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융사(祝融寺)의 괴사(怪事) (10/37)

축융사(祝融寺)의 괴사(怪事)

빽빽하게 들어선 고목들, 숲이 너무나 울창하여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그 숲으로 서서히 땅거미가 깔릴 무렵 숲 속에서 한 백영이 나타났다.

고려금, 바로 그녀였다.

고려금은 숲 속의 좁은 길을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다.

숲 한가운데 이르자, 앞에 거대한 사찰(寺刹)이 나타났다.하늘을 찌를 듯 웅장하게 솟은 거찰(巨刹)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금방 무너질 듯 황폐할 대로 황폐한 폐찰(廢刹)이었다.

쓰러진 돌담, 떨어져 나간 사문(寺門), 무성한 잡초 속에는 깨어진 기왓장이 이끼를 키우며 널려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인적이 끊어진 폐찰이었다.

사문에는 칠이 벗겨진 현판이 붙어 있었다.

<축융사(祝融寺)>

아직도 웅휘한 필체는 엿볼 수 있으나 퇴색하여 희미하다. 그런데 현판에 새겨진 첫글자는 부러진 불진조각에 새겨져 있던 축(祝)자와 똑같지 않은가?

고려금은 현판을 살펴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악한 악령(惡靈)이 깃들어 있다 하여 사백 년 전에 폐쇄된 축융사다."

이때 뒤에서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지난날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던 대마승(大魔僧) 혈황사불(血皇邪佛)이 은거하던 축융사가 바로 여기에 있었군."

고려금은 시선을 휙 돌렸다. 거기에는 한 수려한 문생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물론 무린이었다.

고려금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 새 미행해 왔군!'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형공,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정말 뜻밖이오."

시침을 떼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고려금은 싸늘하게 힐문했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 아니 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단 말이오?"

"하하, 뒤를 미행한 것은 인정하겠소. 그러나 나쁜 뜻은 없었으니 양해하시오."

무린은 고려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절 구경이라도 해야겠군."

고려금은 할 수 없다는 듯 무린의 뒤를 따라 사문을 들어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축융사의 경내로 들어갔다.

경내도 황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뜰에는 그 동안 떨어져 내린 낙엽이 축축하게 썩어 가고, 낡은 불전(佛殿)과 불탑(佛塔)은 무거운 적막에 싸여 있었다.

황량한 경내에는 어디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인적이 완전히 끊어진 폐찰인가?

두 사람은 대법전(大法殿)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때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주들은 어떻게 오셨소?"

"……?"

"……?"

무린과 고려금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의 무성한 수풀 속에 한 괴승(怪僧)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가사, 듬성듬성 나 있는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 올빼미처럼 번뜩이는 눈은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롭다.

폐찰에 웬 괴승인가?

무린이 정중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나가던 유람객으로 길을 잃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쉬어 갔으면 하오."

괴승은 머리를 저었다.

"여기는 쉬어갈 만한 방이 없소!"

"이 거대한 사찰에 어찌 방이 없겠소? 낡은 선방(禪房)이라도 좋으니 쉬어가게 해 주시오."

괴승은 올빼미 눈을 번뜩이며 두 사람을 쏘아보더니 음산하게 말했다.

"그러면 빈승을 따라 오시오."

그는 몸을 돌려 후원 쪽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

"……."

무린과 고려금은 서로 시선을 나눈 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안내된 곳은 곰팡내가 코를 찌르는 낡은 선방이었다.

방에는 나무침상이 하나 놓여 있을 뿐, 가구나 집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올빼미 괴승은 어디론지 말없이 사라졌다. 죽 한 그릇 가져다 줄 사람이 아니었다.

무린은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폐찰에 유령 같은 중이라……."

고려금이 물었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무린이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도 일이 벌어질 것 같소. 우선 아까 못 잔 잠이나 좀 자고……."

그는 눈을 감았다.

정말 한가하게 잠이나 잘 생각인가?

고려금은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심기(心氣)는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군!'

두 사람은 서로 내심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이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세 개의 흑영이 나타났다. 흑색 가사를 걸친 세 화상이었다.

조금 전의 올빼미 같은 괴승과 두 젊은 화상이었다.

올빼미 같은 괴승이 합장하였다.

"아미타불… 두 분은 이제 갈 때가 되었소."

고려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시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아침이라도 됐단 말이오?"

"아미타불… 아침이 안 됐어도 가셔야 하오."

"가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오?"

"때가 되었기 때문이오."

