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동방무적 제3권 (전3권)
지은이: 유소백 김능하
운명(運命)의 대결(對決)
무린은 화빈각으로 돌아와서 홀로 빈청을 거닐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사위는 고요했다.
평화로운 밤이었지만 어딘지 불길한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
무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분명 중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이 때 한 절세미녀가 그림자저럼 나타났다.
사사환미 우주향, 바로 그녀였다.
우주향은 이제 흑사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서 그 눈부시게 절미한 용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매우 싸늘했다. 그녀는 나타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무린, 당신은 살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없나요?"
무린은 가볍게 미간을 모았다.
"무슨 뜻이오?"
우주향이 차갑게 되물었다.
"당신은 여왕전하의 뜻을 거역할 때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무린은 빙긋 웃었다.
"여왕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염라대왕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비록 당세의 기린아라고 하지만 여왕전하의 무한한 능력을 따를 수는 없어요."
"물론 나는 여왕처럼 자신의 혼약자(婚約者)를 죽이고 그 문중을 차지하는 능력 같은 건 없소."
이 말은 황보옥황이 상관룡을 죽이고 밀비천전을 차지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향의 눈동자가 무섭게 번쩍였다.
"여왕전하께서 상관룡을 죽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알고 있소. 그것은 스스로 밀비천전의 주인이 되어 천년여왕천하를 건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그렇지 않아요. 여왕전하께서 상관룡을 죽인 것은 그와의 혼인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에요."
무린의 검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혼인을 원치 않았다고?"
"여왕전하는 이 세상의 어떤 남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상관룡은 억지로 혼인을 강요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거예요."
"……!"
"상관룡의 죽음은 결국 자업자득이었어요."
"여왕은 평생 혼인할 생각이 없단 말이오?"
"여왕전하의 마음 속에는 비밀이 있어요."
"비밀……?"
"여왕전하에게는 갓난아이 때 이미 숙명적으로 맺어진 배필이 있어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만을 찾고 있는 거예요."
"……."
갓난아이 때 숙명적으로 맺어진 배필을 찾는다.
무린은 무감동하게 말했다.
"아무튼 여왕이 무서운 야망 때문에 세상을 혼란시킬 것은 분명하오."
우주향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여왕전하와 적대하겠단 말인가요?"
"나는 초청을 받고 대무후제국을 방문했을 뿐이오. 앞으로 나의 행사는 사태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이오."
무린의 태도는 단호했다.
우주향의 아름다운 얼굴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나타났다.
"무린, 당신은 결국 죽음의 길을 선택할 모양이군요."
그 말에 무린은 빙그레 웃었다.
"향매(香妹), 그대가 나의 생사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향매는 혹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오?"
일순간 우주향의 흰 목이 살짝 붉어졌다.
"흥! 당신이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여기서 그녀의 말은 뚝 끊어지고 말았다.
돌연 무린이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향매,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솔직이 말하시오."
우주향은 노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뻔뻔스럽게 당신이……."
한데 그녀의 말은 또 끊어지고 말았다.
무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린은 우주향의 늘씬하고도 풍만한 몸을 억세게 끌어안고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우주향은 몸을 틀어 저항했다.
"비켜나지 않으면… 흐음……."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의외로 쉽게 사라졌다.
그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두 팔로 무린의 목을 얼싸안았다. 그리고 갈증난 사람처럼 무린의 입술을 빨더니 매끄러운 혀를 그의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으으음……."
갑자기 두 남녀 사이에는 열렬한 입맞춤이 벌어졌다. 달콤한 도취의 순간이었다.
얼마 후에야 우주향은 입술을 ㄸ며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무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린… 곧 여왕전하께서 나타나실 거예요. 당신은 부디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하세요."
그녀의 눈빛과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정감(情感)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무린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무린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마 여왕이 나의 뜻을 따르는 게 좋을 것이오."
"당신은 여왕전하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겠지만……."
돌연 우주향이 말을 맺지 못하고 급히 속삭였다.
