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괴불사녀(不壞不死女) 아라 (14/37)

제목: 동방무적 제2권 (전3권)

지은이: 유소백 김능하

불괴불사녀(不壞不死女) 아라

거대한 대전이었다.

불사전으로 들어선 순간 무린은 이상하게 머리가 쭈삣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경추도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는지 무린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전내에는 흐릿한 혈무(血霧)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또한 전내에는 불가해한 사기가 충만해 있었다.

무린은 혈무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휘리리리리-!

혈무가 서서히 흩어지며 전내의 광경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무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전내 중앙의 석대 위에 하나의 거대한 수정조(水晶槽)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혈무는 그 수정조 속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피어 오르고 있었다.

수정조 주위에는 수백 명의 남녀가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흐릿한 눈빛에 몽롱한 표정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백치였다.

그 수많은 백치인이 수정조를 향해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린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 때 석대 뒤쪽에서 무겁고도 사유한 음성이 들렸다.

"마침내 불괴불사녀가 완성될 때가 되었다."

동시에 한 혈포인(血袍人)이 열두 명의 홍의인(紅衣人)을 거느리고 느릿느릿 나타났다.

혈포인의 인상은 너무나 사악했다. 시체 같은 청회색 얼굴, 잔혹하게 얇은 입술, 두 눈에서는 섬뜩한 사광(邪光)이 줄기줄기 뻗치고 있다.

갈고리 같은 손에는 길다란 붉은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열두 명의 홍의인도 한결같이 인상이 사악했다. 무린과 경추는 문 뒤에 몸을 숨기며 그들을 주시했다.

돌연 혈포인이 길다란 채찍으로 허공을 한 차례 후려갈겼다.

파아아아-!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울리자 백치인들은 일제히 공포의 기성을 토했다.

"우우……!"

그들은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혈포인은 다시 한 번 채찍으로 허공을 후려갈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불사전주(不死殿主)가 너희들의 생명을 아라에게 인도하는 날이다!"

사악한 기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백치인들은 더욱 공포에 질려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한다.

갑자기 불사전주는 한 백치인을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철썩-!

이내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크으으!"

벌렁 쓰러진 그 백치인의 배는 풍선처럼 파열되어 내장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불사전주는 백치인들을 쭉 쓸어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도 제대로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백치인들은 다시 공포의 기성을 지른다.

"우우우……!"

불사전주는 수정조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에서 괴이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이미 백 명의 동정동남의 혈정을 흡취한 아라는 이제 불사불괴불멸인으로 완성된다."

불사전주는 홍의인들을 향해 엄중히 명을 내린다.

"초혼십이령(招魂十二靈)은 준비를 갖춰라!"

열두 명의 홍의인은 즉시 수정조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그리고는 장심(掌心)을 쭉 뻗어 수정조에 대었다.

그들은 일제히 기공(奇功)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열양회류공(熱陽回流功)!"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곧 수정조의 혈무가 맹렬히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류-!

자욱한 혈무는 수정조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무린은 이 괴이한 광경을 미동도 않고 주시하고 있다.

"……!"

두려움에 질린 경추는 무린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가?

불사전주의 사악한 음성이 전내에 울려 퍼졌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 초혼십이령은 열양회류공을 십이 성 끌어 올려라!"

열두 명의 홍의인은 혼신의 진력을 다해 기공을 펼쳐 내고 있었다.

수정조 속의 혈무가 점점 더 맹렬히 회오리칠수록 그들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들의 전신은 후들후들 떨렸다.

마침내 열양회류공을 극한도로 펼쳐 냈는가?

초혼십이령의 안색은 모두 흙빛이 되더니 그 자리에 털썩털썩 쓰러졌다.

"허억!"

"흐윽!"

그들은 바닥에 시체처럼 즐비하게 널려졌다.

잠시 후 수정조 속에서 맹렬히 회오리치던 혈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속에서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떠올랐다.

그것은 여인이었다. 여인의 얼굴은 아직도 환영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구름처럼 늘어진 머리, 그 아래 백옥처럼 희디흰 나신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나신은 매우 장대하고도 아름다웠다.

무린의 시선이 그 나녀(裸女)에게 못박혔다.

'저 여인은 바로 무영수련장에서 보았던 그 거녀(巨女)가 아닌가!'

그녀는 아난타공주와 함께 사라졌던 불괴불사녀 아라였다.

무린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돌연 불사전주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아라여, 그대는 이제 무극진령파황대공(無極眞靈破荒大功)을 통해 영원한 불사불괴불멸인으로 태어나리라!"

그의 붉은 채찍이 세차게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아-!

백치인들이 일제히 공포의 기성을 토했다.

"우우우……!"

불사전주의 사악한 음성이 다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극진령파황대공!"

그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사광(邪光)이 줄기줄기 뻗치며 길다란 채찍이 백치인들의 머리 위를 둥그렇게 쓸어갔다.

파아아아-!

그러자 백치인들은 갑자기 기성을 토하며 아라를 향해 양손을 쭉 뻗었다.

이 순간 백치인들의 쌍장에서는 투명한 진류(眞流)가 분수처럼 뻗어 나왔다.

츠츠츠츳-!

투명한 진류는 맹렬한 소용동이를 이루며 아라에게로 밀려갔다.

휘리리리-!

아라는 순식간에 투명한 진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다음 순간 그 진류는 아라의 백회혈로 급속히 빨려들기 시작했다.

무린은 이 광경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

이 때 옆에서 음유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공포의 불사불괴불멸인이 탄생되고 있다. 세상을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찢어 놓을 저주의 화신이……!"

무린은 시선을 휙 돌렸다. 옆에는 머리통이 크고 체구가 왜소한 괴승이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우주광신승이었다.

우주광신승은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데 음유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천하에 그 불사불괴불멸인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영원한 천하무적인 것이다."

이심전성공(以心傳聲功)!

우주광신승은 마음으로 소리를 전하는 절기공(絶技功)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우주광신승의 다음 전성(傳聲)이었다.

