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情事)와 사랑은 별개 문제
무린은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그 자리에 좌정을 했다.그리고는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심법(心法)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천지무궁심법(天地無窮心法)…….'
천지무궁심법은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조광화원의 세문비공(世門秘功)이었다.
무린의 전신에서 신비로운 서기가 은은히 뻗쳐 오르기 시작했다.
붉어졌던 얼굴은 본래의 냉철한 신색으로 돌아가고 호흡은 물처럼 고요해졌다.
우주향과 아극타는 나란히 침실로 들어섰다.
배에 마련된 침실이었지만 황후(皇后)의 침전(寢殿)만큼이나 우아하고 화려했다.
호화로운 금침이 깔린 침상, 실내에 향긋하게 떠돌고 있는 난사향, 황금촛대는 은은한 홍광(紅光)을 끈끈한 유혹처럼 뿌려 내고 있다.
침상 앞에 이른 아극타는 갑자기 우주향의 가냘픈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오늘 밤의 행운이 꿈만 같소!"
우주향의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이 그의 억센 포옹 속에 실버들처럼 휘어졌다.
아극타는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우주향… 밤이 새도록 무궁한 환락을 함께 누리도록 합시다!"
그는 우주향의 교구를 침상 위로 이끌었다.
이 때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아극타, 잠깐만 기다리세요. 본녀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기이한 느낌이 들도록 무감동하고 쌀쌀한 어조였다.
도저히 육체의 환락을 나누기 위하여 남자에게 몸을 맡기려는 여인의 음성이 아니다.
그러나 아극타는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욕념으로 그런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옷 같은 건 아무래도 좋소! 불초가 그대의 옷을 모두 벗겨 줄 테니……."
그의 손길은 성급하게 우주향의 옷자락을 헤치려 했다.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으나 어딘지 오싹한 한기(寒氣)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다.
"……!"
아극타가 비로소 깨닫고 주춤할 때, 우주향의 몸은 벌써 그의 품에서 거짓말처럼 빠져 나가 있었다.
욕념으로 정신이 어지러워진 아극타는 그녀를 미처 제지하지 못한다.
우주향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아극타는 이제 불길처럼 타오르는 정욕으로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말 옷을 갈아입고 돌아올 것인가?
일말의 의혹이 아극타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러나 잠시 후 우주향은 정말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은 여전히 흑사로 가리고 있으나 일신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침의(寢衣)를 걸치고 있다. 백설처럼 흰 속살이 훤히 비쳐 보이는 침의였다.
그 뇌쇄적인 자태를 어떻게 표현하랴!
봉긋한 젖무덤에는 조그마한 분홍색 돌기가 아른아른 비쳐 보이고, 잘록한 세류요 아래 두 다리가 옥주처럼 뻗어 있다.
아극타의 피가 확 끓어올랐다.
"우주향……!"
우주향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황금촛대의 불을 훅 꺼버렸다.
즉시 칠흑 같은 어둠이 실내를 덮어 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우주향은 아극타의 품속에 스르르 안겨 들었다.
두 남녀는 힘차게 포옹한 채 금침 위에 쓰러졌다.
아아, 이제 그들의 환락을 방해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무린은 이제 천지무궁심법 운행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은은한 서기 속에 그의 신형은 놀랍게도 허공 한 자 높이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장엄한 무지개빛 채환(彩環)이 어려 있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이 꿈 속의 환영(幻影)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이 때 하나의 흑영이 무린의 뒤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아, 놀랍게도 흑영은 바로 우주향이 아닌가!
지금 아극타와 함께 뜨거운 환락에 빠져 있을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우주향은 운공삼매(運功三昧)에 빠져 있는 무린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
그녀의 눈빛은 기이하게 변해 갔다.
'저 사람의 공력 조예는 분명 나의 아래가 아니다! 저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더 놀라게 하고 나를 흔들리게 한다.'
자신이 흔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저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다면 차라리…….'
돌연 우주향의 눈동자에 음산한 살기가 나타났다.
'차라리 일찍 처치해 버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우주향은 무린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섰다.
만약 그녀가 지금 무린을 처치하려 한다면 그것은 손바닥을 뒤집기만큼이나 쉽다.
우주향의 우수(右手)가 서서히 치켜올라갔다.
그 우수가 한 번 내리쳐지면 무린의 머리는 두부처럼 부서지고 만다.