"여왕전하께서 오시고 있어요. 무린… 당신은 부디 내 말을 잊지 마세요. 나는 그만 가야 해요!"
그녀는 무린을 뚫어지게 한 번 응시하더니 청내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스스스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이내 청내에 기이한 운무의 회오리가 나타난다. 동시에 한 여인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바로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었다.
무린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의 모습은 역시 운무 속에서 환영처럼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황보옥황은 신비롭도록 영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존야, 당신은 아직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요?"
무린이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귀하와 손을 잡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을 말하오?"
"그래요."
무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 나왔다.
"나는 지금 갑자기 귀하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황보옥황의 음성은 감미로울 만큼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나는 당장 귀하의 손을 잡아 보도록 하겠소."
순간 무린의 우수가 앞으로 뻗었다.
기쾌(奇快)! 그의 우수는 황보옥황의 맥문을 번개처럼 잡아갔다.
세상의 그 누가 이토록 쾌속한 출수를 피할 수 있으랴!
황보옥황의 맥문은 무린의 손아귀에 덥석 잡혔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럽고 매끈한 손목이었다.
한데 다음 순간 그녀의 손목에서 전류 같은 반탄력이 파르르 뻗쳐 손을 쩌릿하게 마비시키는 게 아닌가?
무린은 황급히 손을 놓고 물러섰다.
"으음……."
황보옥황의 입에서 요염한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무린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여왕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초절한 공력을 지니고 있다!'
황보옥황은 교소를 뚝 그치더니 서릿발처럼 차갑게 말했다.
"대존야, 당신은 감히 본후를 희롱할 셈인가요?"
섬뜩한 살기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무린의 신색은 이내 물처럼 담담하게 변했다.
"귀하가 내 앞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진면목을 한 번 확인하려던 것뿐이오."
"그래서 당신은 본후의 진면목을 확인했나요?"
"귀하의 손은 내가 잡아 본 여인의 손 중에서 가장 매끈하고 부드러웠소. 귀하는 틀림없이 이 세상 최고의 미녀인 것 같소. 물론 손목이 매끈하다고 해서 다 미녀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나오니 황보옥황도 약간 아연한 듯했다.
"당신은……."
무린이 다시 말했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손목이 매우 소중한 곳으로 지극히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소."
"……."
"어느 이방(異邦)의 풍속에 의하면 젊은 여인이 외간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면 바로 손을 잡은 그 남자와 혼인을 해야 한다고 하오."
"……!"
"그 풍속대로라면 귀하는 나에게 시집을 와야 되는 것이오."
무린은 손목 한 번 잡고 크게 생색을 내는데 의외로 황보옥황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도대체 어디의 풍속이지요?"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동방이 아닐지……."
"동방……?"
황보옥황은 나직이 되뇌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설령 우리가 동방의 풍속을 따른다고 해도 당신은 본후와 혼인할 수 없어요."
"그건 무엇 때문이오?"
"본후는 세 살 때 이미 한 사람으로부터 손목을 잡혔기 때문이에요."
무린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누가 도대체 그토록 어린 귀하를 탐내고 그런 엉큼한 수작을 부렸단 말이오?"
"그가 엉큼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본후보다 더 어렸으니까."
그녀의 음성은 독백처럼 희미하게 흐려졌다.
무린의 눈매는 가느스름해졌다.
여왕에게는 갓난아이 때부터 숙명적으로 맺어진 배필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갑자기 황보옥황의 음성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불필요한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부신 신광이 은은히 뻗어 나왔다.
"대존야, 당신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대답을 해야 돼요. 당신이 앞으로 본후의 뜻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적대할 것인지를 말이에요."
무린이 대답했다.
"귀하가 만약 나의 뜻에 따른다면 나 역시 귀하의 뜻을 존중할 용의가 있소."
순간 황보옥황의 전신에 어려 있는 운무가 맹렬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
그녀의 한성(寒聲)이 예리하게 고막을 찔렀다.
