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령파황루(邪靈波荒樓) (18/37)

사령파황루(邪靈波荒樓)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고요한 호변에 하나의 백영이 홀연 나타났다.

대존야 무린, 바로 그였다.

무린은 적막한 갈대밭을 지나 검은 암벽이 솟아 있는 수협(水峽) 쪽으로 몸을 날려 갔다.

그쪽 호변은 지형이 험악하고 물길이 사나와서 배는 물론 사람들도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무린은 높다란 암벽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사위를 살피는 그의 눈동자는 예리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여기는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秘密船團)이 잠복해 있을 만한 곳이다!'

그러나 수협에서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려 올 뿐 배 같은 것은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암벽을 따라 다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 험악한 암벽의 능선을 넘어서는 순간, 무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서서 암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고요한 수협이 길다랗게 뻗어 있었다.

한데 그 수협을 따라 거대한 선단이 그림처럼 떠 있는 게 아닌가?

무린은 약간 격동하여 중얼거렸다.

"역시 있구나!"

물 위에는 최소한 삼백 척에 이르는 전선(戰船)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분명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이었다.

모든 배는 견고한 철갑으로 무장되고 무수한 은의인(銀衣人)들이 엄중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철갑선단이었다.

무린의 눈빛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우주향은 이미 아극타와 대적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놓았다!'

대무후제국의 삼백 비밀선단이 일제히 출동하면 동정호의 파고(波高)는 또 얼마나 높아질 것인가?

일순 무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무림의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저 비밀선단을 모두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서운 생각이었다.

이 때 오른쪽 암벽 위에 두 개의 인영이 번쩍 나타났다.

스스슷-!

무린은 재빨리 암벽 뒤로 몸을 숨겼다.

나타난 사람은 은발이 성성한 두 백포노인이었다.

이방의 풍모를 지닌 위풍당당한 모습이 만인을 압도할 늠름한 기도를 지녔다.

그들의 푸르스름한 눈동자는 무섭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을 싸늘하게 응시하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납법왕, 예상대로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이 저기에 잠복해 있소!"

"예상대로요. 아수법왕은 저 비밀선단을 어떤 방법으로 제거하면 좋겠소?"

무린은 두 백포노인의 정체를 즉각 알아차렸다.

'천축사대법왕 중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이다!'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을 미리 제거하여 사령파황루를 안전하게 영접하기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게 분명했다.

그들은 사령파황루의 선발대(先發隊)였다.

아극타의 안배 역시 무섭고 치밀하지 않은가?

순간 무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갔다.

'사태는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군!'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곳은 좁은 수협이기 때문에 화공(火攻)에 안성맞춤이오!"

"노납의 생각도 같소. 흐흐흐……."

두 사람의 회안(灰眼)에는 으시시한 괴소가 떠올랐다.

돌연 가납법왕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건너편 암벽 위에 불빛이 대낮처럼 밝혀지며 무수한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수백 명의 청의궁수(靑衣弓手)였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철궁(鐵弓)에 화전(火箭)을 지니고 있었다.

가납법왕이 왼손을 번쩍 치켜들자 이번에는 암벽 밑의 길다란 백사장을 따라 무수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역시 수많은 청의검수(靑衣劍手)였다.

청의검수들은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을 서서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도검(刀劍)이 화전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번쩍였다.

갑자기 수협 일대는 긴박한 살기로 가득 찼다.

기류는 숨막힐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때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에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심야의 정적을 찢었다.

"적이다!"

동시에 급박한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슈슈슈- 슈슈슉-!

무수한 화살이 선단을 향해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청의궁수들이 일제히 철궁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슈슈슈슉-!

불타는 화살들이 선단을 향해 우박처럼 폭사했다.

선단은 큰 혼란을 일으켰다.

벌써 화광이 충천하는 가운데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배도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은의인들은 크게 당황하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으로 탈출하라!"

"적을 처치하라!"

그들은 장도를 휘둘러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전을 쳐 내며 백사장 쪽으로 질주했다.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크악!"

