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환환(魔幻環) (17/37)

마환환(魔幻環)

문득 섭해군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존야, 우리 백상회는 대존야의 뜻을 존중하고 싶소. 그것은 우리 또한 사령파황루를 중원에서 제거하고자 하기 때문이오."

결국 백상회는 무린의 놀라운 신위 앞에 굴복했는가?

무린이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소. 본인은 백상회가 상감잠룡신검을 차지한다고 해도 관계하지 않겠소."

실내의 긴장은 겨우 사라졌다. 무린과 백상회 사이에는 묵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 백상회는 대존야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다!

- 대존야는 상감잠룡신검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령파황루의 출현을 앞에 두고 이루어진 잠정적인 묵계였다.

이렇게 하여 무린과 백상회의 관계는 미묘하게 정립되고 있었다.

무린은 발길을 돌렸다.

"본인은 이만 돌아가겠소."

그가 선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갈 때, 실내의 중인은 새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존야… 중원의 대운명을 결정지을 절대기재가 분명하다!'

배를 떠나온 무린은 백로별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약간 무거웠다.

'언젠가는 궁륭마천부와 백상회 사이에 건곤일척의 무시무시한 대결전(大決戰)이 벌어지리라.'

쌍방은 결국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무린은 어두운 암천을 바라보았다.

'대변겁은 피할 수 없다.'

이 때 뒤에서 궁천무의 음성이 들려 왔다.

"대존야, 불초가 말하고 싶은 게 있소!"

"……!"

무린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궁천무는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가 형형한 눈길로 무린을 바라보며 불쑥 말했다.

"대존야, 귀하는 정말 존경할 만하오. 불초는 귀하를 존경하오!"

그 한 마디 말을 마친 궁천무는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무린은 일순 멍해졌다.

"……."

겨우 그 말을 하려고 따라왔던가?

- 불초는 귀하를 존경하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사나이의 뜨거운 진심이 깃들어 있었으니, 훗날 궁천무는 그 한 마디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게 된다.

무린은 다시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궁천무… 그야말로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아닌가!'

*          *          *          *

백로별향의 주각.

무린이 들어섰을 때 탁자에는 이미 별미진향(別味珍香)의 요리와 미주(美酒)가 호화롭게 차려져 있었다.

우주향은 목욕을 마친 뒤 홀로 앉아 있었다.

무린이 마주 앉자 그녀는 옥잔을 건네 주며 물었다.

"당신은 본녀 혼자 술을 마시게 버려 두고 어디를 갔다 오시나요?"

그녀의 음성은 평소와 약간 달랐다.

기이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은요(隱妖)로운 저음(低音)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달짝지근한 관능감(官能感)을 풍기는 음성이었다.

무린은 궁천무나 백상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담담히 응답했다.

"호변을 잠시 산책하고 왔소."

우주향은 옥잔에 벽청색 미주를 찰랑찰랑 넘치게 따라 주며 다시 물었다.

"여름밤의 호변 풍정(風情)이 어떻든가요?"

그녀는 여전히 흑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나 술을 따라 주는 섬섬옥수는 옥잔보다 더욱 희고 아름다웠다.

은은한 황촉불 아래 빙어(氷魚)처럼 움직이는 투명한 손이었다.

무린은 새삼 우주향이 발산하는 짙은 염기(艶氣)를 느꼈다.

그는 옥잔의 술을 단숨에 쭉 들이킨 뒤 말했다.

"귀하가 발산하는 풍정(風情)만큼 매혹적이지는 못했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소."

"그렇다면 좋아요. 나에게로 좀더 가까이 오세요. 아니 내가 당신 옆으로 가겠어요."

우주향은 무린 옆으로 사뿐히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렇게 가까이 앉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우주향은 무린과 어깨가 닿을 만큼 다가앉아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린… 당신이 원한다면 본녀의 풍정을 마음껏 음미해도 좋아요."

"……."

무린은 우주향의 향긋한 체향(體香)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불가사의하도록 감미로운 향기였다.

흑사 안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눈동자는 바로 무린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우주향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풍정을 음미해도 좋다는 말은 어떤 뜻이오?"