"경추는 저 불사불괴불멸인의 탄생을 저지시키기 위해 노납이 회아곡으로 데려왔다. 하나 경추의 힘으로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너의 힘을 빌리고 싶다."

"……!"

무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성이 이어졌다.

"만약 경추가 실패한다면 즉시 경추를 죽여 다오. 경추를 죽이지 않으면 중원은 또 다른 거대한 화(禍)에 직면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무린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우주광신승을 바라보았다.

"……?"

우주광신승의 암울한 동공에는 짙은 비애가 깃들어 있었다.

"노납의 손으로 경추를 죽일 수 없다. 그러므로 너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너는 노납의 말을 따를 수 있겠느냐?"

무린은 의혹을 참지 못하고 전음(傳音)을 보냈다.

"경추를 왜 죽여야 한단 말이오?"

"일이 성공한다면 경추는 저 불사불괴불멸인과 동귀어진하게 된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둘이 동패구상하게 될 것이다."

"……!"

"그러면 노납은 불사불괴인을 처치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경추에게까지 손을 쓸 수는 없다."

"나는 왜 경추를 죽여야 하느냐고 물었소!"

"경추는 앞으로 대마녀(大魔女)로 변신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마녀?"

"너도 곧 알게 되리라."

우주광신승은 암울한 시선을 아라에게로 돌렸다. 백치인들의 쌍장에서 발출되는 진류는 계속 아라의 백회혈로 빨려들고 있었다.

아라의 나신은 불그레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머리 위로 휘황한 서기가 뻗쳐 올랐다.

온몸에 무한한 진력이 끝없이 충만되는 증거였다. 반면 백치인들은 점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그들은 모두 극도의 탈진으로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필사적으로 무모한 진력발출을 계속하고 있다.

무극진령파황대공!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진력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한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진력을 제공한 모든 사람은 생명을 잃고 진력을 받은 사람은 무한의 절대 공력을 얻게 된다.

세상에 생명을 버려 가면서까지 남의 진력을 제공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무극진령파황대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죽음도 깨닫지 못하는 많은 백치인들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백치인들은 모두 일류고수여야 한다.

그러면 지금 수백 명의 백치인들로부터 남김없이 공력을 이전받고 있는 아라는 얼마나 가공스런 존재가 될 것인가?

그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린이 우주광신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불사불괴불멸인의 탄생을 저지하려면 무극진령파황대공이 성공하기 전에 손을 써야 될 게 아니오?"

우주광신승은 머리를 저었다.

"그러면 저 백치인들이 일제히 광란을 일으키므로 안 된다."

"……!"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아라. 진력을 모두 빼앗긴 백치인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다."

과연 진력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발출한 백치인들이 털썩털썩 쓰리지는 게 보였다.

그들은 즉시 쭈글쭈글한 시체로 변해 조그맣게 오그라들었다.

반면에 아라의 머리 위로 뻗어 오르는 서기는 점점 휘황해졌다. 그것은 무지개빛의 거대한 환(環)을 이루었다.

무린은 내심 침성을 토했다.

'홍예채극환(紅霓彩極環)! 아라는 정말 불사신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다!'

백치인들은 계속 쓰러져 쪼글쪼글 오그라든 시체로 변해 갔다.

아라의 머리 위로 뻗어 오른 무지개빛 채환은 점점 크고 선명해졌다.

홍예채극황은 내공의 무한무극경(無限無極境)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돌연 불사전주가 우렁찬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성공이다. 아라는 이제 불사신녀(不死神女)가 되었다. 영원한 불괴불사녀가 탄생되었다!"

이 때 우주광신승이 무린에게 전성을 보냈다.

"시간이 되었다. 너는 노납이 말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추를 꼭 죽여야 한다."

우주광신승은 갑자기 경추를 자신에게로 휙 돌려세웠다.

공포에 사로잡혀 오들오들 떨고 있던 경추는 겁먹은 시선으로 우주광신승을 바라보았다.

순간 우주광신승의 눈에 괴이한 광류(光流)가 번쩍이며 엄숙한 전성이 흘러 나왔다.

"경추, 너는 노납이 가르쳐 준 단천붕세마황공(斷天崩世魔皇功)을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경추는 두려운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버……."

우주광신승은 급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더 말하지 마라. 어서 단천봉세마황공으로 저 벌거숭이 여인을 처치해라!"

경추는 아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단붕세마황공……."

돌연 그녀는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비조처럼 솟구쳤다.

"호호히히… 저 여인을 처치하라고……."

가슴 철렁한 교소가 울리며 경추의 늘씬한 신형은 아라를 향해 번쩍 쏘아갔다.

불사전주는 뜻밖의 인영이 출현하자 깜짝 놀랐다.

"누구냐?"

찰나 경추의 일수가 번개처럼 그의 면상을 쳐나갔다.

"비켜라!"

이내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악!"

불사전주는 얼굴이 두부처럼 으깨져서 털썩 나가떨어졌다.

그는 경추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경추는 아라를 향해 맹렬히 덮쳐들고 있었다.

"히히히… 나는 너를 처치해야 한다!"

아라는 여전히 꿈꾸는 듯 몽롱하고 슬픈 표정으로 서 있을 뿐, 가공할 살기를 뻗치며 덮쳐드는 경추를 의식하지 못했다.

경추의 쌍수가 허공을 사납게 찢으며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교갈이 터졌다.

"단천붕세마황공!"

찰나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는가?

아라의 투명한 우수가 기쾌하게 교차되며 공세를 차단했다.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콰르르- 콰콰쾅-!

기류가 맹렬히 진탕되며 파도처럼 회오리쳤다.

강기의 대폭발 속에 육중한 돌기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전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쩌쩌쩍-!

우르르릉- 우르르르-!

천붕지괴(天崩地壞),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가?

이 격돌의 와중에서 고통스런 신음성이 두 마디 울렸다.

"으음……."

"흐윽……."

