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해전(大海戰) (19/37)

대해전(大海戰)

세 남녀는 사령파황루의 갑판 위에 나란히 내려섰다.

갑판은 거대한 광장처럼 넓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홍의검수(紅衣劍手)들이 장검을 번쩍이며 도열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은 모두 일류 고수들로 보였다.

그들은 가슴이 서늘해질 만큼 삼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선실은 호화로운 전각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난타는 무린과 우주향을 선미(船尾)의 한 대전(大殿)으로 안내했다.

세 사람은 전내로 들어섰다.

순간 무린과 우주향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전의 좌우 양쪽에는 수백 명의 도부수(刀斧手)들이 도끼를 번쩍 치켜들고 늘어서 있었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도끼의 숲이었다.

수백 개의 도끼에서 뿜어지는 살기로 인해 전내의 기류는 으시시하게 느껴졌다.

도부수들은 무엇을 내리찍기 위해 일제히 도끼를 치켜들고 있는가?

대전의 중앙에는 한 금의청년이 높다란 호피의(虎皮椅)에 위엄있게 앉아 있었다.

비범절륜한 풍모의 벽안청년(碧眼靑年), 그의 용모는 여인보다도 아름답고 수려했다.

그의 전신에는 천하를 호령할 만한 제왕의 기도가 어려 있었다.

의심할 필요없는 희대의 천출기재(天出奇才)였다.

그가 누구인가?

<천축왕자 아극타>

그가 아니고 또 누구랴.

그 벽안청년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거대한 태풍의 핵 아극타였다.

아극타의 뒤에는 세 명의 백발노인이 엄중히 늘어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기도를 풍기는 그들은 바로 천축사대법왕 중의 세 명이었다.

아극타의 바로 옆에는 한 아름다운 홍라의(紅羅衣)의 거녀(巨女)가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불괴불사녀 아라,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지난날 겁겁회아루에서 완전한 불괴불사녀로 탄생되지 않았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는 무수한 사극고수(邪極高手)와 혼세마성(混世魔星)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이들 앞에 서면 심장의 박동이 덜컥 멈추어 버리고 말리라.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정신이 아득해져서 바지를 축축이 적시며 털썩 주저앉을 것이다.

그러나 무린과 우주향의 신색은 어느 새 태연하게 변해 있었다.

우주향이 먼저 무시무시한 도끼의 숲을 천천히 통과하여 아극타 앞으로 다가갔다.

전내에는 질식할 듯한 정적이 흘렀다. 공기를 동결시키는 긴장이 대전을 가득 채웠다.

우주향은 아극타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아극타의 넓은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돌연 아극타의 입에서 호쾌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핫… 우주향, 귀하는 정말 당대제일의 여걸(女傑)이오. 핫핫핫……!"

웅혼한 웃음소리는 널따란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공력이 가공할 초극경(超極境)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 우주향의 싸늘한 한 마디가 아극타의 웃음소리를 잘랐다.

"아극타, 당신은 계속 의자에 앉아서 손님을 맞을 셈인가요?"

추상 같은 일침(一針)이었다.

"……!"

아극타의 웃음소리는 뚝 그쳤다.

우주향의 한 마디 앞에서 아극타의 제왕과 같은 위엄은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삼대법왕의 엄숙한 신색에는 일제히 노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극타는 호피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내려서며 미소를 지었다.

"우주향, 이제 됐소?"

우주향의 대꾸는 여전히 싸늘했다.

"손님을 맞이할 때 도부수들을 세워 두는 것은 천축국의 풍속인가요?"

"……!"

이번에도 아극타는 할 말을 잃었다. 아극타는 고소를 지으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좌우에 삼엄하게 늘어서 있던 도부수들이 일제히 밖으로 물러갔다.

대전에 숨막히게 충만해 있던 살기는 비로소 사라졌다.

아극타가 다시 물었다.

"이제 됐소?"

우주향이 되물었다.

