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사내가 나타났다
두두두두-!
마차는 계속 달려갔다.
숲이 끝나고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양쪽으로는 높은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어딘지 음산한 느낌이 드는 계곡이었다.
마차가 계곡 중간에 이르렀을 때, 철묵이 갑자기 채찍을 급히 휘둘러 말을 세웠다.
앞에는 거대한 암석 하나가 불쑥 솟아 진로(進路)를 차단하고 있었다.
철묵은 주름진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암석 따위가 감히 앞을 막다니!'
황제가 앞을 막아도 채찍으로 후려치고 지나갈 그가 아닌가?
그런데 암석에는 이상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수련(水蓮)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돌아가라.>
누가 이런 괴상망칙한 비석을 세웠는가?
철묵이 이런 비석 따위를 안중에 둘 리 없다. 철묵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비석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퍽- 퍽- 퍽-!
그의 쌍권(雙拳)이 몇 번 번뜩이자 거대한 비석은 흙덩이처럼 부서져서 흩어졌다.
철묵으로서는 암석을 부수는 게 삶은 만두를 부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철묵은 다시 마차를 몰기 위하여 돌아섰다.
이때 앞쪽의 무성한 수풀이 괴이하게 흔들렸다.
스스스스-!
동시에 무수한 청의도수(靑衣刀手)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예리한 기도(奇刀)를 비껴든 약 삼십 명의 청의인,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수련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냉혹무정한 표정으로 보아 모두가 일류살수(一流殺手)가 분명하다.
갑자기 계곡은 싸늘한 살기로 가득 찼다.
청의도수들은 마차를 향해 서서히 접근해 왔다. 계곡의 기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돌연 날카로운 외침이 계곡을 울렸다.
"쳐라!"
이어서 청의고수들의 우렁찬 폭갈이 터졌다.
"사라멸도진(邪羅滅刀陣)!"
그들은 폭포가 쏟아지듯 마차를 향해 엄습했다. 그들의 신형은 허공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차차차창-!
삼십 개의 기도에서 눈부신 예광(銳光)이 뻗쳤다. 엄청난 도강(刀 )이 마차를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찰나지간 마차 안에서 은빛 광채가 분수처럼 폭사했다.
슈슈슈슉-!
허공이 온통 은빛 광채로 가려지며 처절한 단말마가 연속 터졌다.
"크아!"
"으아악!"
허공에 떠오른 청의도수들은 가랑잎처럼 뒤집혀서 날아갔다. 그들의 몸에는 모두 비수가 한 개씩 꽂혀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관통이었다.
일순간에 삼십 명의 청의도수는 남김없이 땅바닥에 널려졌다.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깨끗했다.
철묵은 무감동하게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벽상하는 백 명의 암습자라도 한꺼번에 처치하는 여자지.'
백파은섬비 벽상하!
청의도수들은 그녀가 마차 안에서 날린 은섬비에 당한 것이다. 상대를 잘못 만난 게 그들의 불운(不運)이었다.
철묵은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이때 허공에서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쏴아아아-!
철묵은 시선을 들었다.
'이건 또 뭔가?'
양쪽 암벽에서 수많은 금의검수(錦衣劍手)가 독수리 떼처럼 덮쳐 오는 게 보였다. 약 오십 명의 금의검수였다.
철묵은 눈을 껌벅껌벅했다.
"……."
금의검수들은 마차를 단숨에 박살낼 기세로 덮쳐 오고 있었다. 그들의 쾌속한 신법으로 보아 청의도수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고수들이었다.
쐐애애액-!
엄청난 검강(劍 )의 파도가 밀려왔다.
순간 마차 안에서 한 명의 인영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파랑십자도 사원, 바로 그였다.
사원의 파랑십자도가 일섬(一閃)을 뿌리는 순간, 한 줄기 투명한 도강(刀 )이 천공으로 무지개처럼 뻗쳐 올랐다.
