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비천전(密秘天殿)
드디어 금탑쾌류선은 선착대(船着臺)에 닿았다.
우주향이 무린과 아극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무후제국에 도착했어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선착대에는 수많은 여검수(女劍手)들이 엄중히 도열해 있었다.
우주향을 선두로 무린과 아극타는 배에서 내렸다.
세 남녀는 대무후제국의 웅장한 궁성으로 오르는 길다란 대리석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진정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호화로운 궁성이었다.
그림처럼 늘어선 전각과 전각, 그 중에서도 하나의 장려한 오층 전각이 있었다.
<신성옥경전(神聖玉景殿)>
거대한 궁성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대정전(大正殿)이었다.
바로 신성대무후(神聖大武后)가 있는 곳이다.
우주향은 무린과 아극타를 안내하여 신성옥경전의 내전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내전 역시 눈이 부시게 호화로웠다.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웅장한 석주(石柱), 벽에 드리워진 현란한 은사 휘장, 바닥에는 대식국(大息國) 특산의 붉은 융단이 깔려 있다.
그 정면, 중앙의 높다란 옥교의(玉轎椅)에는 한 궁장여인(宮裝女人)이 그린 듯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무한히 신비롭고 존엄한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한히 고결하고 교염(嬌艶)한 그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말이다.
마치 천상의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환영처럼 앉아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괴이한 일었다. 그녀의 전신에는 흐릿한 운무(雲霧)가 어려 있어 분명한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휘리리리리-!
그 운무는 천천히 회오리치며 그녀를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고결하게 느끼게 했다.
그녀가 누구인가?
<신성대무후 황보옥황>
그녀는 바로 대무후제국의 여왕이었다.
중원에 천년여왕천하를 펼치려는 대야망을 품고 있는 당대의 절대신녀(絶對神女). 기사(奇邪)로운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천하제일의 신비여인이다.
여왕의 뒤에는 일곱 명의 자포인(紫袍人)이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었다.
신태절륜한 자포인!
그들 하나하나의 기도는 일파의 대지존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아니, 일문(一門)을 건립할 대종사의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일곱 자포인을 일별한 무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유계칠대살성(幽界七大煞星)이다!'
유계칠대살성!
지옥으로부터 왔다는 백 년 전의 공포사신(恐怖死神)들. 그들은 궁륭마천부가 중원을 일통하면서 무림에서 사라졌었다.
궁륭마천부가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물리쳤기 때문이었다.
유계칠대살성 한 명 한 명의 무공은 천하를 마음대로 유린하기에 충분했다. 한 마디로 지옥의 절대사공(絶對邪功)을 지닌 반신인(半神人)들인 것이다.
그런데 유계칠대살성이 아직도 살아서 대무후제국의 공신(公臣)이 되어 있다니…….
이 사실을 알고도 까무러치지 않을 무림인이 있을까?
무린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유계칠대살성을 공신으로 거느리고 있는 저 여왕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이 때 우주향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여왕전하!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와 천축왕자 아극타가 여왕전하의 청첩을 받들어 본제국을 방문했사옵니다!"
그러자 여왕이 응답했다.
"승상의 노고가 많았소."
이어서 신비롭고 영롱한 옥음(玉音)이 울렸다.
"본후(本后)는 대존야와 아극타왕자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풀잎 위에 아침이슬이 구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 옥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환상경(幻想境)으로 이끌어 가는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여왕의 음성은 머나먼 안개 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무린은 이토록 불가사의한 음성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극타의 표정도 굳어지고 있었다. 여왕이 발산하는 신비괴이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잠시 대전에는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이 때 무린이 입을 열었다.
"신성대무후, 본인은 귀하의 청첩에 따라 귀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오. 또한 귀국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경관을 접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소이다."
담담하고도 장중한 태도였다. 과연 당대의 기린아다운 늠름한 신태가 아닌가?
뒤이어 아극타도 예를 차렸다.
"본인 역시 청첩에 따라 대무후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오."