"아극타, 천하를 지배하는 무림천자를 맞이하는 예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요?"

"무림천자……?"

아극타는 의혹의 빛을 띄었다. 그의 시선이 급히 무린에게로 향했다.

이 때 아난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라버님, 여기 있는 공자께서 바로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입니다."

순간 전내의 모든 고수들은 안색이 대변했다.

'대존야……!'

'저렇게 나이 어린 사람이……!'

중인의 시선은 일제히 무린에게 집중되었다.

아극타 역시 크게 놀랐다.

'이자가 대존야라고……!'

무린과 아극타의 시선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파르르-!

안광이 전류처럼 작렬했다. 전내의 기류는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대존야!

천하무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궁륭마천부의 대존야가 거짓말처럼 출현한 것이다.

모든 고수들이 어찌 대경하지 않으랴!

사실 가납법왕과 아수법왕은 무린과 한 차례 충돌하며 패퇴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도 무린의 출현이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라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들은 일순 숨이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극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린의 신색은 물처럼 담담했다.

용호(龍虎)가 우글거리는 복마전 한가운데에 단신으로 나타나서 저토록 태연할 수가 있는가?

그는 무심한 만큼 담담한 시선으로 아극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린과 아극타의 시선은 서로 부딪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당대의 기린아와 기린아가 최초로 마주친 운명의 순간이었다.

문득 아극타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대존야… 과연 중원제일의 영웅이다!'

그는 무린의 불가사의한 기도가 기이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모든 고수들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린의 신위 앞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마침내 긴장된 정적은 아극타에 의해서 깨어졌다.

"대존야, 대존야께서 사령파황루에 왕림한 것을 불초는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의 음성은 장중했다. 태도 또한 일대지존(一大至尊)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아극타 역시 일세의 영웅이었다.

무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본인이 일찍부터 귀하를 만나고 싶었는데 오늘 비로소 만나게 되었구료."

아극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도 오늘 같은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소이다."

두 사람은 어차피 부딪쳐야 할 거대한 두 줄기 태풍의 핵이다. 그런데 지금 두 태풍의 핵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광폭풍우가 몰아칠 것인가?

무린과 아극타가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우주향이 교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극타, 본녀는 이미 대존야를 대무후제국으로 초청했고 대존야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어요!"

이어서 그녀는 아극타를 똑바로 정시하며 말했다.

"본녀는 이제 당신에게도 청첩을 전하겠어요!"

그녀는 품속에서 하나의 붉은 청첩을 꺼내어 아극타에게 건네 주었다.

그것은 무린이 받은 것과 똑같은 청첩이었다.

대무후제국의 여왕인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 보내는 초청장인 것이다.

아극타는 청첩을 받아서 펼쳐 보았다.

"……!"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번쩍였다.

청첩을 읽고 난 아극타가 물었다.

"우주향, 귀하가 불초에게 이야기해 주겠다는 밀비천전의 비밀은 무엇이오?"

우주향의 대꾸는 명료했다.

"밀비천전은 대무후제국 안에 있어요. 당신이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밀비천전을 직접 방문할 수 있어요."

"……!"

아극타의 눈빛이 심유하게 변했다.

대무후제국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유혹을 지닌 도박이었다.

본래 아극타는 밀비천전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하여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가?

아극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중대한 결단의 순간이 왔다!'

문득 무린과 아극타의 시선이 부닺쳤다.

순간 아극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갔다. 그는 곧 무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존야, 대존야와 불초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이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목적을 한 가지 지니고 있소. 그것은 밀비천전의 비밀을 추적하는 일이오."

아극타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전음은 또렷하게 무린의 귀에 들리고 있었다.

이기심류전성공(以氣心流傳聲功)!

일반 무림인은 흉내낼 수 없는 신비기공(神秘奇功)이었다.

무린의 검미가 가볍게 좁혀질 때, 아극타의 전음이 계속되었다.

