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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후제국(大武后帝國)의 여왕은 누구인가? (9/37)

대무후제국(大武后帝國)의 여왕은 누구인가?

무린과 우주향은 인적이 없는 송림(松林) 앞에 이르러 몸을 멈췄다. 밤의 적막 속에서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라면 마음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무린의 어조는 약간 냉막했다.

"귀하는 먼저 얼굴의 흑사를 벗고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소?"

우주향은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이유가 무엇이오?"

"머리가 ㅉ기 때문이에요."

"……?"

"본녀는 두 달 전 만해도 니승(尼僧)의 신분이었어요. 그래서 아직 머리가 짧은 거예요."

"니승……."

이어 우주향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본녀는 천불육대성승의 공동전인(共同專人)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죽은 뒤부터 승포를 벗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아아, 천불육대성승의 공동전인이라면 그녀는 바로 사사혜니란 말인가?

천불미극전진금법에 의해 천불육대성승의 모든 능력을 이전받은 젊은 니승 사사혜니, 천불육대성승의 유언에 따라 밀비천전으로 간 그녀가 대무후제국의 승상의 되어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주향은 영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본녀는 사사(絲絲)라는 법명(法名)을 버리고 우주향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요. 일신의 염향(艶香)이 우주를 가득 채운다는 의미의 이름이에요."

문득 무린은 우주향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염기(艶氣)를 느꼈다.

우주향(宇宙香)!

일신의 염향이 우주를 가득 채운다.

실로 요기로울 만큼 매혹적인 이름이 아닌가!

무린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얼마나 놀라운 미색(美色)을 지녔기에…….'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머리가 좀더 길면 당신에게 얼굴을 보여 주겠어요. 그 때는 이미 당신이 본녀에게 반하고 말 거예요."

정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이 우주향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들린다.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유감이오. 그러나 머리가 길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소."

"나의 머리는 매우 빨리 길어요."

무린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귀하가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오?"

우주향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본녀는 당신을 대무후제국으로 초청할 생각이에요."

"초청……?"

우주향의 태도는 진지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대무후제국에서 당신에게 부승상(副丞相)을 제수하려는 거예요."

"대무후제국의 부승상?"

"부승상은 대무후제국에서 네째 안에 드는 높은 직위예요!"

무린은 의외의 말을 듣고 잠시 대꾸를 하지 못했다.

"……!"

우주향이 심유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당신이 비록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라고 하지만 머지않아 궁륭마천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니 그런 직위는 아무 소용도 없어요!"

궁륭마천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 어찌 광오하지 않은가?

돌연 무린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대무후제국에서 소생에게 그토록 높은 직위를 제수하겠다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소. 비록 궁륭마천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소생이 출세하는데는 지장이 없겠구료. 하하하……!"

"당신은 믿어지지 않나요?"

무린이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그런데 대무후제국이라는 것이 정말 있기는 있소?"

우주향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대무후제국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무후제국은 도대체 어디에 있소?"

순간 우주향의 입에서는 놀라운 한 마디가 떨어졌다.

"밀비천전!"

무린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오?"

"그래요. 대무후제국은 밀비천전에 있어요!"

그게 사실인가? 그것은 밀비천전이 이미 대무후제국의 수중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무린이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사실이에요!"

"그러면 밀비천전은 어디에 있소?"

"그것은 아직 말할 수 없어요!"

"……!"

무린은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우주향이 태연히 말했다.

"대무후제국은 곧 천하를 뒤덮게 될 거예요! 그 때는 중원이 영원히 우리 여왕폐하께서 다스리는 여인천하(女人天下)로 변하는 거예요!"

무린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졌다.

'결코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주향의 말은 무서운 진실을 함축하고 있었다. 대무후제국이 이미 밀비천전을 차지했다면 천하형세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급속히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무린은 우주향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쩌면 이 여인은 중원대운명(中原大運命)의 가장 큰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린은 새삼 그녀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우주향이 물었다.

"이제 당신은 대무후제국의 승상이 될 생각이 들었나요?"

무린은 담담히 되물었다.

"대무후제국이 나에게 승상을 제수하려는 까닭은 무엇이오?"

우주향의 눈동자가 흑사 안에서 기이하게 번쩍였다.

"밀비천전에는 곧 동방의 응징자가 출현할 거예요. 그를 막아 내기 위해서는 당신 같은 절대기재가 꼭 필요해요. 동방의 응징자를 만약 막아 내지 못한다면 중원은 천년멸절천하(千年滅絶天下)로 변하고 말 테니까요."

그녀의 말은 세상에 떠도는 풍문과 일치했다.

천년멸절천하!

동방에서 올 응징자는 그토록 무섭단 말인가?

우주향이 심유하게 말했다.

"궁륭마천부가 완전한 패도천하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당신에게 가장 현명한 길은 대무후제국에 충성하는 거예요!"