우주향의 은요로운 음성이 더욱 나직해졌다.

"본녀의 얼굴을 보거나 몸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만 빼고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에요."

"……!"

"좀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나를 안거나 애무해도 좋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무린은 우주향의 허리에 손을 뻗었다. 그는 우주향의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우주향은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끌려왔다. 두 남녀의 몸은 찰싹 밀착되었다.

무린은 우주향의 봉긋하게 부풀은 젖무덤이 뭉클하게 가슴을 압박하는 것을 느꼈다.

엷고 섬세한 흑궁의(黑宮衣)를 통해 감촉되는 탄력 있는 유방이었다.

우주향이 나직이 속삭였다.

"목에는 입맞춤을 해도 좋아요."

무린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의 입술이 흑사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희디흰 목덜미에 닿았다.

백옥처럼 매끈하고 백설처럼 눈부신 목이었다.

우주향은 감미로운 한숨을 토하며 턱을 살며시 치켜들었다.

"아……."

엷은 흑사가 하늘거리며 둥글고 아름다운 턱이 드러났다.흑사가 조금난 더 제껴진다면 얼굴까지 드러날 판이었다.

그러나 우주향은 교묘히 얼굴을 틀어 흑사가 제껴지는 걸 피한다.

무린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지나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주향은 무린의 가슴과 등을 미묘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도대체 두 남녀는 어느 선까지 갈 셈인가?

일순간 우주향의 양 손 십지(十指)가 활짝 펼쳐지며 무린의 요혈(要穴)에 닿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흑사 속에서 번쩍 빛을 발했다.

무린은 갑자기 그녀의 십지에서 화끈한 열기가 전류처럼 뻗치는 것을 느꼈다.

무린의 검미가 칼날처럼 치켜올라갔다.

"……!"

무린의 전신은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우주향이 음유하게 입을 열었다.

"대존야… 지금 당신의 사대요혈(四大要穴)은 본녀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있어요."

어느 새 그녀의 음성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본녀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의 생명은 찰나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음……."

"당신은 본녀의 말을 인정하나요?"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오."

"그러면 본녀가 왜 당신의 사대요혈을 제압했는지 알겠어요?"

"모르겠소."

"본녀는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

"다만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에요."

"……!"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본녀는 잠깐 재미있는 놀이를 하려는 것뿐이니……."

무린이 물었다.

"우주향, 나를 제압해 놓고 어떤 놀이를 하고 싶소?"

"본녀는 당신과 말놀이를 하고 싶어요."

"말놀이라면……?"

"당신은 먼저 옷을 모두 벗어야 돼요. 다음에는 본녀를 등에 태우고 말처럼 뛰어다니는 거예요."

"……!"

"호호호… 당신이 뛸 수 있도록 뇌심혈(腦心穴)을 제압한 뒤 다른 혈도는 풀어 주겠어요."

뇌심혈이 제압당하면 실혼인이 되고 만다. 그 때는 모두 옷을 벗고 뛰어다녀도 이상할 게 없다.

우주향의 옥수가 무린의 뇌심혈을 향해 천천히 뻗어 갔다.

"대존야, 반시진만 말놀이를 즐긴 뒤에는 도로 혈도를 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돌연 무린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주향, 지금 그대의 단전혈(丹田穴)은 나에게 제압당해 있소."

순간 우주향은 단전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흠칫해서 손길을 멈췄다.

아, 어느 새 무린의 좌수(左手)는 그녀의 단전(丹田)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무린의 말이 이어졌다.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그대의 전신경맥(全身經脈)은 찰나지간에 풍선처럼 파열되고 마오."

단전이 파괴되면 전신경맥은 산산이 파열된다.

우주향은 할 말을 잃었다.

"……!"

사대요혈이 일시에 제압당한 무린이 어떻게 출수를 할 수 있었는가?

우주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린의 공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압당한 요혈을 스스로 해제하는 무린의 공력조예는 이미 천극입정(天極入頂)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극입정!

공력조예가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최극경(最極境)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혈도의 이동과 폐쇄는 물론 스르로 해혈(解穴)과 점혈(點穴)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무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대는 본인의 말을 인정하오?"