우주향의 우수는 무린의 천령혈을 향해 서서히 뻗어갔다.
생사관두! 무린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우주향의 손은 무린의 천령혈 한 자 앞에서 딱 멈추어 선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미묘한 갈등이 스쳐 가고 있었다.
"……!"
허공에 번쩍 치켜올린 옥수는 투명하게 빛나는데 우주향은 선뜻 내려치지 못한다.
결국 우주향은 가벼운 한숨을 토하며 손을 내리고 만다.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녀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뒤로 물러섰다.
비정한 살수 행사는 후일로 연기되었는가?
이 때 무린의 신형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으며 전신에 어려 있던 서기와 채환이 흐릿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심공운행을 마치고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신색은 눈이 부시도록 청신하고 고요했다.
천지무궁심법에 의해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욕화(慾火)가 말끔히 제거된 것이다.
천지무궁심법!
실로 불가사의한 공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주향, 그대가 나의 운공에 호법(護法)을 서준데 대해 감사하고 싶소."
무린은 이미 우주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뒤에서 우주향이 살수를 펼치려한 사실도 알고 있었는가?
무린은 우주향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감사를 하면 좋겠소?"
"……!"
일순 우주향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우주향, 그대는 인내력이 강한 여자요. 그 인내력이 아니었다면 우리 사이는 이미 파탄되었을 거요."
역시 무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우주향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것이 단순한 인내력이라고 생각하나요?"
의외로 조용한 어조였다.
"인내력이 아니라면……?"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우주향은 몸을 돌려 갑판 저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싸늘한 밤바람이 그녀의 흑사자락을 펄럭이며 스쳐 갔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흘러내린 머리결을 쓸어 올렸다.
문득 무린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고독의 그림자를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천하를 움켜쥐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여걸(女傑)도 고독을 느낄 때가 있는가?
무린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주향,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우주향이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부탁이죠?"
"오늘 밤 나를 그대의 침실에서 재워 줄 수 있겠소?"
굉장히 뻔뻔스런 부탁이 아닐까?
일순 우주향의 교구가 주춤했다. 그런데 그녀의 응답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좋아요. 본녀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선실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린은 심유하게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무린과 우주향은 나란히 침실로 들어섰다.
깨끗하고 아늑한 침실이었다. 호화롭지 않으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향내도 떠돌지 않았고, 황금촛대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다만 침상 위의 눈처럼 흰 금침이 무한히 청결하게 느껴졌다.
우주향이 말했다.
"여기가 본녀의 침실이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오늘 밤 여기서 자도 좋아요."
그렇다면 그녀가 조금 전에 아극타와 함께 들어간 그 화려한 침실은 누구의 방인가?
그곳은 시녀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하얀 침의로 갈아입고 들어온 여인은 이름 없는 한 시녀였던 것이다.
욕념에 눈이 어두워진 아극타는 미처 그러한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그녀와 환락의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게 아닌가?
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의 침실이 이토록 소박할 줄은 몰랐소."
"실망했나요?"
"아니오. 마음에 꼭 들었소."
"그러면 편히 쉬세요."
우주향은 몸을 들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순간 무린이 그녀의 옥수를 덥석 잡았다.
"우주향, 이 침상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자도 좋을 만큼 충분히 넓지 않소?"
우주향의 대꾸는 쌀쌀했다.
"그렇지만 본녀는 당신과 함께 자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무린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함께 자고 싶소."
"당신이 감히 본녀에게 그런 요구를 할 만큼 대담하다고는 믿지 않아요!"
"나는 오늘 밤 특별히 대담해지기로 했소."
"본녀에게 함께 자도록 강요를 하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무린의 대답은 명쾌하게 떨어졌다.
우주향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겠어요!"
말이 끝나는 순간 무린의 손에 잡혀 있던 그녀의 옥수가 미끄러지듯 빠져서 번개처럼 찔러 왔다.
기쾌독랄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무린의 미심(眉心)을 향해 한 줄기 경기(經氣)가 뇌류(雷流)처럼 쇄도했다.
치리릿-!
찰나 무린은 전광처럼 몸을 틀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침실의 암투란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닌데……."
그러나 웃고 있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치리리리릿-!
우주향의 무서운 살수가 숨돌릴 틈도 없이 뻗어 왔다. 웬만한 고수였다면 벌써 사혈이 찍혀 거꾸러졌으리라.