"대존야, 불초는 대존야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고 싶소. 그것은 대무후제국으로 가서 밀비천전의 비밀을 완전히 캐낼 때까지는 서로 적대하지 말고 합작(合作)을 하자는 제의요. 어떻소?"

진정 심기(心機)가 깊은 제의가 아닌가?

위험천만한 호혈(虎穴)로 들어가서 호랑이 새끼를 사로잡기까지 손을 잡자는 제의.

이번에는 무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극타는 과연 보통 인물이 아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더니 이윽고 무린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신광이 뻗쳤다.

그는 아극타에게 이기심류전성공으로 전음을 보냈다.

"좋소. 본인은 귀하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아아, 돌연한 합작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뜻밖의 사태변화였다.

아극타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의 준미한 얼굴에 득의의 빛이 스쳐 갔다. 아극타는 비로소 우주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불초는 대무후제국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우주향이 요염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당신은 대존야와의 합작에 성공했군요!"

우주향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는가?

아극타의 안색이 약간 변할 때, 우주향은 어느 새 웃음을 그치고 또렷하게 말했다.

"아무튼 좋아요. 본녀는 두 분을 대무후제국으로 안내하겠어요!"

중대한 국면(局面)은 의외로 쉽게 결말이 났다.

대존야 무린과 천축왕자 아극타, 그리고 사사환미 우주향!

당대 무림을 주름잡고 있는 세 남녀가 대무후제국에 함께 가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깊은 심기를 품고 있지만…….

우주향이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 본녀의 금탑쾌류선으로 가도록 해요."

아극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주향은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존야, 당신은 아직 사령파황루에 용무가 남아 있나요?"

물론 무린은 더 이상의 용무가 없었다. 아극타와의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난타는 무린에게 무언가 용무가 있는 듯했다.

그녀는 우주향에게 무린 대신 쌀쌀하게 대꾸했다.

"대존야는 본녀의 초정에 따라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잊었나요? 대존야와 본녀 사이에는 잠시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당신은 먼저 돌아가도 좋아요!"

흡사 축객령과도 같았다.

이어서 아난타는 무린의 손을 잡아 살며시 이끌었다.

"무린… 당신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 저를 따로오세요."

달콤한 교성이었다.

무린이 응답했다.

"좋소."

순간 우주향의 눈동자는 흑사 안에서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것은 여인들 특유의 질투의 불꽃이었다.

아난타는 무린을 안내하여 밀실로 들어갔다.

밀실에서 단둘이 되자, 아난타는 푸른 눈동자를 샛별처럼 반짝이며 물었다.

"무린… 당신은 우주향이라는 그 요사스런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린이 대답했다.

"그녀는 초인적인 무공과 지혜를 지녔소.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절세적인 아름다움까지 지닌 것 같소."

아난타의 눈꼬리가 상큼 치켜올라갔다.

"그녀가 절세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고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커먼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겠어요?"

"그건……."

"본녀의 짐작에 의하면 그녀는 보기 흉한 추녀(醜女)가 틀림없어요. 틀림없이 천하삼대추녀(天下三大醜女) 중의 한 명일 거예요!"

천하삼대추녀!

그런 여인들도 있었던가?

그런데 아난타는 우주향의 용모를 가지고 왜 이렇게 열을 올리는가? 남이야 어떻게 생겼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무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의 짐작에 의하면 우주향은 상상 이상의 경세미녀(警世美女)일 거요."

아난타의 음성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몸매만 보아도 놀라운 절대미색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소."

"몸매……?"

아난타는 무린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몸매가 나의 몸매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인가요?"

무린이 빙그레 웃었다.

"아난타, 오해하지 마시오. 우주향이 아무리 놀라운 미녀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난타와 비교를 할 수 있겠소?"

"……!"

순간 아난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의 빛이 스쳐 갔다.

무린이 한 마디 더했다.

"나는 아난타가 천하제일미녀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소."

아난타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구름을 타고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녀는 짐짓 새침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여자의 기분을 맞춰 주는 말솜씨가 대단하군요!"