"대존야, 당신은 꼭 관 속에 넣어서 뚜껑을 덮어야 정신이 들 모양이군요."
운무의 소용돌이는 무린에게로 급속히 밀려왔다. 그에 따라 수만 근의 엄청난 암경이 태산처럼 전신을 압박해 왔다.
무린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는 쌍장에 혼신의 진기를 끌어올려 앞으로 쭉 뻗었다.
"황보옥황, 관 속에 넣어서 뚜껑을 덮고 못질을 한다 해도 내 생각은 변할 수 없소!"
휘류류류류-!
운무의 소용돌이는 양쪽으로 쫘악 갈라져서 흩어졌다.
황보옥황은 대노했다.
"감히 본후에게 대항하려 들다니!"
일성 교갈과 함께 그녀의 섬섬옥수가 괴이하게 교차되더니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무린은 그녀의 무공 내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환인천제문의 비공을 황급히 펼쳐 냈다.
"홍단태극신공!"
두 줄기 강기가 격돌하자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괴음(怪音)이 울렸다.
쿠르르릉-!
화빈각 전체가 무섭게 진동하며 집기가 와장창 부서져 날아가고 휘장이 찢어져서 미친 듯 펄럭였다.
무린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슈슈슉-!
순간 황보옥황의 섬섬옥수가 일직선으로 무린에게 뻗어 왔다. 운무 속에서 환영처럼 뻗어 오는 희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무린은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비홍수검인!"
그의 쌍수는 황보옥황의 옥수에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살벌한 정면대결! 두 남녀의 초수가 교차되는 순간 뇌전이 작렬하는 듯한 은빛 광채가 청내를 가득 채웠다.
파파파팟-!
다음 순간 화빈각의 벽과 기둥이 가루로 변하여 눈보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
화빈각은 벌써 시커먼 잿더미로 변하여 무너지고 있었다.
그 혼돈의 와중에서 무린과 황보옥황의 신형은 번개처럼 교차하며 계속 괴공을 펼쳐 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대결이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고 해도 그들이 어떤 무공과 어떤 수법을 사용하는지 알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다만 전류 같은 강기가 작렬하며 눈부신 은빛 광채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교차하는 것을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화빈각은 완전히 붕괴되어 흩어지고 어느 새 장내에는 무수한 홍의여검수들이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대결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인경혼(萬人驚魂)할 이 대결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돌연 황보옥황의 날카로운 교갈이 허공에 울렸다.
"우비잠신강(宇秘潛神 )!"
쿠콰콰콰-!
순간 태양처럼 휘황한 광망이 거대한 분수같이 폭출됐다.
그 엄청난 광망은 무린의 신형을 뇌전처럼 관통했다.
"으윽……!"
고통스런 신음이 울렸다. 무린의 신형은 허공에서 휘청 흔들렸다.
찰나지간 황보옥황의 일수가 그의 요혈을 번개처럼 찔러 갔다.
"헉!"
무린은 짚단처럼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는 즉시 의식을 잃고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아아, 무린은 결국 패배했는가?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의 무공이 이토록 가공스럽단 말인가?
겨우 장내에 미친 듯 휘몰아치던 강기의 파도는 사라지고 사위가 평온을 되찾았다.
황보옥황은 쓰러져 있는 무린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말 무섭고 괴이한 무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수하들을 향해 엄중하게 명을 내렸다.
"이 사람을 일단 지저옥부(地低獄府)에 감금하라!"
지저옥부.
대무후제국의 수인(囚人)들이 감금되는 뇌옥이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 무한한 공포와 적막만이 존재하는 곳. 한 견고한 석실에 하나의 희미한 인영이 쓰러져 있었다.
대존야 무린! 황보옥황에게 패배하여 이곳 뇌옥에 감금당한 바로 그였다.
무린은 시체처럼 미동도 않고 있었다.
치명상이라도 입었는가?