우주향은 정말 살의(殺意)가 솟구쳤는가?
그런데 이 순간 무린이 우주향에게 번쩍 다가서며 한 손을 뻗었다.
"싸움은 좀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하는 게 좋겠소!"
찰나간에 그의 한 팔이 우주향의 허리를 번개처럼 휘감아 버렸다.
다음 순간 두 남녀는 서로 뒤엉킨 채 침상 위에 털썩 쓰러졌다.
"으흠……."
우주향이 가벼운 신음을 토해 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흑사는 위로 휙 제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 순간 우주향과 무린의 암투는 동시에 끊어지듯 정지되었다.
우주향의 진면목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무린은 바로 눈 아래 나타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아, 그 눈부신 절염극미(絶艶極美)를 어떻게 표현하랴?
일순간에 사람의 뇌혼(惱魂)을 앗아가 버릴 그 처염한 얼굴이여!
그의 시선은 우주향의 눈동자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두 남녀의 시선은 서로 부딪쳐 뜨거운 얼음처럼 용해되고 있었다.
"……!"
"……!"
호흡조차 멈춰진 듯한 시간이 잠시 흘렀다.
문득 우주향의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살며시 열려졌다.
"무린… 당신은 내 얼굴을 보고 실망했나요?"
평소의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처럼 나직하게 흘러 나온 음성이었다.
무린이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가 천하삼대추녀 중의 한 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소."
우주향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래서 당신은 그 말을 확인했나요?"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최소한 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인했소. 그대는 아무래도 천하삼대미녀 중의 한 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소."
우주향의 그린 듯한 선명한 수미(秀眉)가 살짝 찌푸러졌다.
"본녀는 결코 천하삼대미녀 중의 한 명은 아니에요."
무슨 뜻인가?
무린이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그대는 분명 천하제일미녀라고 해야 할 것이오."
"그 말도 맞지 않아요."
"그렇다면……?"
"천하제일미녀는 바로 대무후제국의 여왕전하에요."
"여왕?"
"무린, 내 머리가 짧아서 보기 흉하지 않은가요?"
사실 흑사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머리결은 약간 짧았다. 그러나 그 칠흑처럼 검고 윤택한 머리결은 충분히 아름답고 풍성했다.
무린이 머리를 저었다.
"약간 짧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특이하고 매혹적으로 보이오."
우주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 기분을 맞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그녀의 백사 같은 팔이 스르르 뻗어 무린의 목을 안았다.
우주향은 향긋한 숨결을 토해 내며 물었다.
"무린… 당신은 본녀를 원하나요?"
무린은 그녀의 교구를 힘차게 포옹했다.
"물론 원하오."
"그렇다면 가져도 좋아요. 그러나 당신은 한 가지를 명심해야 돼요."
"한 가지라면……?"
"오늘 밤의 일은 오늘 밤으로써 끝난다는 거예요."
"……."
"다시 말하면 당신이 본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밤뿐이에요!"
"음……."
그것은 무림의 여인만이 할 수 있는 대담한 말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것은 우주향만이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무린은 대꾸하지 않고 한 손으로 가만히 우주향의 턱을 잡았다.
희고 아름다운 턱이 살며시 치켜올라가며 우주향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무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두 남녀의 입술은 비스듬히 교차되어 겹쳐졌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 그 감미로운 감촉의 스침!
돌연 무린은 강렬한 욕망의 충동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을 갈증난 듯 탐하기 시작했다.
우주향은 달콤한 신음을 토해 내며 온몸을 밀착시켜 왔다.
"으으음……."
두 남녀는 꽃뱀처럼 서로 휘감기었고 입맞춤은 뜨겁게 계속되었다.
황홀한 몰아의 순간. 그것은 생명의 원초적인 열락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욕망의 숨결이 점점 가빠지며 두 남녀의 옷자락은 하나씩 하나씩 벗겨져 침상 아래로 흘러내렸다.
우주향의 빙옥 같은 나신이 드러났을 때, 무린은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여인의 향긋하고도 비릿한 살내음을 맡으며 문득 아득하게 잃어버렸던 어머니의 체취를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의 용솟음치는 본능은 그 기억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탐욕스럽게 여인의 가슴을 입술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우주향의 몸도 불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녀는 거칠은 호흡을 토해 내며 무린의 목을 끌어당겼다.
