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賭博)을 한 번 할까요?
금탑쾌류선은 속도를 줄였다.
우주향이 음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강대선단의 후익진(後翼陣)이에요!"
앞에 나타난 배들 역시 장강대선단이었다. 적의 배후를 차단하는 후익진이었던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안배된 천라지망의 뒷날개였다.
거대한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전선들은 금탑쾌류선을 향해 쾌속으로 접근해 왔다.
어느 새 사령파황루에 의해 무참하게 파해된 장강대선단의 나머지 본진(本陣)도 전열을 가다금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금탑쾌류선이 장강대선단에 의해 포위된 셈이었다.
우주향이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존야, 장강대선단은 사령파황루를 놓치고는 감히 우리 금탑쾌류선을 공격할 모양이군요!"
무린은 머리를 저었다.
"그들은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배를 나포하려는 것 같소."
백상회는 대존야 무린이 타고 있는 금탑쾌류선을 경솔히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배를 나포하여 아극타의 인도를 요구할 게 분명했다.
우주향이 차갑게 말했다.
"대무후제국과 백상회는 앞으로 공존할 수 없는 적이 될 거예요. 본녀는 미래의 적을 미리 제거해 버리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멀리 수평선 쪽에 괴이한 흑선(黑船)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흑선들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날쌘 괴어(怪魚)처럼 생긴 철추선(鐵鎚船)이었다.
삼백여 척의 철추선, 그들은 순식간에 장강대선단의 배후로 엄습해 왔다.
콰르르- 콰콰콰쾅-!
철추선들은 장강대선단의 전선을 닥치는 대로 충돌시켜 격파하기 시작했다.
마치 양 떼를 습격하는 사나운 늑대같다고나 할까?
장강대선단의 전선들은 미처 대항할 틈도 없었다. 철추선의 번개 같은 습격을 받은 배는 즉시 산산조각으로 깨어져서 흩어졌다.
해상에는 다시 무서운 혼전이 벌어졌다.
무린의 검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대무후제국의 비밀선단이다!'
그 철추선들은 바로 우주향이 비밀리에 매복시켜 놓았던 제국선단이었다.
아극타도 제국선단의 무서운 위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제 장강대선단은 금탑쾌류선을 가로막을 여유도 없었다.
콰아아아-!
금탑쾌류선은 검푸른 파도를 가르며 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탑쾌류선은 전역(戰域)을 멀리 벗어났다.
가공할 제국선단은 계속 장강대선단을 무차별 격침시키고 있는 광경이 아득하게 보였다.
금탑쾌류선은 화살처럼 빠르게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어느덧 금탑쾌류선은 동정호의 북쪽 호변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무린과 우주향과 아극타.
세 남녀는 선실에 앉아 아름다운 호변의 경관을 감상하고 있었다.
호변에는 높다란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고 그 아래에는 검푸른 소용돌이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장려한 일대절경(一大絶境)이었다.
금탑쾌류선은 절벽 사이를 지나 한쪽 협곡으로 들어섰다.협곡의 물결은 유난히 급하고 사나왔다.
콰르르르- 콰르르르릉-!
어디선지 웅장한 폭포의 굉음이 울려 왔다.
문득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배는 절금만장폭(絶禁萬丈瀑)으로 가고 있어요."
무린과 아극타는 흠칫 놀랐다.
절금만장폭!
동정호의 절대금역(絶代禁域)이었다.
그것은 배는 물론 사람이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거대한 폭포이기 때문이다.
절금만장폭에 한 번 휩쓸리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뼈마디 하나 찾을 수 없이 엄청난 급류 속에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웬만한 배나 사람은 절대로 십 리 안에는 접근하지 않는다. 그런데 금탑쾌류선이 그 절금만장폭을 향해 가고 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무린이 물었다.
"우주향, 배가 절금만장폭 속으로 들어간단 말이오?"
우주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건 무엇 때문이오?"
"대무후제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절금만장폭을 통과해야 돼요."
"……."
우주향이 교성으로 물었다.
"무린, 당신은 두려운가요?"
