쇠 같은 주먹으로 홍장미녀의 가냘픈 교구를 후려치려 하는 순간, 홍장미녀의 양귀비처럼 새빨간 입술 사이로 맑은 교성이 흘러나왔다.
"철묵(鐵默), 내가 집게벌레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요. 당신은 집게벌레를 제일 좋아하죠?"
사내의 노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집게벌레라는 말이 그에게는 대단한 위력을 나타내는 듯했다.
홍장미녀는 흰 손가락 하나를 까닥거렸다.
"나를 따라와요. 집게벌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테니……."
그녀는 발길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데 따라 백설처럼 하얀 다리가 치마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났다.
뇌쇄적인 각선미(脚線美)였다.
사내는 홍장미녀의 뒤를 주춤주춤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여인의 각선미에 끌려가는 건 아니었다. 집게벌레라는 말에 끌려 가는 것이다.
홍장미녀는 숲 속의 한쪽에 서 있는 거대한 암석 앞에서 멈추어 섰다. 집채만큼 우람한 거암(巨岩)이었다.
여인은 거암 한가운데에 뻥 뚫려 있는 구멍을 가리켰다.
"저 구멍 속으로 커다란 집게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내가 똑똑히 봤어요."
사내의 눈동자는 소년처럼 반짝였다.
사내는 거암을 주먹으로 쿵 쳤다.
거암이 부르릉 진동하며 돌가루가 풀썩 휘날렸다.
사내는 가공할 괴력(怪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구멍 속에서 집게벌레는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손가락을 빳빳이 세워 구멍을 찌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단단한 암석이 흙덩이처럼 부서져 나갔다.
가공할 수도공(手刀功)이다. 진정 무서운 공력이었다.
그래도 집게벌레가 나오지 않자 사내는 쌍수(雙手)로 거암을 이리저리 쪼개기 시작했다.
쩌쩌쩌쩍-!
부서진 돌덩이가 우박처럼 흩어지며 집채만한 거암이 가로 세로로 무수히 갈라져서 땅바닥에 널려졌다.
마치 망치로 두부를 부수는 것과 같았다.
진정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아닌가?
사내는 석산(石山)이라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대력거패왕(大力巨覇王)이라도 된단 말인가?
거암은 단번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흩어졌다.
사내는 그 속에서 집게벌레를 찾느라 열심히 돌조각을 뒤적이고 있다.
돌연 여인이 요란한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철묵, 당신 같은 바보는 다시는 없을 거예요. 집게벌레는 썩은 나무 속에 살지 바위 속에 살지는 않아요!"
사내는 속은 것이다. 여인이 속인 것이다.
사내의 화강암 같은 얼굴에 무서운 분노가 나타났다.
철묵, 그는 금령밀전의 고수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평생 말을 한 적이 없다.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작은 벌레나 곤충뿐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집게벌레였다. 그 자신이 완강한 턱을 가진 집게벌레와 흡사했다.
그는 한 마리의 고독한 집게벌레였다.
그러나 그의 금강벽파수도공(金剛劈破手刀功)은 무서운 절대파괴력을 지녔다.
금강벽파수도공 앞에서는 모든 금석(金石)이 두부처럼 부서진다. 누구라도 그를 건드리는 것은 삶에 짜증을 느꼈을 때 외에는 삼가해야 한다.
하면 홍장미녀는 어쩌자고 철묵을 건드리고 있는가?
마침내 철묵의 노기는 폭발했다.
그의 왜소한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여인을 향해 사나운 매처럼 덮쳐 갔다.
쐐액-!
쌍수에서 허공을 찢는 바람 소리가 울렸다.
그 쌍수에 한 번 부딪치면 강철이고 무쇠고 가루로 변할 게 분명했다.
순간 여인의 신형도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호호… 집게벌레가 화가 났군!"
붉은 치마가 우산처럼 확 펼쳐지며 백옥 같은 두 다리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아찔하다. 혹시 치마 속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건 아닐까?