"칠십이만멸백파세도!"
예리한 일갈에 이어 웅장한 파공음이 울렸다.
구구구궁-!
극맹한 도강이 금의검수들을 해일처럼 쓸어 나갔다.
"커억!"
"크으으!"
비명과 도광(刀光)이 허공에 충만할 때였다.
후두둑- 후두두둑-!
땅에는 피비(血雨)가 소나기처럼 뿌려지며 갈기갈기 찢어진 육골(肉骨) 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이내 장내가 조용해졌다.
사원은 마차 위에 우뚝 서서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십 명의 금의검수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오,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의 가공할 위력이여!
금의검수들 또한 사람을 잘못 만난 것이 불운이라고나 할까?
이제 더 이상의 방해자는 없었다. 철묵은 마차를 몰기 위해 채찍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 마차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회의청년(灰衣靑年).
일신에는 허름한 회의를 걸쳤는데, 흩어진 머리가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다.
휘적휘적 걸어오는 걸음걸이는 술에 취한 것처럼 불안정했다.
회의청년은 마차의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마차를 못 보았는가? 그대로 오면 마차와 정통으로 부딪칠 판이다.
철묵은 자신도 모르게 노기가 치밀었다.
'걸리는 게 뭐가 이리 많은가!'
벙어리이니 소리는 칠 수 없고, 그는 치켜든 채찍으로 회의청년을 후려쳤다.
'꺼져라!'
채찍은 쐐액 소리를 내며 회의청년에게 뱀처럼 뻗쳐 갔다.
그는 붉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지는가?
순간 회의청년은 우연인 것처럼 한 손을 가볍게 쳐 냈다. 거짓말처럼 채찍이 홱 당겨지며 철묵의 왜소한 신형이 땅바닥에 날아가서 푹 쑤셔 박혔다.
"헉!"
무언가가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다행히 갈라진 것은 철묵의 머리와 부딪친 바위였다.
일찍이 철묵이 이런 대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철묵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이렇게 대노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버!"
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사상 유례없는 노기에 사로잡힌 증거였다.
철묵의 왜소한 신형이 납작 엎드리더니 다음 순간 회의청년을 향해 굶주린 매처럼 덮쳐들었다.
쐐애액-!
그의 쌍권에는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울렸다.
금강벽파수도공!
이 쌍권에 부딪치면 금강철벽이라도 일순간에 콩가루가 되고 만다.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회의청년도 사람을 잘못 만난 게 아닐까?
한데 이 순간 회의청년이 다시 우연인 것처럼 한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허억!"
벙어리도 신음은 토한다. 철묵은 일순간에 삼 장이나 허공으로 날아가서 땅바닥에 푹 쑤셔 박혔다.
이번에도 그의 머리에 부딪친 바위가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진짜 사람을 잘못 만나 불운한 것은 바위였다.
아아, 철묵은 이제 너무나 대노했다. 그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졌다.
머리카락은 철사처럼 빳빳이 곤두섰다. 천하를 박살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엄청난 분노였다.
이때였다.
"하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무린이 마차 안에서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무린은 회의청년 앞으로 다가갔다.
"형공, 나의 친구가 실례를 한 것 같소."
청년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엉뚱한 걸 불쑥 물었다.
"비석에 씌어 있던 수련이란 말은 무영수련장을 의미하오?"
무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런 것 같소."
비석은 무영수련장에서 세운 것으로 보였다. 몰살당한 청의도수와 금의무사들은 무영수련장에서 경비를 위해 배치한 무사들이리라.
청년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무영수련장을 찾아가고 있소?"
"그렇소."
"당신은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무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백상회(白象會)의 궁천무(宮天舞)요."
청년의 말은 직선 그대로였다. 이렇게 사설을 제외하고 직선적인 말만 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흔치 않으리라.
무린은 궁천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백상회라면 어찌 모르랴.
백상회!