"두렵지는 않소. 다만 이 아름다운 배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질까 염려될 뿐이오."
사실 절금만장폭 속으로 들어가는 배가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는가?
우주향은 머리를 저었다.
"금탑쾌류선은 절대로 부서지지 않아요. 배가 급류 속에 들어갈 때 충격을 받는 것은 배의 속도가 급류의 속도보다 느리기 때문이에요. 배의 속도가 더 빠르면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아요."
정말 그럴까?
무린이 다시 물었다.
"만약 배가 부서진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소?"
우주향은 달콤한 교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헤엄을 치지 못하니 당신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지요."
"나는 매달리는 여자는 딱 질색이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끌어들이겠어요!"
"어디로?"
"지옥으로!"
아극타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지옥이든 천당이든 우리는 어차피 동행할 운명인 것 같소."
지금 배는 공포의 절금만장폭으로 급속히 다가가고 있는데, 세 남녀는 태연히 한담을 해도 되는 것일까?
물결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지축이 무너지는 듯한 폭포의 굉음이 점점 가까이 들렸다.마침내 앞에 분수처럼 솟구치는 물보라가 보였다.
몽롱한 포말이 안개처럼 지욱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절금만장폭!
한 번 휩쓸리면 천하의 누구라도 뼈마디 하나 추릴 수 없다는 그 절대금역이었다.
만장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 금탑쾌류선은 무서운 속도로 그 폭포를 향해 돌진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크게 소리쳤으리라.
- 아름다운 호화선 한 척이 절금만장폭으로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
일순간 금탑쾌류선은 엄청난 물보라 속으로 작은 종이배처럼 휩쓸려 들었다.
콰아아아아-!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포말은 순식간에 선체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말 지옥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끝없는 나락 속으로 함몰되는 듯 무서운 순간, 보이는 것은 몽롱한 포말 뿐 벽력 같은 폭포의 굉음조차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찰싹 몸을 밀착시킨 우주향의 교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무린, 제법 기분이 괜찮지요?"
무린이 대꾸할 사이도 없이 금탑쾌류선은 엄청난 폭포의 물줄기 속으로 완전히 함몰되고 말았다.
콰르르르르-!
시야를 완전히 가렸던 포말이 사라졌을 때, 무린은 금탑쾌류선이 절금만장폭을 무사히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놀라운 일이다!'
금탑쾌류선은 만 장 높이의 폭포를 거짓말처럼 통과한 것이다.
이제 물결의 속도는 매우 완만했고, 배는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무린은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밖에는 장엄하고 수려한 신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울울창창한 고목의 원시림(原始林), 까마득하게 하늘을 가린 암벽, 그 사이의 계곡으로 푸르고 맑은 물줄기가 그림처럼 흐르고 있었다.
대자연의 정기(精氣)가 충만한 듯한 신비계곡이었다.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이 벽금비로(碧錦秘路)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절금만장폭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만인불가침(萬人不可侵)의 비밀수로(秘密水路)이기 때문이에요."
벽금비로!
푸른 비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한히 신비로운 비역(秘域)이었다.
물줄기는 결국 장강의 하류(下流)에 합류되나 속계(俗界)와는 완전히 차단된 별계(別界)였다.
우주향이 말을 이었다.
"이 벽금비로를 따라 내려가면 열흘 후에는 대무후제국에 도착하게 돼요. 그 동안에는 저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껏 감상하기만 하면 돼요."
무린과 아극타는 계곡의 장려한 경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피비린내나는 무림과는 너무나도 다른 별계(別界)가 아닌가?
지극한 순수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원초의 세계라 할 수 있었다.
그림 같은 숲 속에서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요란하고 무성한 수풀 사이에는 제멋대로 뛰어노는 야생의 금수들이 보였다.
이곳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영원히 바깥 세계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무린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
멀리 뒤쪽에서 유유히 다가오고 있는 한 척의 배를 발견한 것이다.
하얀 돛을 단 깨끗한 범선(帆船)이었다.