경추의 신형은 허공에서 휘청 꺾여지며 튕겨나갔다.

아라도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우주광신승이 비통한 외침을 터뜨렸다.

"실패다!"

그는 무린을 향해 무섭게 외쳤다.

"어서 경추를 죽여라. 노납은 아라를 처치하겠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다음 찰나 우주광신승의 왜소한 신형은 아라를 향해 늙은 독수리처럼 덮쳐 갔다.

그의 쌍수가 대각선으로 쪼개지며 창노한 폭갈이 터졌다.

"불력개폐우주경(佛力開閉宇宙經)!"

아라의 몽롱한 눈동자에 본능적인 공포가 나타났다. 순간 그녀는 또 한 차례 옥수를 기쾌하게 교차시켰다.

눈부신 첨광(尖光)이 피어나며 천번지복할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쾅-!

엄청난 강기의 파도가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지축이 갈라지는 음향이 울렸다.

쿠르르르릉- 쿠르르-!

마침내 대전 전체가 무섭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천장이 우르르 무너지며 육중한 돌기둥이 흙벽처럼 무너졌다.

쿠쿠쿵- 쿠르르르-!

무시무시한 대혼돈이었다.

돌연 암흑 속에서 경추의 가슴 철렁한 교소가 울렸다.

"히히히히… 드디어 세상이 초토로 변한다!"

그녀는 암흑의 혼돈을 뚫고 천공으로 솟구쳤다.

우주광신승이 무린을 향해 비통하게 소리쳤다.

"너는 왜 경추를 죽이지 않느냐?"

무린의 대답은 놀랄 만큼 침중했다.

"나는 경추를 죽일 수 없소."

"이… 이유가 뭐냐?"

"나는 경추의 오빠가 되었기 때문이오."

"아아, 모든 게 끝이다. 종말이 왔다. 천기는 거역할 수가 없구나!"

우주광신승은 절망의 탄식을 토해 냈다.

무린은 아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라의 눈부신 교구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우주광신승의 불력개폐우주경에 의해 극심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무린은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여인은 아난타의 수하가 될 테니 처치해 버려야 한다!'

그러나 무린은 즉각 출수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아라의 몽롱한 눈빛이 이상하게 슬프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린은 기이한 가슴의 파동을 느꼈다.

"……!"

아라의 눈동자에 어린 슬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라는 가까스로 몸을 세우더니 돌연 섬섬옥수를 쭉 뻗으며 천공으로 솟구쳤다.

심해에서 솟구치는 한 마리 은빛 인어(人魚)라고나 할까?

구름 같은 머리결을 휘날리는 눈부신 나신의 아라는 암흑의 혼돈을 뚫고 아득히 솟아올랐다.

우우우웅-!

그녀의 쌍수에서 무지개빛 광채가 둥그렇게 뻗으며 산사태처럼 붕괴되던 대전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우르르릉- 쿠르르-!

그 엄청난 광경에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오오……!"

이 때 우주광신승의 미약한 신음이 들려 왔다.

무린이 시선을 돌렸을 때, 우주광신승은 마지막 말을 숨가쁘게 토해 내고 있었다.

"노납이 보기에… 너는 무림의 운명을 결정지을 천의(天意)적 존재다. 부디… 불사불괴불사녀 아라를 처치해 다오. 천하를 위해……."

그의 고개가 푹 꺾여졌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콰르르- 콰콰쾅-!

불사전 전체가 폭삭 내려앉으며 거대한 멸천아수라탑이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수천 길 지하계곡이 온통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무린은 아라의 뒤를 따라 한 마리 불사조처럼 천공으로 힘차게 솟구치고 있었다.

천축과 지축이 갈라지는 대함몰 속에서…….

무린이 미향선계각으로 돌아온 것은 밤늦은 시각이었다. 무린은 붕괴되어 폐허가 되어 버린 겁겁회아루에서 탈출한 뒤 불괴불사녀 아라를 찾아보았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마불소랑 경추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린은 결국 아난타공주를 만나러 갔다가 충격적인 괴사(怪事)만 목격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무림의 운명에 어떤 변수가 될 것인가?

노노아는 혼자 앉아서 술을 찔끔찔끔 마시고 있다가 무린이 나타나자 반색을 했다.

"형,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무린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적당히 대꾸한다.

"그냥 좀 나갔다 왔다."

노아는 더 묻지 않고 술을 따라 주었다.

"술맛이 삼삼하니까 한 잔 마셔!"

무린은 술잔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노노아는 오리고기 한 점을 집어 무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거 먹어!"

무린은 오리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이 때 문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왔다. 초라한 꼽추노인이었다.

허리가 잔뜩 굽은데다가 등에 낙타 같은 육봉(肉峯)이 불룩 솟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용모는 우스꽝스러웠다. 머리통이 보통 사람의 배나 될 만큼 큰데 머리카락이 한 오라기도 없어 커다란 구리거울(銅鏡)처럼 번쩍거렸다.

주먹보다 큰 코는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들렸다. 비오는 날은 외출하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눈은 너무나 가늘어서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깨에는 커다란 가죽부대를 둘러매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괴이한 깃발 하나를 들고 있었다. 깃발에는 몇 줄의 글이 씌여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病)에 처방(處方)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의문에 해답을 제공하고, 이 세상의 모든 난제(難題)를 해결해 준다.

대가는 은자 열 냥이며 반드시 선불(先拂)을 받는다.>

비에 젖어서 후줄근한 깃발에는 그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노인의 용모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내용이었다.

깃발에 씌여 있는 게 사실이라면 노인이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예 없는 셈이다.

곱추노인은 깃발을 탁자 앞에 세우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젊은 점원이 깃발에 쓰인 글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빼빼마른 중년 회계(會計)도 크게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왔다.

회계는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노인장, 그 깃발에 쓰여 있는 말이 사실입니까?"

노인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실일세."

"그러면 노인장께서는 어떠한 고질병도 고칠 수가 있습니까?"

"두말 하면 잔소리지!"