궁륭마천부에 반기를 들고 있는 당금 무림의 이단자들의 집단이다.
무린은 궁천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
궁륭마천부의 대존야 앞에서 어찌 백상회의 인물이 거침없이 정체를 밝힐 수 있는가?
궁천무의 용모는 평범했다. 그러나 그 평범 속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비범이 깃들어 있었다.
궁천무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라고 하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무린이 물었다.
"무엇이오?"
"지난날 우리 백상회의 선도삼개가 궁륭마천부에 잡혀 간 적이 있소.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선도삼개.
무린이 참정수옥에서 만났던 그 세 명의 괴인이 아닌가?
무린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죽었소."
"부주 우문환탑이 그들을 죽였소?"
"아니오. 그들은 내가 죽였소."
궁천무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렇다면 고맙소. 그들의 고통을 없애 주었으니."
궁천무도 선도삼개의 비참한 상태를 알고 있었던 듯 무린을 탓하는 빛은 아니다.
그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무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리 형편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군."
"……!"
천하의 대존야에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니.
무린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도삼개는 죽기 전에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소."
"무슨 부탁이오?"
"백상회의 인물을 만나면 한 마디 전해 달라고 했소. 물건은 무영수련장에 있다고 말이오."
"음……."
궁천무는 나직한 침음성을 토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소. 알고 보니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군."
칭찬의 격(格)이 약간 높아졌는가?
이번에는 무린이 물었다.
"그 물건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에게도 말해 줄 수 있겠소?"
궁천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도삼개가 그 물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았소?"
"내가 그들에게 묻지 않았소."
궁천무는 다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담백한 사람이군."
궁천무는 선선히 말했다.
"그 물건은 상감잠룡신검(象嵌潛龍神劍)이오."
"상감잠룡신검……."
"그 검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나도 모르오. 나는 다만 회주(會主)의 명에 따라 그것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오."
상감잠룡신검!
그것이 어떤 검이기에 백상회가 추적하고 있는가?
무린은 그 검이 비상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광고(曠古)의 이물(異物)이 분명하다.'
궁천무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나는 이제 무영수련장으로 가야겠군."
그는 가려다 말고 문득 무린에게 물었다.
"당신도 무영수련장을 찾아간다면 동행하는 게 어떻겠소?"
무린이 웃으며 말했다.
"귀하와 나는 적대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소. 나는 필요할 때 당신에게 손을 쓸 것이고, 당신 또한 원할 때는 언제라도 출수해도 좋소!"
실로 세상에 이토록 직선적인 사내는 흔치 않으리라.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동행합시다."
"당신은 꽤 좋은 사람이군."
칭찬의 격은 또 한 계단 높아지고 있었다.
무린과 궁천무는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철묵이 마부석에 오르자 마차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무린과 궁천무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훗날 이 만남이 무림형세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천무!
그 사내야말로 중원이 배출한 또 한 명의 절세기린아였다.
* * * *
사방 십 리에 이르는 거대한 장원(莊園)이었다.
장원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였고, 중앙에는 방대한 청수담(淸水潭)이 있었다.
호수처럼 크고 푸른 연못이었다. 연못에는 수련(水蓮)이 무성하여 아름다운 운치를 풍겼다.
장원의 건축물은 이국풍(異國風)의 특이하고 우아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신비로운 장원이었다.
연못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화각(華閣).
화각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사방에는 백화(百花)가 난만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지금 화각 안에는 두 여인이 하나의 조각상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축융사에서 도망쳐 온 환색사불이었다.
그러면 이곳이 바로 무영수련장인가?
환색사불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은 길다란 은발이 발꿈치까지 늘어진 노파였다.
은발노파의 용모는 매우 추악했다. 쭈글쭈글한 피부에 입이 길게 찢어지고, 은은한 자광(紫光)이 발산되는 눈동자는 동굴처럼 깊숙했다.