그러나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인의 붉은 소맷자락이 번개처럼 펄럭이자 눈부신 은빛 광채가 철묵을 향해 분수처럼 폭사되었다.
슈슈슈슈슉-!
다음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챙챙챙-!
은빛 광채는 철묵의 쌍수에 튕겨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비수(匕首), 그것은 세공품(細工品)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수였다.
그런데 그 비수를 모두 쳐낸 철묵이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비수 하나가 바지끈을 절묘하게 자르고 지나간 것이다.
철묵이 바지춤을 움켜쥐고 주저앉자, 여인은 거침없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끝났을 때, 여인은 벌써 어디론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철묵은 깨끗이 당한 것이다. 그는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때 하나의 손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손바닥 위에는 한 마리의 집게벌레가 놓여 있었다.
크고 억센 집게벌레, 완강한 턱을 쩍 벌린 채 기세가 등등하다.
"……!"
철묵의 눈에 경이(驚異)의 빛이 나타났다.
철묵은 시선을 들었다.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철묵, 내가 잡은 것이니 가져도 좋소."
철묵은 만면에 반색을 했다.
'무린… 보고 싶었다!'
철묵은 벙어리이니 눈으로는 말을 할 수 있다.
금령밀전에서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무린밖에 없었다.
철묵은 기쁨을 참지 못하며 집게벌레를 받았다.
'이렇게 크고 잘생긴 집게벌레는 처음 본다!'
그의 입은 저절로 쩍 벌어졌다.
집게벌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들여다보던 철묵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무린…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어디를 갔다 왔지?'
그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철묵에게는 본래 무린이 유일한 친구였다.
무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잠시 공부를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떠나야 하오."
철묵의 눈동자가 갑자기 기이하게 번쩍였다.
'그러면 나도 간다.'
"이번에 떠나는 길은 생사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오."
'그래도 간다.'
"아직 행선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오."
'무린과 함께라면 나는 지옥에라도 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이윽고 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함께 갑시다."
철묵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었다.
이때 옆에서 요염한 교성이 들렸다.
"무린! 당신이 철묵을 데려가면 나는 심심할 때 누구와 놀죠?"
동시에 한 여인이 사뿐히 나타났다.
조금 전에 철묵을 놀려 주고 사라졌던 바로 그 홍장미녀였다.
무린은 미소를 지었다.
"벽상하(碧霜霞), 그대도 함께 가면 될 게 아니오?"
홍장미녀는 교태롭게 웃었다.
"함께 가면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있는 것은 피(血)와 죽음(死)뿐…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소."
"그렇다면 나의 취향에 맞는군요."
여인이 또 한 번 요염하게 웃었다.
<백파은섬비(百波銀閃匕) 벽상하>
금령밀전의 유일한 여고수다.
그녀는 매우 화사하고 우아한 여인이다. 그녀의 팔십 가지 살인수법(殺人手法) 또한 모두가 화사하고 우아하다.
찰나지간에 일백 개가 발출되는 그녀의 은섬비는 일백 고수의 넋을 일순간에 구천으로 인도한다.
그녀의 은섬비는 무림에 널리 알려진 중원일절(中原一絶)이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갈라진 치마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뇌쇄적인 각선미였다.
그녀의 다리에 눈독을 들이는 사내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그 대리석처럼 희고 매끄러운 다리는 바로 죽음을 부르는 유혹자였다.
사사환미(絲絲幻美) 우주향(宇宙香)
참정수옥.
파랑십자도 사원은 여전히 참정수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돌침상에 앉아 맞은편 석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벽에는 한 가지 도식(刀式)이 새겨져 있다.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
그가 칠 년의 고심고련을 통해 만들어 낸 무적도식(無敵刀式)이었다.
도식을 바라보는 사원의 눈빛은 새파랗게 타올랐다.
'내 손에 파랑십자도가 쥐어지는 날, 천하는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 아래 무릎을 꿇으리라!'