그런데 문득 무린이 눈을 스르르 뜨더니 나직이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이제 간수들이 모두 사라진 모양이군."
그는 한잠 잘 잔 사람처럼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황보옥황, 너무 좋아할 필요는 없소. 본인이 편의상 잠시 후퇴했을 뿐이니…….'
그렇다면 무린은 일부러 황보옥황에게 패배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인가?
무린의 깊은 심기를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무린의 안광이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
'황보옥황, 나는 일단 이곳을 떠나겠소. 그러나 곧 그대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오.'
무린은 석문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서자 육중한 석문에 장심(掌心)을 대었다.
어쩔 셈인가? 어쩌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가 한 번 공력을 운행하자 두 자 두께의 석문이 논바닥처럼 갈라져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쩌쩌쩍-!
무린은 모래벽처럼 붕괴된 문을 통해 밖으로 성큼 나섰다.
밖은 어두컴컴한 통로였다.
그런데 통로에는 세 명의 홍의여검수가 엄중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린이 석문을 파괴하고 나오는 것을 보자 안색이 대변했다.
"아니……!"
그들은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무린의 앞을 막아 섰다.
"멈춰라!"
무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말만한 낭자들이 시집이나 갈 일이지, 무슨 검을 휘두른단 말이오?"
순간 무린의 삼지(三指)에서 예리한 지강(指 )이 빛살처럼 뻗어졌다.
"흑!"
"으윽!"
세 여검수는 그 자리에 털썩털썩 쓰러졌다.
무린은 쓰러진 그들을 뒤에 두고 통로를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반시진 후에는 저절로 깨어날 테니 모두들 시집갈 꿈이나 꾸시도록……."
통로가 끝나자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앞에는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무린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 장으로 철문을 후려쳤다.
콰르릉- 퍼펑-!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한 자 두께의 철문이 목판(木板)처럼 깨어져서 나가 떨어졌다.
무린은 밖으로 번쩍 몸을 날렸다. 찰나지간 그는 지저옥부 앞의 정원에 가볍게 내려섰다.
"기왕에 뇌옥을 만들려면 좀 튼튼하게 만들 일이지……."
쇠를 먹고 산다는 불가사리도 이토록 간단히 지저옥부를 뚫고 나오지는 못하리라.
무린이 나타나는 순간, 지저옥부를 경계하던 많은 여검수들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대존야가 뇌옥에서 탈출했다!"
"사로잡아라!"
무린은 씩 웃었다.
"사로잡힐 바에야 힘들여 탈출할 필요가 없지."
다음 순간 무린의 신형은 어두운 암천을 향해 한 줄기 빛살처럼 솟구쳤다.
파스슷-!
거꾸로 흐르는 유성이라고나 할까?
지저옥부의 여검수들은 일순 꿈을 꾸는 듯 멍해졌다.
"아……!"
사로잡기는커녕 무린의 모습을 눈으로 추적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순식간에 무린의 모습은 암천 저편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은 무린을 약간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칼날처럼 솟은 절벽.
홀연 하나의 인영이 절벽 위에 번쩍 내려섰다.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절벽 아래의 계곡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밤이라 방향을 잡기가 어렵군.'
계곡에는 검푸른 수로가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대무후제국의 영역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수로를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
무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스스슷-!
이 때 예리한 파공음이 울리며 허공에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무린의 검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벌써 추격자가 나타났군.'
찰나지간 두 자의노인과 한 절세미청년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려 무린의 앞을 우뚝 막아 섰다.
그들은 유계칠대살성 중의 유유살성(幽幽煞星)과 지부살성(地府煞星), 그리고 뜻밖에도 천축왕자 아극타였다.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은 무린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대존야, 감히 대무후제국의 금법(禁法)을 깨뜨리고 어디로 도망칠 셈이오?"
무린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극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린은 담담히 물었다.
"아극타, 우리는 일찍이 대무후제국에 와서 밀비천전의 비밀을 알아낼 때까지는 함께 행동하자는 약속을 한 일이 있는데 이제 그 약속의 기한이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소?"
