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겁회아루(劫劫回兒樓) (13/37)

겁겁회아루(劫劫回兒樓)

무창성(武昌城)은 문물이 풍성하고 번화한 곳이다.

주점이나 상포가 늘어선 남문로(南門路)는 더욱 화려하고 번잡하다. 그러나 오늘은 남문로도 매우 한산했다.

아침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어 행인(行人)이 적기 때문이었다.

부슬부슬…….

여름을 재촉하는 부슬비였다.

미향선계각(味香仙界閣).

남문로의 한쪽에 웅장하게 솟아 있는 거대한 요각(料閣)이다.

무창성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객점이지만 일류 거상(巨商)이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마음 놓고 출입할 수 없다.

요리가 맛이 있는 대신 호되게 비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여러 채의 호화로운 주각(酒閣)들.

그러나 미향선계각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에 한산했다. 손님이 찾아들기에는 아직 이른 오전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조용한 별원(別院).

한 미서생이 깨끗한 정실의 침상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잠이 깊이 들었는가?

그는 고른 숨결 속에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약간 창백하게 보였다. 화려한 금침에 대비되어 병자처럼 파리하게도 보인다.

창밖에 빗줄기가 소리 없이 뿌려지는데…….

문득 미서생이 눈을 스르르 떴다.

그는 흠칫 놀라 실내를 돌아보더니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내가……."

그는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여기가 어디인가?"

이때 머리맡에 한 통의 서찰이 놓여 있는 게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서찰을 집어서 펼쳤다.

<형공, 깨어나면 가셔도 좋소. 천축공주 아난타는 무영수련장에서 탈출하고 말았소. 소생은 아직 형공이 여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소.

무린 필(筆)>

미서생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고려금이었다.

고려금은 무린이 자신을 구출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내상의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사실도 비로소 깨달았다.

무린은 그녀를 구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상까지 치료해 준 것이다.

극심한 내상을 거짓말처럼 완치시킨 것은 무린의 의술(醫術)이 신비지경(神秘之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린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자 고려금은 미간을 좀더 찌푸렸다.

"……."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 알 수 없는 파문이 되어 밀려왔다.

그러나 서찰의 마지막 귀절에 생각이 미차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소생은 아직 형공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소.

여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고려금은 재빨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았다.

옷은 단정했다.

'하지만…….'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몸을 만졌을 것이다. 어쩌면 옷까지 풀어 헤쳤을지 모른다.

봉긋하게 부풀은 가슴을 무린이 보았다면……?

고려금은 저절로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는 최상승의 의술을 지녔을 것이니 공력의 운행만으로 간단히 내상을 치료했을 것이다. 옷을 벗길 필요없이…….'

그러나 의식을 완전히 잃고 있는 동안에 치료가 행해졌으니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

고려금은 입술을 잘근잘근 ㄲ물었다.

'흥! 누가 치료를 해 달라고 했나… 제멋대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무린이 아니면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문득 그녀는 무린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나면 가도 좋다고…….'

그녀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따질 건 따지고 가야지."

그녀는 방을 나섰다.

뜰 앞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 건너편에 호화로운 이층 누각이 보였다. 그것은 미향선계각의 주청(酒廳)이었다.

널따란 주청.

주청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창가의 한 백의문생과 소녀가 마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무린과 노노아였다.

무린은 창밖에 내리는 보슬비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나 무심한 표정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안 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앞에는 빈 술잔이 하나 놓여 있다.

노노아는 열심히 요리를 먹고 있었다. 그녀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 일보다 더 행복한 건 이 세상에 없다.

무린은 손을 뻗어 술잔을 잡았다.

이때 한 미서생이 문에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고려금이었다. 그녀는 무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싸늘하다.

그녀는 무린 앞자리에 턱 앉더니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구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해야 될 것 같군요!"

무린은 짐짓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공은 왜 갑자기 여인의 말투를 쓰오?"

"흥! 당신은 재미없는 연극을 계속할 셈인가요?"

무린은 빙긋 웃었다.

"그러면 어떤 재미있는 연극을 해야겠소?"

고려금은 한성(寒聲)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인지 물어 보시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본녀의 내상을 치료했나요?"

무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상을 치료하는데는 을목요상대법(乙木療傷大法)이 가장 효험이 좋소."

"을목요상내법이라면……."

"가슴을 마찰하여 운기(運氣)를 시킨 뒤 단전(丹田)에 진력을 주입시켜 내상을 치료하는 의술이오."

맙소사! 고려금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린의 말대로라면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 한 뒤 배꼽 밑에까지 손을 댔다는 얘기가 아닌가?

고려금은 노기가 등등해졌다.

"누가 당신더러 그런 방법으로 본녀를 치료하라고 했나요?"

무린이 되물었다.

"누가 그런 방법으로 치료를 했다고 했소?"

"아니 그러면……."

"나는 그런 방법이 가장 효험이 좋다고 했을 뿐이오."

"……!"

"내가 사용한 방법은 진매운기요상대법(眞昧運氣療傷大法)이오."

"그것은……."