그녀에게서는 섬뜩한 사기(邪氣)가 물씬 풍겼다. 결코 범상한 노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두 여인 앞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석대 위에 단정히 정좌한 나녀(裸女)의 조각상이었다.
사요(邪妖)하고 이국적인 거녀상(巨女象)이었다.
얼굴은 윤곽이 또렷하고 음영(陰影)이 짙은데, 머리는 불타는 듯한 홍발(紅髮)이었다.
눈은 감고 있었고 체형은 크고 약간 비대하게 느껴질 정도로 풍만하여 유방만 해도 보통 사람의 세 배는 되었다.
조각상이 만약 몸을 일으킨다면 키는 일곱 자에 이르렀다. 살아서 생동하는 듯 정교하고 아름다운 거녀상이다.
거녀상은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욱 요매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녀상의 뒤에는 열두 명의 홍의녀(紅衣女)가 엄중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류고수로 보였다.
문득 은발노파가 사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장주(莊主) 칠해사고(七海邪姑) 예추령(芮秋玲)이 오늘에야 대임(大任)을 완수할 수 있게 되었구료. 비록 환색사불 그대의 사형들이 희생되었지만 혈불사리를 무사히 가져온 게 큰 다행이오."
은발노파는 무영수련장의 장주였다. 그런데 그녀의 내력은 무엇인가?
<칠해사고 예추령>
백 년 전의 전설적인 대마녀였다.
천축의 한 사도밀문(邪道密門) 출신으로서, 그녀가 지난날 아미파(峨嵋派)에 출현하여 삼백 니승(尼僧)을 무참하게 잔살한 것은 무림사에서도 가장 전율적인 참극(慘劇)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무영수련장의 장주라는 것을 중원에서 알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환색사불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천녀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존하여 도망친 것은 정말 천행이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칠해사고 예추령이 말했다.
"아난타(阿難他)공주께서 오실 시간이 되었소. 준비를 갖추도록 합시다."
아난타공주는 또 누구인가?
칠해사고는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한쪽 벽에 드리워진 붉은 휘장이 스르르 갈라지며 백의를 입은 한 낭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인상은 예쁘장하고 총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커다란 홍옥병 하나를 받쳐 들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가득했다.
칠해사고는 그녀를 향해 엄숙하게 명했다.
"명주(明珠)! 향로(香爐)에 불을 피우고 그 홍옥병을 올려 놓아라."
명주라 불린 백의낭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복명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석대 옆에 놓여 있는 향로 앞으로 다가갔다. 고색창연한 금동(金銅) 향로였다.
명주는 향로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
불길이 타오르자 은은한 암향(暗香)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홍옥병을 향로 위에 올려 놓았다.
암향이 서서히 실내를 채우자, 분위기는 더욱 사괴(邪怪)하게 변해 갔다.
이때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세미녀(驚世美女)였다.
갑자기 화각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빙설(氷雪) 같은 피부, 입술만이 꽃잎처럼 붉은데 호수처럼 서늘한 봉목(鳳目)은 사람의 혼을 빨아들인 듯하다.
화려한 청라의(靑羅衣)를 걸친 교구는 후리후리하고 늘씬했다. 일신에는 무한히 고귀한 기품이 어려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다섯 명의 시녀도 한결같이 기품이 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들은 중원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는 이국(異國)의 신비로운 염색(艶色)이 흘러넘쳤다.
칠해사고와 환색사불은 황망히 예를 표했다.
"천비들이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몹시 공손했다.
청라의를 입은 여인이 바로 아난타공주인가?
아난타공주는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邪姑), 수고가 많소. 준비는 끝났나요?"
은방울이 짤랑거리는 듯 무한히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칠해사고가 공손히 응답했다.
"그렇습니다. 혈불사리는 이미 준비가 되었습니다."
환색사불이 급히 품속에서 혈불사리를 꺼내어 바쳤다.
"혈불사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극렬한 사기를 뻗어 내는 혈불사리!