"그러면 제 병을 한 번 고쳐 보시겠습니까?"

노인은 가느다란 눈으로 회계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숨이 차고 호흡을 할 때마다 바람이 세고 언제나 어질어질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고질이 있군!"

회계는 매우 놀랐다.

"그렇습니다. 노인장 말대로입니다.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간단히 대꾸했다.

"그것은 허파에 바람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니 그 구멍을 막아야 하네."

회계는 대경실색했다.

"허파에 바람구멍이 뚫렸다고요?"

"그렇다네. 그 구멍을 막지 않으면 당신은 반 년 이내에 저 세상으로 가게 될 걸세."

회계는 이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구멍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노인장?"

"노부의 처방대로 하면 쉽게 구멍을 막을 수 있네."

"그러면 제발 처방 좀 해 주십시오."

노인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우선 은자 열 냥을 선불하게."

회계는 급히 은자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노인은 은자를 품속에 갈무리하더니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휙휙 써갈기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난 노인은 그것을 회계에게 내밀었다.

"여기 처방전(處方箋)이 있네."

회계는 눈을 크게 뜨고 처방전을 들여다보았다.

처방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처방하노라.

염소똥 열 냥(兩), 오리피 한 대접, 대추씨 일곱 개, 파리눈깔 두 개, 제비알 세 개, 영지 다섯 냥, 벌꿀 한 숟가락 반.

이상을 합쳐서 푹 고아 먹으면 허파의 바람구멍이 서서히 아물게 되리라.>

회계는 처방전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영지와 벌꿀이 약이 되는 건 익히 아는 바다. 그러나 염소똥이나 파리눈깔이 약이 된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회계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 처방대로 하면 정말 허파에 생긴 바람구멍이 막히겠습니까?"

노인은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당신은 이 우내제일현(宇內第一賢) 와광생(臥光生)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순간 회계와 점원은 깜짝 놀랐다.

"아니 노인장께서 바로……!"

<우내제일현 와광생>

자칭 무불통소, 무소불능의 천하제일 현인(賢人)이다.

그는 신통방통한 의술과 역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천기(天機)를 훤히 꿰뚫어본다고 자처하고 다닌다.

그의 진실한 면모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다.

그는 당금무림 오대불가사의인(五大不可思議人) 중의 한 명이었다.

우내제일현 와광생은 젊은 점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쯔쯧… 아깝군, 아까와!"

점원은 의아한 빛으로 물었다.

"무… 무엇이 아깝다는 말씀이십니까?"

와광생은 점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될 수 있는 얼굴 바탕을 지녔으나 몇 군데 약점이 있어 평범한 용모로 그치고 말았네."

정말 그런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얼굴은 평범 이하의 얼굴이 분명하다고 점원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제… 제가 천하제일의 미남자……!"

와광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코가 너무 낮고 입술이 두껍고 광대뼈가 지나치게 튀어나온데다가 눈이 너무 작네."

그러면 도대체 어디가 잘 생겼는가?

와광생의 말은 의젓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몇 가지 점만 고치면 천하제일의 미남자로서 손색이 없겠네."

점원은 들뜬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어…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와광생은 자신 있게 대답한다.

"노부의 간단한 치료로 고칠 수가 있네."

"저… 정말이십니까?"

점원은 흥분하여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천하제일의 미남자!

뭇 사나이들의 가슴을 마차바퀴처럼 덜컹거리게 하는 말이 아닌가?

점원의 눈앞에는 벌써 찬란한 장미빛 환상이 쫙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된다면… 별각의 앵앵(櫻櫻), 향란(香蘭), 홍도(紅挑)가 모두 나에게 반하여 그 때는… 그 때는… 으휴……!'

그는 와광생을 향해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제발 소인에게 치료를 좀 해 주십시오!"

와광생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은자 열 냥을 선불하게."

"조… 좋습니다!"

점원은 황망히 품속을 뒤지더니 은자 열 냥을 꺼내 와광생에게 건넸다.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되는데 단돈 열 냥이라니 얼마나 싼 값인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리라.

은자 열 냥을 품속에 갈무리한 와광생은 커다란 가죽부대를 열었다.

그는 가죽부대 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물건들이었다.

망치, 대패, 톱, 끌, 면도(面刀), 그리고 바늘과 실도 있었다.

점원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그… 그 물건들은 무엇입니까?"

와광생이 대답했다.

"치료기구일세."

점원은 안색이 싹 변했다.

"치… 치료기구……!"

"뼈는 이 톱으로 자르고 끌로 다듬네. 살은 면도로 자르고 대패로 살짝 밀어내네."

"……!"

"다음에는 바늘로 꿰맨 뒤 금창약을 바르면 치료가 끝나네."

갑자기 점원은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뼈를 톱으로 자르고, 살은 대패로 밀고……."

점원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소… 소피 좀 보고… 오… 오겠습니다!"

점원은 부리나케 발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그는 두 번 다시 와광생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와광생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쯔쯧…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떻게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될 수 있는가?"

이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할아버지!"

와광생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어깨를 친 것은 노노아였다.

노노아는 들고 있던 오리고기 접시를 와광생의 눈앞에 내밀었다.

"할아버지, 이걸 먹고 나에게 치료 좀 해 줘요."

와광생은 노노아를 힐끗 한 번 보더니 사양하지 않고 요리접시를 받았다.

그는 오리고기를 집어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으응, 어디를 치료해 주랴?"

노노아는 와광생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코!"

노노아는 자신의 살짝 치켜들린 코를 가리켰다.

아닌게 아니라 와광생이 보아도 치켜들린 각도가 약간 높다.

와광생은 가느스름한 시선으로 노노아의 코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해 주지!"

그는 망치와 끌을 잡았다. 끌로 코뼈를 쪼아서 조각을 할 모양이다.

노노아는 눈을 스르르 감으며 코를 바짝 내밀었다.

"이쁘게 해야 돼요!"