"그것은 명문혈(命門穴)에 대한 진력의 운행만으로 내상을 치료하는 방법이오."

고려금은 이야기도 들어 보지 못한 신비지술(神秘之術)이다.

아무튼 그런 방법이라면 부끄러운 곳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려금은 겨우 노기가 풀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 순간 고려금은 마음 속에 한 가닥 이상한 실망감이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알다가도 모를 여심(女心)이여!

고려금은 새침한 표정이 되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세우(細雨)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

"……."

돌연 고려금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만 가겠어요."

그녀는 무린의 얼굴을 재빨리 한 번 훔쳐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무린이 그녀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겠소."

"……."

고려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왠지 뒷모습이 약간 쓸쓸해 보인다.

일순 무린의 눈빛이 심유하게 변했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체가 밝혀지겠지.'

노노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형, 그 여자는 형을 좋아하고 있어. 내 눈은 못 속여!"

무린은 고소를 지으며 잔에 술을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무린은 곧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 곳이 있으니 모두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라."

노노아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무린은 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

추백산(秋柏山).

하남(河南) 한가운데에 위치한 험악하고도 수려한 암산이다. 특히 북쪽 기슭은 산세가 유난히 험악하고 가파르다.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을 만큼 험준한 곳이다.

그런데 이 깊고 음침한 곳에 하나의 거대한 흑성(黑城)이 자리잡고 있다.

성곽과 성문, 전각, 탑루 등이 모두 흑석(黑石)으로 되어 있다.

검은 빛 일색의 거성(巨城)!

어딘지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준다.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사람의 출입이 없다.

<겁겁회아루(劫劫回兒樓)>

흑성의 이름이다. 흑성이 왜 겁겁회아루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려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겁겁회아루는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의 금역(禁域)이 되었다. 

어떠한 비밀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금역, 다만 세간에는 매우 괴이한 이야기가 떠돌 뿐이다.

-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겁겁회아루로 들어가라.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저녁 무렵,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겁겁회아루의 거대한 흑영(黑影)은 괴물처럼 으시시하다. 등촉이 밝혀진 곳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루(空樓)인가?

홀연 한 백의공자가 겁겁회아루의 성벽 앞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불가사의한 신위(神威)를 풍기는 절세미공자!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가볍게 성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무린은 누각 앞으로 다가가서 전문을 가만히 밀었다.

끼이익-!

듣기 거북한 음향이 울리며 낡은 전문이 빠끔히 열렸다.

무린은 망설이지 않고 전문 안으로 들어섰다.

길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 한 흑포인이 유령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무린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아난타공주를 만나러 왔소."

흑포인의 인상은 매우 기괴했다. 해골처럼 앙상한 얼굴에 눈동자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다. 기분 나쁜 백안(白眼)이었다.

흑포인은 아무 대꾸가 없더니 돌아서서 흐느적흐느적 걷기 시작했다.

잠자코 따라오라는 뜻인가?

무린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한없이 길다란 복도였다. 복도는 미로(迷路)처럼 수많은 방향으로 갈라져서 끝없이 뻗어 있다.

등촉조차 없는 복도는 또한 컴컴한 적막에 잠겨 있다.

저벅저벅저벅-!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적막을 깨뜨린다. 정말 음산하도록 기분 나쁜 곳이었다.

흑포인은 한쪽 복도로 들어서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보기 흉한 백안이 이상하게 휘번득거린다.

그러나 무린은 무심한 얼굴로 뒤를 따라갔다.

새로 들어선 복도도 한없이 길었다. 복도 양쪽에는 수많은 문이 붙어 있었다.

흑포인은 계속 흐느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문득 흑포인이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무덤을 스스로 찾아오는 놈도 있다니……."

무린에게 들으라는 말인가?

문득 무린이 불쑥 물었다.

"아난타공주는 혼인준비를 하고 있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흑포인은 주춤하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무린의 대답은 의젓하다.

"나는 본래 그녀의 남편감이오."

흑포인은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공주께서 혼인을……."

"그렇소.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일찌기 그런 논의가 있었소."

흑포인은 잠시 염두를 굴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내전으로 안내를 해 주겠소."

태도까지 갑자기 공손해졌다. 흑포인은 방향을 돌려 오른쪽의 아름다운 대리석 복도로 들어섰다.

무린은 내심 실소했다.

흑포인은 피처럼 붉은 궁형문(穹形門)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는 안을 향해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누주께 아뢰옵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실내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흑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린에게 말했다.

"누주께서는 밖에 계신 모양이오. 들어가서 기다리면 곧 연락을 취해 드리겠소."

"알겠소."

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포인은 문을 열어 주었다. 무린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흑포인은 공손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내전은 깨끗하고 우아했다. 은은한 등롱(燈籠)까지 요요하게 밝혀져 있다. 콧속에 스며드는 달콤한 향기가 여인의 내실과도 같다.