그러나 파랑십자도를 다시 손에 잡을 수 있을지는 기약조차 없다. 이곳은 평생 벗어날 길 없는 종신수옥이기 때문이다.
사원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모두가 부질없는 꿈이다.'
이때였다.
그르르릉-!
석문이 둔중한 음향을 울리며 활짝 열렸다. 이어서 한 백의문생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형공,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사원은 머리를 끄덕이며 고소를 지었다.
"결국 소형도 잡혀 오고 말았구료!"
무린이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자, 나갑시다."
사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말이오?"
"밖으로!"
"또 탈출하잔 말이오?"
"그렇소."
사원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수 있겠소?"
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성공할 수 있소."
"그렇다면 좋소."
사원은 두말하지 않고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석실을 나섰다. 사원이 통로를 날카롭게 살펴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순찰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구료. 우리가 탈출하도록 하늘이 돕는 모양이오."
무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두 사람은 길다란 통로를 지나 출구(出口)를 나섰다.
순간 사원의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출구 밖에는 무수한 경비무사들이 철벽처럼 늘어서 있는 게 아닌가?
번쩍이는 도검의 광채는 눈앞을 현란하게 했다.
사원은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또 틀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린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무사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일제히 몸을 굽히는 게 아닌가?
사원은 흠칫 놀랐다.
'저 소형이 간수장(看守長)이 되었는가? 아니 최소한 수옥장(囚獄長)은 된 모양이다!'
무린이 사원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형공, 어서 나갑시다."
사원은 의혹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참정수옥을 완전히 벗어나자 무린이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소."
사원이 의혹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생이 약간 출세를 한 것뿐이오."
"정말 수옥장이 되셨소?"
"하하하……!"
무린은 호쾌하게 웃더니 등에 맨 보도(寶刀)를 풀어 내밀었다.
"형공의 애도(愛刀)요."
순간 사원은 격동하여 보도를 꽉 잡았다.
"이것은 나의 파랑십자도……!"
그것은 사원이 꿈에서도 그리던 파랑십자도였다.
사원은 도신(刀身)을 쑥 뽑았다. 찬연한 청광(淸光)을 뿌려내는 절세보도가 명멸하듯 눈부시게 빛났다.
도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사원이 무린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소형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소."
그것은 무린과 대결을 원한다는 사원 특유의 의사표시였다.
고수를 만나면 겨루어 보고 싶은 게 도검인(刀劍人)의 본능이다. 사원의 가슴 속에서는 그 본능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양하지 않겠소."
사원은 파랑십자도를 무린에게로 겨누었다.
무린은 천천히 쌍수를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대치는 오 장 거리를 두고 이루어졌다.
엄숙한 대치! 무도(武道)는 사사로운 감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갑자기 장내의 기류는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질식할 듯한 긴장이 장내에 가득 찼다.
이때 돌연 숲 속에서 나직한 고금 소리가 울려 왔다.
딩딩딩- 딩딩딩-!
단조롭고 우울한 음률이다. 두 사람의 대결에 대한 누군가의 축곡(祝曲)인가?
그러나 무린과 사원의 신색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전의(戰意)는 더욱 치열하게 타올랐다.
무린의 쌍수는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천공을 향하고 있다. 파랑십자도는 일직선으로 무린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숨막히는 순간이 흐르더니 마침내 날카로운 폭갈이 터졌다.
"파랑십자도!"
파랑십자도가 환영처럼 허공을 갈랐다.
쿠구구궁-!
극맹한 도기(刀氣)가 파도처럼 밀려갔다.
찰나 무린의 쌍수가 둥그런 원호(圓弧)를 그리며 천공으로 쭉 뻗었다.
"매화파라수!"
아, 그것은 상취매옹의 사해만취주호에 새겨져 있던 절공(絶功)이었다.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 현란한 음향이 울리며 허공에는 거대한 매화(梅花)의 환영(幻影)이 피어났다.