와광생은 끌을 코 끝에 대고 망치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는 돌연 망치를 내리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정말 아깝다, 아까워!"

노노아가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뭐가 아까워요?"

"사실은 네 코가 절대로 못생긴 코가 아니다! 노부가 보기에는 제일 잘 생긴 코다!"

"……!"

"분명 네 코에는 남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정말이에요?"

노노아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와광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네 코에는 개성이 있고 기품이 있고 시정(詩情)이 있다!"

코에 이토록 난해한 미학(美學)이 있다니 노노아는 약간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와광생이 다시 말했다.

"치료를 하면 얼핏 보기에는 좀더 예뻐질지 모르지만 네 코가 지니고 있는 진실한 매력은 사라지고 만다."

"……!"

자신의 코를 한동안 만지작거리던 노노아는 결국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좋아요. 치료는 그만 두겠어요!"

그녀는 와광생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은자 이십 냥을 줘요!"

와광생의 가느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자라니?"

"할아버지는 나의 오리고기를 먹고도 치료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은자를 내야 될 게 아니에요?"

"그… 그것은……."

"할아버지는 치료를 할 때 열 냥씩 받으니 일단 약속이 깨어지면 두 배를 내야 돼요!"

"……!"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돌파리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도… 돌파리 사기꾼!"

노노아의 예리한 논리에 와광생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노노아는 냉정했다.

"할아버지가 돌파리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은자 이십 냥만 내면 돼요!"

"얘… 얘야!"

"천하의 우내제일현께서 설마 돌파리 사기꾼은 아니겠지요?"

와광생은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은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십 냥… 여기 있다."

와광생은 진짜 임자를 만난 것이다. 오리고기를 넙죽 받아먹은 게 불찰이었다.

무린은 두 노소(老少)의 수작을 보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 때 무린의 시선이 문득 창 밖에 미쳤다.

"……!"

밖에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행인이 없는 한산한 거리에 하나의 백영이 우뚝 서 있었다.

묘령의 백의여인, 그녀는 빗줄기 속에 유령처럼 서서 미향선계각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환영처럼 창 밖으로 흘러 나갔다.

찰나간에 무린은 백의여인 앞에 우뚝 내려섰다.

백의여인은 창백하도록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띄웠다.

"무린… 당신이었군요!"

불가사의한 요기를 풍기는 미소였다.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사랑… 그대였구료."

그녀는 바로 우정소녀 빙사랑이었다.

항상 비오는 날이면 출현하고, 출현하면 항상 불길한 일이 발생한다는 수수께끼 속의 여인. 역시 당금무림 오대불가사의인 중의 한 명이다.

지난날 무린은 빙사랑을 궁륭마천부의 참정수옥에서 만난 적이 있다.

빙사랑은 희디흰 옥수를 뻗어 무린의 손을 잡았다.

"무린… 당신은 미향선계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돼요. 미향선계각에는 곧 무서운 일이 발생할 거예요."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린이 물었다.

"어떤 무서운 일이 발생한단 말이오?"

빙사랑은 무린의 손을 살며시 이끌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이야기를 해 드릴께요."

무린은 의혹을 느꼈다. 또한 빙사랑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 흥미를 느꼈다.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빙사랑이 빗속으로 몸을 날리며 재촉했다.

"무린… 어서 오세요."

무린은 즉시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교외의 숲 속, 하늘을 가린 고목이 너무나 울창하여 숲 속에는 빗방울조차도 떨어지지 않았다.

빙사랑은 숲 한가운데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살며시 무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무린…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린이 물었다.

"무슨 부탁이오?"

"잠깐 동안만 저를 꼭 안아 주세요."

"……?"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빙사랑의 팔이 무린의 목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녀는 무린의 귓가에 애원하듯 속삭였다.

"무린… 저를 꼭 안아 주세요. 비오는 날이면 저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는 풀잎처럼 가냘프고 애잔한 몸을 무린에게 찰싹 밀착시켰다.

비에 촉촉히 젖은 옷을 통해 섬뜩한 한기가 느껴졌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미묘한 체향(體香). 무린은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정시했다.

"빙사랑, 당신은 어떠한 여인이오?"

그녀의 눈동자는 서늘한 빙호(氷湖)처럼 투명했다.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은채(銀彩)가 반짝이고 있다.

빙사랑은 무린의 목덜미에 향긋한 숨결을 토해 냈다.

"무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 드릴께요. 어서 저를 꼭 안아 주세요."

그녀의 입술이 점점 다가오더니 무린의 뺨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입술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무린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비단결처럼 섬세하고도 싸늘한 입술의 감촉이었다.

무린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은 무린의 입술과 합쳐졌다.

그녀의 팔은 무린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으음……."

달콤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의 혀가 무린의 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안았다. 어느덧 무린은 기이한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두 남녀는 서로 포옹한 채 천천히 수풀 위로 쓰러졌다.

빙사랑이 뜨거운 호흡을 토해 냈다.

"무린… 지금 제 몸은 점점 더워지고 있어요."

과연 그녀의 전신은 서서히 따스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빙사랑은 무린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옷자락 속에 넣었다.

"무린… 제 몸을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여인의 다리에 무린의 손이 닿았다. 비단결보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진다.

무린의 손은 따뜻하게 열기가 피어 오르는 그녀의 허벅지를 스쳐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

빙사랑은 몸을 활짝 벌려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숨결은 급속히 가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무린이 천천히 얼굴을 들며 입을 열었다.

"빙사랑, 아까 한 이야기는 어떤 뜻이 있소?"

그의 어조는 놀랄 만큼 냉철했다.

여인과의 애희(愛戱)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빙사랑은 달콤한 도취에서 깨어나 눈을 스르르 떴다. 그녀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물었다.

"미향선계각에 대한 이야기말인가요?"

"그렇소."

빙사랑의 눈동자에 이상한 은채가 나타났다.

"지금쯤 미향선계각은 완전히 피로 씻겨져서 살아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누가 미향선계각을 피로 씻는단 말이오?"

