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복마전(伏魔殿)
팔두마차는 백로별향 앞에 이르러서 멈추어 섰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바로 무린과 우주향이었다.
두 남녀는 나란히 백로별향의 전문을 들어섰다. 그러자 한 어린 시동(侍童)이 황급히 달려나와 영접했다.
"귀빈들의 왕림을 환영합니다!"
무린과 우주향은 시동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 누각은 황실의 별전(別殿)만큼이나 화려하고 우아한 별세계였다.
벽과 기둥은 금은보석으로 휘황하게 장식되고, 바닥에는 대식국(大息國) 특산의 호화로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넓은 주각에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지루할 정도의 한적한 고요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무린과 우주향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한 비대한 금의인이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소인 왕대강(王大江)이 귀빈들의 분부를 받고자 합니다!"
그는 백로별향의 주인이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어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온데 대해서 몹시 기뻐하는 듯했다.
우주향이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본녀는 오늘부터 열흘 동안 백로별향 전체를 빌리고자 해요. 물론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어요."
왕대강은 눈을 크게 떴다. 겨우 한 쌍의 남녀가 거대한 백로별향 전체를 빌려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열흘씩이나 말이다.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시중을 들 점원이나 시녀는 필요하지 않소. 다만 이 어린 시동 하나면 족하오."
왕대강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물론 귀빈들께서는 앞으로 열흘 동안 백로별향 전체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좀 비싸서……."
우주향은 품속에서 하나의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아름다운 채문금낭(彩紋錦囊)이었다.
우주향은 채문금낭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이며 왕대강에게 내밀었다.
"이 주머니에는 열 개의 흑진주(黑珍珠)가 들어 있어요. 이거면 충분하겠어요?"
왕대강은 깜짝 놀라서 채문금낭을 받았다.
그는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들여다보더니 입이 딱 벌어졌다.
눈부신 흑광(黑光)을 뿌려 내는 열 개의 흑진주, 그것은 가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진귀한 이물(異物)이었다.
왕대강은 대경하여 더듬거렸다.
"이 보물은 너무나 마… 막대합니다!"
우주향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냥 받아 두세요."
왕대강은 감격을 금치 못하며 어린 시동에게 급히 명했다.
"문문(文文), 어서 귀빈들께 최고급 술과 요리를 올릴 준비를 갖춰라! 그리고 귀빈들께서 목욕을 하신 뒤 편히 쉬실 특실도 마련하도록 해라!"
왕대강과 시동 문문은 황공스런 태도로 뒷걸음질쳐서 물러갔다.
무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극타를 만나려면 여기서 열흘이나 기다려야 하오?"
우주향이 대답했다.
"그가 언제 출현할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열흘 이내에 출현하는 것은 분명해요."
사령파황루를 찾아가는 게 아니고 아극타가 출현하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우주향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녀는 먼저 목욕을 하겠어요. 그리고 함께 술을 나누도록 해요."
그녀는 교성으로 이렇게 말하더니 내실로 들어섰다.
무린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 황혼이 깃들고 있었다. 수면이 붉은 금빛으로 물들어 고기비늘처럼 번쩍거렸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이 때 어린 시동 문문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황금 촛대에 불을 밝히고 탁자 위의 화병에 새로 꺾어 온 작약(芍藥)을 꽂았다.
싱그러운 작약의 향기가 은은히 번졌다.
문득 무린의 검미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
무린은 옆으로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복도로 통하는 문이 있어 붉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린은 몸을 일으켜 그리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휘장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린의 초인적인 육감은 휘장 뒤에 누군가가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무린은 휘장을 휙 제쳤다. 그러나 휘장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삼층으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이 복도 끝에 뻗어 있을 뿐이었다. 융단이 깔린 아름다운 계단이었다.
무린은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삼층으로 도망갔군!'
그러자 문문이 급히 뒤따라오며 말했다.
"공자님, 삼층은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님께서는 삼층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무린은 담담히 물었다.
"문문, 너는 우리가 열흘 동안 백로별향 전체를 빌린 사실을 알지 않느냐? 삼층 역시 백로별향이 분명한데 어찌 갈 수가 없단 말이냐?"
문문은 할 말을 잃었다.
"그… 그건……."
무린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무린은 빙그레 웃으며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문, 나는 삼층을 잠깐만 구경하고 내려올 테니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문문은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삼층의 복도는 몹시 호화로웠다. 복도 양쪽에는 많은 문들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삼층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무린은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무린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하나의 문을 향해 돌아섰다.