무린은 분홍빛 휘장 속의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겁겁회아루…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무린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때 한 금의인이 성큼 들어섰다. 뒤에는 백안의 흑포인이 따르고 있었다. 위풍이 당당하고 신색이 비범한 금의인, 그가 누주인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일문주존(一問主尊)의 절륜한 기도가 뻗어 나왔다. 다만 미간에는 음산한 사기(邪氣)가 어려 있고 인상이 냉혹했다. 또한 놀랄운 절정고수로 보였다.

금의인은 무린을 보자 의혹의 빛을 띄었다.

"그대가 공주님을 뵈러 왔다고?"

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 나는 공주의 남편감이오."

금의인의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다.

"공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데, 웬 미치광이가……."

그는 흑포인을 휙 돌아보았다.

"너는 이런 미치광이를 왜 내전까지 끌어들였느냐?"

흑포인은 당황했다.

"소… 소인은……."

금의인은 무린을 미치광이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의 음성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규율을 어긴데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다!"

흑포인은 더욱 당황했다.

"누주님… 소인은… 오해를……."

"본좌가 그리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순간 금의인이 일 수를 쳐냈다.

파츳-!

금의인의 우수에서 눈부신 자광(紫光)이 뻗었다.

"으악!"

처절한 단말마가 울리며 흑포인은 털썩 거꾸러졌다. 그의 얼굴은 벌써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이것은 무린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린은 약간 놀랐다.

'자신의 수하에게 이토록 잔인하다니…….'

그러나 무린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했다. 무린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귀하가 겁겁회아루의 누주요?"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 있는 태도였다. 금의인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놀랄 만큼 대담한 놈이구나.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귀하가 누주냐고 물었소."

금의인의 눈썹은 더욱 찌푸려졌다.

"그렇다. 본좌 구로찰(具路察)이 겁겁회아루의 누주이다!"

구로찰!

중원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무린이 무감동하게 말했다.

"당신은 누주의 자격이 없소."

구로찰의 얼굴에 짙은 살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음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뜻이냐?"

무린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었소. 나는 정말로 공주의 남편감이니까."

"……!"

"당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는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지요."

구로찰의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했다.

"아직도 헛소리를 늘어놓을 셈이냐. 너를 회아곡(回兒谷)으로 보내 주마!"

찰나 구로찰의 한 손에서 자색 광전(光電)이 쭉 뻗었다.

무린은 번개처럼 몸을 틀었다.

"가공할 자전뇌강지(紫電雷 指)로군!"

그러나 구로찰의 쌍수에선 자색 광선이 연속 작렬했다.

번쩍- 번쩍-!

실내가 온통 자색 첨광(尖光)으로 가득 찬 순간, 무린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으윽!"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사태였다.

바닥에 쓰러진 무린은 시체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아아, 구로찰의 무공은 그토록 무섭단 말인가?

구로찰은 복도에 있는 한 수하에게 명을 내렸다.

"이 자를 회아곡(回兒谷)에 처넣어라!"

명을 받은 수하는 무린을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일막의 이상한 소극(笑劇)은 허망하게 막을 내린 셈이었다.

*          *          *          *

칠흑 같은 암흑 속이었다.

무린은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바로 회아곡인가?'

그는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과연 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모르겠군. 이곳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짐작은 들지만…….'

아, 그렇다면 무린은 겁겁회아루의 깊은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 거짓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가?

지금 무린이 있는 곳은 거대한 암동(暗洞)이었다. 아득한 지하의 밀폐된 계곡, 암동은 복잡한 미로처럼 사방으로 구불구불 뻗어 있다.

무린은 암동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장에는 날카로운 석순이 삐죽삐죽 돋아 있고, 바닥에는 음습한 이끼가 깔려 있다.

울퉁불퉁한 석벽에는 크고 작은 버섯이 무수히 돋아 있었다. 원색 빛깔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원추형 버섯이었다.

문득 버섯을 바라보던 무린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회아향쌍마균(回兒香雙麻菌)…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가?'

무슨 뜻인가?

이때 앞에서 두 괴인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배… 배고프다……."

"오… 오줌도 마렵고……."

두 괴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머리는 쑥대밭처럼 헝클어지고 다 떨어진 옷을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있다.

한 사람은 바지를 머리통에 감았고 다른 사람은 여자의 치마를 뒤집어 입었다.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어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치마를 입은 괴인이 멈추어 서서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바지를 둘러쓴 괴인이 두 눈을 멀뚱멀뚱 굴리며 말했다.

"너… 너 옷 젖는다."

오줌 누던 괴인은 깜짝 놀라 황급히 치마를 치켜들었다.

바지를 둘러쓴 괴인은 치마 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한 마디하였다.

"크구나……."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석벽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그는 석벽에 무수히 돋아난 버섯을 보자 그것을 허겁지겁 뜯어먹기 시작했다.

"바… 밥이다!"

치마 입은 괴인도 이것을 보자 황급히 달려갔다.

"호… 혼자 먹으면 안 돼!"

두 괴인은 닥치는 대로 버섯을 뜯어서 입 속으로 처넣었다.

무린은 두 괴인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

문득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겁겁회아루가 이런 회아곡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널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물론 사위팔방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동혈(洞穴) 광장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람,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사람, 벌거숭이가 되어 뒹구는 사람,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사람, 미친 듯 울부짖는 사람 등…….