"천축왕자 아극타예요."

무린은 흠칫했다.

"그가 왜 미향선계각을 피로 씻는단 말이오?"

"물론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죠."

"……!"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빙사랑의 이야기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가?

무린은 그녀를 똑바로 정시하며 재차 물었다.

"빙사랑,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빙사랑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저의 정체를 꼭 알고 싶으세요?"

"알고 싶소."

"좋아요. 그럼 이야기해 드릴께요. 그 대신 입맞춤을 한 번 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입술로 무린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한동안이나 갈증난 사람처럼 무린의 입술을 빨았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을 떼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밀비천전에서 왔어요."

무린은 흠칫했다.

"밀비천전……!"

"뜻밖인가요?"

무린은 급히 물었다.

"그러면 낭자는 대무후제국의 인물이란 말이오?"

밀비천전은 이미 대무후제국의 수중에 있지 않은가?

빙사랑은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돌연 싸늘한 한기가 피어 났다.

"아니에요. 대무후제국은 나의 적(敵)이에요!"

"적……?"

"지금은 더 묻지 마세요. 언젠가는 당신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

빙사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린도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낭자가 마향선계각에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이오?"

빙사랑이 대답했다.

"물론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지난번에 참정수옥에서 나를 구해 주었듯이……."

"……!"

"저는 이제 가야 돼요.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 때……."

그녀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무린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홀연 숲 속으로 유령처럼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가?

그녀는 수수께끼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무린은 잠시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한바탕의 짧은 꿈을 꾸고 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의 예고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파앗-!

무린은 미향선계각을 향해 급히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미향선계각 앞에 이른 순간, 무린은 주춤했다.

"……!"

사방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무린은 급히 미향선계각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 이럴 수가!

빙사랑의 불길한 예언은 그대로 적중해 있었다. 미향선계각의 모든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점원도, 기녀도, 손님도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목부위 동맥이 끊긴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별원에도, 화각에도, 주청에도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의 시체였다.

거대하고 호화로운 미향선계각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변해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이토록 철저하고 완벽한 도살(屠殺)이 있을 수가 있는가?

무린은 황급히 이층의 주청으로 들어섰다.

'노아는 어찌 됐는가?'

우내제일현 와광생과 수작을 하던 노노아의 안위가 걱정된 것이다.

회계와 점원도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노노아는 보이지 않았다.

와광생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무린은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때 계산대 밑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쌍의 노소(老少)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바로 노노아와 와광생이었다.

무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아, 무사했구나!"

노노아는 아직도 공포의 빛을 띄고 있었다.

본래 노노아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소녀다. 그런데 지금은 새파랗게 질려서 공포의 빛을 띄고 있으니…….

무린이 급히 물었다.

"노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노노아는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녀는 반쯤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와광생이 대신 대답했다.

"잔양살막(殘陽殺幕)이 출현했었네!"

"……!"

무린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졌다.

<잔양살막>

전설 속의 유계이대공포(幽界二大恐怖) 중 하나다.

그들은 무림 사상 가장 잔혹하고 완벽한 살수집단(殺手集團)이었다. 잔양살막이 출현하는 곳에는 모든 생명체가 시체로 변한다.

그들의 수뇌부는 동왜(東倭) 출신으로 알려졌다.

청풍일도류(淸風一刀流)라는 가공할 쾌도법(快刀法)을 지닌 이국고수(異國高手)들, 중원에 그들의 쾌도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무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천축왕자 아극타가 잔양살막까지 지배하고 있단 말인가!'

아극타는 대존야 무린을 처치하기 위해 잔양살막을 동원한 것이다.

무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잔양살막의 동왜 출신 도객(刀客)들이 출현한다면 중원형세는 더욱 험악해질 것이다!'

그 때 와광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중원이 이방(異邦)의 고수들에게 철저하게 짓밟힐 때가 다가오고 있다."

문득 무린은 와광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린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노인장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그러자 와광생은 지체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우선 은자 열 냥을 선불하게."

직업의식이 철저한 노인이라고나 할까?

무린은 은자 열 냥을 꺼내 주었다.

은자를 받고 난 와광생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어 보게."

"노인장은 혹시 우정소녀 빙사랑과 일행이 아니오?"

와광생의 가느다란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맞았네. 노부는 그녀와 함께 왔네."

와광생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가? 그러면 무린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는가?

무린은 빙사랑과 와광생이 같은 오대불가사의인 중의 한 명으로서 동시에 미향선계각에 출현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일행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와광생 역시 밀비천전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와광생은 더 말하기 싫은지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네."

그는 이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득 와광생의 뒷모습을 쫓던 무린의 눈에서 번쩍 이채가 빛났다.

'저 노인을 추적하면 밀비천전의 비밀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와광생의 나직한 전음이 들려 왔다.

"지금은 노부를 추적할 시간이 없네. 어서 천부남궁(天府南宮)부터 가 보게."

무린은 흠칫 놀랐다. 와광생은 무린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천부남궁이라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무린은 급히 노노아를 재촉했다.

"노아, 어서 천부남궁으로 가자!"

무린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가?

무창성(武昌城) 교외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솟아 있는 거성(巨城).

이곳은 궁륭마천부의 사대분궁(四大分宮) 중 하나인 천부남궁이었다.

분궁이라고 하지만 무림의 일반 문파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궁륭마천부의 명에 따라 중원의 남사성(南四省)을 통치하는 지상권부(至上權府)이기 때문이다.

부슬부슬…….

천부남궁에도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웅장하게 펼쳐진 궁성은 고요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화향전(華香殿).

천부남궁의 최고 귀빈(貴賓)이 머무는 곳이며, 화려하고 우아하기가 황실(皇室)의 별궁(別宮)을 능가하는 곳이다.

지금 화향전에는 한 여인이 머무르고 있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바로 그녀였다.

우문검지는 무영수련장에서 대군단을 철수시킨 뒤 천부남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대존야 무린의 명(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문검지는 창가에 단정히 앉아서 수(繡)를 놓고 있었다. 하얀 비단천에 오색 실이 아름다운 무늬를 짜 가고 있었다.