아극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나는 앞으로 대무후제국과 협조하여 천하대사를 도모하기로 마음을 굳혔소."
"당신은 과연 영웅이오. 시무(時務)를 아는 자가 영웅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이오."
분명 비웃는 말이었다. 아극타의 심기가 지나치게 영활하게 움직이는데 대한 비웃음인 것이다.
아극타는 음유하게 말했다.
"대존야, 귀하와 나는 본래 적이오. 나는 귀하를 생포해 달라는 여왕의 부탁을 기꺼이 수락했소."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서로 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한데 대해 감사하오. 본인이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로서 무림에 출도를 한 목적은 귀하를 중원에서 제거하고 밀비천전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였소."
그의 말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이제 본인은 밀비천전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귀하를 제거하는 일만이 남았소."
아극타는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나 또한 대존야를 제거하여 후환을 미리 제거해야 되겠소."
결국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서로를 제거하기로 말이다.
갑자기 장내에는 기류가 얼어붙는 듯한 살기가 충만했다.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은 감히 경동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당대의 두 기린아가 정면으로 대결할 순간이 온 것이다.
운명의 대결! 그 결과에 따라 천하대세는 막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부딪쳐 불꽃처럼 작렬했다.
"……."
"……."
이윽고 아극타의 양 손이 은은한 핏빛 광채를 발산하며 허공으로 치켜올라갔다. 그의 쌍장은 투명한 혈홍색으로 변해 갔다.
무린의 표정은 약간 굳어졌다.
'혈태양공(血太陽功)이다!'
<혈태양공(血太陽功)>
한 번 펼쳐지면 사방 백 장 이내가 잿더미로 변한다는 천축제일마공이다. 마치 작은 태양이 폭발하는 듯한 공포마공이었다.
질식할 듯한 고요 속에서 돌연 아극타의 호통이 우렁찬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혈태양폭라기(血太陽暴羅 )!"
쿠아아아-!
그의 쌍장에서 눈부신 혈광이 뻗으며 엄청난 강기가 폭출했다.
순간 무린의 신형은 한 마리 비조처럼 천공을 솟구치며 양손 십지가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져서 허공을 갈랐다.
"불세연화비공!"
허공에는 무수한 연꽃의 환영이 나타나 눈보라처럼 비산했다.
정종칠대기공 중의 일공! 마공을 전문적으로 파해하는 불문기공(佛門奇功)이었다.
쿠르르르- 쿠쿠킁-!
기류가 맹렬히 격탕하며 핏빛 혈광과 연꽃의 환영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쩌쩌쩌쩡-!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음향이 울렸다.
혈광과 연꽃은 사나운 폭풍의 회오리 속에서 휘감겼다.
파아아아-!
분수처럼 뿌려지는 혈광 속에서 무수한 연꽃이 산산이 파해되어 흩어졌다.
엄청난 열류(熱流)의 불길은 천공을 태울 듯 휘몰아쳤다.
아아, 혈태양공은 불세연화비공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아극타는 호기 있게 소리쳤다.
"대존야, 목숨을 나에게 주시오!"
그는 살찐 암탉을 낚아채려는 굶주린 독수리처럼 무린에게로 덮쳐갔다.
풍전등화의 위기! 무린은 패배하고 마는가?
순간 무린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사라지며 휘황한 서기가 무지개처럼 폭사했다.
번쩍-!
그 빛의 기둥 속에서 무린의 일수가 아극타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갔다.
"비홍수검인!"
실로 환상적인 신비공이 아닌가?
아극타는 주춤했다.
'과연 대존야다!'
그는 위험을 직감하고 힘차게 쌍수를 쳐 냈다.
"혈태양마라천강(血太陽魔羅天 )!"
츠츠츠츳-!
태양이 맹렬히 소용돌이치며 엄습하는가?