'이곳으로 들어갔군!'
그것은 화려한 주홍색 궁형문(窮形門)이었다.
무린은 궁형문을 살며시 열었다.
스르르루-!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무린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순간 한 줄기 극맹한 암경(暗勁)이 무린의 얼굴을 향해 맹렬히 엄습했다.
쐐애액-!
무린은 번개처럼 몸을 틀며 기쾌하게 일수를 쳐 냈다.
"예상하고 있었다!"
콰르릉-!
요란한 폭발음 속에 하나의 인영이 허리를 꺾으며 뒤집혔다.
"으헉!"
찰나 또 하나의 인영이 전광석화처럼 덮쳐들며 소리쳤다.
"제법 대단한 놈이구나!"
그의 쌍수가 두 자루 비수처럼 시야를 가르며 쇄도했다.
쾌속독랄하고 보기 드문 절정고수의 살초였다.
그러나 무린이 어찌 그 정도 솜씨에 당하랴!
무린의 우수가 여유 있게 일호를 긋는 순간, 그 인영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멀리 퉁겨져 나갔다.
털썩-!
그가 바닥에 떨어지자 실내는 겨우 조용해졌다.
바닥에는 두 거지가 거꾸러져 있었다.
무린이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내가 처음 도착할 때부터 숨어서 지켜보던 자들이군."
그들은 바로 우비개와 일목개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계속 숨어서 무린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린이 무감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가진 것은 무슨 까닭이오?"
우비개와 일목개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중상을 입지는 않은 듯 사지를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우비개가 큰 코를 벌름거리며 대꾸했다.
"우리는 상공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었소!"
일목개도 외눈을 번득이며 한 마디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상공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오!"
두 거지는 굽히지 않고 재차 공세를 취할 태세를 갖추었다.
실내에는 다시 긴박한 공기가 감돌았다.
우비개와 일목개는 무린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상공은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무린은 담담한 신색으로 대꾸했다.
"나야말로 당신들의 정체를 밝혀 보아야겠군."
일전(一戰)을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 옆에서 무거운 음성이 들렸다.
"모두 멈추시오!"
동시에 벽에 드리워진 푸른 휘장이 쫘악 갈라지며 한 청년이 모습을 나타냈다.
평범한 용모의 회의청년이었다.
하나 그 평범함 속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비범함이 깃들어 있다.
우비개와 일목개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예를 표했다.
"속하들이 궁사찰(宮査察)님을 뵙습니다!"
회의청년은 무린 앞으로 성큼 나섰다.
"대존야를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소."
무린의 눈에도 빠르게 이채가 스쳐 갔다.
"나도 형공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회의청년은 누구인가?
궁천무, 그는 바로 백상회의 인물인 궁천무였다.
무린은 지난번에 그와 함께 무영수련장에 찾아가지 않았던가?
이제 보니 일목개와 우비개 역시 백상회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천무는 무슨 일로 갑자기 백로별향에 나타난 것일까?
궁천무가 말했다.
"이곳 백로별향은 백상회의 동정분단(洞庭分檀)이오. 대존야는 어떻게 이곳을 찾아오셨소?"
궁천무의 단도직입적인 성품은 여전했다.
무린은 내심 놀라는 가운데 비로소 의혹이 풀렸다.
'그랬었군!'
백로별향은 백상회에 소속된 하나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무린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주각이니 나는 술을 마시며 호수의 풍광을 즐기러 왔을 뿐이오."
궁천무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귀하는 분명 특별한 목적이 있어 왔을 것이오. 그러나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좋소."
"……!"
"다만 나는 백상회의 사찰로서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소. 우리는 앞으로 행사(行事)하는데 서로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오."
무린은 내심 생각했다.
'궁천무는 여전히 상감잠룡신검을 추적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은 사령파황루와 관계가 있다!'
무린과 궁천무는 여전히 같은 대상을 추적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로 충돌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무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사렬파황루를 찾아서 여기에 왔소. 그러나 사령파황루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르오."
궁천무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하는 솔직하구료. 그러면 내가 한 가지 정보를 말해 주겠소. 사령파황루는 지금 장강(長江)을 따라 동정호로 접근하고 있소."
무린이 가볍게 미간을 모았다.