모두가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짐승 같은 몰골들이다.

한 노파는 단단한 암벽을 주먹으로 계속 후려치고 있었다.

"죽여! 죽여! 죽여!"

퍼퍼퍽-!

한 번 칠 때마다 구멍이 움푹움푹 파이며 돌조각이 우박처럼 흩어졌다. 가공할 공력이었다.

그러나 그 노파의 표정은 바보처럼 멍청하다.

무린은 은연중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은 모두 무림의 일류고수들이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모두 철없는 어린애가 되어 버렸다.'

이때 옆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종말이여! 폐허여! 절망이여!"

이어서 한 괴인이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흉칙했다. 자주색으로 쩍쩍 갈라진 피부에 시커먼 반점이 얼룩덜룩한 얼굴이 마치 괴물 같은 모습이다.

안광만은 무섭게 번쩍이고 있어 다른 사람과 다르다.

괴인은 무린 앞에 이르자 멈추어 섰다.

"키히힛… 너는 이곳에 새로 들어온 모양이로구나!"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흉칙한 괴소가 징그러웠다.

그러나 무린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키히힛… 너는 지금 웃고 있느냐?"

"당신도 지금 웃고 있지 않소?"

"키히히힛… 노부는 여기서 너 같은 녀석을 만날 줄 몰랐다!"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소."

"키히히힛……."

괴인은 입이 찢어지게 웃어제끼더니 안광을 번쩍거리며 물었다.

"너는 이 회아곡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느냐?"

무린은 머리를 저었다.

"모르오."

"키히힛… 그러니 너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회아곡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다면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이곳은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아……."

"지옥이 어떤 곳인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네 얼굴에서는 영원히 웃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무린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다.

"그러면 당신은 예외요?"

"키히히힛… 그런 셈이다."

"회아향쌍마균이 당신의 식성(食性)에는 맞는 모양이군."

"너는 그 버섯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회아향쌍마균이 무엇인가?

그것은 천축 특산의 희귀한 버섯이다. 이 버섯을 상식(常食)하면 일신의 진력이 놀랍게 증진된다. 반면에 뇌에 나쁜 영향을 미쳐서 서서히 백치(白痴)가 되고 만다.

일호일악(一好一惡)의 양면성을 지닌 세외이초(世外異草)였다. 중원에는 서식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무린이 물었다.

"이곳에는 먹을 수 있는 게 회아향쌍마균밖에 없소?"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여기에 떨어진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회이향쌍마균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백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비밀이 거기에 있었던가?

괴인의 말이 이어졌다.

"백치가 된 사람들은 결국 불사전(不死殿)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무린이 다시 물었다.

"불사전이란 무엇이오?"

"노부도 알 수 없다.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겁겁회아루는 역시 심상치 않은 비밀을 품고 있군.'

무린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백치가 되지 않았소?"

"크흐흣… 노부는 회아향쌍마균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단 말이오?"

괴인은 한쪽 석벽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아라."

그가 가리키는 암벽 위에는 전갈(全 )과 흡사한 갑충(甲蟲)들이 슬슬 기어다니고 있었다.

다리에 털이 숭숭한 자주색 갑충, 징그럽고도 흉칙한 모습이다.

괴인이 말했다.

"노부는 회아향쌍마균 대신 저놈들을 잡아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무린이 약간 놀라며 말했다.

"유황천독갈(幽皇天毒 )이로군."

"너는 아는 게 많구나!"

유황천독갈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가공할 극독(極毒)을 지닌 전갈이다. 유황천독갈의 독 한 방울이면 천 명의 생명을 일순간에 빼앗을 수 있다.

독물지왕(毒物之王)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서운 독충이었다. 그것은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에서만 서식한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유황천독갈을 잡아먹고 살 수 있다면 분명 절세의 독인(毒人)일 것이오."

"키히힛… 물론 노부의 독공(毒功)은 천하무적이다! 무림에서는 노부를 일컬어 독황(毒皇)이라 칭한다!"

"당신은 개세독황(蓋世毒皇) 가릉(價陵)이었구려."

"역시 너는 아는 게 많구나!"

<개세독황 가릉>

중원을 공포에 떨게 하던 절대독인(絶對毒人)이다.

그는 일천 가지 절독(絶毒)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삼백 가지 독공(毒功)을 귀신처럼 펼친다.

명호 그대로 세상을 덮을 수 있는 독의 황제(皇帝)였다. 그런 그가 지난 수십 년 간은 무림에 출현한 적이 없었다.

개세독황 가릉의 어조가 음울하게 변했다.

"그러나 노부도 유황천독갈의 독성(毒性)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 흉칙하게 변한 것이다."

무린은 그의 쩍쩍 갈라진 자주색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노부는 얼굴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중독되었다. 노부는 머지않아 한 줌의 독수(毒水)로 변할 것이다."

문득 그는 암벽 위에 기어 다니는 유황천독갈을 한 마리 집어 입 속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버적버적 씹어먹으며 말했다.