"무린… 나를 모두… 가져도 좋아요. 나는 아직 남자를 모르지만… 당신 마음대로……."
침실에는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고, 두 남녀는 무한한 열락의 늪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침실에 휘몰아치던 열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환희와 격정의 신음소리도 잦아들었다.
폭풍과 같은 열락의 순간은 지나갔다.
우주향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서늘한 속눈썹에는 관능과 쾌락의 절정에서 흘러 나온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그녀의 봉긋한 육봉은 분홍빛으로 물든 채 아직도 물결처럼 잔잔히 파동치고 있었다.
무린은 그녀의 아미에 맺힌 진주 같은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향(香)……."
무림의 부드러운 음성에 우주향은 눈을 스르르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물 속에 잠긴 흑진주처럼 젖어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무린… 나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때로는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던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지극히 조용하고 감미로운 음성이다.
무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주향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돌연한 한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당신은 오해해서는 안 돼요. 그 말은 본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녀의 다음 말은 놀랄 만큼 싸늘했다.
"당신은 분명히 명심해야 돼요. 오늘 밤의 일은 오늘 밤으로서 끝난다는 사실을!"
무린은 그녀의 땀에 젖은 머리결을 쓸어 주며 담담히 말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오늘 밤의 일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겠소. 그러나 오늘 밤 그대와 함께 보낸 순간은 그 망각의 저편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오."
사실 무린도 여체를 속속들이 경험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니 어떻게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으랴!
"……!"
우주향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렸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대 또한 한 가지 명심해 둘 것이 있소. 그것은 나 또한 아직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우주향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은채(銀彩)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는 당신 말을 명심하겠어요."
나직하면서도 싸늘한 음성이다.
무린은 그녀에게 금침을 다정하게 덮어 준 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향… 편히 쉬시오."
그는 옷을 입고 천천히 침실을 나왔다.
그의 뒷모습이 밖으로 사라질 때, 우주향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망연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갑판.
밤바람은 좀더 서늘해지고 금탑쾌류선은 계속 물결을 따라 흘러 가고 있었다.
무린은 뱃전에 기대 서서 어둠에 잠긴 계곡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이 때 그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
약 백여 장 뒤에서 느릿느릿 흘러 오고 있는 하나의 범선을 발견한 것이다.
하얀 범선! 바로 전번 낮에 보았던 그 돛단배였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유령선(幽靈船)이라고나 할까?
아니, 범선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는 않았다. 금탑쾌류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유유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범선의 뱃전에는 한 노인이 등을 돌린 채 구부정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은발이 성성한 백의노옹이었다.
무엇을 하는지 그는 수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무린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결코 보통 노인은 아니다!'
슈우우웃-!
돌연 무린이 신형은 가볍게 뱃전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범선을 향해 한 줄기 유성처럼 흘러 갔다.
무린은 이내 범선의 갑판 위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은발노옹은 전혀 기척을 못 느꼈는지 등을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린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가느다란 낚싯대를 수면에 드리우고 있는데 낚싯줄이 보이지 않는다.
좀 이상한 게 아니라 대단히 이상했다. 줄도 없는 낚싯줄을 허공에 치켜들고 낚시를 하고 있다니…….
진짜로 이상한 것은 노인의 머리인가?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노인의 깡마른 몸에서 은은히 뻗치고 있는 불가사의한 무형기도(無形氣度)!
그 괴이무쌍한 무형기도가 은연중 무린의 전신을 압백해 오고 있지 않는가?
등을 돌린 채 꾸부정하게 걸터 앉아 있는 노인에게서 뻗치는 그 신비로운 압박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린의 표정은 급속히 굳어지고 있었다.
'역시 보통 노인이 아니다!'
그는 노인에게서 뻗치는 압박감이 천 근 만 근의 무게로 가슴을 짓눌러 오는 것을 느꼈다.
무린의 검미가 날카롭게 치켜올라갔다.
'평생 처음 대하는 초극인(超極人)이다!'
무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은발노옹이 난생 처음 대하는 상상불허의 절대고수라는 사실을…….
무린은 내심 침성을 흘려 냈다.
'분명 나보다 강하다!'
그렇다면 그 은발노옹은 누구인가?
문득 은발노옹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주인은 나타났는데 어찌 고기는 잡히지 않는가."
무슨 뜻인가?
무린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노인을 주시하고 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공자(武公子), 잠시만 기다리시구료."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
무린은 흠칫했다.