그녀의 섬섬옥수는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우문검지의 또 다른 일면(一面)이었다.

궁륭마천부의 십만 무적대군을 통수하는 우문검지가 평범한 아녀자처럼 다소곳이 앉아서 수를 놓고 있을 줄이야 누구도 상상치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녀는 복색부터가 너무나 여자다운 모습이었다.

구름 같은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길게 끌리는 분홍색 궁장(宮裝)은 우아하고 화사했다.

은갑패검에 신검(神劍)을 치켜들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천부대군수의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우문검지의 시선은 비단천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꿈꾸듯 흐르고 있었다.

"……."

수를 놓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쩌면 아무 생각도 안 하는지도 모른다. 비단천에는 한 쌍의 새 무늬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오색 깃털을 지닌 아름다운 새 한 쌍이었다.

두 마리의 새는 가지에 마주 앉아 다정하게 부리를 비비고 있다.

무늬를 다 새기자 우문검지는 비단천을 활짝 펼쳤다.

그것은 손수건이었다.

보통의 경우 자기가 사용할 손수건에 수를 놓는 여자는 없다. 그러면 그녀는 그 손수건을 누구에게 선물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런데 웬일일까?

우문검지는 가벼운 한숨을 토하더니 수놓기를 중지하고 비단천을 차곡차곡 접었다.

분홍색 옷자락에 비친 탓인지 그녀의 하얀 목덜미는 약간 붉어 보인다.

우문검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새 비는 그쳐 있었다.

정오의 밝은 태양이 비치며 한여름의 녹음이 싱싱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문득 우문검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존야께서는 안 오시려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속으로 무린을 생각하고 있었던가?

이 때 돌연 어디선지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속 들려 왔다.

"크아악!"

"으아악!"

우문검지의 선명한 눈썹이 살짝 찌푸러졌다.

"……!"

차차창-!

병장기의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은 계속 울려 왔다.

대격전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우문검지의 성목(星目)이 날카롭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군수답게 침착하고 냉철한 성품인 것이다.

이 때 문 밖에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시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대군수께 보고드립니다. 지금 대정전(大正殿)에 잔양살막의 살수들이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대존야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문검지는 흠칫했다.

"잔양살막……!"

그녀도 잔양살막의 공포스러움을 잘 알고 있었다.

우문검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알았다!"

그녀는 급히 은갑패검을 하고 문을 나섰다.

대정전 앞에는 벌써 무수한 시체가 널려 있었다. 모두 천부남궁의 황기검수(黃旗劍手)들이었다.

황기검수는 천부남궁의 최고정예다.

지금 수백 명의 황기검수는 불과 열 명의 잔양살막 살수를 이중삼중으로 에워싸고 맹렬히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살수들의 예도(銳刀)가 한 번씩 번쩍일 때마다 황기검수들은 추풍낙엽처럼 거꾸러졌다.

황기검수들은 도저히 살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살수들의 도법(刀法)은 귀신과 같았다.

희생자는 급속히 늘어갔다. 대정전 앞이 온통 피비로 뒤덮이며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정전에 우뚝 서서 격전을 지켜보던 천부남궁의 궁주(宮主)는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기검수들이 전멸하는 수밖에 없다!'

궁주는 난생처음 공포의 전율이 등줄기를 꿰뚫는 것을 느꼈다.

남패신장(南覇神將) 공손수악(公孫秀岳)!

천부남궁의 궁주인 그는 중원을 진동시키는 당대의 용장(勇將)이다.

그의 신출귀몰한 병법전략(兵法戰略)은 중원제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남패신장 공손수악이 지금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무장(武將)들도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잔양살막의 살수들은 그토록 초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공손수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옆에서 위엄 있는 음성이 들려 왔다.

"싸움을 멈추게 하시오!"

공손수악은 시선을 휙 돌렸다. 거기에는 은갑패검의 우문검지가 성큼성큼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공손수악과 무장들은 황급히 예를 표했다.

"대군수를 뵙습니다!"

공손수악은 즉시 명을 내렸다.

"모두 멈추어라!"

한 번 명이 떨어지자 결사적으로 공세를 펼쳐 가던 황기검수들이 일제히 썰물이 빠지듯 뒤로 물러섰다.

격전은 갑자기 중지되었다. 잔양살막의 살수들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장내가 돌연 뭄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장내에는 벌써 이백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다. 목불인견의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문검지는 천천히 대전 중앙으로 나섰다. 장내를 압도하는 늠름한 신위였다.

공손수악을 비롯한 무장들은 황송한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대군수시여, 속하들의 무능을 벌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문검지는 묵묵히 살수들을 쓸어 보았다.

살수들은 칠흑처럼 검은 흑의를 입었는데, 가슴 한복판에 섬뜩한 붉은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잔양살막의 표식(標識)이었다.

무림사상 가장 잔혹하고 완벽한 살수조직이라는 잔양살막.

살수들은 모두 조각처럼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가공할 살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무표정한 가운데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건 그들이 초인적인 특급살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우문검지는 표정이 굳어졌다.

'과연 유계(幽界)로부터 온다는 살수들답군.'

이윽고 그녀는 엄중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여기에 나타났느냐?"

열 명의 살수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느릿느릿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인상은 특이했다. 짧은 머리를 뒤로 묶은 강팍한 얼굴, 왜소한 체령엔 짧은 무복(武服)을 입고 있어 마치 전신이 한 자루의 도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했다.

그는 무감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를 죽이러 왔소."

먼지가 풀풀 날릴 만큼 건조하고 음산한 대꾸였다. 한데, 중원인과는 어감(語感)이 다르다.

우문검지는 싸늘하게 힐문했다.

"너는 동왜(東倭) 출신이냐?"

"그렇소. 내 이름은 부전삼수(富田三秀)이며 동왜(東倭) 청풍가(淸風家) 출신이오."