"으아악!"

화전에 관통되어 거꾸러지는 은의인들이 속출했다. 백사장에 구름처럼 포진한 청의검수들은 은의인들을 가로막아 사납게 살검(殺劍)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차창- 창-!

쌍방간에는 치열한 혼전이 벌어졌다.

"으악!"

"크으으!"

밤공기를 찢는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도검이 난무하며 피비(血雨)가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슈슈슈- 슈슈슉-!

화전은 계속 선단을 향해 빗줄기처럼 폭사하고 있었다. 삼백 척의 선단은 이미 무서운 불바다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좁은 수협이었기 때문에 피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수협 일대는 화염과 피보라가 광란하는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아, 드디어 그 막을 열기 시작한 대혈겁이여!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암벽 아래에서 벌어진 혼전을 주시하며 음산한 괴소를 흘려 냈다.

"흐흐흐… 삼백 척의 선단이 불타오르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로군!"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은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 배에서 탈출한 은의인들도 청의검수들에 의해 무참하게 도살당하고 있었다.

오호라! 우주향은 아극타를 너무 경시했는가?

무린은 무심한 얼굴로 혼전의 아수라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중원을 어지럽히는 사마(邪魔)의 무리!'

이윽고 무린은 가납법왕과 아수법왕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두 분은 지옥도를 구경하는 감상이 어떻소?"

"……!"

"……!"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흠칫하여 시선을 돌렸다.

가납법왕이 음산하게 힐문했다.

"너는 누구냐?"

무린이 담담히 대꾸했다.

"본인은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요."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안색이 급변했다.

"대존야……!"

무린은 빙그레 웃었다.

"놀랄 필요 없소. 사령파황루의 선발대가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을 궤멸시킨데 대해 본인은 진심으로 경하하고 싶소."

그 말은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절대자인 대존야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납법왕의 벽안이 무섭게 번뜩였다.

"대존야, 귀하는 노납들에게 무슨 용무가 있소?"

무린의 음성이 심유하게 변했다.

"가납법왕 그리고 아수법왕, 본인은 당신들을 중원에서 제거할 임무를 띄고 있소."

무겁고도 단호한 한 마디였다.

순간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의 만면에 음산한 살기가 나타났다.

"대존야, 노납들이 그대를 두려워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담담했다.

"원한다면 출수해도 좋소. 당신들이 출수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소."

냉엄하면서도 물처럼 고요한 태도였다.

일순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무린의 불가사의한 기도에 압도당했다.

"……!"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천인(天人)의 위엄 앞에 부딪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뭉클뭉클 피어났다. 벽안에서는 소름끼치는 청광(靑光)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후르르르르-!

그들의 백포가 팽팽 부풀어 올랐다. 극렬한 사기(邪氣)였다.

무린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역시 초절한 사극고수(邪極高手)들이다!'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무린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후르르르르-!

그들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사기가 기이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대존야, 목숨을 바쳐라!"

돌연 그들의 선제합공(先制合攻)이 번개처럼 펄쳐졌다.

"가납대법천공(伽納大法天功)!"

"아수대법천공(阿修大法天功)!"

파아아앗-!

두 사람의 장대한 신형이 맹렬히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늘이 온통 그들의 그림자로 가려지며 주위의 기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휘리리리리-!

이내 엄청난 초강기(超 氣)가 무린을 향해 노도처럼 쇄도했다.

찰나지간 무린의 우렁찬 일갈이 날카롭게 천공을 울렸다.

"홍단태극신공!"

동시에 그의 쌍수가 기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조광화원의 최고 세문절학(世門絶學)이었다.

다음 찰나 벼락 같은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 콰쾅-!

그리고는 이내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으으음……."

"으윽……."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의 신형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내 그들은 물고기처럼 뒤집히더니 암벽 밑으로 급속히 추락해 갔다.

아아, 그들의 가슴에는 거대한 장인(掌印)이 거무튀튀하게 찍혀 있었다.

홍단태극신공에 의해 가슴이 타 버린 것이다.