"이놈들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키며 또한 단축시킨다."

과연 그런 셈인가?

개세독황 가릉이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기괴한 화상(和尙)이 있다. 그는 이끼를 씹어 즙만을 빨아먹고도 반 년을 살아왔다. 어쩌면 그는 이 회아곡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무린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

"그러나 그는 일체 말을 하는 일이 없다.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무린은 흥미를 느꼈다.

"그는 어디에 있소?"

"만나고 싶다면 노부가 너를 그에게로 안내해 주겠다."

개세독황 가릉은 오랜만에 외인을 만난 탓인지 매우 친절했다.

무린은 가릉의 뒤를 따라갔다.

벙어리 화상은 암벽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홀로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매우 특이했다. 보통 사람의 세 배쯤 되는 커다란 머리통, 밭고랑처럼 주름이 깊은 이마, 귀도 크고 코도 크고 입도 크다.

한데 앙상하게 여윈 몸은 왜소하여 그 커다란 머리통을 어떻게 받치고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화상은 눈을 꽉 감은 채 닳아서 반들거리는 묵주(默珠)를 헤아리고 있었다.

무린과 개세독황이 앞에 나타나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개세독황이 그의 다리를 툭 차며 말을 건넸다.

"벙어리, 당신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왔소!"

화상은 눈을 스르르 떴다. 심해(深海)처럼 암울한 무저의 동공 같은 눈동자였다.

그는 무린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무린은 기이한 충격을 받았다.

'천기(天機)를 꿰뚫고 있는 눈빛이다!'

무린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화상은 이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낡은 묵주를 하나하나 헤아릴 뿐이다.

개세독황이 투덜거렸다.

"벙어리가 말을 못하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이 벙어리는 뭔가를 꼭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지."

무린은 화상을 유심히 응시하고 있다. 문득 그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우주광신승(宇宙狂神僧)이 틀림없다!'

그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우주광신승>

본래는 중원 출신이나 서역(西域)에서 오도(悟道)하고 돌아왔다는 괴기승(怪奇僧)이다.

그는 불법(佛法)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쳐 우주의 비밀을 풀었다 한다.

석가세존의 뜻을 십이 성 깨우친 고금유일승(古今唯一僧)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공은 전혀 모르며 가끔 미치광이 같은 언행(言行)을 하여 우주광신승이라는 명호를 얻었다. 특히 그는 수년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천하인을 아연케했다.

- 머지않아 천 길 지하에서 한 불사불괴불멸인(不死不壞不滅人)이 탄생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쪼개질 것이다!

불사불괴불멸인이란 영원히 죽지도 상하지도 않는 사람이란 말이 아닌가? 세상에 어찌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국 우주광신승은 미치광이 비슷하게 대접받는 화상이 되고 말았다.

무린은 일말의 의혹을 느꼈다.

'우주광신승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무린은 묵묵히 우주광신승 앞에서 물러났다.

'그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우주광신승은 본래 벙어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개세독황은 무린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에는 좋은 구경거리가 있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물이 작은 연못처럼 고여 있었다.

연못 속에 십여 명의 여인이 들어가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이년아, 저리 비켜!"

"난 몰라! 몰라!"

"호호, 히히… 물 속에 풍덩 처박을 테니……."

누군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소리도 들렸다. 여인들은 모두 벌거숭이였다. 그들은 모두 물장난을 치며 노는 중이었다.

새파란 낭자도, 나이든 중년인도, 쭈글쭈글한 노파도 모두 벌거숭이였다.

그들은 서로 밀치고 다투며 물장난을 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진정 꼴볼견이 아닌가?

영락없이 철부지 계집애들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백치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개세독황이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저기 젖통이 유난히 탐스러운 여자가 중원에 염명(艶名)을 날리던 백화선자(百花仙子), 그 옆에 엉덩이가 보름달처럼 허여멀건한 여자가 강서제일미(江西第一美) 오벽하(吳碧霞)일세. 저 늙어빠진 할망구는 아미(峨嵋)의 청청사태(淸淸師太)이고……."

무린은 일순 곤혹을 느꼈다.

"그런 고수들이……."

개세독황이 괴소를 흘려 냈다.

"크흐흣…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건 일종의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도 저렇게 즐겁게 놀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이때 여인들 틈에서 한 소녀가 무린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커다랗게 소리쳤다.

"오… 오빠!"

그녀는 급히 연못 밖으로 뛰쳐나와 자루 같은 옷을 몸에 꿰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무린에게로 달려왔다.

"오빠! 오빠! 어디 갔다 왔어?"

무린이 놀랄 사이도 없이 그녀는 두 팔로 무린의 목을 얼싸안고 매달렸다.

십삼사 세쯤 되었을까?

예쁘장한 얼굴에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소녀였다.

무린은 그녀가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 역시 백치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심한 백치는 아니었다.

소녀는 기쁨에 못 이겨 깡충깡충 뛰며 무린의 팔을 잡아 끌었다.

"오빠, 이리 와! 저쪽에 놀러가! 어서……."