여왕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그 불가사의한 옥음을 울려 냈다.
"본후가 두 분을 초청한 것은 중원의 천년대운명을 함께 의논해 보고자 함이오. 그러나 두 분은 무엇보다도 한 가지 커다란 희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오."
옥음은 천상에서 울려 오는 듯 아련하게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희망은 바로 밀비천전의 비밀을 알고자 함일지니 본후는 먼저 두 분의 희망을 이루어 주려 하오."
여왕의 입에서는 의외로 빨리 본론이 나오고 있었다.
밀비천전.
무린과 아극타가 생명을 건 무서운 도박인 줄 알면서도 대무후제국을 방문한 것은 바로 밀비천전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원무림 최대의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닌가?
여왕의 옥음이 이어졌다.
"승상은 즉시 두 분을 밀비천전으로 안내하여 그 비밀을 공개하도록 하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본후는 내일 연회를 베풀어 두 분의 왕림을 축하하고 아울러 천하대세를 함께 의논하도록 하겠소."
휘리리리리-!
말이 끝나는 순간, 여왕의 모습은 운무의 회오리와 함께 시야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야말로 신비와 경이 속의 면담이 끝난 것이다.
무린과 아극타는 새삼 여왕의 존재에 대해 무한한 신비를 느꼈다.
이윽고 우주향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본녀는 두 분을 밀비천전으로 안내하겠어요."
웅장수려한 석산(石山).
궁성의 후원에는 하나의 석산이 솟아 있었다.
거대한 괴물(怪物)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장엄한 형상의 석산이었다.
우주향은 무린과 아극타를 안내하여 석산 앞으로 다가갔다. 석산의 전면에는 칼날을 세워 놓은 듯한 암벽이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암산(奇岩山). 그런데 암벽에는 커다란 동구(洞口)가 하나 컴컴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구에는 많은 여검수들이 엄중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주향이 나타나자 그들은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져 몸을 숙였다.
우주향이 동구로 발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밀비천전은 이 동부(洞府) 안에 있어요."
아아, 중원무림 최대의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밀비천전이 이런 비역의 석산 속에 건립되어 있었단 말인가?
무린과 아극타는 우주향의 뒤를 따라 동구로 들어선다.
그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긴장이 어려 있었으나 눈동자는 형형히 번쩍이고 있었다.
동굴은 길었다. 울퉁불퉁한 동벽에는 푸른 이끼가 덮이고, 천정에는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늘어진 천연동굴이었다.
세 남녀는 어두운 동굴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약 백 장쯤 들어갔을까?
마침내 육중한 석문이 앞을 막아섰다. 천연동굴은 끝나고 인조석물(人造石物)이 나타난 것이다.
석문 위에는 용이 춤추는 듯한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밀비천전(密秘天殿)>
무린은 석문 앞에서 심장이 무섭게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왔다!'
거대한 운명의 문 앞에 마주 선 느낌이었다.
밀비천전 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과연 어떠한 운명인가?
우주향이 석문의 기관장치를 돌렸다.
그그그긍-!
육중한 석문이 둔탁한 음향을 울리며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석문이 완전히 열리자 우주향이 앞장을 섰다.
"따라오세요."
무린과 아극타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앞에는 위로 오르는 대리석 계단이 길다랗게 뻗어 있었다. 끝없이 뻗어 올라간 나선형 계단이었다.
세 남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좌우 벽에는 구름 속에 뛰노는 무수한 천룡(天龍)의 무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살아서 생동하는 듯 장려한 조각이었다.
그 천룡의 무리를 보면 누구나 자신이 천상에 와 있는 듯한 환각에 빠지리라.
수천 개의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오르자 마침내 앞에는 황금빛 전문(殿門)이 나타났다. 무서운 천년비밀을 품고 있는 금문(禁門)!
우주향이 앞으로 다가가자 육중한 전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기기기깅-!
전문이 활짝 열리자 우주향이 앞서서 전내로 들어섰다.
"들어오세요."