"때……?"

"아미타불… 저 세상으로 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오."

그러고 보니 두 젊은 화상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무린과 고려금을 처치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무린이 눈을 뜨고 부시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우리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시주들이 여기에 온 게 불찰이었소."

돌연 두 젊은 화상이 낭랑하게 불호를 외며 쌍장을 쳐 냈다.

"아미타불… 가라!"

살인을 하면서 불호를 외는 것은 그들의 버릇인가?

다음 순간 극맹힌 장력이 벼락치듯 작렬했다.

콰르르릉- 콰쾅-!

찰나 고려금의 우수(右手)에서 두 줄기 지강(指 )이 빛살처럼 뻗쳤다.

치리리릿-!

장력은 지력에 부딪치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컥!"

"크윽!"

이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화상은 털썩털썩 쓰러졌다. 그들의 미심에는 가느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쾌잔(快殘), 고려금의 무공은 진정 괴이하고 무서웠다.

올빼미 같은 괴승은 대경실색했다.

"아니……!"

고려금의 우수가 그를 향해 뻗었다.

"이리 가까이 와서 왜 우리를 죽이려는지 말해라!"

괴승은 강맹한 흡인력에 의해 주르르 끌려 왔다.

'허어억……!'

괴승은 도저히 고려금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끌려가는 그대로 머리를 침상에 힘껏 부딪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머리가 수박처럼 깨어졌다.

그의 몸은 바닥에 흙벽처럼 털썩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자결(自決)을 한 것이다.

고려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하군."

방에는 세 화상의 시체가 널려졌다.

무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경내를 조사해 볼 차례인 것 같소."

고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사람은 서로 목적이 다르면서도 생각은 일치했다.

그들은 선방을 나섰다.

축융사의 경내는 매우 넓었다. 도처에 불전과 불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인적이 끊어진 폐찰이 분명했다.

무린과 고려금은 매우 실망했다. 아무것도 눈에 띈 게 없으니 허망할 노릇이 아닌가.

이때 무린의 시선이 후원의 울창한 숲 쪽으로 향했다.

"……!"

숲 속에서는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뻗치고 있었다.

"저 숲 속으로 가 봅시다."

무린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려금이 뒤를 따랐다.

숲 속에 이른 두 사람은 주춤 멈추어 섰다.

앞에는 거대한 석탑(石塔)이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형거탑(尖形巨塔)이었다. 불빛은 그 괴탑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괴탑 앞에는 십여 명의 화상이 엄중히 늘어서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음산한 인상의 흑포화상들, 모두가 한결같이 일류고수로 보였다.

무린은 그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흑포화상들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멈춰라!"

"누구냐?"

순간 무린의 십지(十指)에서 뇌전 같은 지강(指 )이 뻗쳤다.

치치치- 치치칫-!

흑포화상들은 손 한 번 써 볼 틈도 없었다.

"허억!"

"으윽!"

숨막히는 짧은 비명이 연속 터졌다.

가히 섬전지간(閃電之間), 일순간에 십여 명의 흑포화상은 모두 짚단처럼 쓰러졌다.

무린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괴탑 앞으로 다가갔다. 고려금은 뒤를 따르며 안색이 약간 변했다.

'대단한 무공이다!'

탑문(塔門) 안에서는 환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무린과 고려금은 탑문을 들어섰다.

아래로 길다랗게 뻗친 돌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거기 시작했다. 거의 일천 개나 되는 계단을 내려가자 육중한 전문(殿門)이 앞을 막아 섰다.

피를 칠한 듯 붉은 주홍문(朱紅門)이었다.

문에는 다섯 글자가 찬란한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혈황보전(血皇寶殿)>

어딘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무린은 가만히 전문을 밀었다. 의외로 전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무린과 고려금은 혈황보전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네 명의 거인(巨人)이 앞을 막아 섰다.

탑처럼 우람한 네 거인, 그러나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거대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이었다. 살아서 생동하는 듯 무시무시한 사천왕이다.

무린과 고려금은 사천왕상 뒤에 몸을 숨기며 전면(前面)을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그곳은 널다란 대전(大殿)이었다. 대전 중앙에는 거대한 세존상(世尊像)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그것은 시뻘건 적동(赤銅)으로 만든 초대형의 혈불이었다. 높이가 무려 십 장은 되었다.

대혈불은 심장을 찍어 누르는 듯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대혈불 앞에는 한 노화상이 석대 위에 단정히 정좌를 하고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데, 만면에는 기이한 대지존(大至尊)의 위엄이 흘러넘친다. 천하인을 압도할 듯 절륜한 기도였다.