무린은 주춤주춤 끌려갔다.

개세독황이 뒤에서 혀를 찼다.

"쯔쯧… 졸지에 남매가 되어 버리는군!"

소녀가 무린을 끌고 간 곳은 한쪽 암벽 밑의 움푹 들어간 틈바구니였다.

"오빠, 여기가 추아( 兒)가 혼자 놀러오는 곳이야!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소녀는 계속 무린의 팔을 잡아 끌었다.

무린은 소녀가 애처롭게 여겨져서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다.

소녀는 좁은 암벽 틈을 열심히 기어나갔다.

그녀는 무엇을 찾아가는가?

무린은 차츰 호기심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삼십 장쯤 전진했을까?

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오빠, 어서 와서 이 구멍 속을 들여다 봐!"

암벽은 그곳에서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그런데 소녀가 가리키는 암벽 위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하나 뻥 뚫려 있다.

무린은 소녀의 재촉을 받고 그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순간 무린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졌다.

"……!"

그 구멍 안에는 하나의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알 수 없는 사기가 충만된 또 다른 지하계곡이었다.

흐릿한 혈광(血光)과 자욱한 운무(雲霧), 그 몽롱한 공간 속에 하나의 거대한 청동탑(靑銅塔)이 산처럼 솟아 있었다.

청동탑의 형태는 무시무시했다.

아수라상(阿修羅像)!

그것은 흉칙한 아수라상이었다.

길게 찢어진 입, 무섭게 부릅뜬 눈, 날카로운 이빨이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는 멸천아수라탑(滅天阿修羅塔)이었다.

소녀가 무린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소곤거렸다.

"오빠! 무섭지, 응?"

따뜻한 숨결이 귓가에 간지럽다.

무린은 거대한 멸천아수라탑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저것은……."

소녀가 다시 소곤거렸다.

"오빠, 안 무서워?"

무린이 나직이 대답했다.

"정말 무섭구나."

멸천아수라탑에서 뻗치는 사기는 사실 으시시한 느낌이 들었다.

소녀가 무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빠, 저곳에 가 볼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으응?"

무린이 물었다.

"추아, 저쪽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소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몰라! 하지만 이 암벽을 부수면 돼!"

돌연 그녀는 조그만 주먹으로 암벽을 후려쳤다.

쾅-!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암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소녀는 굉장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암벽에는 사람이 빠져 나갈 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그 구멍으로부터 흐릿한 혈광이 뻗어 나오며 싸늘한 한풍이 후욱 끼쳐 왔다.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빠, 정말 안 무서워? 추아는 무서워."

무린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추아, 무서워할 필요 없다. 오빠가 옆에 있으면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한다."

소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안도의 빛이 나타났다.

"으응… 그럼 이제 안 무서워!"

이때 뒤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린은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개세독황 가릉이 서 있었다.

개세독황은 눈빛을 번득거리며 멸천아수라탑을 가리켰다.

"저 탑의 꼭대기에 불사전(不死殿)이 있다. 그 공포의 불사전이……."

무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소."

"백치가 되기 전에는 누구도 저 불사전에 들어갈 수 없다!"

개세독황은 소녀를 향해 다시 말했다.

"마불소랑(魔佛少娘) 경추(經 ), 너 역시 좀더 시간이 흘러야 불사전에 들어갈 수 있다!"

무린은 마불소랑 경추라는 말에 흠칫했다.

<마불소랑 경추>

일 년 전에 중원에 출현한 괴이무쌍한 소녀이다.

그녀는 어느 고찰(古刹)에서 비밀히 태어났다고 한다. 부모는 어느 절세고승(絶世高僧)과 절세성니(絶世聖尼)라는 소문이었다.

도저히 태어날 수 없는 내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녀의 자질만은 경천(驚天)할 정도여서 불문최상절학(佛門最上絶學)을 모두 익혔다고 했다.

무린은 마소불랑 경추가 바로 눈앞의 소녀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어쩌다가 회아곡에 떨어져 백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오빠, 안 갈 거야?"

경추가 다시 묻자 무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으응, 알았어."

경추는 무린의 손을 더욱 힘주어 꼭 잡았다.

무린은 개세독황을 향해 물었다.

"나는 불사전에 들어가 보고 싶소. 경추는 당신이 보호하고 있는 게 어떻겠소?"

개세독황은 괴소를 흘렸다.

"자네는 불사전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린이 담담히 웃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갑자기 개세독황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그는 무린을 정시하며 또렷하게 말했다.

"노부는 자네가 불이무쌍(不二無雙)의 고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네. 그러나 불사전에는 접근하지 말게."

그의 음성이 은밀하게 낮아졌다.

"그곳에는 공포스런 사령(邪靈)이 깃들어 있네."

"사령……?"

"또한 경추는 노부보다 무공이 높으니 노부에게는 보호할 능력이 없네."

"음."

무린이 침묵을 지키자 경추가 옆에서 재촉했다.

"오빠, 어서 가! 오빠가 옆에 있으면 추아는 무섭지 않아!"

결국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가보자."