무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나에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무엇이오?"

아난타의 표정은 즉시 심각하게 변했다.

"무린, 당신은 절대로 우주향과 친해져서는 안 돼요!"

무린이 물었다.

"이유가 무엇이오?"

"그녀는 무서운 요녀(妖女)에요. 당신이 그녀에게 홀린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예요!"

"나는 대무후제국의 초청을 받아 그녀와 일시적으로 동행할 뿐이오."

"그렇다면 약간 안심이에요. 하지만 제 말을 명심하세요. 우주향과 친해져서는 절대로 안 돼요!"

이렇게 되면 남편의 바람기를 단속하는 아내와 흡사하지 않은가?

아난타는 거기에 한 마디 더했다.

"만약 당신이 우주향과 친해진다면 나는 반드시 그녀를 죽이겠어요!"

무린은 약간 아연해졌다.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그것이오?"

"그래요. 이야기가 끝났으니 당신은 이제 가도 좋아요!"

아난타의 결언(決言)은 또렷했다.

무린은 고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문득 무린의 입에서 심유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난타, 우리가 서로 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오."

"……!"

아난타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녀는 무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 적이다!'

일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희미한 고뇌의 빛이 나타났다.

무린이 밖으로 나왔을 때, 우주향과 아극타는 벌써 금탑쾌류선으로 옮겨가고 보이지 않았다.

무린은 즉시 금탑쾌류선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가 갑판에 가볍게 내려서는 순간, 희미한 전음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대존야, 불초 궁천무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소!"

무린은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선실 뒤쪽의 어두운 구석에 하나의 회영(灰影)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바로 궁천무였다.

그는 파도 속을 헤엄쳐 왔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무린은 궁천무 앞으로 다가갔다.

"형공, 무슨 일이오?"

궁천무의 신색은 엄숙했다.

"우리 백상회는 곧 사령파황루를 공격하고자 하오. 대존야의 재가를 바라오!"

무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엄중하게 말했다.

"본인의 사령파황루에 대한 용무는 끝났소. 백상회는 이제 원하는 대로 행사해도 좋소!"

"알겠소이다!"

응답이 끝나는 순간, 궁천무의 신형은 허공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검푸른 파도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수평선 쪽으로 향했다.

"……!"

어느 새 백상회의 장강대선단은 검은 구름처럼 수평선을 뒤덮고 급속히 밀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성채처럼 웅장하게 떠있는 사령파황루를 향해…….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이제 대풍운은 피할 수 없다!'

무린은 선실로 향했다.

선실 안에는 우주향과 아극타가 마주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미주와 가효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무린이 나타나자 아극타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존야, 이번 우리들의 여행을 축하하여 불초가 대존야께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소이다."

그는 백상회의 장강대선단이 구름처럼 밀려오고 있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무린이 자리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본인도 이번 여행이 즐겁기를 바라오."

두 절세기린아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부딪쳐 전류처럼 작렬했다.

그 때 갑자기 우주향이 창에 드리워진 금사휘장을 확 걷어제꼈다.

세 남녀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순간 그들의 안광이 제각기 미묘하게 번쩍였다.

오오, 검은 구름처럼 밀려오는 저 엄청난 대선단을 보라!

호면을 온통 새카맣게 뒤덮고 급속히 밀어닥치고 있는 백상회의 장강대선단의 위용이었다.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거대한 해상극(海上劇)의 막이 오르고 있군요."

그녀의 어조는 놀랄 만큼 무감동했다. 마치 별 흥미도 없는 연극의 막이 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극타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주연(酒宴)을 위한 여흥으로 안성맞춤일 것 같소."

그러고 보니 아극타의 신색도 물처럼 고요했다.

그는 천이백 척의 대선단이 사령파황루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는 엄청난 광경이 하나의 여흥으로 보인단 말인가?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군요."

곧 금탑쾌류선은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라운 쾌속이었다.

금탑쾌류선은 북쪽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갔다.

촤아아아-!