이야기는 조금 전과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주향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요."

"본인 역시 그대를 죽일 생각은 없소."

"……!"

"다만 그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오."

"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잠깐 재미있는 놀이를 하려는 것뿐이니……."

우주향은 자신이 했던 그대로 당하고 있었다.

우주향이 물었다.

"당신은 본녀와 어떤 놀이를 하고 싶나요?"

무린은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 보니 말놀이가 퍽 재미있을 것 같소. 나는 그 놀이를 해 보아야겠소."

"……!"

"그러니 그대는 옷을 모두 벗어야 하오. 그리고는 나를 등에 태우고 말처럼 뛰어야 하오."

형편만 바뀌었을 뿐 말놀이는 정말 벌어지려는가?

우주향은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대존야, 본녀의 패배를 인정하겠어요. 당신이 승리했어요."

어쩔 수 없는 패배의 인정이었다.

무린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우리는 잠시 장난을 했을 뿐인데 무슨 패배와 승리가 있단 말이오? 하하하……!"

무린이 우주향의 단전에서 손을 떼었다. 우주향의 눈동자가 흑사 안에서 심유하게 빛났다.

'무린… 이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난 영웅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옥잔에 술을 따라 무린에게 건네 주었다.

"대존야, 당신에게 진심으로 술 한 잔을 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음성은 다시 은요롭고 달콤하게 낮아져 있었다.

무린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받았다.

"고맙소."

우주향은 무린 옆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이 때였다.

스스스스…….

허공에서 돌연 흐릿한 운무가 피어 올랐다.

그 백색 운무가 서서히 사라지며 실내에는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백포노인(白袍老人), 치렁치렁 늘어진 백포로 몸을 휘감은 위풍당당한 신비노인이었다.

그는 이국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회색 피부, 깊은 눈과 우뚝한 코, 전신에서는 기이한 사기가 소름끼치게 발산되고 있었다.

휘리리리-!

기류를 진탕시키는 극렬한 사기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뻗치는 새파란 벽광(碧光)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

"……!"

무린과 우주향은 은연중 표정이 굳어졌다.

백포노인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혼계사마를 죽였는가?"

어감(語感) 역시 중원인과는 매우 달랐다.

우주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당신은 누군가요?"

혼계사마는 마차를 막아 섰다가 희대의 마병(魔兵)인 자전철사극에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백포노인이 대답했다.

"노납은 천축에서 온 범아법왕(梵亞法王)이다."

우주향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대로 아극타의 수족이로군."

그녀는 지극히 태연했다.

<범아법왕(梵亞法王)>

바로 아극타가 거느리고 온 천축사대법왕(天竺四大法王) 중의 한 명으로 중원의 일파지존을 능가하는 공포스런 이방고수이다.

범아법왕이 물었다.

"너희는 왜 혼계사마를 죽였느냐?"

"그들이 무례하게도 우리의 마차를 막아섰기 때문이에요."

우주향의 대꾸는 무감동했다.

범아법왕의 백포자락이 후르르 떨렸다.

"노납은 너희들을 죽이겠다!"

긴 말이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범아법왕이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그에게서 뻗는 살기가 실내를 숨막히게 가득 채웠다.

우주향은 여전히 태연했다.

"범아법왕, 당신이 우리를 죽이는 건 자유지만 먼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범아법왕의 두 눈에서 뻗어 나오는 벽광이 섬뜩하게 번득였다.

"무엇이냐?"

"사령파황루는 언제 이곳에 도착할 예정인가요?"

"닷새 후에 도착한다."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요."

"저 세상으로 갈 사람에 대한 노납의 마지막 자비다."

"좋아요. 이제 우리를 죽여도 관계없어요."

"……!"

범아법왕의 회색빛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이 스쳐 갔다. 우주향의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무린은 옥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아법왕의 존재 따위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범아법왕은 서서히 노기가 치밀었다.

'이 어린 것들이 노납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구나!'

범아법왕은 분명 무린과 우주향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우주향을 향해 한 손을 쭉 뻗었다.