무린은 경추의 손을 잡고 암벽의 뚫어진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개세독황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대담한 녀석이군.'

그는 잠시 염두를 굴리더니 두 사람의 뒤를 가만히 따르기 시작했다.

구멍 속으로 들어선 무린과 경추는 청동탑을 향해 계속 다가갔다.

은은한 혈광 속에 솟아 있는 거대한 멸천아수라탑은 가까이 갈수록 그 웅자(雄姿)가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높이는 거의 백여 장, 실로 웅자무비한 거탑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청동탑을 향해 서서히 접근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십 장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탑에서 괴이한 기류가 뻗기 시작했다.

휘류류류-!

바람결처럼 부드럽게 불어 오는 음유기류였다. 그 기류의 기세는 다가갈수록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무린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암강파류멸절진(暗 波流滅絶陣)이 펼쳐져 있다!'

그는 급히 경추의 명문혈을 통해 한 줄기 진류(眞流)를 주입시켰다.

암강파류멸절전!

중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방의 기진(奇陣)이다.

무형암강(無形暗 )으로 펼쳐지는 절대사진(絶對死陣)으로서 이 진법을 파해하는 방법은 없다.

생사로(生死路)의 방향이 바람처럼 변화무쌍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파진법은 본신 진력으로 무형암강을 격파하는 것 뿐이나,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불가(不可)하다.

결국 진법 속에 고스란히 생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린의 일신 공력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능히 초절무비하다고 할 만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닥친 암강파류멸절진은 경우가 달랐다.

그것은 상대가 없는 무형암강이기 때문이다.

휘류류류-!

암강은 사나운 파도처럼 점점 거세게 밀려왔다.

무린은 암강에 굴하지 않고 경추를 보호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암강은 이제 수천 수만 근의 압력으로 밀려 오고 있었다.

이때 돌연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무린은 시선을 휙 돌렸다. 한 노인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게 보였다.

바로 개세독황 가릉이었다.

다음 순간 개세독황의 신형은 허공에서 풍선처럼 폭발했다.

퍼펑-!

핏물이 소나기처럼 뿌려졌다. 그의 시체는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 개세독황은 암강파류멸절진의 위력을 잘 알면서 어찌 참변을 자초했는가?

그는 무린과 자신의 공력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계속 뒤를 따르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경추는 공포에 질려 무린에게 와락 매달렸다.

"오빠, 무서워!"

무린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빠가 옆에 있으니 조금도 무서워할 필요 없다."

"으응, 그럼 안 무서워!"

경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린은 혼신의 공력으로 암강에 대항하고 있었다. 암강에 패배한다면 찰나간에 개세독황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 것이다.

멸천아수라탑은 오 장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암강의 격류 속에서 눈부신 벽광(碧光)이 명멸했다.

번쩍-!

순간 무린과 경추의 몸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안색은 백납처럼 창백해졌다.

무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파류광강(波流光 )! 중원에 알려지지도 않은 무서운 강기다!'

파류광강은 기강(氣 )과 음강(音 )을 초월하는 빛의 강류( 流)였다.

일순간 두 사람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졌고 전신에서는 땀이 주르르 흘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무린의 전신에서 황금빛 광채가 좍 피어 올랐다.

광채는 둥그런 무지개처럼 허공으로 뻗었다.

휘황한 홍예금채서기(紅霓金彩瑞氣)!

그것은 일신의 공력운행이 무상최극경(無上最極境)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러자 암강 속에서 명멸하던 벽광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흩어졌다.

파파파팟-!

찰나지간 무린은 경추를 가볍게 안고 청동탑의 계단으로 성큼 올라섰다.

결국 그는 암강파류멸절진을 완전히 통과한 것이다.

이제 무린과 경추는 멸천아수라탑의 계단 위에 서 있다.

청동으로 된 계단은 나선형을 이루며 탑의 꼭대기를 향해 아득히 뻗어 있었다.

무린은 경추의 손을 잡고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경추는 무엇이 좋은지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히히덕거린다.

"오빠,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거야? 헤헤……."

불사전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두 사람은 계속 위로 올라갔다.

이때 계단이 꺽어 도는 곳에서 두 사람은 주춤 멈추어 섰다.

두 파의인(破衣人)이 장승처럼 앞을 막아 섰기 때문이다.

사순의 두 중년인이었다.

두 사람은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쳤으나 용모가 비범했다. 무림의 일류고수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멍청하고 눈빛은 몽롱했다. 그들은 무린과 경추를 막아 서며 물었다.

"왜… 왜 왔어?"

의심할 필요없이 그들은 백치였다. 하지만 보통 백치는 아니었다. 돌연 그들은 쌍수를 쭉 뻗었다.

"주… 죽어!"

엄청난 장력이 쇄도했다.

쐐애애액-!

무린이 급히 출수하려는 순간이었다.

"너희들! 저리 비켜!"

경추의 일 수가 번개처럼 쳐나갔다.

콰르릉-!

계단이 무너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허억!"

"끄윽!"

두 중년인은 숨통이 막히는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날아갔다.

털썩-!