갑자기 실내는 소름끼치는 사기로 가득 찼다.
아난타공주는 혈불사리를 받아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나직한 탄성을 토해 냈다.
"정말 놀라운 신물(神物)이로군!"
이내 아난타공주의 신색은 엄숙하게 변했다.
"이제 불괴불사녀(不壞不死女)가 탄생될 준비가 되었군."
불괴사녀!
어딘지 무서운 느낌이 드는 이름이 아닌가.
아난타공주의 말은 무슨 뜻인가?
아난타는 혈불사리를 들고 석대 위의 거녀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거녀상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칠해사고와 환색사불의 얼굴에는 긴장된 빛이 나타났다.
아난타는 거녀상의 눈앞에 혈불사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사유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괴사녀여! 눈를 떠라!"
혈불사리의 눈부신 광채가 거녀상의 눈을 환히 비추었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거녀상이 정말로 눈을 스르르 뜨는 게 아닌가?
무한히 깊고 맑은 눈동자였다.
아아, 거녀상은 조각이 아니었다.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거대한 체형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어 조각처럼 보였을 뿐 틀림없는 여인의 생체(生體)였다.
그러나 거녀(巨女)의 시선은 혈불사리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 몽롱했으나 눈동자에는 은은한 공포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난타의 입에서 다시 사유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괴사녀여! 그대는 이제 일백 명의 동정동남(童貞童男)에게서 취한 혈정(血精)을 복용하여 새 생명을 얻으라!"
그러자 칠해사고가 즉시 금동향로 위에 올려 놓았던 홍옥병을 가져왔다.
홍옥병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난타는 홍옥병을 받아 거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불괴불사녀여! 입을 벌려 이 혈정을 복용하라!"
거녀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려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아난타는 그녀의 입으로 천천히 홍옥병을 기울였다.
주르르-!
홍옥병 안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녀는 그 액체를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아아, 그것이 무엇인가?
일백 동정동남의 혈정!
그것은 순양(純陽)을 지닌 일백 명의 동자(童子)에게서 취한 피의 정수(精髓)였다. 생명의 가장 순수한 정화(精華)였다.
그렇다면 그 홍옥병에 들어 있는 혈정은 일백 명의 동자를 희생시켜서 얻은 생명의 결정(結晶)이란 뜻이 아닌가?
또한 그녀는 그 혈정을 복용하면 완전한 생명을 얻는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기괴한 일이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거녀는 홍옥병의 혈정을 모두 복용하자 긴 숨을 몰아쉬었다.
풍만한 유방이 크게 오르내렸다.
아난타의 아름다운 얼굴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불괴불사녀여! 이제 사령혈심공(邪靈血心功)을 운행하여 잠자는 내력을 끌어올려라!"
그러자 불괴불사녀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내 그녀의 전신이 분홍색으로 물들더니 은은한 혈광(血光)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혈광은 점점 눈부시게 뻗쳐서 실내를 가득 채웠다.
아난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괴불사녀는 우리가 수십 년의 고심과 노력 끝에 탄생시키는 것이다! 겁겁회아루(劫劫回兒樓)의 두 번째 관문만 거치면 불괴불사녀는 이제 중원을 완전한 폐허로 만들 수 있으리라.'
놀랍고 무서운 말이 아닌가!
그런데 겁겁회아루는 또 어디인가?
불괴불사녀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혈광은 점점 강렬해졌다.눈부신 혈광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중인은 긴장하여 불괴불사녀를 주시하고 있다.
이때 두려움으로 몸을 떨던 백의낭자 명주는 문득 이상한 육감을 느꼈다.
"……!"
그녀는 붉은 휘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소저께서…….'
붉은 휘장 옆에는 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수려한 청년서생, 바로 고려금이었다.
고려금은 명주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명주, 내색하지 말아라!"
명주는 반가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녀야말로 새의 발목에 구원을 청하는 종이쪽지를 매달아 보낸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고려금의 수하였던 것이다.