하늘을 가득 채운 홍매화였다. 매화의 환영에서는 짙은 매향(梅香)까지 풍겼다.
불가사의하게도 그 매화의 환영은 사원에게로 그물처럼 덮쳐 갔다.
촤아아아-!
순간 사납게 파도치는 사원의 검기가 매화의 환영을 해일처럼 쓸어 나갔다.
갑자기 장내는 칠흑처럼 캄캄해지고 매화의 환영은 산산이 깨어져 흩어졌다.
아아, 파랑십자도의 가공할 위력이여!
기류의 맹렬한 격탕음이 울리며 장내는 무서운 혼돈 속으로 빠졌다.
쿠르르릉-!
주위의 수목이 갈대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대결이 끝나고 장내는 고요를 되찾았다.
어떻게 승패가 났는가?
무린과 사원이 본래의 위치에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무린의 가슴 옷자락은 정확하게 십자(十字)로 갈라져서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었다. 파랑십자도의 검기에 베어진 것이다.
사원은 어떠한가?
그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사원의 눈동자에 득의의 빛이 스쳐 갔다.
'이겼다!'
무린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승리를 축하하오."
이때 조금 전의 그 고금 소리가 다시 울렸다.
딩딩딩- 딩딩딩-!
이어서 갈대처럼 쓰러진 수목 사이로 한 사내의 넓적한 얼굴이 나타났다.
만폭왕 당유기, 바로 그였다.
당유기는 사원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꽃 한가운데 서 있구료!"
무슨 말인가?
사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굳어졌다.
"……!"
과연 그는 거대한 꽃송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직경 삼 장의 거대한 홍매화였다. 그것은 땅에 새겨진 붉은 매화의 무늬였다.
물론 무린의 매화파라수가 찍어 놓은 거대한 수영(手影)이었다.
당유기가 다시 말했다.
"공력이 오 성만 발출되었어도 당신은 아마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을 거요!"
사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음……."
그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무린이 불과 사 성의 공력만을 사용했다는 것을…….
일순 사원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싸늘하게 힐문했다.
"소형은 나를 모욕할 셈이오?"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폭사했다. 그는 무린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을 모욕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무린이 담담히 말했다.
"형공 역시 일 성의 공력만 더 사용했어도 검기가 나의 심장에까지 미쳤을 거요. 또한 형공은 무적도식인 칠십이만팔백파세도법을 펼치지 않았으니 피차 일반이오."
사원은 무린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시선이 불꽃처럼 작렬했다.
사나이들의 강렬한 시선이 파르릇 타오르며 뒤엉키고 있었다.
돌연 사원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좋소! 사실 소형은 나보다 강하오. 나는 깨끗이 승복하겠소.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무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조건이오?"
"오늘 밤 나와 함께 통쾌하게 한 잔 마셔야 된다는 조건이오!"
무린도 호쾌한 웃음을 터뜨혔다.
"좋소! 조건을 받아 들이겠소. 하하하하……!"
당유기가 히죽 웃었다.
"본의 아니게 나도 한 잔 마시게 됐군."
그는 고금을 힘차게 튕겨 냈다.
딩딩딩- 딩딩-!
희대의 걸물(傑物)들은 이렇게 맺어지고 있었다.
청로별각(靑露別閣).
궁륭마천부에서 최고 귀빈을 맞이하여 주연을 베푸는 곳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최고급이다.
최고급 요리(料理), 최고급 미주(美酒), 최고급 가기(歌妓) 등…….
일문(一門)의 지존(至尊)이나 천하의 명숙(名孰) 등 지극히 신분 높은 손님이 아니면 청로별각의 주연에는 참석할 수 없다. 일반 무림인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꿈 속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날 밤 청로별각에서 벌어진 주연에는 약간 괴이한 인물들 몇몇이 참석했다.
그들은 무린을 비롯해서 사원, 당유기, 철묵, 벽상하 등이었다.