"……!"

"당신이 만약 거절한다면 대무후제국은 천축왕자 아극타를 부승상으로 제수하게 될 거예요!"

천축왕자 아극타, 그까지 끌어들이려 하다니…….

우주향의 말은 계속 사람을 놀라게 한다. 대무후제국은 정말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문득 무린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주향, 만약 귀하가 본인에게 온다면 더욱 좋은 직위를 제수받게 될 것이오."

우주향은 싸늘하게 물었다.

"어떤 직위죠?"

"대존야의 부인!"

우주향은 요염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사실 본녀도 당신이 나의 남편감이 될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봤어요."

"결과는?"

"당신이 당대의 기린아인 것은 분명하지만 본녀의 남편감으로 충분한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무린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본인도 귀하가 나의 부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소. 셋째 부인이라면 본인도 충분히 만족하겠소만……."

"흥! 듣던 대로 당신은 광오하군요."

"하하… 처음에 광오했던 건 바로 그대요."

결국 입씨름은 우주향의 판정패였다. 우주향의 음성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대존야, 이제 이야기는 끝내고 당신의 대답만이 남았어요. 당신은 대무후제국에 충성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분명히 말해 보세요."

무린의 신색이 엄숙하게 변했다. 그는 우주향을 정시하며 위엄 있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분명히 이야기를 하겠소. 궁륭마천부는 무림의 주인으로서 천하를 통치하고 있소. 천하의 무림인은 모두 궁륭마천부의 명을 따라야 하오. 대무후제국 또한 중원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궁륭마천부의 제재를 받을 것이오!"

"……!"

"나아가서 본인은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로서 대무후제국이 차지하고 있다는 밀비천전을 본인에게 인도할 것을 요구하겠소!"

단호한 결언(決言)에 늠름한 신위(神威)였다.

일순 우주향은 무린의 신위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망연히 무린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녀가 어디 보통 여자인가?

"대존야, 당신은 아직 대무후제국의 능력을 잘 모르고 있군요."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말한 우주향은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송림 속에서 수많은 인영이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스스스스-!.

그들은 모두 여인이었다.

젊은 여인에서 호호백발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연령은 다양했으나, 그들의 안광은 한결같이 비수처럼 번쩍였다. 모두 초절한 공력을 지닌 절정고수가 분명했다.

그들은 음산한 살기를 띠고 무린을 서서히 에워쌌다.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지옥삼마녀(地獄三魔女)… 악령오나찰(惡靈五羅刹)… 구유마파(九幽磨婆)… 탈혼선자(奪魂仙子)… 유령사녀(幽靈邪女)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수십 년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던 전대마녀(前代魔女)들이다. 한 명 한 명이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일제히 출현한 것을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대부분 까무러치고 말리라.

그러면 사사환미 우주향이 이런 전대마녀들을 수하로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대무후제국의 가공할 능력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돌연 장내에는 긴장된 살기가 흘렀다.

우주향이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존야, 당신은 아직도 큰소리를 칠 수 있나요?"

그러나 무린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본인은 수많은 고수들이 숲 속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아무리 놀라운 절정고수들도 무린의 예리한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어서 무린이 느릿한 미소로 물었다.

"우주향, 귀하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너무도 태연한 신색이었다. 무린과 우주향의 시선은 무섭게 부딪쳤다.

일촉즉발의 순간, 혈전이 벌어지는가?

문득 우주향이 가볍게 한숨을 토해 냈다.

"본녀는 당신에게 손을 쓰라는 명(命)을 받지는 않았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그대로 보고를 하겠어요."

무린이 물었다.

"귀하에게 명을 내리는 사람은 누구요?"

"물론 대무후제국의 여왕이에요."

"음……!"

"그분은 본녀보다 열 배나 아름답고 백 배나 지혜로운 우중유일(宇中唯一)의 절대신녀(絶對神女)예요."

"……."

"당신이 그분을 한 번 뵙게 되면 당장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무린이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는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그분을 뵈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겠소?"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돌아가면 당신 말을 꼭 여왕께 전하겠어요."

"좋소!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기대하겠소."

겨우 타협은 이루어졌다. 혈전의 위기는 사라진 것이다.

우주향은 무린을 싸늘하게 한 번 쏘아본 뒤 발길을 휙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여러 무시무시한 마녀들을 거느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린으로서도 그녀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무린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서 어두운 암천을 우러러보았다.

'대무후제국… 그들은 상상 이상의 무서운 힘(力)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          *          *          *

돌연 중원에 충격적인 소문이 터져 나왔다.

- 궁륭마천부의 대존야가 무림에 출도한다!

놀라운 소문이었다. 대존야라면 궁륭마천부의 부주와 똑같은 신분과 권한을 지닌 또 한 명의 무림천자가 아닌가?