그런데 그의 전신에서는 투명한 혈광(血光)이 은은히 뻗고 있지 않은가?

또한 그에게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한 사기(邪氣)가 뻗고 있었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사기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어진 유체(遺體)였다.

고려금이 무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것은 혈황사존불의 유체가 틀림없소."

무린은 흠칫했다.

<혈황사불존>

사백 년 전에 출현했던 공포의 대사불(大邪佛)이다.

홀연 소림사에 출현한 그는 소림 일천 제자를 처참하게 잔살하여 천하를 전율케 했다.

그 뒤 그가 축융사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중원 정도불문(正道佛門)의 삼천 고수가 일제히 축융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혈황사불존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사찰만이 폐쇄되고 말았다.

지금 형황사존불 앞에는 다섯 혈포인(血袍人)이 부복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무린과 고려금은 그들을 유심히 주시했다.

혈황사존불 앞의 다섯 혈포인.

네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요염하게 아름다운 중년미부였다.

그들은 붉은 승포를 걸쳤으나 머리를 깎지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은은한 사기(邪氣)가 뻗치고 있었다.

무린은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혈라오사불(血羅五邪佛)이다!'

<황음사불(荒淫邪佛)>

<무도사불(無道邪佛)>

<유부사불(幽府邪佛)>

<염왕사불(閻王邪佛)>

<환색사불(幻色邪佛)>

그들은 오십 년 전에 출현하여 천하불문(天下佛門)을 횡행하던 사극고수(邪極高手)들이다.

지난 수십 년 간은 무림에 출현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혈황사존불의 유체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때 황음사불의 입에서 장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혈황사존불이시여! 이제 때가 되었나이다!"

으시시한 한기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 계속 울러 퍼졌다.

"후인(後人)들이 조사(祖師)의 유체에서 신물(神物)을 얻으려 하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슨 말인가?

무린은 겨우 그들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혈라오사불은 바로 혈황사존불의 후인이었구나!'

황음사불은 환색사불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사매(師妹)! 존체(尊體)에서 신물을 취하도록 하시오!"

요염하게 아름다운 환색사불이 앞으로 나섰다.

"사형(師兄)의 명을 따르겠어요!"

환색사불은 혈황사존불 앞으로 다가가서 똑바로 마주 섰다.

무린과 고려금은 의혹의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

돌연 환색사불이 쌍장을 앞으로 쭉 뻗었다.

츠르르르르-!

혈황사존불의 유체를 향해 눈부신 첨광(尖光)이 폭사했다. 다음 순간 혈황사존불의 유체는 미세한 가루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1

환색사불은 왜 조사의 유체를 훼손했는가?

순식간에 혈황사존불의 유체는 한 무더기의 회색 가루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그 속에서 눈부시게 뻗쳐 오르는 한 줄기 혈광(血光)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두만한 핏빛 혈주(血珠)였다. 혈광은 그 혈주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혈라오사불은 일제히 격동성을 토해 냈다.

"오오……!"

"혈불사리(血佛奢利)다!"

환색사불이 뼛가루 속에서 혈주를 집어 들었다.

순간 넓은 대전은 혈주에서 뿜어지는 눈부신 혈광으로 가득 찼다.

아아, 그것은 극렬한 사기(邪氣)였다.

혈주에서는 가공할 사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무린과 고려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혈불사리는 예사 물건이 아니다.'

혈불사리!

절대마승의 유체에서 나오는 사악한 악령의 실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악령을 지배할 수 있는 무서운 공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혈라오사불은 혈불사리 앞에서 격동을 금치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이 혈불사리가 이루어 줄 것이다!"

"우리는 무적천하를 이룰 수가 있다!"

환색사불이 혈불사리를 소중히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제 무영수련장으로 가도록 해요!"

무영수련장이라는 말을 듣자 무린은 흠칫했다.

지난날 파랑새를 쫓아가서 다리에 매달린 종이쪽지를 떼어 보니, 명주라는 여인이 무영수련장에서 구원을 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던가?

또한 참정수옥에서 죽은 선도삼개(仙道三 )도 어떤 물건이 무영수련장에 있다는 말을 백상회에 전해 달라고 했었다.

무영수련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려금의 안광도 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무영수련장에 대해서 어떤 관심이 있는가?

혈라오사불은 대전을 떠날 준비를 갖췄다.