공포의 천축고수인 가납법왕과 아수법왕도 무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벌써 까마득한 암벽 밑으로 떨어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죽지는 않았더라도 중상은 면치 못했으리라.

'살아서 돌아가면 아극타에게 내 안부를 전해 주시오.'

무린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는 아직도 치열한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협 일대를 냉철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은 거의 불타서 물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이 때였다.

두두두두-!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늠름한 무장이 급속히 달려왔다.

은갑패검의 절세미녀!

바로 천무대검수 우문검지였다.

"대존야, 여기 계셨군요!"

그녀는 무린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우문검지는 수일 전에 일만의 대군단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동정호 북동 호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무린은 혼전이 계속되고 있는 수협 쪽을 가리켰다.

"대군수,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은 사령파황루의 선발대에게 기습을 당하여 거의 궤멸당했소. 이제는 우리가 사령파황루의 선발대를 궤멸시킬 차례요."

우문검지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속하의 군단은 이미 적의 출현을 포착하여 일제히 진군했습니다. 수협 일대의 모든 적은 본 군단의 수중에서 한 명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이 노도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은 수협 일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천지를 뒤엎을 기세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미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의 지휘를 받지 못하는 사령파황루의 선발대가 그 무서운 기세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동녘엔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청명한 아침이었다.

호반의 한적한 갈대밭에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대존야 무린과 사사환미 우주향.

그들 두 남녀였다.

두 남녀는 키를 넘게 무성한 갈대밭을 헤치고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들은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겨 갔다.

문득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지난 밤에 우리의 비밀선단이 사령파황루의 선발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또 사령파황루의 선발대는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에 의해 전멸당했어요."

그녀의 음성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

무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무심한 표정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주향이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존야, 당신은 그 일 막의 활극(活劇)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흑사를 통해 뻗어 나오는 그녀의 시선은 비수처럼 예리하다.

무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주향, 불찰은 그대에게 있었소. 그대는 아극타를 너무 경시한 것이오."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그렇다면 본녀의 일계(一計)는 성공했어요."

무슨 말인가?

우주향의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대무후제국의 진짜 비밀선단은 다른 곳에 있어요. 수협에 있던 배들은 모두 쓸모없는 노후선(老朽船)이었어요."

"……!"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수협에 있던 비밀선단이 가짜였다니 그럴 수밖에…….

우주향의 음성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우리의 진짜 비밀선단은 결정적인 순간에 일제히 출현할 거예요. 그 때는 아극타가 본녀를 너무 경시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아아, 우주향의 무서운 심기(心機)여!

그녀는 쓸모없는 노후선들을 비밀선단으로 위장시켜 아극타는 물론 무린의 이목까지 속여 버린 것이다.

무린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우주향…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여인이다!'

우주향이 요염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본녀는 당신과 우문검지가 대군단을 출동시켜 사령파황루의 선발대를 전멸시킨데 대해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음."

무린은 할 말을 잃었다.

우주향은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아극타의 기선(機先)을 꺽어 버린 것이다.

문득 무린이 입을 열었다.

"우주향, 그대에게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생겼소."

"무엇이죠?"

"그대는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오."

"……!"

돌연 무린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우주향, 나는 그대가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소. 만약 어젯밤에 이런 감정을 느꼈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대의 침실을 방문했을 것이오."

얘기가 약간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웬일인지 우주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무성한 갈대밭을 헤치고 그녀의 신형은 구름 속의 달처럼 미끄러져 나갔다.

길다란 흑사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우주향의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자태는 지극히 매혹적이다.

무린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우주향이 만약 정도(正道)의 인물이라면 중원무림은 최소한 백 년의 정도천하(正道天下)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갈대밭이 끝나고 망망한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는 호면, 검푸른 파도는 잔잔하게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우주향은 머나먼 수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무린은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우주향이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우리 대무후제국의 금탑쾌류선(金塔快流船)이 나타날 거예요. 금탑쾌류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호화로운 배예요."

무린이 물었다.