천지를 태워 버릴 듯 뜨거운 열강(熱 )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천하의 그 누가 이 가공할 열강을 감당할 수 있으랴!
허공은 눈부신 혈광으로 완전히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조차 불 같은 열기에 밀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대결을 본 적이 없었다.
열류폭풍 속의 대혼돈!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이 때 아극타의 우렁찬 폭갈이 터졌다.
"대존야, 최후의 순간이다!"
동시에 핏빛 광채가 거대한 광주(光柱)처럼 뻗어 가는 게 보였다.
츠츠츠츳-!
아극타는 필살의 기세로 최후의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천축제일마공의 위력은 가히 산하를 태우고 바다를 끓일 만했다.
그런데 이 순간 무린의 일수가 그 핏빛 광주 속으로 느릿하게 전진하며 완만한 일호선(一弧線)을 그었다.
"그렇다. 최후의 순간이다, 아극타!"
촤아아아-!
찰나지간 핏빛 광주가 양쪽으로 쫙 흩어지며 투명한 은빛 첨광이 일직선으로 대기를 갈랐다.
"태극비홍일기검(太極飛鴻一氣劍)!"
순간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에 울렸다.
"크아아악!"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은 안색이 대변했다.
아극타의 신형이 커다랗게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털썩-!
아극타는 고목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오오, 아극타의 가슴은 세로로 길게 갈라져서 검붉은 선혈을 샘처럼 뿜어 내고 있었다.
처참한 결과가 아닌가!
무린의 신형이 그의 앞에 유유히 내려섰을 때, 아극타는 마지막 가쁜 호흡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존야… 내가 패배했다… 그러나 나의 사부님… 절륜대법황께서는… 반드시 나의 원수를 갚고… 중원을 접수하실… 것이니……."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그의 목은 옆으로 푹 꺽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진정 비참하고도 허망한 최후였다.
중원천하에 거센 폭풍의 회오리를 일으켰던 천축왕자 아극타는 무린의 냉엄한 응징 아래 일순간에 생명을 잃고 말았다.
무린은 그의 시체를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극타… 부질없는 탐욕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미리 알았어야 했다."
유유살성과 지부살설은 이 무서운 결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은 서로 부딪쳤다.
"……."
"……."
다음 순간 그들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무린을 향해 맹렬한 합공을 전개했다.
"유유천강기(幽幽天 )!"
"지부사령공(地府邪靈功)!"
고막을 찢는 폭갈과 함께 기쾌한 선공(先攻)이 펼쳐졌다.
츠츠츠츠츳-!
너무나도 급박하고 독랄한 암습이 아닌가?
순간 무린의 싸늘한 일갈이 울렸다.
"비겁한 암습은 스스로의 생명을 해칠 뿐이다!"
동시에 그의 소맷자락 안에서 투명한 나비 한 마리가 번쩍 솟구쳤다.
파르릇-!
그 나비는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의 눈앞을 번개처럼 스쳐 갔다.
찰나지간 붉은 피가 소리 없이 쫙 뿌려졌다.
"크윽!"
"으헉!"
그들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들의 목은 이미 가로로 깊숙이 갈라져 있었다. 투명한 나비의 날개가 예리한 검처럼 목을 자르고 스쳐 간 것이었다.
그 나비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수정비혼접 바로 그 신비로운 암기였다.
유유살성과 지부살성은 땅바닥에 털썩털썩 거꾸러졌다.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던 대마성들의 최후로서는 너무나 허무하지 않은가?
그것은 수정비혼접의 가공한 위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 어찌 한 마리 투명한 나비의 무서움을 알 수 있으랴?
절벽 위에는 세 구의 시체가 널려졌는데 이제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무린은 비로소 희미하게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 가면 수로가 있겠군.'
이 때 사방에서 수많은 금의여검수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스스스슷-!
대무후제국의 최고정예가 일제히 추격해 온 것이다.