하얀 파도가 비단천처럼 찢어져서 갈라졌다.

이 때 섬처럼 미동도 않고 있던 사령파황루가 그 웅자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령파황루는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는 백상회의 장강대선단 쪽으로 선수(船首)를 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령파황루는 저 엄청난 장강대선단과 정면으로 결전을 치룰 셈이란 말인가?

사령파황루는 벌써 장강대선단의 한복판으로 유유히 다가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거대한 복마전!

그 사해를 압도할 듯한 웅자가 구름처럼 호면을 뒤덮은 장강대선단의 천라지망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극타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번쩍였다.

'백상회… 감히 본좌가 차지한 상감잠룡신검을 탈취하려 하다니… 사령파황루가얼마나 무서운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금탑쾌류선은 전역(戰域)을 벗어나자 질주를 멈췄다.

우주향은 미증유의 대해전(大海戰)을 여유 있게 관망할 모양이었다.

그녀는 금잔에 미주를 가득 따라 무린에게 권하며 물었다.

"대존야, 당신은 저 해전(海戰)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하나요?"

"……!"

무린은 잔을 받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갈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킨 뒤 아극타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귀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하오?"

아극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존야, 사령파황루는 장강대선단을 완전히 궤멸시킬 것이오!"

무서운 예언이었다.

과연 아극타의 예언은 적중할 것인가?

어느덧 사령파황루는 수백 척의 전선(戰船)에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었다.

마치 이중 삼중의 엄중한 천라지망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섬을 방불케 했다.

전운(戰雲)은 긴박하게 해상을 덮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돌연 뇌성 같은 음향이 울렸다.

동시에 사령파황루의 선수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분출했다.

불기둥은 수면 위를 일직선으로 뻗어 한 척의 배에 적중했다.

콰콰쾅-!

고막을 찢는 폭발음이 터지며 배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령파황루는 계속 불기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르르- 쿠르르릉-!

불기둥은 전선 하나하나에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콰콰콰- 콰콰쾅-!

불기둥에 격중된 배들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화염에 휩싸인 채 파도 속으로 잠겨들어 갔다.

오오, 사령파황루의 저 가공할 화약암기(火藥暗器)는 무엇인가?

아극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령파황루의 수뇌벽력폭(水雷霹靂爆)은 커다란 섬(島)이라도 단숨에 콩가루로 만들어 물 속에 장사지낼 수 있다."

<수뇌벽력폭(水雷霹靂爆)>

진정 경천위지할 무시무시한 암기였다.

사령파황루의 수뇌벽력폭은 계속 장강대선단을 파국지세로 격파해 나갔다.

순식간에 장강대선단의 천라지망은 형편없이 와해되어 무서운 혼란 속에 빠졌다.

해상은 화염으로 뒤덮이고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진정 보고도 믿지 못할 무서운 광경이 아닌가?

사령파황루는 정말 장강대선단을 완전히 궤멸시킬 것인가?

그러나 대강(大江) 십만 리를 지배하는 장강대선단은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장강대선단은 황급히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필사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불타는 화전(火箭)이 빗발치듯 난비했다.

화전의 소나기가 사령파황루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쇄도했다.

슈슈슈- 슈슈슈슉-!

허공이 온통 불꽃의 그물로 뒤덮였다.

장강대선단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수한 화폭선(火爆船)이 사령파황루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갔다.

화폭선은 적선(敵船)과 충돌시켜 폭발시키는 무인화약선(無人火藥船)이다. 배로 된 일종의 화약암기였다.

화폭선이 연이어 사령파황루와 격돌하며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콰콰콰- 콰콰쾅-!

시뻘건 화염이 충천하며 산더미 같은 파도가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촤아아아-!

그러나 사령파황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맹렬히 격돌하는 화폭선도 거대한 절벽에 부딪친 파도처럼 무력하게 부서져 나갈 뿐이었다.