여전히 건조하고 무감동한 대꾸였다. 그런데 그의 출신은 어디인가?

<청풍가(淸風家)>

동왜 제일의 비밀 무도문(武道門)이다. 그들은 중원에 무림사적 중대사가 발생할 때에는 항상 출현하여 천하를 경동시켰다.

청풍가의 독문도법(獨門刀法) 일도류(一刀流)는 중원무림인에게 무한한 공포의 대상이 있다.

우문검지가 다시 물었다.

"잔양살막은 왜 대존야를 노리느냐?"

부전삼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행사(行事)에 대해 말하지 않는 규칙이 있소."

순간 우문검지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싸늘해졌다.

"너희들은 분명 아극타의 명을 받고 있을 것이다!"

부전삼수는 음산하게 대꾸했다.

"이야기는 더 필요하지 않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대존야의 목이오!"

우문검지는 노성으로 소리쳤다.

"일개 살수조직 따위가 감히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에게 칼을 겨눌 자격이 있다고 믿느냐?"

"대존야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천부남궁은 결국 피로 씻겨질 것이오!"

공손수악은 사태를 처리할 중대한 책임을 느꼈다. 천부대군수에게 누(累)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은가? 더 이상 황기검수들만을 희생시킬 수도 없다.

마침내 공손수악은 뒤에 늘어서 있는 무장들을 향해 엄중히 명을 내렸다.

"저 살수들을 어서 제압하라!"

그러자 한 무장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속하 막사강(莫斜强)이 먼저 저 동왜의 고수들을 일검(一劍)에 처치하겠습니다!"

거무튀튀한 얼굴의 팔 척 거한.

만인을 압도할 듯 웅맹한 인상이다. 그는 천부남궁에서도 가장 용맹무쌍한 만력용장(萬力勇將) 막사강이었다.

막사강은 육 척 장검을 스르릉 뽑아 들고 부전삼수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

"……!"

군웅들은 긴장하여 그를 주시했다.

막사강은 부전삼수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동종(銅鐘) 소리 같은 호통이 장내를 울렸다.

"오랑캐 섬나라에서 온 살수 따위가 본궁을 침범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어서 본관의 검을 받아라!"

호통이 끝나는 순간, 막사강의 장검은 쾌속극맹한 기세로 부전삼수를 향해 뻗어 갔다.

파츠츠츠츳-!

태산이라도 양단할 듯한 검세였다. 부전삼수의 왜소한 몸이 그 엄청난 검세를 어떻게 감당하랴!

그러나 부전삼수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자 길이의 예도(銳刀)가 느릿하게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기이이이-!

괴이하도록 느릿한 일 도(一刀)였다.

다음 찰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막사강의 목에서 선혈이 확 뿜어졌다. 그의 장대한 신형은 땅바닥에 고목처럼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정확하게 목 동맥이 끊어져 있었다.

오오, 정녕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다.

어찌 그토록 느릿한 도초(刀招)가 번개처럼 빠른 검세를 간단히 파해할 수 있단 말인가?

군웅들은 모두 두 눈을 의심했다.

'세… 세상에 저런 괴도법(怪刀法)이 있었다니…….'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는 세 명의 무장이 벼락처럼 호통을 치며 부전삼수를 향해 덮쳐 갔다.

"개벽삼검(開闢三劍)!"

그들은 천부남궁의 최고검객인 개벽삼검이었다.

번쩍-!

눈부신 검광이 분수처럼 폭사했다. 세 줄기 검기가 부전삼수를 향해 맹렬히 뻗어 갔다.

순간 부전삼수의 예도가 또 한 차례 느릿하게 허공을 갈랐다.

기이이이-!

도검의 광채가 중인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며 이번에도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크악!"

"컥!"

개벽삼검의 신형이 허공에서 휘청 꺾여지는 게 보였다. 그들은 똑같이 목에서 검붉은 피를 뿜으며 땅바닥에 털썩털썩 떨어졌다.

아아, 이럴 수도 있는가?

부전삼수의 도법은 차라리 귀신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군웅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공손수악은 수하 무장들이 계속 처참하게 목숨을 잃자 피가 무섭게 끓어올랐다.

마침내 그는 수중의 보검을 번쩍 치켜들고 앞으로 나섰다.

"부전삼수, 과연 놀라운 도법을 지니고 있구나! 그러면 이번에는 본좌가 직접 시험해 보겠다!"

군웅들은 더욱 긴장했다. 공손수악과 부전삼수의 대결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공손수악마저 패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공손수악은 부전삼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안광은 새파랗게 타올랐다.

부전삼수는 여전히 조각처럼 무표정했다. 그의 예도는 비스듬한 각도로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돌연 공손수악의 입에서 우렁찬 폭갈이 터졌다.

"검을 받아라!"

그의 보검은 부전삼수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찔러 갔다.

파아아앗-!

찰나 부전삼수의 예도가 번쩍 빛을 발했다. 한 줄기 도광이 전광처럼 뻗었다.

치리잇-!

그 일도(一刀)야말로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쾌속했다.

카카캉-!

고막을 찢는 금속성이 울리며 상관수악의 보검은 옆으로 뒤집히듯 튕겨졌다. 동시에 한 줄기 선혈이 쫙 뿌려졌다.

"으음……!"

고통스런 신음이 울렸다.

상관수악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 새 그의 한 팔은 어깻죽지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목 동맥이 끊기는 대신 팔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수하 무장들이 대경하여 급히 그를 부축했다.

"궁주님!"

공손수악의 얼굴은 고통과 치욕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으으으……."

그는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급히 장외(場外)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천부남궁에는 이제 부전삼수의 적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새삼 공포와 전율을 느꼈다.

이 때 우문검지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녀는 패검을 힘차게 뽑아 들었다.

"부전삼수, 이번에는 본녀가 동왜 청풍가의 도법을 견문해 보겠다!"

아아, 드디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드디어 천부대검수 우문검지가 직접 대결을 벌여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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