청동벽에 부딪쳤던 그들의 신형이 바닥에 떨어지며 선혈이 쫙 뿌려졌다.

그들은 이미 처참한 피떡으로 변해 있었다.

경추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히히히, 빨리 비켰으면 괜찮았지!"

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

경추는 두 사람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더니 무린의 손을 잡아 끌었다.

"오빠, 죽었으니까 겁내지 말고 어서 올라가!"

경추 역시 가공할 공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백치임에는 다름이 없는가?

계단을 백여 장 올라갔을 때, 앞에 거대한 주홍문(朱紅門)이 나타났다.

주홍문에는 세 개의 금빛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불사전(不死殿)>

그곳은 바로 불사전이었다. 그런데 불사전 앞에는 네 명의 백미화상(白眉和尙)이 우뚝 서 있었다.

불그레한 얼굴, 눈처럼 흰 수염, 그들은 모두 절세고승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전신에서 심오한 불력(佛力)이 넘치는 듯했다.

그들을 일별한 무린의 눈에 놀라는 빛이 스쳐 갔다.

'세외사불(世外四佛)이 여기에 있다니…….'

오오, 세외사불이라 했는가?

<세외사불>

백 년 전부터 불문(佛門)의 최고고수로 알려진 소림의 대장로(大長老)들이다.

그들은 중원 일에 일체 관여치 않고 소림 조사동(祖師洞)에서 연공에만 정진해 왔다.

그들이 강호에 출도한 것은 삼 년 전이었으나 곧 실종되어 무림인들의 커다란 의혹을 샀다.

세외사불도 표정과 눈빛이 흐릿하고 몽롱했다. 그들도 이미 백치가 되었는가?

세외사불은 무린과 경추의 앞을 엄중히 막아 섰다.

"아… 아미타불… 못 들어간다!"

경추가 양 손을 허리에 척 걸치며 호통을 쳤다.

"땡땡이들아! 비켜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거야!"

일찍이 세외사불에게 땡땡이라고 호통을 친 사람이 있었던가?

세외사불은 일시 멍해졌다.

"때… 땡땡이가 뭐냐?"

경추는 다짜고짜 쌍장을 맹렬히 쳐 냈다.

"땡땡이들! 죽어라!"

극맹한 장경(掌勁)이 무섭게 폭출되었다.

콰르르르-!

세외사불은 비록 백치로 변했으나 동작은 본능적으로 쾌첩했다.

"어… 어린 여시주, 다친다!"

그들의 연수(連手)는 전광처럼 경추의 장경을 받아 쳤다.

콰콰쾅-!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주위의 기류가 무섭게 진탕되었다. 엄청난 강기의 폭발이었다.

찰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으헉!"

경추의 조그마한 신형은 뒤로 주르르 밀려 나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경추의 공력이 아무리 가공스러워도 세외사불의 연합공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세외사불은 이어서 무린을 향해 사납게 출수해 왔다.

"시, 시주도… 물러가라!"

순간 무린의 우수가 기쾌하게 호선(弧線)을 그었다.

세외사불의 장력이 미풍처럼 흩어지며 신음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허억!"

"흐윽!"

그들은 쿵쿵쿵 뒷걸음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들은 사태가 어떻게 됐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무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 시주, 빈승들이… 잘못했소?"

이때 경추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땡땡이들에게 당하다니… 쳇, 재수없어!"

내력이 진탕되어 쓰러졌을 뿐 내상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그녀는 즉시 세외사불 앞으로 다가왔다.

"땡땡이들! 이번에는 맛 좀 보아라!"

요란한 타격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딱- 딱- 따악-!

세외사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벌렁 쓰러졌다.

"아고고!"

"아쿠!"

그들의 머리에는 커다란 혹이 하나씩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공전(空前)의 기문진사(奇聞珍事)였다.

천하의 고수인 세외사불이 나이 어린 소녀에게 호되게 알밤을 하나씩 먹은 사실을 만약 무림인들이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실로 고소를 금치 못할 일이 아닌가?

무린은 이 진귀한 광경을 보면서도 의혹을 금치 못했다.

'세외사불은 겁겁회아루의 어떤 비밀을 캐려고 침입했다가 회아곡에 떨어진 것일까?'

이윽고 무린은 주홍문 앞으로 다가섰다. 무린은 문을 가만히 밀었다.

스르르-!

육중한 주홍문은 의외로 소리 없이 열렸다. 무린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경추가 재빨리 뒤를 따랐다.

바닥에 쓰러진 세외사불은 커다란 혹을 어루만지기에 바쁘다.

"아… 아프다. 타불……."

"부처님… 이 혹을 좀……."

이때 하나의 인영이 이들 앞에 귀신처럼 소리 없이 나타났다.

머리통이 유난히 크고 체구가 왜소한 괴승, 그는 바로 우주광신승이 아닌가?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가?

우주광신승은 세외사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뻐끔히 열려진 주홍문 앞으로 다가갔다.

"운명의 시간이 닥쳐 왔다. 무서운 운명의 시간이……!"

음울한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2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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