그들은 하룻밤 통쾌하게 마시기 위해 청로별각에 모인 것이다.
이미 주연석에는 산해진미와 미주가효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꽃다운 가기들은 제각기 악기를 뜯고 술을 따르며 녹아날 듯한 교태를 부리고 있다.
앵화(櫻花), 자견(紫鵑), 목단(木丹), 벽란(碧蘭) 등 모두가 이름난 절세가기들이다.
천하의 한량들은 그들의 노래 한 마디 듣기를 평생 소원으로 삼을 정도이다.
자금성의 황제나 즐길만한 호화로운 주연이었다.
중인은 금잔에 넘치는 술을 마시며 좌중에는 급속히 주흥이 돋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아니? 나만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주연을 벌이다니 이럴 수가 있어?"
성난 외침과 함께 한 소녀가 창문을 와장창 부수고 날아들었다.
노노아, 그녀가 아니고 누구랴?
늙은 앵무새 견자도 흥분하여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날아들었다.
"개자식!"
노노아는 엄청나게 차려진 주효를 보자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아! 미처 몰랐더라면 큰일날 뻔했군!"
그녀는 잡담 제하고 자리에 털썩 앉더니 맛좋은 요리를 닥치는 대로 입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술은 병째 거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유기가 옆에서 급히 주의를 주었다.
"노아, 그건 독한 술이다!"
노노아는 연신 먹고 마시며 건성으로 대꾸한다.
"으응? 나는 물인 줄 알았는데……."
중인은 아연하여 멍해졌다.
"……."
아름다운 가기들이 요란한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호호호… 무서운 대주객(大酒客)께서 나타나셨네!"
노노아의 출현은 좌중에 아연 활기를 돋구었다. 중인은 다시 흥겹게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하녀(下女)가 특별요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코가 납작한데다가 얼굴이 검다. 차라리 추녀(醜女)라고 하는 게 옳으리라.
그녀는 가기가 아니고 주방에서 심부름하는 여인이었다.
하녀는 은쟁반에 칠미보화채(七味寶花菜)를 들고 주연석으로 다가왔다.
칠미보화채는 황제도 자주 먹을 수 없는 최고급 요리이다.
하녀는 탁자 앞에 이르자 은쟁반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조심을 한 게 탈이었다. 발을 헛디딘 그녀의 몸이 기우뚱하며 은쟁반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아까운 요리가 바닥으로 쏟아지며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일 낭패를 당한 사람은 무린이었다. 국물이 튀어서 바로 옆에 있던 그의 백삼을 흠뻑 적셔 버린 것이다.
가기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춘춘(春春), 네가 미쳤느냐?"
"얼마나 멍청하기에 요리도 제대로 나를 수 없단 말이냐!"
"못나고 어리석은 것!"
온갖 힐난과 질책이 쏟아졌다.
하녀 춘춘은 너무나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내 눈물이 핑 돌더니 뺨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기들이 다시 소리쳤다.
"쏟아진 요리를 치우지 않고 뭘 하느냐!"
"보기 싫으니 어서 꺼져라!"
춘춘은 더욱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때 무린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낭자, 괜찮소. 이 정도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하녀의 옷에 튀어오른 국물을 닦아 주었다.
춘춘은 놀란 듯 무린을 쳐다보더니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황송하게 머리를 숙였다.
"공자님… 고맙습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는 탁자를 치운 뒤 황황히 물러갔다.
한 가기가 무린이 바꾸어 입을 백삼을 가져 오고 겨우 주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무서운 참극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하녀 춘춘은 주방으로 돌아오자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른 하녀들은 요리를 만들기에 바빠서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춘춘은 벽에 걸린 동경(銅鏡)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동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못나고 어리석은 것…….'
조금 전에 들은 그 한 마디가 가슴 속에 아프게 맴돌았다.
자신이 보아도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다.
'부모님은 왜 나를 요렇게 만드셨을까?'