이상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저 범선도 절금만장폭을 지나왔단 말인가?'
우주향도 배를 발견했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금탑쾌류선 외에 벽금비로에 들어올 수 있는 또 다른 배가 있을 줄은 몰랐군."
범선은 금탑쾌류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더 이상 접근하지는 않았다. 어딘지 금탑쾌류선을 뒤따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주향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분명히 미행을 하고 있군."
그러나 범선은 점점 속도를 줄여서 거리를 넓히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범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시 석양이 왔다.
금탑쾌류선은 계속 벽금비로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유유히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무린과 우주향과 아극타는 갑판에 나란히 앉아서 어둠에 잠겨 가는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화려한 미주가효가 차려져 있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하고, 서늘해진 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고독과 감상이 찾아들 만한 시간이었다.
문득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이 도박을 한 번 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눈동자는 흑사 안에서 미묘하게 번쩍였다.
아극타가 먼저 호기심을 보였다.
"어떤 도박을 하자는 말씀이오?"
우주향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서로의 영혼이나 몸, 또는 천하를 걸어도 좋아요."
어쩐지 시작부터가 으시시하다. 영혼이나 몸, 또는 천하를 건 도박이라니…….
우주향은 얼마나 엄청난 대도박을 벌일 셈인가?
아극타가 다시 물었다.
"도박의 방법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번쩍였다.
우주향이 대답했다.
"그 또한 아무래도 좋아요. 서로의 무공이나 암기, 그 외에 어떠한 살인수법도 좋아요."
아극타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살인수법……."
얘기가 이렇게 된다면 결코 단순한 도박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생명을 바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린은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우주향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낼 모양이로군.'
분명 우주향은 심심풀이 여흥으로 도박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칼날처럼 준엄한 운명의 도박패를 슬쩍 던져 보려는 것이었다.
아극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어떠한 도박이라도 할 용의가 있소."
과연 천하를 주름잡는 영웅의 호기가 보이는 태도였다.
우주향은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무린도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어떠한 도박이라도 할 용의가 있소."
이야기는 끝났다. 세 남녀는 결과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도박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우주향이 교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본녀가 도박의 방법을 정하겠어요."
그녀의 달콤한 음성 속에는 이상한 요기(妖氣)가 깃들어 있었다.
우주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그녀는 주효 앞에 놓여 있는 세 개의 금잔(金盞)을 가리켰다.
"이 금잔들을 혈잔(血盞)으로 만드는 문제가 어떨까요?"
금잔을 혈잔으로 만들다니 이건 무슨 말인가?
우주향의 말이 이어졌다.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금잔에 피를 채우면 곧 혈잔이 되니까요!"
무린과 아극타의 미간은 가볍게 좁혀졌다.
'금잔에 피를 채워서 혈잔으로 만든다……!'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시간은 반시진… 반시진 이내에 이 자리에서 금잔을 혈잔으로 만들지 못하면 도박에 패하는 거예요."
무린과 아극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데 우주향의 음성은 또렷했다.
"도박에 패한 사람은 이긴 사람의 요구 한 가지를 들어 주기로 해요. 그것이 어떠한 요구일지라도 블웅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무서운 도박이 아닌가? 어떠한 요구라도 들어 주어야 된다면, 심장을 꺼내 달라고 해도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아극타가 입을 열었다.
"좋소! 나는 그 도박이 마음에 들었소!"
그는 도대체 어떤 피로 금잔을 채울 생각인가?
우주향의 시선이 무린에게로 향했다.
"당신의 의향은 어때요?"
무린의 대답은 담담했다.
"나는 어떠한 도박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소."
우주향은 요염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면 이야기는 끝났군요. 우리들의 도박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그녀는 분명 득의하고 있었다. 도박의 승리를 확신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녀로서는 금잔 하나를 피로 채우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기 만큼이나 쉽다.
금탑쾌류선에서 그녀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시녀만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시녀를 한 명 희생시키면 일은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린과 아극타는 어디서 금잔을 가득 채울 만한 피를 구할 것인가?