"사령파황루가 정말 움직인단 말이오?"
"사령파황루는 하나의 배요."
"아……!"
사령파황루가 누각이 아닌 배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궁천무의 음성이 약간 침중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배가 아니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초거선(超巨船)이오. 차라리 움직이는 거대한 복마전(伏魔殿)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오."
"움직이는 복마전이라……."
"물론 사령파황루에는 아극타와 아난타, 그리고 천축사대법왕 등 무수한 고수들이 타고 있소."
백상회의 정보수집 능력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무린이 새로운 의혹을 느끼고 물었다.
"사령파황루가 동정호에 접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궁천무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지 못하오."
무린의 뇌리에 한 가지 상념이 스쳐 갔다.
'우주향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궁천무가 물었다.
"귀하는 지금 시간의 여유가 있소?"
무린이 대답했다.
"물론 시간은 있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소?"
"평소에 귀하를 만나고자 하던 분이 가까운 곳에 있소."
"누가 나를……?"
"귀하에게 만나 볼 의사가 있다면 그리로 안내해 주겠소."
무린은 궁천무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무림의 중요한 인물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궁천무가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다.
무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를 만나 보겠소."
"그러면 나를 따라 오시오."
무린과 궁천무는 나란히 문을 나섰다.
우비개와 일목개는 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굽혔다.
어느 새 주인 왕대강도 나타나 궁천무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무린은 백상회에서 궁천무의 신분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았다.
무린과 궁천무는 백로별향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그러나 호변에는 수많은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온갖 환락을 파는 주각과 기루, 호수에도 불을 밝힌 유람선들이 무수히 떠다니며 야정(夜情)의 풍취를 즐기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여름밤이었다.
궁천무는 인적이 별로 없는 무성한 갈대밭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갈대밭들을 지나자 의외로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인적도 불빛도 미치지 않는 물가에 높다란 암벽이 솟아 있었다.
그런데 암벽 밑에는 한 척의 배가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는 게 보였다. 매우 견고하게 보이는 백색 거선(巨船)이었다.
궁천무가 배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귀하를 만나고자 하는 분은 저 안에 있소."
무린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가까이 갈수록 배의 웅자(雄恣)는 사람을 압도할 듯 거창하게 느껴졌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라도 탈 수 있는 거선이었다.
파앗-!
돌연 궁천무의 신형이 가볍게 위로 솟구쳤다.
"배 위로 오릅시다!"
그는 물에서 삼십 장이나 떨어진 배를 향해 비조처럼 날아갔다. 절정신법이었다.
무린도 즉시 몸을 솟구쳐 배를 향해 쏘아갔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갑판에 나란히 내려섰다.
갑판은 몹시 넓었다. 또한 갑판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궁천무를 보자 일제히 예를 표했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은 모두 무림의 일류고수로 보였다.
궁천무는 무린을 선실로 안내했다. 선실도 수십 개나 즐비하게 붙어 있어 배 위에 거대한 저택이 늘어선 것과 흡사했0다.
무린과 궁천무는 한 선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조용한 선실.
실내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있었다.
상석에는 한 중년문사(中年文士)가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형형한 눈빛에 수려한 용모가 인세에 보기 힘든 고아준초한 선비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중년문사의 좌우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옹(老翁)들이 보였다.
그들의 풍모 역시 한결같이 비범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절세기인들이 분명했다.
궁천무는 중년문사를 향해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속하가 백로별향에서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를 만났기에 회주님께 안내해 왔습니다."
"……!"
"……!"
순간 실내의 분위기는 기이하게 변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무린에게도 화살처럼 집중되었다.
기류가 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굳어졌다.
"……!"
무린의 표정도 약간 굳어졌다. 백상회의 최고 수뇌부가 이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무린을 만나고자 한 사람은 바로 백상회의 회주임이 분명할 것이다.
무린은 중년문사를 똑바로 정시했다. 중년문사도 무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쳐 불꽃처럼 작렬했다.
중인이 모두 숨을 죽이는 순간, 무린이 낭랑한 음성을 터뜨렸다.
"하하하… 백상회의 회주께서 본인을 초대해 준데 대해 먼저 사의를 표하겠소이다."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과연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다운 신위가 아닌가?
무린의 늠연한 신위 앞에 중인은 일순 압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백상회의 회주는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존야, 노부 섭해군(攝海君)이 대존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무린은 흠칫했다.