그 무상의 권능을 지닌 대존야가 무림에 직접 출도를 한다는 것이다.

사해팔황에 대존야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면 대존야는 무슨 일로 무림에 출도하는가?

그것은 중원에 엄청난 대풍운이 밀어닥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또한 궁륭마천부의 이백 년 패도천하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때문에 궁륭마천부에서는 대존야만 출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 천부대군수 우문검지가 일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대존야를 수행한다.

중원의 꽃 우문검지가 일만의 정예군단과 함께 대존야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우문검지가 출진(出進)한 것은 궁륭마천부의 심만 무적대군단(無敵大軍團)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천하가 경동(驚動)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면 대존야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대존야의 내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행사(行事)도 완전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

다만 대존야는 약관의 절세기남아(絶世奇男兒)라는 사실만이 알려졌다.

중원무림은 크게 긴장했다. 천하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대존야가 어디서 언제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천하인의 관심은 대존야의 무림출도에 집중되고, 대존야는 어디로 밀어닥칠지 모르는 거대한 회오리 태풍의 핵(核)으로 떠올랐다.

*          *          *          *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넓은 황야를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견고한 육두마차(六頭馬車)였지만 유난히 튼튼하게 보이는 것 외에 별다른 특색은 없는 마차였다.

마부석에는 화강암처럼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앉아 있었다.

벙어리 사내 철묵, 바로 그였다.

오늘 철묵의 태도는 놀랄 만큼 당당했다. 목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고, 눈동자에는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황제가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채찍으로 후려치고 지나갈 것 같은 신위였다.

그는 왜 이렇게 변했는가?

그는 지금 대존야의 마차를 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 평범한 마차에 대존야 무린이 타고 있단 말인가?

마차의 내부.

내부는 의외로 아늑하고 화려했다. 상석에는 한 백의문생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대존야 무린, 바로 그였다.

그의 뒤에는 세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파랑십자도 사원과 만폭왕 당유기, 그리고 백파은섬비 벽상하였다.

한 마디로 대존야 무린을 수행하는 희대의 걸물들이었다.

"……."

무린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는 궁륭마천부를 떠나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부주 우문환탑은 무린의 손을 잡고 장중하게 말했다.

- 대존야, 대존야가 중원의 대사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날, 그 영광과 영화는 이 땅을 영원히 덮게 될 것이오!

거기 대해 무린은 담담히 응답했다.

- 불초는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조광화원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하여 대존야 무린을 태운 마차는 출발한 것이다.

문득 무린은 조광화원에 있는 부친을 떠올렸다. 무린이 반 년 전에 조광화원을 떠날 때, 부친 청유수사(淸柳秀士) 무군(武君)은 엄숙하게 말했다.

- 린아(麟兒), 일 년이 지나면 즉시 돌아와야 한다. 너에게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막중한 대사(大事)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막중한 대사란 무엇인가?

무린은 부친에게 특별한 내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린은 조광화원의 현묘무쌍한 세문무공(世門武功)을 십이 성 수련하고 세상을 배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으나, 앞으로 반 년이 지나면 반드시 조광화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무린도 희미하게 예감은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내력상의 신비로운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무린은 문득 이상한 육감을 느꼈다.

"……!"

무린은 시선을 돌렸다. 뒤에 놓여 있는 건량(乾糧) 상자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게 보였다.

무린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상자의 뚜껑을 확 열었다.

순간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퍼드득 솟구치며 소리쳤다.

"개자식!"

이어서 한 소녀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히히히… 나를 떼어 놓고 가려 하다니 맘대로 안 될걸!"

재빨리 곰방대를 뒤로 감추며 부시시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바로 노노아가 아닌가?

중인은 아연하여 입을 딱 벌렸다.

"노아……."

벽상하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노아는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두두두두-!

마차는 계속 질풍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림사의 거대한 회오리 태풍 속으로 돌진해 가는 대존야의 선풍마차였다.

대존야의 선풍마차!

마차는 어디로 돌진하는가?

*          *          *          *

오릉산(烏陵山) 취운곡(翠雲谷).

푸른 계류(溪流)가 아름답게 흐르는 곳이다. 초하(初夏)의 짙은 녹음이 싱그러운 숲 속.

두두두-!

돌연 요란한 새 소리가 그치며 한 대의 마차가 모습을 나타냈다.

마차가 멈추더니 한 수려한 백의문생이 안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아름다운 계곡 일대를 죽 둘러보았다.

'여기가 바로 지난날 금령밀전의 고수 열 명이 희생된 곳이다. 아홉 구의 시체는 돌아왔지만 한 명은 실종되었다.'

그랬던가? 하지만 지난날의 참극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살수(殺手)들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무린은 마차를 남겨 두고 계류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이때 물가에 한 백영(白影)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무언가 조그만 둥근 물체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 빛났다.