기이한 도박은 이미 시작되었고, 배는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데, 세 남녀는 아직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세 남녀의 금잔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렇다고 초조해 하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계곡의 야경(夜景)을 여유 있게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도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때 날쌘 야행조(夜行鳥) 한 마리가 갑판 위를 번쩍 날아갔다.
순간 아극타의 오른손이 전광처럼 허공으로 뻗었다.
끼이약-!
애절한 울음소리를 토하며 야행조는 아극타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경이할 흡인공이었다.
피잉-!
아극타의 일지(一指)가 튕겨지며 야행조의 머리는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극타는 빙그레 웃으며 야행조의 잘려진 목줄기에서 솟아나는 피를 금잔에 받았다.
곧 금잔은 혈잔으로 변해 버렸다.
아극타는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우주향이 문제를 낼 때, 꼭 사람의 피라야 된다고는 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
무린과 우주향은 혈잔을 묵묵히 응시할 뿐 아무 말이 없다.
운좋게 또 다른 야행조가 갑판 위를 스쳐 간다는 보장도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돌연 우주향이 수면을 향해 옥수(玉手)를 뻗었다.
치리리릿-!
한 줄기 벽섬(碧閃)이 폭사하는 순간, 커다란 은어(銀魚) 한 마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우주향의 손길이 또 한 번 번개처럼 펼쳐지자 은어는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와 우주향의 금잔 위에 가볍게 떨어졌다.
금잔 위에 떨어진 은어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벌써 은어의 배에는 구멍이 뚫려 피가 금잔 안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절묘한 기공(奇功)이 아닌가!
우주향도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말았다. 바람을 쏘이러 수면으로 올라오던 은어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아극타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향, 귀하의 신기(神技)는 불초가 도저히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우주향은 말없이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무린, 당신은 분명 도박에 패할 것이에요. 왜냐하면 본녀는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는 걸 방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아아, 우주향이 도박에서 노리는 것은 바로 무린의 패배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린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암중으로 방해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무린이 패배하게 되면 약속에 따라 한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우주향의 이런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린은 어두운 야공(夜空)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야행조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혹시 도박에 대해서 잊어버린 건 아닐까?
시간은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배는 어느덧 좁은 협곡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듯 웅장하게 늘어선 암벽이 그림처럼 스쳐 갔다.
칼날처럼 솟은 단애였다.
문득 무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혈산홍(血山紅)이로군."
휘리리릭-!
순간 무린의 소맷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그러자 높다란 암벽 위에 흐드러지게 만발한 야생화(夜生花) 한 가지가 뚝 꺾어져 무린의 수중으로 날아왔다.
무서운 섭물공(攝物功)이었다.
최소한 삼사십 장 거리에 있는 꽃가지를 꺾을 수 있는 이러한 섭물공은 일반무림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리라.
야생화는 타오르는 듯 붉은 혈산홍이었다.
혈산홍은 꽃은 물론 잎과 줄기까지도 피처럼 붉은 야생화다.
무린은 혈산홍 가지를 금잔 안으로 기울였다.
다음 순간, 혈산홍은 마치 얼음처럼 녹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핏빛 액체가 금잔 안에 뚝뚝 떨어졌다. 당연히 금잔은 혈잔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혈산홍은 지금 무린의 신비로운 열양공(熱陽功)에 의해 핏물처럼 용해되고 있는 것이다.
돌연 아극타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과연 대존야의 풍도(風度)는 천하제일이오! 우리는 비린내나는 짐승의 피로 잔을 채웠을 뿐인데, 대존야는 향기로운 꽃의 피로 잔을 채우니 말이오!"
이렇게 되고 보니 입맛이 씁쓸해진 사람은 우주향이었다.
무린이 야행조나 물고기를 잡으려 했다면 그녀는 암중으로 교묘히 방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꽃가지를 꺾어서 화혈(花血)을 만들어 낼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주향은 가벼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붉은 꽃물이 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 금잔이 혈잔으로 변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녀의 음성은 약간 음유해졌다.
"하지만 당신은 문제를 늦게 해결했으니 한 가지 벌을 받아야 돼요!"