노인의 그 말은 분명 무린에게 한 게 아니고 무엇인가? 노인은 무린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노부 고려충(高麗忠)이 무공자께 선물할 천년홍예린(千年紅霓鱗)을 한 마리 낚으려고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나 잘 잡히지 않는구려. 허허……."
노인은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려충(高麗忠)>
무린은 그런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무린을 알고 있는가?
또 그가 말한 천년홍예린이란 어떠한 물고기인가?
천년홍예린!
이 세상 최고인 수중영물(水中靈物)이다.
전설 속에 존재하는 환상의 천어(天魚). 보통 사람도 천년홍예린의 정단(精丹)을 복용하면 하늘의 기운(氣運)과 서로 통하는 천인(天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천년홍예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무린은 가벼운 한담으로 넘겨 버렸으리라.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은발노옹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린은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린은 의혹을 참지 못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소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 노선배님은 누구십니까?"
노인은 다시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노부는 머나먼 동방에서 온 사람으로 무공자의 신위가 보고 싶어 이렇게 나타났소이다!"
"동방……?"
순간 무린은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무언가 나와 관계가 있는 깊은 내력을 지닌 분이다!'
노인은 무린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불가사의한 무형기도를 만 근의 압력으로 뻗어 내린 노인의 용모는 지극히 평범했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촌노(村老)의 풍모에 다름 아니었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검버섯이 돋아난 얼굴은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또 그 따뜻하고 자애로운 눈빛은 어떠한가?
사랑스러운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푸근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일신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뭐라고 할까?
만인(萬人)을 포용할 수 있는 무한한 금도, 그리고 대자연과도 같은 의연한 기도.
일찍이 무린은 그러한 인물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늘 비로소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무린은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인도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헤벌쭉 웃었다.
"과연 무공자는 훌륭하구료. 노부의 마음이 흡족하오. 허허허……."
웃으니까 훤히 빠진 앞니가 드러났다.
무린은 노인에게 기이한 친밀감을 느꼈다. 마치 피가 서로 통하는 혈족(血族)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린은 공손히 청했다.
"소생에게 노선배님의 내력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선선히 대답했다.
"노부는 머나먼 동방에 있는 환인천제문(桓因天帝門)의 장로(長老)요."
"환인천제문……!"
무린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조금도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인천제문이라는 다섯 글자가 기이하게 가슴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인천제문(桓因天帝門)>
무린의 눈동자는 심유하게 빛났다.
'분명 범상한 문파(門派)가 아니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노부가 중원으로 온 것은 동방사(東方社)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소.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것은 문공자의 신위를 뵙기 위해서요."
무린의 안광은 형형히 번쩍이기 시작했다.
"동방사……!"
역시 중원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은 희미하게 알고 있었다.
<동방사(東方社)>
동방에서 중원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극비조직이다.
동방사는 일찍이 무림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 때문에 세상의 이목을 끈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동방사의 인물은 한결같이 중원무공을 한 차원 능가하는 불가사의한 신비기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동방사는 중원의 운명을 결정지을 무섭고도 거대한 천비(天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동방사는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중원대운명의 변수(變數)였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소생을 알고 계십니까?"
노인은 소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노부는 무공자에 대해 손녀(孫女)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소."
그는 갑자기 선실을 향해 소리쳤다.
"금아(金兒)야, 무공자께서 오셨는데 너는 어찌 인사도 없느냐?"
그러자 조그마한 선실의 문이 열리며 한 수려한 미청년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무린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소녀가 공자님을 뵙습니다!"
무린은 흠칫했다.
"아니, 그대는……?"
미청년은 누구인가?
고려금!
그는 바로 미향선계각에서 무린의 치료를 받고 사라진 고려금이 아닌가?
그녀는 여전히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여자라는 건 무린도 처음부터 알아차렸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노인 고려충의 손녀일 줄이야.
그리고 그녀가 언제부터 이토록 공손했던가?
지금 고려금은 무린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무린의 뇌리에 한 가지 상념이 스쳐 갔다.
'고려금은 동방사의 인물이다. 그리고 동방사는 머나먼 동방에 있다는 환인천제문의 중원분단(中原分檀)일 것이다!'
당연하고도 예리한 추리엿으며, 그의 추리는 적중하고 있었다.
동방사는 바로 환인천제문의 중원분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