고려금은 아난타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덧 불괴불사녀의 온몸에서 뻗치던 혈광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이제 투명한 홍옥(紅玉)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사령혈심공의 운행을 마치고 눈을 스르르 떴다.
아, 그녀의 눈에서는 소름끼치도록 눈부신 혈광이 뻗치고 있었다. 누구나 그녀의 안광에 부딪친다면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과 공포를 느끼리라.
아난타는 크게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다. 불괴불사녀, 몸을 일으켜라!"
불괴불사녀는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짙은 관능의 마력(魔力)까지 지닌 풍염한 여체였다.
한 시녀가 화려한 홍라의(紅羅衣)를 가져와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불괴불사녀의 표정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녀의 정신은 환각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난타 옆에 공손히 시립해 섰다.
그녀는 아난타의 시녀가 된 것이다.
그것은 아난타가 지닌 혈불사리의 무서운 공능(功能) 때문이었다. 불괴불사녀는 혈불사리에 지배당하는 실혼(失魂)의 노예였다.
아난타가 미소를 지었다.
"불괴불사녀, 나는 너의 이름을 아라(阿羅)라고 짓겠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아라가 되는 것이다. 이제 겁겁회아루로 가서 두 번째 관문을 거치면 너는 완전한 불괴불사녀가 된다."
불괴불사녀 아라!
중원을 폐허로 만들 수 있다는 그녀는 앞으로 천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칠해사고와 환색사불도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때 환색사불은 문득 뒤에서 이상한 육감을 느꼈다.
"……!"
그녀는 시선을 홱 돌렸다. 순간 한 줄기 광채가 전류처럼 뻗었다.
번쩍-!
동시에 환색사불의 입에선 처절한 단말마가 터졌다.
"크악!"
그녀는 썩은 짚단처럼 맥없이 털썩 거꾸러졌다.
중인은 대경하여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붉은 휘장 옆에 한 수려한 청년서생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물론 그는 고려금였다.
칠해사고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너는 누구냐?"
그녀 옆에 서 있던 명주는 더욱 긴장했다. 명주는 칠해사고의 가공할 무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려금은 칠해사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난타를 향해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이 상감잠룡신검을 가지고 있소?"
상감잠룡신검!
고려금도 그 신비 속의 보검을 추적하고 있었던가?
명주라는 여인이 무영수련장에 잡혀 있는 것도 그 검과 관계가 있으리라.
아난타는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 너는 상감잠룡신검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고려금의 대꾸는 냉엄했다.
"나는 상감잠룡신검을 찾으러 왔소."
"찾으러 왔다고?"
"상감잠룡신검은 우리 문중(門中)의 물건이므로 찾으러 온 것이오."
아난타는 흠칫했다.
"그대는 동방사(東方社)의 인물인가?"
"그렇소."
대답은 명료했다.
한데 동방사라면……?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난타가 흠칫 놀라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고려금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어서 상감잠룡신검을 내놓으시오!"
정말 상감잠룡신검은 동방사의 보물인가?
고려금의 태도는 너무도 당당했다. 장내에 늘어서 있는 다른 고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돌연 칠해사고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십이수련수(十二水蓮手), 저 대담한 놈을 사로잡아라!"
그러자 뒤에 늘어서 있던 열두 명의 홍의녀가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고려금을 재빨리 에워싸더니 번개처럼 합공(合攻)을 펼쳤다.
"십이수련수(十二水蓮手)!"
열두 개의 붉은 인영이 사납게 덮쳐 갔다.
찰나 고려금이 싸늘한 호통을 터뜨렸다.
"물러가라!"
그녀의 흰 소맷자락이 기쾌하게 펄럭였다.
슈우우웃-!
동시에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크윽!"
"헉!"
헛바람 새는 소리가 연속 울렸다. 열두 명의 홍의미녀 십이수련수는 한꺼번에 무너지듯 털썩털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