무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대는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 셈이오?"
"나는 당신에게 벌로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겠어요!"
"그런 벌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소."
"좋아요!"
우주향은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러자 시녀가 금쟁반에 은잔 하나를 받쳐 들고 나타났다.
은잔에는 호박색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코 끝을 향긋하게 간지럽히는 미주였다.
무린은 선뜻 은잔을 잡았다.
"도박을 한 보람이 있군."
그는 은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아극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벌이라면 나도 받고 싶소."
우주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그녀는 시녀에게 또 한 잔의 호박색 술을 가져오게 했다.
아극타도 은잔을 쭉 들이켰다.
"정말 진귀한 미주로군!"
그런데 그들은 무슨 술인지 알고나 마시는가?
우주향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술은 천향환락주(天香歡樂酒)에요. 사람에게 무한한 환락을 가져다 주는 천산의 미주지요."
일순 무린과 아극타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천향환락주(天香歡樂酒)>
일종의 강력한 미혼주(迷魂酒)였다.
이 술을 마시게 되면 누구나 일신의 욕념(欲念)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게 된다.
남녀의 음양교합을 통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극렬한 욕정. 만약 교합을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전신 혈맥이 파열되어 생명을 잃는다.
그야말로 환락을 부르는 독주(毒酒)라고나 할까?
우주향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 배 안에는 많은 미녀들이 타고 있어요. 본녀는 당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어떠한 상대라도 제공해 주겠어요!"
저절로 피가 뜨거워지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가 무린에게 천환향락주를 마시게 한 저의가 무엇인가?
무린과 아극타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숨결도 차츰 급해지고 있었다. 벌써 강렬한 욕념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주향의 야릇하게 번쩍이는 시선이 무린의 얼굴에 똑바로 꽂혔다.
"무린, 어떤 상대를 원하는지 말해 보세요. 당신은 이 배 안에 있는 어떠한 여자라도 선택할 수 있어요."
뇌쇄적인 마력을 풍기는 은요로운 음성이다.
그런데 그 말이 무한한 여운을 풍기지 않는가?
- 어떠한 여자라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즉 우주향 그녀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
무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무린, 어서 선택하세요. 당신이 원하는 어떤 여인이라도 좋아요."
녹아날 듯 감미로운 속삭임. 아아, 그것은 차라리 무서운 유혹이었다.
지금 우주향은 무린에게 뇌쇄적인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린은 느릿느릿 머리를 젓고 있었다.
"우주향, 지금 나는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소."
순간 우주향의 눈동자에는 한 가닥 실망의 빛이 스치더니 이내 음성이 싸늘해졌다.
"그렇다면 좋아요. 후화하지 않기를 바래요!"
이 때 아극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를 선택하겠소!"
우주향이 시선을 돌렸다.
"어떤 여자인지 말해 보세요!"
아극타의 눈빛이 횃불처럼 이글거리며 또렷한 한 마디가 떨어졌다.
"바로 그대요!"
우주향은 흠칫했다.
"본녀를......."
아극타의 타오르는 눈동자는 우주향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그대는 분명히 말했소. 어떠한 여인을 선택해도 좋다고……."
"……"
우주향의 교구가 약간 주춤했다.
잠시 기이한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이윽고 우주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본녀를 따라 오세요."
그녀는 무린을 야릇한 시선으로 한 번 쏘아본 뒤 발길을 휙 돌렸다.
그녀는 침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극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우주향이 아극타의 손을 잡으며 달콤한 교성으로 속삭였다.
"아극타, 당신은 행운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군요."
아극타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하하… 남자가 미녀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는 법이오!"
두 남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란히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갑판에는 무린 혼자 남게 되었다. 무린은 시선을 들어 야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붉어진 얼굴을 밤바람이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일신에서는 여전히 욕념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천향환락주는 그만큼 강력한 미약의 성분을 지닌 술이었다.
그는 그 불길을 어떻게 잠재울 셈인가?
무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금탑쾌류선은 여전히 물결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