무린과 아극타는 전내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두 사람은 나직한 탄성을 토해 냈다.
"아……!"
"오……!"
그곳은 놀랄 만큼 거대한 원추형의 대전이었다. 차라리 하나의 광장이라고나 할까?
석산 속에 이런 엄청난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 자체가 세상을 놀라게 할 지경이였다.
아득하게 올려다보이는 천장의 꼭대기에선 은은한 미광(迷光)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대전은 천녀신비를 품고 있는 유현한 정적으로 덮여 있었다.
대전의 중앙에는 높이가 삼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청동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조각상은 분명 검(劍)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초거검(超巨劍)! 세상에 저토록 큰 검은 다시 없으리라.
천공을 꿰뚫어 하늘을 양단할 듯 장엄하게 세워져 있는 청동검상(靑銅劍像). 그것은 능히 천하를 압도할 듯한 웅자(雄姿)가 아닌가!
무린과 아극타의 시선은 그 거대한 청동검상에 못박혔다.
"……!"
"……!"
검신(劍身)에는 길다란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린은 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별처럼 번쩍였다.
청동검상(靑銅劍像)에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본좌 원세무황(元世武皇) 상관무륭(上官武隆)은 동방대장정에서 돌아온 뒤 본 밀비천전을 건립했노라.
그것은 삼백 년 후에 닥쳐올 무서운 중원대멸절(中原大滅絶)을 막으려 함이니, 밀비구대무신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올 응징자를 제지하기 위함이노라.>
드디어 밀비천전의 천년비밀은 그 껍질을 벗기 시작하는가?
글은 놀라운 내용으로 이어졌다.
<본좌가 중원의 십만 정예를 거느리고 동방대장정을 떠난 것은 환단무극경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림인의 영원한 이상향(理想鄕)인 환단무극경. 본좌는 그 환단무극경을 찾아 내어 중원무림에 영원한 만년영화(萬年營華)를 이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본좌는 동방에서 한 신비문(神秘門)만을 발견했을 뿐이니, 그 문중의 이름은 환인천제문(桓因天帝門)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순간 무린은 기이한 충격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다.
'환인천제문!'
환인천제문이라면 바로 신비노인 고려충이 말해 준 부친의 출신문파가 아닌가?
그곳은 당연히 무린 자신의 문중이기도 했다.
무린은 급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환인천제문은 무한히 신비로운 문중이었다. 또한 그들은 환단무극경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본좌는 그들에게 환단무극경에 대한 비밀의 제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본좌의 요구를 거절했다. 환단무극경은 범접해서는 안 되는 성역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본좌와 환인천제문 사이에는 충돌이 생겼다.
환인천제문의 칠백여 제자 한 명 한 명은 불가사의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중원의 고수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
그러나 본좌의 십만 정예는 압도적인 숫자의 우세로 결국 그들을 모두 제압할 수가 있었다.
본좌는 환단무극경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을 하나하나 고문하기 시작했다.>
무린은 전신의 피가 급속히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이었다.
글은 계속되었다.
<환인천제문의 인물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본좌는 백 가지의 혹독한 고문수법을 모두 동원했으나 그들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본좌는 대노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참살분시(慘殺分屍)하고 말았다.
나아가서 그들의 이천여 식솔을 모두 처치했으니… 환인천제문은 완전히 피에 씻겨지고 말았다.>
무린의 눈동자는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환인천제문이 피로 씻겨졌다고……!'
불꽃이 뚝뚝 떨어지는 듯 이글거리는 성목(星目)!
만약 이 때 누군가가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면 심장이 덜컥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글을 읽어 내려가는 무린의 안광은 석면(石面)을 태워 버릴 듯했다.
<아아, 돌이켜볼 때 그것은 본좌의 커다란 과오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본좌는 환인천제문의 조사당(祖祠堂)까지 침입하여 그들의 모든 종사록(宗史錄)을 불태우고 열대조의 영정을 파괴했다.