하나 부모를 원망해서 무엇하랴? 진정으로 원망스러운 것은 온갖 수모를 주던 가기들이다.
춘춘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들은 얼마나 잘났다고… 기껏해야 노래나 하고 술이나 따르는 주제에…….'
이때 한 여인이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선다.
흑사녀(黑絲女).
칠흑처럼 검은 흑의를 입었고 얼굴도 흑사(黑絲)로 가리고 있다. 보이는 것은 빙어(氷魚)처럼 희고 아름다운 손뿐이다.
그런데 풍염하면서도 후리후리한 여인의 교구에서 풍기는 그 불가사의한 염기(艶氣)를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 기이한 염기였다.
춘춘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흑사녀는 손에 백자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춘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본녀는 옥황궁에서 왔다. 여기 부주께서 내리는 미주(美酒)를 한 병 가져왔으니 청로별각의 주연에 올리도록 해라."
영롱하고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싸늘한 위엄이 깃들어 있다.
춘춘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부주가 있는 옥황궁에서 부주의 심부름을 왔다면 무조건 신분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춘춘은 두말 할 여지가 없었다.
흑사녀는 백자병을 춘춘에게 건네주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춘춘은 백자병을 소중히 받긴 했으나 막상 주연석으로 가져갈 생각을 하자 겁이 더럭 났다.
이 찰랑찰랑 넘치는 주효를 가져가다가 또 엎지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때는 가기들이 자신의 머리털을 몽땅 뽑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주로부터 내려온 명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춘춘의 눈동자가 빛났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술을 약간 따라 낸 뒤 들고 가면 엎질러지지 않겠지.'
그녀는 즉시 옆에 놓인 은쟁반에 술을 살며시 따라 냈다.
주르르-!
호박색 미주가 은뱅반에 쏟아졌다.
한데 이 순간 춘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아니……."
그녀는 은쟁반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분명 술에 닿은 은쟁반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춘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술에 독(毒)이……."
아아, 부주가 독주(毒酒)를 보내 왔단 말인가?
춘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로서는 술을 청로별각에 가져가기만 하면 임무는 끝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얼굴이 번개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 공자님께서 이 독주를 드시면… 그건 안 돼!'
손수건을 꺼내어 옷을 닦아 주던 무린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춘춘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 공자님께 이 술을 드려선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
춘춘은 더욱 심한 고민에 빠졌다.
이때 문득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
그녀는 급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백자병을 들고 청로별각으로 향했다.
춘춘이 다시 나타나자 가기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춘춘은 백자병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애 내려놓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이건 옥황궁에서 보내 주신 술입니다."
옥황궁이라는 말에 좌중은 약간 술렁거렸다.
"부주님의 하사주다!"
그 순간 무린은 춘춘이 무언가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무릎 위에 살며시 떨어뜨리는 것을 알았다.
무린은 종이쪽지를 집어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몇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공자님, 이 술은 가기들에게 먼저 권한 뒤 드십시오. 그것이 청로별각의 주연 규칙이옵니다.>
무린은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는 규칙이로군.'
그는 곧 금잔이 찰랑찰랑 넘치도록 가기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낭자들에게 술을 한 잔씩 권하겠소."
가기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무쌍의 영광이옵니다!"
"자기… 멋지셔. 호호호……."
가기들은 금잔을 들어 기분좋게 죽죽 들이켰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헉!"
"흐윽!"
가기들이 돌연 헛바람을 들이키며 털썩털썩 쓰러지는 게 아닌가!
중인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저럴 수가……!"
가기들은 전신이 퍼렇게 변하더니 얼음처럼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가기들은 벌써 전신이 푸른 액체로 변하여 바닥에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꽃다운 그녀들의 모습은 좌중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비릿한 푸른 액체가 바닥에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무린의 검미가 칼날처럼 치켜올라갔다.
'청라시류독(靑羅時流毒)이다!'