나아가서 사령파황루는 가공할 파선전법(破船戰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웅자가 무서운 쾌속으로 돌진하여 장강대선단의 전선들을 닥치는대로 격침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무자비한 좌충우돌이었다. 사령파황루에 부딪친 배들은 장난감처럼 깨어져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콰아아아- 쿠르르릉-!

해일 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사령파황루는 장강대선단을 계속 무참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아아, 동정호 미증유의 대참극이여!

해상은 난파된 뱃조각으로 뒤덮였고, 무수한 고수들이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무서운 해상지옥도라고나 할까?

사령파황루는 과연 천하무적선이었다.

아극타가 만족한 빛으로 입을 열었다.

"장강대선단이 스스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모든 전선이 한 척도 남김없이 부서져 파도 속에 사라질 것이오."

우주향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극타, 장담하기는 좀 일러요. 장강대선단이 최후의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어요."

"……."

무린은 묵묵히 전황(戰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무심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때 전황이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백상회의 고수들이 배에서 일제히 몸을 솟구쳐 사령파황루로 덮쳐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사적인 최후의 공세였다.

절정신법을 지닌 일류 고수들이 거대한 독수리 떼처럼 사령파황루로 덮쳐 갔다.

물론 사령파황루에 오르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리는 고수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백상회의 마지막 공세는 맹렬히 계속되었다.

무수한 전선들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흩어지는 가운데 마침내 사령파황루의 갑판에서는 쌍방간에 치열한 혼전이 벌어졌다.

도검과 강기가 광란하며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으악!"

"크윽!"

화르르르-!

사령파황루의 호화롭게 늘어선 선실에서도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화염이 하늘을 태울 듯 솟구쳤다.

우주향이 아극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당신은 호언(豪言)을 할 수 있나요?"

"……."

아극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눈매는 가느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이 때 놀랍게도 사령파황루가 서서히 물 속으로 잠겨들기 시작했다.

장강대선단의 집요한 공세로 선체에 구멍이라도 뚫렸는가?

분명 사령파황루는 밀물에 잠기는 섬처럼 파도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복마전이 장엄한 최후를 마치는가?

잠시 후, 사령파황루는 물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아서 그 웅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물결 위에는 난파된 뱃조각만이 떠돌고, 파도에 휩쓸린 고수들의 아우성이 어지럽게 들려올 뿐이었다.

아아, 천하무적인 사령파황루의 최후는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아극타, 사령파황루는 결국 본녀를 실망시키고 마는군요!"

"……."

아극타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그의 신색은 의외로 태연했다. 가볍게 검미가 찌푸러져 있을 뿐이었다.

문득 무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령파황루가 잠수(潛水)까지 할 수 있는 배인 줄은 미처 몰랐소."

잠수라니?

그렇다면 사령파황루는 가라앉은 게 아니고 스르로 물 속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돌연 아극타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대존야의 안목은 매우 날카롭구려. 사실 사령파황루는 물 속에 잠수하여 하루 이상을 머물 수 있소."

경악! 진정 사령파황루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극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천축국은 일찍이 이국(異國)의 조선술(造船術)을 배워 중원보다 훨씬 훌륭한 배를 만들 수가 있소이다. 사령파황루는 천축국의 일류장인(一流匠人) 삼천 명이 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 낸 최대의 걸작이오."

우주향이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사령파황루가 장강대선단의 맹렬한 공세를 견디지 못해 물 속으로 도망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요."

"장강대선단이 사령파황루에 의해 반 이상이나 궤멸된 사실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오!"

두 남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사령파황루는 최후의 대결을 피해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백상회의 장강대선단이 치룬 희생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무린은 내심 무섭게 중얼거렸다.

'결국 싸움은 끝난 것이다.'

이제 금탑쾌류선은 북쪽을 향해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촤아아아아-!

하얀 파도가 쫙 갈라지며 금탑쾌류선은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 나갔다.

이 때 앞쪽 수평선에 배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급속이 다가오고 있는 무수한 전선(戰船)들이었다.

그 전선들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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