섭해군이 누구인가?
<선기은유자(仙機隱儒子) 섭해군(攝海君)>
백 년 전에 벌써 천하제일유(天下第一儒)라는 이름을 얻은 절세의 기인이다.
전설적인 선기유문(仙機儒門)의 대종사(大宗師)로서 측량불가의 무공과 학문을 지녔으나 일찍이 무림의 일에는 간섭한 적이 없다.
비록 사순의 중년문사로 보이지만 그의 나이가 이미 백 세를 훨씬 넘은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반신인(半神人)이었다.
그러한 선기은유자 섭해군이 바로 백상회의 회주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무린은 새삼 섭해군의 좌우에 있는 노옹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또한 한 번 출현하면 세상이 경동할 전대의 대기인(大奇人)들이었다.
<만겁삼군(萬劫三君)>
<태양신군(太陽神君) 수묵룡(壽墨龍)>
<월정신군(月精神君) 제갈굉(諸葛宏)>
<성하신군(星河神君) 오무상(吳武相)>
<천령이공(天靈二公), 수령공(水靈公) 소잠(沼潛)과 화령공(火靈公) 소염(沼炎)>
<팔해신개(八海神 )>
<망아선사(亡我禪師)>
<금각진인(金閣眞人)>
……
그야말로 근세 일백 년의 백도(白道) 무림을 대표할 만한 희대의 고수들이 아닌가?
무린은 백상회의 조직이 상상을 훨씬 초월할 만큼 강대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 있는 인물들만 해도 천하대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무린은 지금 무서운 강적(强敵)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았다.
백상회는 궁륭마천부의 패도천하(覇道天下)에 반기를 든 비밀결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중인을 쭉 쓸어 보며 입을 열었다.
"궁륭마천부의 대존야 무린이 여러 고인들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리고 본인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천하대세를 의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놀랄 만큼 늠연한 태도였다.
중인은 새삼 감탄했다.
'역시 무림천자의 풍도를 지녔다!'
선기은유자 섭해군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대존야,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가 비록 무림의 배분으로는 백 년이나 높지만 당금 천하를 지배하는 무림천자를 감히 경시할 수는 없다.
"좋소이다."
무린과 섭해군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벌어질 것인가?
중인은 긴장하여 두 사람을 주시했다.
섭해군이 먼저 장중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노부는 지난 이백 년 동안 궁륭마천부가 천하무림을 훌륭하게 통치하여 중원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시켜 온데 대해 경의를 표하고자 하오."
그의 말은 진중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현금에 이르러 궁륭마천부의 통치는 무서운 패도로 흐르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모두 그것을 우려하게 되었소."
무린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섭해군의 어조가 약간 고조되었다.
"현금의 궁륭마천부 부주인 파세천무황 우문환탑은 분명 완전한 패도천하를 추구하고 있소. 그것은 우리 백도무림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백상회가 결성(結成)된 것이오."
"……!"
"대존야는 제이의 무림천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고견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소이다."
무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본인은 사실 궁륭마천부의 패도천하를 좋아하지 않소."
이 한 마디에 중인은 매우 놀랐다. 그것은 궁륭마천부의 대존야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린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본인이 대존야로서 무림에 출도한 것은 당금 무림의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일 뿐 천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아니오. 본인은 앞으로 몇 달 안에 임무를 마치고 궁륭마천부를 떠나게 될 것이오."
"아……!"
중인은 나직한 침성을 토했다.
무린은 담담하나 무게 있는 음성을 흘려 내었다.
"그러므로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대답할 수 없소."
중인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뜻밖의 말을 들었기 ㄸ문이다.
섭해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대존야는 일신상의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형형한 시선으로 무린을 정시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대존야가 앞으로 해결할 무림의 중대사란 어떤 것이오?"
무린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아극타의 천축세력을 중원에서 제거하고, 밀비천전이 사마(邪魔)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일이오."
섭해군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우리 백상회도 진심으로 원하는 바요!"
중인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표만도 궁륭마천부와 백상회가 일치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무린이 물었다.
"백상회는 지금 신비이물(神秘異物)인 상감잠룡신검을 추적하고 있다고 알고 있소. 그 물건이 어떤 비밀을 지녔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섭해군의 표정이 약간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말씀드리겠소. 상감잠룡신검은 동방(東方)에서 흘러 들어온 이물로서 환단무극경(桓檀無極境)의 비밀을 품고 있다고 하오."