환인천제문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서였다.>
무린의 몸에는 격동의 떨림이 스쳐 가고 글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환인천제문의 조사당에서 발견된 몇 권의 무공비급을 보았을 ㄸ, 본좌는 무서운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독문무학(獨門武學)은 분명 중원무공의 차원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본좌가 비록 십만 고수의 위세로써 그들을 몰살시켰으나 그들의 무공은 중원천하를 뒤덮기에 충분했다.
결국 본좌는 공포를 느낀 나머지 또 하나의 과로를 범하게 되었으니…….
중원으로 데려가서 노비로 삼기 위해 살려 두었던 세 살 미만의 갓난아이 삼백여 명을 처참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환인천제문의 후예를 완전 멸족시키기 위해서…….>
무린의 전신은 부들부들 떨렸다.
'원세무황 상관무륭… 그대는 진정 하늘이 두렵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는 경련이 스쳐 갔다.
<아아, 본좌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노라.
바둥거리는 갓난아이들이 사지가 찢어지며 흘리던 그 선렬한 핏물을, 그 아이들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경악으로 부릅뜬 눈망울을…….
아아, 본좌가 후회를 했을 때는 이미 무서운 천죄(天罪)를 범하고 난 뒤였노라.
그 뒤 본좌가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마침내는 환단무극경 찾기를 포기하고 중원으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본좌에게 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본좌의 십만 정예는 무서운 역병(疫病)으로 쓰러지기 시작하고, 천지를 뒤엎을 듯한 폭풍이 동해로 철수하는 우리의 선단(船團)을 휩쓸었다.>
처절한 내용이었다.
삼백 년 전에 동방에서 일어났던 무서운 대비극. 세상을 전율시킬 참혹한 전대비사(前代秘事)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글은 계속 이어졌다.
<본좌는 중원으로 돌아오자 즉시 밀비천전을 건립하고 은거했다. 앞으로 닥쳐올 무서운 변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본좌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환인천제문이 완전히 멸문되었다 하나, 언젠가는 다시 싹이 터서 부활하리라는 것을!
그 때는 중원을 심판할 무서운 응징자가 중원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 응징자가 출현할 때, 중원은 고금미증유의 무시무시한 멸절천하가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천 년 후라도 변겁은 반드시 오리라. 환인천제문의 무학은 그만큼 무섭고 신비로운 것이다.
이에 본좌는 밀비천전의 안배를 남기노니, 후대(後代)는 밀비구대무신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올 응징자를 제지하도록 하라. 중원을 천년멸절천하의 대변겁에서 구하도록 하라.
원세무황 상관무륭>
청동검상에 새겨진 글은 여기서 끝났다.
엄청난 비밀은 모두 밝혀졌다.
무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청동검상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화산 같은 격동의 불길이 파동치고 있었다.
'원세무황 상관무륭… 그대는 진정 하늘이 용서하지 못할 천죄를 범했다! 그러나 그대가 더욱 용서받지 못할 일은 그 뒤의 일이다. 그대가 진정 천죄를 뉘우쳤다면 밀비천전을 건립하여 동방에서 올 응징자를 제지할 안배부터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먼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환인천제문의 삼천여 생령(生靈)을 위해 동방을 향한 속죄의 탑을 세우고, 자신의 심장에서 흐르는 속죄의 피를 그 탑에 뿌려야 했다. 환인천제문
의 조사당을 다시 세우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천죄를 하늘에 빌어야 했다!'
무린의 얼굴에는 섬뜩한 한기가 스쳐 갔다.
'원세무황 상관무륭… 그대의 안배가 과연 어떤 것인지 나 무린이 살펴보리라!'
무린은 우주향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우주향, 원세무황의 안배는 어떤 것이오?"
어느 새 그의 신색은 물처럼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그 무심한 얼굴에는 이미 격동한 빛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서운 심기! 누가 그의 용암처럼 끓고 있는 가슴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우주향이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밀비구대무신을 부활시키는 거예요!"
무린은 가볍게 마간을 찌푸렸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전대인(前代人)들이 정말로 다시 살아난단 말이오?"