"우리는 금탑쾌류선을 타고 대무후제국으로 가게 되오?"

"그래요."

무린은 더 묻지 않았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는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바로 사령파황루가 출현한다는 그날이므로.

무린과 우주향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아득한 수평선을 주시했다.

문득 우주향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금탑쾌류선이 오고 있어요."

과연 수평선에서 한 척의 황금빛 쾌속선(快速船)이 나타나 급속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호화선!

금탑쾌류선의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순식간에 금탑쾌류선은 호변으로 다가왔다.

금탑쾌류선의 형태는 약간 기이했다.

미끈한 유선형(流線型)이면서도 선미(船尾)에는 탑 같은 선실(船室)이 솟아 있었다. 선체는 온통 금은보석으로 장식되어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움직이는 황금궁전(黃金宮殿)이라고나 할까?

자금성의 황제라도 이러한 호화선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리라.

금탑쾌류선이 백 장 앞까지 다가오자 우주향이 무린의 소맷자락을 이끌며 말했다.

"함께 배에 오르도록 해요."

그녀는 배를 향해 비조처럼 몸을 날렸다.

무린도 즉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찰나간에 백 장의 거리를 날아 금탑쾌류선의 갑판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절정신법이었다.

당금 무림에 이 정도의 경공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막상 금탑쾌류선에 올라보니 선체는 더욱 장려하고 호화로웠다.

갑판에는 무수한 궁장시녀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그들은 우주향이 나타나자 일제히 몸을 숙였다.

선두에는 활짝 핀 모란꽃처럼 화사하게 아름다운 한 홍의미부(紅衣美婦)가 보였는데, 그녀는 우주향을 향해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금탑쾌류선 선령(船領) 화염요(華艶曜)가 승상께 보고드립니다. 속하가 거느린 제국선단(帝國船團)은 지금 본래의 위치에 포진한 채 출전령(出戰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국선단!

그것이 바로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금탑쾌류선을 천천히 서남방으로 전진시키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선령 화염요는 공손히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우주향은 무린의 소맷자락을 이끌었다.

"선실로 들어가요."

두 남녀는 나란히 선실로 들어섰다. 선실 역시 우아하고 화려하기가 황실의 별전을 능가했다.

창에 드리워진 금사 휘장이 미풍에 펄럭이며 그 사이로 망망한 동정호의 장관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이 다탁 앞에 앉자, 시녀가 진귀한 당과(糖菓)와 향차(香茶)를 날라왔다.

어느 새 금탑쾌류선은 선수(船首)를 돌려 호심(湖心)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문득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

그의 시선은 아득한 수평선에 머물러 있었다. 수평선에는 무수한 검은 점(點)들이 깨알처럼 떠있었다.

우주향이 말했다.

"장강십팔수채의 장강대선단(長江大船團)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의 총채주인 개세수로왕 사마궁달은 백상회의 총관이에요!"

아, 우주향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백상회의 천이백 장강대선단이 호변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우주향은 너무나 무감동했다.

"하지만 장강대선단 정도로는 사령파황루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무린이 물었다.

"사령파황루가 그토록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이오?"

"사령파황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천하무적선(天下無敵船)이에요."

"……!"

도대체 사령파황루가 어떠한 배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 때 우주향이 섬섬옥수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드디어 사령파황루가 나타났어요."

그녀의 음성은 은은히 격동되어 있었다.

무린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수평선의 검푸른 파도를 가르며 유유히 접근하고 있는 한 척의 붉은 거선(巨船)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아, 그것은 배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섬(島)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세상에 그토록 웅장하고 거대한 배가 있었던가?

무린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사해(四海)를 압도할 만한 위용이다!'

사령파황루는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위용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거대한 선체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성채와도 같았다. 웅장한 선수는 십팔층 누각처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혈해(血海) 속에서 솟구친 핏빛 일색의 초거선(超巨船)이었다.

길이만도 최소한 일백 장은 되리라.

무린과 우주향은 저절로 긴장하여 사령파황루의 웅자를 주시했다.