이때 무린이 그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혈라오사불, 모두 여기 있었구료!"

혈라오사불은 흠칫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는 빛이 나타났다.

"너는 누구냐?"

무린은 부러진 불진 조각을 그들 앞에 툭 던지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지나가던 사람인데 이게 혹시 당신들 물건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왔소."

그것은 고려금이 금령이십사호의 은패와 함께 건네 준 불진조각이었다.

혈라오사불은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무도사불이 음산하게 말했다.

"그것은 노납이 사용하던 불진이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린의 어조는 지극히 담담했다.

"역시 금령밀전의 고수들에게 살수를 펼친 것은 당신들이었군."

차라리 무심할 만큼 담담한 어조였다.

혈라오사불의 눈빛은 흉흉하게 변했다.

황음사불이 얼음굴에서 울려 오는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보니 너는 궁륭마천부에서 왔구나!"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 대담하구나!"

"대담한 건 당신들이오. 감히 궁륭마천부에 대항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오?"

"우리는 궁륭마천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무린은 냉소를 지었다.

"당신들 배후에 있는 존재가 그토록 강하단 뜻이오?"

황금사불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나는 천축왕자 아극타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인 줄은 미처 몰랐다."

혈라오사불의 배후에는 천축왕자 아극타가 있는 것이다.

혈라오사불은 아극타의 명을 받아 금령밀전의 고수들에게 살수를 펼친 것이다.

황음사불이 음산하게 말했다.

"중원에 있는 그분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돌연 무린의 신색이 엄숙하게 변했다.

"당신들은 아극타에게 중원을 팔아 넘길 모양인데, 나 궁륭마천부의 대존야가 용납하지 않겠소."

순간 혈라오사불은 안색이 대변했다.

"대존야라고……!"

눈앞에 서 있는 이 수려한 문생이 바로 제이(第二)의 무림천자인 대존야란 말인가?

천하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대존야가 이런 약관의 젊은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고려금도 무린의 신분을 알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쩐지 비범하다고 생각했더니…….'

혈라오사불은 크게 긴장했다. 바로 생사의 심판자가 눈앞에 출현한 것이다.

혈라오사불의 시선은 서로 번개처럼 부딪쳤다. 찰나 대전을 진동시키는 폭갈이 터져 나왔다.

"광전빙강지!"

"단백혈폭공!"

"사혼청염기!"

황음사불과 무도사불, 유부사불은 일제히 무린을 향해 덮쳐들었다.

염왕사불은 고려금을 향해 맹렬히 덮쳐 갔다.

치치치칫-!

츠츠츳-!

핏빛 광채가 대전을 가득 채우며 엄청난 기류의 파동이 노도처럼 휘몰아쳤다.

순간 무린의 입에서 낭랑한 일갈이 터졌다.

"수미패엽원불공!"

그것은 정종칠대신서의 첫번째 신공이었다.

콰우우우우웅-!

대전의 기류는 미친 듯 격탕하기 시작했다.

이내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으아악!"

황음사불과 무도사불, 유부사불의 신형이 허공에서 낙엽처럼 뒤집히더니 거대한 세존상 쪽으로 날아갔다.

털썩- 털썩-!

육중한 적동상(赤銅像)에 부딪친 그들은 바닥에 무참한 모습으로 거꾸러졌다.

아, 너무나도 허망한 일전(一戰)이 아닌가?

그들이 비록 가공할 사극고수였지만 무린의 절대공력 앞에서는 일초지적(一超之敵)이 되지 못했다.

이 광경을 본 환색사불은 대경실색했다. 그녀의 눈은공포로 부릅떠졌다.

"대존야, 당신의 공력은……."

그녀의 교구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놀랄 만큼 담담했다. 그는 환색사불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환색사불, 당신은 팔십 살이 넘었을 텐데 아직도 삼십대의 미색(美色)을 유지하고 있으니 정말 놀랍소."

지금이 미색 따위를 논할 때인가?

환색사불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무린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데에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소?"

일순 환색사불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쩍였다.

'이 젊은 녀석이 의외로 여색(女色)을 밝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한 가닥 생로(生路)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요염한 매소(魅笑)를 지으며 말했다.

"대존야, 그 비결을 알고 싶으세요?"

녹아날 듯한 교성이었다.

무린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소."

"그렇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당신도 그 비결대로 한다면 백 세가 넘도록 청춘을 유지할 수 있어요!"

"호오……!"