무린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백영은 선비 차림의 청년이었다.

단정한 청년서생, 체형은 늘씬하고 용모는 수려했다. 얼굴의 선(線)이 너무나 섬세하고 단아해서 미녀(美女)의 아름다움을 능가했다. 대단한 미청년이었다.

무린은 그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형공,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청년서생은 시선을 휙 돌렸다.

서늘한 눈동자, 그러나 예리하고 싸늘한 눈빛이었다.

청년서생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소."

무린은 바위에 털썩 걸터앉으며 다시 물었다.

"그 손에 든 것은 무엇이오?"

그는 손에 든 물체를 내밀었다.

"이거 말이오? 여기서 주운 것이오."

그가 내민 것은 하나의 은패였다. 은패에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령이십삼호(金令二十三號)>

그 은패는 바로 금령밀전의 실종된 고수가 지녔던 것이다.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었군."

청년서생은 은패가 무언지 아는 듯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궁륭마천부의 인물이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소."

"원한다면 은패를 넘겨 주겠소. 나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니……."

청년서생은 은패를 무린에게 건네 주었다.

무린은 은패를 받았다.

"고맙소."

무린은 금령밀전의 실종된 고수 금령이십삼호도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체는 물 속을 떠내려갔으리라.

그렇다면 살수는 누구인가?

청년서생이 무언가 또 한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필요하다면 이것도 가지시오."

그것은 한 조각의 불진(佛塵)이었다.

불진조각, 살수가 떨어뜨린 것인가?

무린은 그것을 받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불진 끝에는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축(祝)>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불진은 물론 사찰(寺刹)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축(祝)은 사찰의 이름인가?'

무린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무린이라고 하오. 귀하의 성명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청년서생이 대답했다.

"나는 고려금(高麗金)이라고 하오."

좀 이상한 이름이다.

무린이 다시 물었다.

"문중도 말해 줄 수 있겠소?"

"문중 같은 건 없소. 나는 경개 좋은 곳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니는 일개 유람객(遊覽客)일 뿐이오."

무린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금이 심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고려금은 천천히 쉬어갈 생각인지 등에 맨 보퉁이를 풀었다. 그리고는 보퉁이를 바위 위에 펼쳤다.

안에는 먹음직스런 떡과 계육(鷄肉), 건포(乾脯) 등이 들어 있었다.

고려금은 무린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

"함께 먹읍시다. 나는 배고픈 걸 제일 싫어하오."

무린은 사양하지 않았다.

"나도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인데 고맙소."

두 사람은 음식을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고려금이 음식을 먹는 태도는 매우 정갈했다. 입술에 조금만 음식이 묻어도 눈처럼 흰 무명수건으로 깨끗이 훔쳐내곤 했다.

무린은 은연중 미소를 지었다.

'분명 여인이다!'

희고 매끄러운 손, 콧등에 별자리처럼 살짝 깔린 주근깨, 고려금은 틀림없는 여인이었다. 비록 남장(男裝)을 하고 있지만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묘령의 낭자였다.

또한 그녀에게서는 무한히 고귀하고 품위 있는 기도(氣道)가 풍긴다.

절세기녀(絶世奇女)가 분명했다.

음식을 다 먹자 고려금은 깨끗한 자기병을 내밀었다.

"여기 녹엽차(綠葉茶)가 있으니 드시오."

여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토록 알뜰하게 마실 것까지 준비해 가지고 다니랴.

녹엽차를 마시고 난 무린은 갑자기 고려금의 하얀 손을 덥썩 잡았다.

"정말 잘 먹었소. 이제 함께 목욕이나 하러 갑시다. 소생이 음식을 얻어 먹었으니 형공의 등이나 씻겨 드리고 싶소."

고려금은 약간 당황했다.

"아니… 괜찮소. 나는 조금 전에 목욕을 했소."

"그렇다면……."

무린은 더 권하지 않고 물가로 성큼성큼 걸어 가더니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고려금은 헛기침을 하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

"험험……."

무린은 내심 웃으며 시원하게 목욕을 한다. 이윽고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무린은 고려금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팔베개를 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느 화상이 살수를 펼쳤는가?"

고려금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당신은 그 불진조각의 임자를 찾아볼 생각이오?"

무린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천하에 그런 불진을 가진 화상은 십만 명도 넘을 텐데 어떻게 임자를 찾는단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살수를 찾기 위해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소?"

"불가능한 일은 아예 포기하는 게 현명한 법이오."

무린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잠시 후 그는 희미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고려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별볼일 없는 잡벌레에게 음식만 축냈군.'

그녀는 몸을 일으켜 숲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때 무린이 눈을 스르르 떴다.

그는 곧 벌떡 일어나 고려금이 사라진 쪽으로 번쩍 몸을 날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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