사령파황루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금탑쾌류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백 장, 삼백 장, 불과 백 장, 거리는 순식간에 손에 닿을 듯 좁혀졌다.

거대한 복마전이 다가오는가?

돌연 우주향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싸늘해졌다.

"사령파황루는 우리 금탑쾌류선과 정면으로 충돌하려는 게 틀림없어요. 아극타는 일단 본녀의 콧대를 꺾어 놓겠다는 속셈이에요!"

만약 사령파황루와 금탑쾌류선이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

금탑쾌류선은 분명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 가랑잎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우주향은 놀랄 만큼 태연했다.

"하지만 아극타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예요. 금탑쾌류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기 때문이에요!"

이 때 벌써 금탑쾌류선은 절묘하게 선수를 틀어 놀라운 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촤아아아-!

파도가 하얗게 갈라지며 금탑쾌류선은 화살처럼 빠르게 사령파황루의 정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솟구칠 때, 사령파황루와 금탑쾌류선은 아슬아슬하게 교차되어 옆으로 스쳐 갔다.

간발의 차이로 정면 충돌을 피해 낸 것이다.

이 순간이었다.

"호호호……!"

요염한 홍소가 울리며 사령파황루에서 하나의 청영(靑影)이 번쩍 몸을 숫구쳐 금탑쾌류선으로 비조처럼 날아들었다.

청라의를 입은 절세미녀!

그녀는 우주향 앞에 사뿐히 내려선 뒤에 다시 요란한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우리 사령파황루의 인사가 약간 거칠었나요?"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아극타의 여제(女弟)인 천축공주 아난타였다.그런데 그녀는 무린을 보자 흠칫 놀란 듯했다.

"아니, 당신은……!"

아난타는 순간적으로 반색을 띄더니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대존야, 당신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뜻밖이군요!"

무린이 담담히 응답했다.

"나는 오늘 귀하를 다시 만나리라 예상하고 있었소."

두 사람은 지난날 무영수련장에서 한 차례 대결을 벌이지 않았던가?

아난타는 우주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바로 사사환미 우주향인가요?"

그녀의 신색은 어느 새 쌀쌀하게 변해 있었다.

우주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그녀의 대꾸 또한 쌀쌀했다.

아난타가 심유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의 오라버니께서는 당신을 사령파황루로 초청하셨어요. 당신은 본녀와 함께 사령파황루로 갈 용기가 있나요?"

상대를 얕보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 말에 우주향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본녀는 물론 사령파황루로 갈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의 오라버니 아극타가 이곳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인가요?"

날카로운 반격이었다.

아난타는 고소를 지었다.

"우주향, 역시 당신은 대단한 여인이로군요. 본녀는 당신을 정중하게 사령파황루로 안내하겠어요!"

우주향이 응답했다.

"좋아요. 나는 사령파황루로 가서 아극타를 만나겠어요!"

아난타가 이번에는 무린을 향해 말했다.

"대존야, 본녀는 당신을 사령파황루로 초청하고 싶어요. 당신은 본녀의 초청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나요?"

무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아아, 무린은 정말 아극타가 있는 무서운 복마전으로 들어갈 셈이란 말인가?

아난타는 생긋 웃었다.

"과연 대존야답군요!"

매혹적인 미소였다. 그녀의 눈길 속에는 뇌쇄적인 추파가 깃들어 있었다.

순간 우주향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한광(寒光)이 번쩍 빛났다.

'꼬리를 치는군.'

미묘한 여심(女心)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아난타가 앞서서 선실을 나섰다.

"그럼 어서 사령파황루로 가도록 해요!"

무린과 우주향도 선실을 나왔다.

세 남녀는 갑판으로 올랐다. 사령파황루는 이백 장쯤 떨어진 곳에 하나의 섬처럼 멈추어 서 있었다. 붉은 성채처럼 거대한 웅자였다.

아난타가 먼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두 분은 본녀를 따라오세요!"

무린과 우주향도 즉시 몸을 날렸다. 세 남녀는 사령파황루를 향해 유성처럼 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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