벽상하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매우 화려한 여흥(餘興)이로군!"
당유기가 음산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즉살하려 한 게 분명하오."
노노아만은 술과 요리를 마음껏 포식한 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무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소. 일단 조용히 돌아갑시다."
주연은 끔찍한 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중인은 묵묵히 청로별각을 나섰다.
무린은 곧 주방으로 향했다.
'춘춘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린은 주방으로 통하는 복도로 들어섰다.
이때 하나의 흑영이 그림자처럼 앞을 막아 섰다.
"대존야, 술은 맛있게 드셨나요?"
흑사녀, 춘춘에게 백자병을 가져온 바로 그 여인이었다. 불가사의한 염기를 풍기는 신비녀.
무린이 검미를 찌푸렸다.
"귀하는 누구요?"
흑사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바로 독주를 가져 온 사람이에요."
이렇게 대담할 수가 있는가?
무린의 신색은 싸늘하게 변했다.
"당신은 정체가 뭐요?"
흑사녀는 영롱한 음성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사환미 우주향!"
무린은 흠칫했다.
<사사환미 우주향>
바로 최근에 무림에 출현한 대무후제국(大武后帝國)의 승상(丞相)이 아닌가?
무린이 놀라서 물었다.
"귀하가 정말 대무후제국의 승상이오?"
흑사녀가 되물었다.
"믿어지지 않나요?"
"일국(一國)의 승상이 어찌 독주가 든 술병 따위를 들고 다닌단 말이오?"
"사실 본녀는 당신을 만나려고 왔어요. 그 독주는 당신에게 드리는 예물이에요."
옥황궁에서 부주의 심부름을 왔다는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그런데 독주를 예물이라니…….
무린은 냉소를 지었다.
"예물을 엉뚱한 사람들이 받아서 실망했겠소."
사사환미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유감이에요. 그 술은 당신이 꼭 마셔야 했는데……."
무린의 검미는 더욱 찌푸려졌다.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그 술은 청라시류독이 든 만일우로주(萬日雨露酒)인데 보통 사람이 마시면 즉시 목숨을 잃고 말아요. 그러나 당신처럼 초인적인 공력을 지닌 사람이 마시면 정신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진력이 더욱 정순해지는 효험이 있어요."
"……."
그랬던가? 우주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본래 청라시류독은 극독(極毒)과 극약(極藥)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무린이 그 술을 마셨으면 오히려 몸에 득이 되었을 것이다.
가기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춘춘에게 심한 모욕을 가한 응보라고나 할지…….
무린이 의혹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그러면 그 예물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소?'
"우리 대무후제국이 당신에 대한 경애(敬愛)의 표시에요."
"경애……?"
우주향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본녀를 따라오세요. 여기는 사람들의 이목이 많아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치가 않아요."
말을 마치는 순간 그녀는 무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창밖으로 번쩍 몸을 날렸다.
신묘무쌍한 경공이다. 그녀의 신형은 찰나간에 까마득한 암천(暗天)으로 솟구쳤다.
차라리 비조(飛鳥)라고나 할까?
무린은 그토록 초절한 경공의 소유자를 본 적이 없었다.
'범상한 고수가 아니다!'
무린은 즉시 그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두 남녀는 어두운 허공을 쾌속으로 날아갔다.
누군가가 그들을 목격했어도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았으리라. 밤하늘을 스쳐 가는 커다란 두 마리의 야조(夜鳥)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우주향은 계속 몸을 날리며 말했다.
"당신의 경공은 본녀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군요."
칭찬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그녀의 얼굴을 가린 흑사가 바람결에 펄럭이며 희디흰 목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무린이 말했다.
"귀하의 공력은 불초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 것 같소."
"당금 무림에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를 능가할 공력을 지닌 사람은 흔치 않을 거예요."
자신의 공력이 대존야를 능가한단 말인가, 아니면 능가하지 못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암천을 두 줄기 유성처럼 쏘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