"그래요. 당신은 믿을 수 없나요?"
밀비구대무신은 지난 삼백 년 간 중원이 배출한 최고봉의 절대고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벌써 옛날에 사라져 간 사람들이다.
한데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우주향이 다시 말했다.
"밀비구대무신은 사실 죽지 않았어요.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에요."
"……!"
"원한다면 당신에게 그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겠어요."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그들을 직접 한 번 보고 싶소."
"본녀를 따라오세요."
우주향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린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극타도 안광을 기이하게 번쩍이며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전 한쪽에는 좁은 복도가 있었다. 우주향은 복도로 들어섰다.
그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린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복도에는 음산한 한기가 깔려 있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는 매우 길었고,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한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이윽고 복도가 끝나고 육중한 철문이 앞을 막아 섰다. 하얗게 서리가 깔려 있는 철문이었다.
우주향이 벽에 붙어 있는 기관장치를 돌렸다.
그르르릉-!
그러자 둔중한 음향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순간 안에서는 뼛골을 얼릴 듯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주향이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이곳은 천연적인 만년빙동(萬年氷洞)이에요."
무린과 아극타는 문을 들어서며 몸을 한 차례씩 부르르 떨었다.
극렬한 냉기! 보통 사람이라면 즉시 온몸이 동태처럼 뻣뻣하게 얼어붙고 말리라.
그곳은 하나의 빙실(氷室)이었다.
사방 벽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천장에는 얼음기둥과 빙순(氷筍)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그런데 전면에 장방향의 길다란 빙대(氷臺)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아홉 개의 얼음 관(棺)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우주향은 아홉 개의 빙관(氷棺)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이분들이 바로 밀비구대무신이에요."
투명한 빙관 속에는 한 구씩의 시신(屍身)이 들어 있었다.잠자듯 단정히 누워 있는 아홉 구의 시신들이었다.
무린은 시신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의 안광은 무섭게 번쩍였다.
'밀비구대무신이 틀림없다!'
시신들은 모두 절세적인 신인(神人)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중원무림사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는 무공의 최고봉들이 틀림없었다.
비록 시신들이라고는 하나 그들 앞에서 감히 머리를 숙이지 않을 무림인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무린은 그들의 시신 하나하나를 놀랄 만큼 무감동한 시선으로 쓸어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밀비구대무신이 정말로 되살아날 수 있단 말이오?"
우주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천명수령검(天命繡靈劍)이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깨어날 거예요!"
"천명수령검?"
"천명수령검은 이 세상 최고의 영검(靈劍)이에요. 천명수령검의 영기(靈氣)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천명수령검은 어디에 있소?"
"천명수령검은 여왕께서 지니고 계셔요. 여왕께서는 원세무황이 남긴 한 가지 극비검결(極秘劍訣)을 연구하고 계신데, 그 연구가 완성되면 밀비구대무신을 부활시키게 될 거예요."
<천명수령검(天命繡靈劍)>
그 검은 과연 어떤 영능(靈能)으로 밀비구대무신을 부활시킬 것인가?
무린이 물었다.
"만약 저기 누워 있는 밀비구대무신의 시신이 조각조각 파괴되어도 다시 부활할 수가 있소?"
우주향이 흠칫하여 되물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내가 저 아홉 구의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려도 그들이 부활할 수 있느냐는 뜻이오."
"무린, 그런 농담은 하지 마세요!"
우주향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돌연 무린의 입에서 엄청난 광소(狂笑)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핫……!"
웃음소리는 빙실을 쩌렁쩌렁 진동시켰다.
푸르르르-!
얼음가루가 눈보라처럼 회오리쳤다.
우주향과 아극타는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린의 광소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린은 웃음을 뚝 그치고 심유하게 말했다.
"나는 밀비구대무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를 기다려 보겠소."
아아, 우주향과 아극타는 이 말의 무서운 의미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거대한 대운명의 장은 급속히 눈앞으로 닥쳐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