"중원의 젊은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콰아아아-!

순간 엄청난 장강(掌 )이 우주향을 향해 쇄도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약간 유치하군요!"

우주향은 가볍게 소맷자락을 한 번 흔들었다. 순간 괴이(怪異)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

범아법왕이 발출한 장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범아법왕은 흠칫했다.

"이제 보니 보통 계집이 아닌군!"

돌연 그의 쌍장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눈부신 벽광(碧光)을 쏟아 냈다.

쿠우우우-!

얼굴까지도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범아법왕의 전신에서는 푸른 운무가 뭉클뭉클 피어났다.

순간 무린의 얼굴에 약간 긴장된 빛이 스쳐 갔다.

'마령벽라천공(魔靈碧羅天功)이다!'

<마령벽라천공(魔靈碧羅天功)>

지난날 중원에 한 번 출현하여 공포의 회오리를 일으켰던 천축밀공(天竺密功)이다.

당시 중원의 삼대마공(三大魔功)은 모두 마령벽라천공에 의해 격파되어 천하제일마공(天下第一魔功)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범아법왕의 쌍장이 우주향을 향해 서서히 덮쳐 갔다.

"노납의 장공(掌功)을 다시 받아 보아라!"

우우우웅-!

휘류류류류-!

웅장한 진동음이 울리며 기류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실내는 완전히 범아법왕이 쏟아 낸 장영(掌影)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우주향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범아법왕! 아극타가 직접 오더라도 본녀의 상대가 되지는 못한다."

이내 그녀의 옥수가 기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촤르르르릇-!

무수한 은구슬이 일제히 쏟아지는 듯한 기이한 음향이 따라 울렸다.

다음 순간 두 줄기 강기가 충돌하여 기류가 무섭게 역류했다.

우르르르- 쿠쿠쿵-!

놀랍게도 범아법왕의 장강은 산산이 파해되어 흩어졌다.

범아법왕의 안색이 대변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위험을 직감하고 혼신의 진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난 푸른 운무가 노도처럼 밀려 왔다.

콰아아아아-!

동시에 웅장한 폭갈이 벼라처럼 고막을 쳤다.

"마령벽라천공!"

범아법왕의 장대한 신형은 사나운 독수리처럼 덮쳐들고 있었다.

순간 우주향의 싸늘한 일갈이 울렸다.

"마환환(魔幻環)!"

동시에 허공에는 둥그런 은환(銀環)이 떠올랐다. 그 은환은 찰나간에 범아법왕의 목에 휘감겼다.

"끄으으……."

범아법왕의 입에서 숨막히는 듯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의 장대한 신형은 허공에서 휘청 꺾여지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져서 고목처럼 쓰러졌다.

"끄으윽……."

범아법왕은 계속 숨막히는 신음을 토하며 목에 휘감긴 은환을 떼어 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은환은 급속히 범아법왕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끄… 윽……."

결국 미약한 외마디 신음을 끝으로 범아법왕의 신형은 거대한 풍선처럼 파열했다.

파아아앗-!

살과 뼈가 산산이 분해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갈기갈기 찢어진 백포자락이 꽃잎처럼 펄럭이며 떨어졌다.

그의 모습은 눈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너무나도 놀랍고 허망한 최후였다.

그 신비로운 은환은 이미 환영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 이 무슨 놀라운 괴공(怪功)인가?

일순 무린의 얼굴에는 경이가 스쳐 갔다.

'마환환… 무림최고의 마공 중의 하나다!'

<마환환(魔幻環)>

그것은 환영처럼 나타나는 불가해한 강기( 氣)의 환(環)이다.

마환환은 어떤 무공으로도 제압할 수 없고 어떤 고수도 상대할 수 없다고 한다.

마환환이 나타나면 오직 죽음만이 있는 것이다.

공포의 범아법왕이 허망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주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령파황루가 닷새 후에 도착한다… 아극타도 약간 어리석은 인물이로군."

무슨 말인가?

그 때 무린이 물었다.

"우주향, 사령파황루가 이곳으로 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목적이 무엇이오?"

"본녀를 만나기 위해서에요."