순간 무린은 가벼운 경성을 토해 냈다.
"환단무극경……!"
오오, 그랬던가?
<환단무극경(桓壇無極境)>
일천 년 천하무림사의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는 하늘 밑의 제일비역(第一秘域). 동방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꿈 속의 신비경(神秘境)이다.
삼백 년 전 원세무황 상관무륭은 환단무극경을 찾기 위하여 십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동방대장정에 올랐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찾지 못하고 한 가지 천죄(天罪)만을 범한 뒤 돌아와서 밀비천전을 건립하고 은거해 버렸으니…….
결국 당금 무림의 모든 중대사도 환단무극경에서 파생된 셈이 아닌가?
무린이 말했다.
"환단무극경이 무림 최대의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본인과는 관계가 없소. 그러므로 백상회가 상감잠룡신검을 추적하는데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소."
물처럼 담담한 태도였다.
섭해군은 내심 감탄했다.
'궁사찰이 대존야의 풍도가 지극히 담백하다고 칭찬하더니 과연 그렇군.'
사실 천하의 무림인치고 환단무극경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상감잠룡신검을 탐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든지 환단무극경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새로운 천하무림사의 주인공이 될 게 분명하거늘…….
중인은 무린의 담백한 기도에 대해 무한한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린과 상감잠룡신검 사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때 한 중년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탑처럼 장대한 체구, 불그레한 대추빛 얼굴, 아랫배까지 늘어진 검은 수염이 마치 관운장처럼 위풍당당한 인물이었다.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호목(虎目)은 만인을 압도할 만했다.
중년인은 선기은유자 섭해군에게 읍을 한 뒤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속하 사마궁달(司馬弓達)이 회주님께 보고드립니다. 본채(本寨)의 천이백 장강대선단(長江大船團)은 동정호의 북동(北東) 호변 일대에서 완전한 천라지망(天羅之網)을 펼쳤습니다!"
섭해군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사마총관(司馬總官), 정말 수고가 많소! 이제는 대상(對相)이 출현하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구료."
"그렇습니다. 어떠한 선박이라도 본채와 장강대선단이 펼친 천라지망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인은 만족하여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린은 중년인의 내력을 알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개세수로왕 사마궁달이 백상회의 총관이었구나!'
<개세수로왕(蓋世水路王) 사마궁달(司馬弓達)>
장강 수만 리 일대를 지배하는 장강십팔채의 총채주(總寨主)이다.
사실상 그는 장강의 모든 상권(商權)과 교통을 장악하고 있는 수상(水上)의 제왕(帝王)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천이백의 장강대선단이 한 번 출동하면 장강의 파도는 일제히 거꾸로 흐른다.
그런데 이 거대한 장강대선단이 동정호의 북동 호변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대상은 아극타가 타고 올 사령파황루가 아니고 무엇이랴.
엄청난 대풍운(大風雲)이 밀려 오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섭해군이 무린을 향해 말했다.
"대존야, 사령파황루는 지금 우리 백상회의 수중으로 들어오고 있소.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상감잠룡신검에 있으니 아극타를 사로잡으면 대존야의 처리에 맡기도록 하겠소."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러나 한 가지 미리 말해 둘 게 있소."
"무엇인지 말씀하시오."
"본인은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로서 당금무림의 대사를 처리할 책임과 권한을 지니고 있소."
"……!"
"그러므로 본인은 사령파황루에 대한 일을 스르로 처리하겠소."
"……!"
"백상회는 본인의 허락없이 사령파황루에 손을 써서는 안 되오. 그것은 본인이 대사를 처리하는데 차질이 생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오."
아아, 무린은 분명히 경고를 한 것이다. 무림천자인 대존야의 허락없이는 백상회가 함부로 경동(輕動)할 수 없다는 것을…….
중인은 일제히 표정이 굳어졌다.
돌연 실내의 기류는 팽팽하게 당겨졌다.
중인의 얼굴에는 싸늘한 한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무린의 태도는 여전히 물처럼 담담했다.
"본인은 다시 한 번 말해 두겠소. 백상회는 앞으로 본인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되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아, 차라리 광오하다고나 할까?
무린은 눈앞에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는 전대고수(前代高手)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단 말인가?
실내에는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한 차례의 무서운 폭풍이 밀어닥칠 듯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