수백 명의 여검수, 그들은 무린을 향해 급속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팽팽한 살기가 숨통을 조일 듯 엄습해 왔다. 무서운 필살대검진(必殺大劍陣)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린의 검미가 칼날처럼 치켜올라갔다.
'엄청난 일막의 살상극을 피할 수 없겠군!'
한데 돌연 처절한 비명이 연속 울리며 검진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악!"
"헉!"
동시에 금의여검수들이 짚단처럼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진은 파죽지세로 깨어지고 있었다.
무린은 흠칫 놀랐다.
'아니… 노선배님이……!'
홀연 나타나서 금의여검수들을 무찌르고 있는 사람은 고려충이었다.
고려충은 순식간에 그들의 포위망을 찢어진 그물처럼 뚫어 놓은 뒤 무린에게 소리쳤다.
"무공자, 어서 노부를 따라 오시오!"
무린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무린과 고려충은 벌써 금의여검수들의 검진을 벗어나서 어둠 속으로 화살처럼 쏘아가고 있었다.
계곡의 검푸른 수로에 돛단배 한 척이 떠 있었다. 하얀 범선이었다.
갑판에는 한 미서생이 우뚝 서서 북쪽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고려금이었다.
그녀의 수려한 얼굴에는 약간 초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이 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나더니 찰나간에 허공을 날아 갑판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바로 무린과 고려충이었다.
고려금의 얼굴에는 기쁨과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고려충은 급히 그녀에게 지시했다.
"금아야, 빨리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배는 즉시 출발했다. 물살은 몹시 빨라서 배는 놀랄 만큼 쾌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려충은 비로소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공자, 이 계곡의 수로는 대단한 급류이기 때문에 위험하기는 하지만 대무후제국을 가장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오."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배님이 아니었다면 매우 귀찮은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고려충이 장중하게 말했다.
"노부는 무공자를 조광화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소."
무린의 안광은 형형히 빛났다.
"저도 조광화원으로 가서 아버님을 뵈올 생각이었습니다."
드디어 무린은 집으로 돌아가서 부친에게 문중의 모든 비밀과 내력을 물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때는 무린에게 어떤 대변환이 올 것인가?
배는 살처럼 빠르게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번쩍 날아와 갑판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미간에 홍점이 있는 나의미녀(羅衣美女), 바로 춤을 추며 무린에게 전음을 보냈던 그 여인이었다.
고려충과 고려금이 흠칫 놀랄 때, 여인은 무린을 향해 다짜고짜 힐문했다.
"대존야, 당신은 여왕을 죽일 자신이 없어서 그냥 도망치는 중인가요?"
무린은 담담히 대꾸했다.
"나는 필요에 따라 그냥 돌아가지만 머지않아 다시 대무후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오."
"그 때는 여왕을 꼭 죽일 계획인가요?"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여왕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여인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번쩍였다.
"본녀 소소(素素)는 대무후제국을 일시에 폐허로 만들 수 있어요!"
무린은 힘칫 놀란다.
"대무후제국을 폐허로……?"
"다만 본녀가 죽일 수 없는 사람은 여왕일 뿐이에요."
어떻게 대무후제국을 일시에 폐허로 만들 수 있는가?
무린이 물었다.
"귀하는 대무후제국의 적(敵)이오?"
여인 소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섬뜩한 살기가 스쳐 갔다.
"본녀가 필요한 것은 오직 여왕의 목숨이에요."
"……!"
"본녀는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여왕을 죽여야 해요. 여왕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저주받을 마녀이기 때문이에요."
"……?"
소소가 다시 말했다.
"대존야, 당신이 다시 대무후제국을 찾아온다면 그 때를 기다리겠어요. 그리하여 당신이 여왕을 죽이게 되면 나는 대무후제국을 초토로 만든 뒤 당신을 따라가서 노예가 되겠어요."
말을 마친 소소는 허공으로 번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무린은 그녀가 사라진 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떤 특이한 내력이 있는 모양이군.'
소소가 남긴 말은 매우 기괴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배는 계속 쾌속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