무린은 우주향의 담담한 대답에 약간 놀랐다.

"아극타와 그대는 만날 약속이 되어 있단 말이오?"

"그래요."

"……!"

우주향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 의외의 일이 아닌가?

우주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극타는 본녀가 밀비천전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듣고 급히 오고 있는 거예요."

"음."

"결국 아극타는 본녀의 수중으로 오고 있는 셈이에요."

무린은 비로소 아극타가 우주향의 유인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린은 재차 물었다.

"그를 꼭 동정호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우주향의 음성은 심유해졌다.

"동정호에 있는 대무후제국으로 가는 비로(秘路)가 있어요. 우리는 그 비로를 통해 대무후제국으로 가게 될 거예요."

그랬던가?

우주향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동정호에 포진하고 있는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秘密船團)은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존재들을 일시에 제거할 수가 있어요."

"비밀선단……?"

무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대무후제국은 얼마나 무서운 비밀선단을 보유하고 있는가?

무린은 문득 백상회에서 ㅍ치고 있는 천라지망이 생각났다. 아무튼 엄청난 대풍운이 동정호로 밀려오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우주향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본녀는 이만 침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겠어요."

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일찍 잠이나 자도록 하겠소."

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우주향이 물었다.

"당신은 본녀의 침실에서 자고 싶은 생각이 없나요?"

이렇게 대담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질 수 있는 여인이 우주향 외에 또 있을까?

무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함께 자고 싶은 생각이 있소."

"함께 자게 되면 당신과 본녀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점점 대담한 질문이 이어진다. 그러나 무린의 대답은 거침이 없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소. 원한다면 나는 그대를 안아 주겠소."

"그냥 안아 주기만 한단 말인가요?"

"그대는 무엇을 더 원하오?"

"본녀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우린 함께 잔다고 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오."

"당신 역시 본녀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소. 나는 그대에게 무언가를 원하게 될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생각은 없소."

우주향은 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갔다.

"좋아요. 그렇다면 나도 당신과 함께 자는 것은 훗날로 미루도록 하죠."

그녀의 내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린이 자신의 매력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기를 기다리는가?

무린은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겠소."

두 남녀의 심기(心機) 대결은 이렇게 하여 일 막을 마치고 있었다.

*          *          *          *

돌연 동정호의 파고(波高)가 급속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소문이 무림에 번져 갔다.

- 장강십팔수채의 천이백 장강대선단이 일제히 동정호에 집결되었다!

- 정체불명의 무수한 대선단이 속속 동정호로 모여 들고 있다!

- 궁륭마천부의 대군단도 동정호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 수많은 신비고수들이 동정호 호변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소문은 동정호에 미증유의 대풍운이 닥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소문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분명 중원의 운명을 강타할 태풍의 핵은 동정호로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 그 태풍은 중원의 운명을 어떤 방향으로 휩쓸어 갈 것인가?

*          *          *          *

중원에서 아득히 먼 서쪽 땅 천축(天竺).

그 이역(異域)의 어느 한 곳에 방대한 궁성(宮城)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전각(殿閣)과 원추형의 칼날 같은 첨탑이 환상처럼 경이롭다.

무한히 장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궁성이다.

그런데 좀 기이하다. 궁성 도처에는 무수한 등롱(燈籠)이 밝혀져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심야의 적막이 고요히 깔려 있어 한없이 유현하고 음산하게 느껴진다.

유령이 살고 있는 궁성인가?

궁성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밀전(密殿).

지금 대전에는 기이한 녹무(綠霧)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섬뜩한 사기(邪氣)와 요기(妖氣)를 발산하며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녹무. 그 녹무가 서서히 흩어지자 전내의 광경이 흐릿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아, 전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아닌가?

무수히 많은 나녀들. 모두가 꽃다운 낭자들로서 숫자는 무려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두 머리를 길다랗게 풀어 헤친 채 장심(掌心)을 합쳐 가슴 앞에 모으고 있었다.