"비결은 바로 본녀의 유불환희극락공(幽佛歡喜極樂功)에 있어요!"

"유불환희극락공?"

"그 비공(秘功)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것은 오직 육체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예요. 본녀의 이 육체를 통해서……."

환색사불은 뇌쇄적으로 교구를 흔들었다. 그녀의 교구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색기(色氣)는 눈앞이 현란할 정도였다.

일순 무린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색기다!'

환색사불은 무린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대존야, 당신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본녀의 육체를 통해 유불환희극락공을 연성할 수가 있어요!"

"……."

"대존야, 당신은 이제 보니 매우 준미하군요."

환색사불은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짙은 체향이 코끝에 풍겨 왔다.

비록 승포를 걸쳤다고는 하지만 일반 속세의 미녀들보다 더욱 뇌쇄적인 교태였다.

그녀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대존야… 제 눈을 보세요."

무린은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들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기이한 벽광이 뻗쳤다.

'미혼환시공(迷魂幻視功)!'

그녀의 안광은 무린의 망막을 찔렀다. 그러자 무린의 몸은 전류에 부딪친 듯 부르르 떨렸다.

찰나 환색사불의 우수가 번개처럼 무린의 심장을 향해 뻗쳤다.

"대존야… 유불환희극락공을 전수해 주기 전에 먼저 그대의 심장을 꺼내야겠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히 심장을 꺼낼 수는 없었다.

무린은 어느 새 귀신처럼 뒤로 물러서며 기괴하게 일수(一手)를 쳐 내고 있었다.

치잇-!

한 줄기 극맹한 강기( 氣)가 뻗쳤다.

"헉!"

환색사불은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주르르 밀려났다. 그녀는 선혈 한 모금을 울컥 토하더니 겨우 멈추어 섰다.

"으윽, 대존야! 다음에 다시 만나자!"

그녀는 곧 황급히 몸을 뒤집어 전문 밖으로 도망쳤다. 무린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도주한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무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순간 한 마리의 투명한 수정나비가 그녀의 뒤를 빛살처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수정비혼접, 바로 그 신비로운 암기였다.

무린은 심유한 미소를 지었다.

'환색사불, 그대가 무영수련장으로 간다면 내가 곧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아, 무린은 잠시 연극을 했는가?

하기야 억만번뇌산승의 색향파행심결을 십이 성 완성한 무린이 어찌 간단한 미혼법(迷魂法)에 넋을 잃을 것인가?

또한 무린은 고의로 환색사불을 도주시킨 것이다. 물론 수정비혼접의 추적으로 무영수련장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기류심강으로 움직이는 수정비혼접의 놀라운 묘용(妙用)이었다.

염왕사불과 고려금의 격전은 마지막 고비에 이르고 있었다.

고려금의 기괴한 절초(絶招)가 연속 펼쳐졌다. 그녀의 무공은 역시 신비무쌍했다.

"쓰러져라!"

마침내 고려금의 낭랑한 일갈이 터졌다.

"으윽!"

염왕사불은 찰나간에 요혈이 제압당해 바닥에 털썩 거꾸러졌다.

고려금은 즉시 한 발을 그의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두부처럼 뭉개 버릴 셈인가?

염왕사불의 눈에는 절망적인 공포가 스쳐 갔다.

"으으……."

고려금의 눈동자가 무섭게 번쩍이며 입술이 몇 번 소리 없이 움직였다.

염왕사불에게 무언가 전음을 보내는 게 분명했다.

염왕사불의 입ㅅ도 몇 번 소리 없이 움직였다.

무슨 대답을 하는가?

다음 순간 고려금의 발이 무자비하게 염왕사불의 얼굴을 뭉개 버렸다.

"끄윽!"

숨이 넘어 가는 답답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이 끝이었다. 염왕사불은 이내 숨이 끊어져서 축 늘어졌다.

고려금은 가공할 무공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잔인한 일면(一面)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린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축융사에는 더 볼일이 없을 것 같소."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그러면 나는 먼저 떠나겠소."

고려금은 무린을 날카롭게 한 번 응시하더니 대전 밖으로 번쩍 사라졌다.

무린은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염왕사불에게서 무영수련장의 위치를 알아냈겠지.'

고려금은 염왕사불을 위협하여 무영수련장의 위치를 알아낸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먼저 무영수련장으로 떠난 것이다.

무린은 대전을 나섰다.

밖에는 벌써 철묵이 모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린이 오르자 마차는 즉시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린의 앞에는 어떤 태풍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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