기도하는 듯한 자세다. 그러나 그들은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전내는 숨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기이한 사기와 요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녹무와 함께 전내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이 때 돌연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대전의 중앙에 작은 태양과 같은 불덩어리가 나타나더니 눈부신 광휘를 뿌리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전내는 붉은 광채로 가득 차고 수많은 나녀들은 공포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 불덩어리 속에서 사유(邪幽)한 음성이 울렸다.

"때가 왔도다! 본좌는 오늘 너희들 칠백 순녀(純女)의 음정(陰精)을 취하리라!"

듣는 사람의 심장을 얼려 버릴 듯 으시시한 한성(寒聲)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음성은 계속 울린다.

"모두 일어서라! 모두 일어서서 본좌의 사라밀궁심공(邪羅密宮心功)을 받아라!"

그러자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나녀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합장한 손을 허공에 치켜들고 태양처럼 빛나는 불덩어리를 향해 괴성을 토해 냈다.

"호오오……!"

"호오오오오……!"

화르르르-!

불덩어리는 이글이글 타오르며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구결(口訣)이 허공중에 울려 퍼졌다.

"양전기화구행파라밀(陽轉氣化九行波羅密)……."

나녀들이 구결에 따라 기이하게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듯, 아니면 관능의 흥분으로 몸을 비비꼬는 듯, 그들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전신은 경련을 일으켰다.

괴이한 일이 아닌가?

구결이 계속됨에 따라 그들의 몸부림은 점점 격렬하게 변해 갔다. 여전히 고통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몸부림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일제히 바닥에 몸을 눕히고 광란의 흐느낌을 토하기 시작했다.

"흐흐흑……."

"흐흑… 흐흐흑……."

그것은 마치 격렬한 정사를 하는 광경과 흡사하지 않은가?

요기롭고도 사음(邪陰)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녀들이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더니 사지를 쭉 뻗었다.

절정(絶頂)의 신음이 대전을 울리며 그들의 신형은 활처럼 휘어졌다.

"허억!"

"허어어억!"

그 순간 불덩어리 속에서 음산하고도 사유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본좌가 이제 너희들의 음정(陰精)을 모두 취하노라."

돌연 불덩어리 속에서 뻗는 눈부신 광채는 나녀들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순간 여인들의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아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의 홍수 속에 대전 안의 광경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대전을 가득 채웠던 붉은 섬광이 서서히 사라지자 전내의 광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 무슨 놀라운 괴사(怪事)인가?

그 젊고 아름답던 나녀들은 모두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쭈글쭈글한 피부, 허옇게 변해 버린 머리카락, 수백 명의 나녀들은 한 명 남김없이 뼈와 가죽만 남은 처참한 노파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진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경악지사!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때 허공에는 거대한 혈포인(血袍人)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나타나 있었다.

태양처럼 눈부신 광휘를 발산하는 환영. 그 환영으로부터 사유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본좌 절륜대법황(絶輪大法皇)의 혈혈태양사령천공(血血太陽邪靈天功)은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제 칠백 순녀의 음정을 모두 취하여 일수파세천극인(一手破世天克人)이 된 본좌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절륜대법황,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혈혈태양사령천공은 또 어떠한 무공인가?

일수파세천극인.

한 손으로 세상을 부수고 하늘을 이긴다!

이 또한 무한한 공포의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돌연 환영으로부터 엄청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핫… 본좌는 천축무림의 지존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노라! 본좌는 곧 중원무림(中原武林)을 접수하러 갈 것이니, 천하와 사해팔황이 모두 본좌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크하하하핫……!"

무서운 말이 아닌가?

사유한 음성이 다시 뇌성처럼 웅장하게 대전을 울렸다.

"본좌가 이끄는 천룡밀궁사(天龍密宮寺)의 중원대장정(中原大長征)이 마침내 시작되니 이로써 천하무림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리라!"

<천룡밀궁사(天龍密宮寺)>

바로 천축무림의 패자(覇者)이자 아극타의 사문(師門)이 아닌가?

이곳은 바로 천룡밀궁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천룡밀궁사가 중원대장정을 선언했으니, 천축에서 발생한 엄청난 태풍의 핵이 중원을 향해 몰려가는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혈포인의 환영 속에서는 여전히 눈부신 핏빛 광채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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