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존야(大尊爺) 돌아오다
중원무림은 사납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동정호에서 벌어졌던 대해전(大海戰)은 천하를 경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령파황루의 출현!
백상회 장강대선단의 궤멸!
그런데 동정호의 엄청난 혈파(血波)가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충격적인 소문이 무림을 강타했다.
- 궁륭마천부의 대존야와 천축왕자 아극타가 함께 대무후제국을 방문했는데, 아극타는 결국 대존야에게 죽음을 당했다!
- 대무후제국의 여왕은 곧 천명수령검의 검결을 완성하여 밀비구대무신을 부활시키게 된다!
천하형세가 무섭게 급전(急轉)하고 있음을 알리는 놀라운 소문이었다.
천하의 패권다툼은 이제 궁륭마천부와 대무후제국으로 압축되는가?
그러나 무림에는 또 다른 거대한 변수(變數)가 등장하고 있었다.
절륜대법황!
당금 천축무림의 절대지존인 천룡밀궁사의 장문인이자 아극타의 사부인 절륜대법황이 곧 천축 최고고수들을 거느리고 중원에 출현하리라는 예상이었다. 그가 이미 중원에 출현했다는 소문까지 번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변수는 세상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비밀조직이었다.
동방사!
아직 분명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이 비밀조직은 중원 천년대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동방사는 바로 중원을 심판하기 위해 출현할 동방의 응징자를 보위하기 위한 조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방의 응징자!
천하무림인의 간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한 마디가 아닌가!
동방의 응징자가 한 번 출현하면 중원무림은 천년멸절천하를 맞이한다 했으니, 동방사가 무림의 거대한 변수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하나의 괴이한 존재가 무림인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혈향흑장미(血香黑薔薇)>
피의 향기를 풍기는 검은 장미. 그것은 한 여인을 가리키는 명호였다.
그녀는 동왜제일미녀(東倭第一美女)라고도 했고, 십삼 인의 허무승(虛無僧)을 거느린 고금제일의 절대살수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녀를 가까이서 목격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한다.
- 천하를 차지하려는 자는 본녀를 사라!
그녀는 도대체 어떠한 가치를 지닌 상품이란 말인가?
그러나 대존야 무린은 한 동안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무후제국을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그는 어디로 갔는가?
아극타의 여제(女弟)인 아난타는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불괴불사녀 아라를 거느리고 미친 듯 그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 * * *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 만발해 있었다. 정원의 주인은 아마 꽃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그 수많은 꽃송이 하나하나가 지극한 정성 속에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의 소박한 현판에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광화원(朝光花園)>
이름 그대로 아침의 밝은 햇살 아래 그림처럼 펄쳐져 있는 장원이었다.
장원은 고요하고 평화로운데 지금 장원의 넓은 정청(正廳)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청에는 네 명의 인물이 보였다.
상석에는 한 청수한 중년선비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절세적인 대종주(大宗主)의 기도와 고아한 선비의 풍모를 아울러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앞에는 한 미서생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중년선비는 누구인가?
그는 무린의 부친인 청유수사 무군이었다.
청유수사 무군의 옆에는 고려충과 고려금이 앉아 있었다.
중인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몹시 중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올 숙연한 분위기였다.
마침내 청유수사 무군이 무린을 향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린아, 너의 짐작대로 우리 문중은 머나먼 동방에 있는 환인천제문이다!"
역시 그랬던가?
무린의 표정은 저절로 굳어졌다.
청유수사의 말이 이어졌다.
"환인천제문은 삼백 년 전 원세무황 상관무륭의 십만 정예에게 짓밟혀 처참하게 멸문당했으나 그 뒤 가까스로 명맥을 이을 수가 있었다."
무린은 성목을 형형히 빛내며 부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의 백부이신 무환(武桓) 선형(先兄)께서는 바로 환인천제문의 십구대 문주이셨다."
"……!"
무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백부님이 환인천제문의 문주이셨다고… 그러나 백부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청유수사의 얼굴에는 서서히 분노의 빛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 환인천제문에는 일군의 무서운 살수단이 침입하여 너의 백부님과 백모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살상했다. 그 때 너의 어머님도 목숨을 잃었고 나는 겨우 너를 구하여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살수단이라면……."
"바로 잔양살막이다!"
순간 무린의 눈동자에는 섬뜩한 한기가 스쳐 갔다.
"잔양살막……!"
잔양살막이 바로 백부 일족과 모친을 죽인 피맺힌 원수였단 말인가?
무린의 전신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청유수사의 말은 무겁게 이어졌다.
"잔양살막의 환인천제문에 침입한 것은 환단무극경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상감잠룡신검을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
"결국 잔양살막은 상감잠룡신검을 탈취하여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그 비밀을 풀지 못하자 아극타와 손을 잡고 검을 그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음……."
무린은 침성을 토해 냈다. 그의 안광은 무섭게 빛났다.
'상감잠룡신검은 지금 아난타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백상회는 상감잠룡신검을 차지하기 위하여 천이백 장강대선단으로 사령파황루를 공격했으나 엄청난 희생만을 치루지 않았던가?
청유수사는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린아, 백부님께서는 네가 태어나자마자 즉시 너를 환인천제문의 제이십대 문주로 지명하셨다. 그것은 네가 희대의 절대재화(絶代才華)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무린은 흠칫했다.
"환인천제문의 제이십대 문주……!"
갑자기 청유수사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백부님께서는 너를 환인천제문의 삼백년지한(三百年之恨)을 해결할 천의자(天意者)로 지명하셨다!"
"……!"
"하늘의 뜻에 따라 중원을 심판할 동방의 응징자라는 뜻이다!"
순간 무린은 격렬한 충격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다.
오오, 중원을 심판할 동방의 응징자가 바로 무린이었다니천하가 경악할 일이 아닌가?
무린의 전신은 세찬 격동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바로 동방의 응징자란 말인가!'
청유수사의 음성도 격동으로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내가 불과 두 살밖에 안 된 너를 데리고 중원으로 들어온 것은 너를 완벽한 중원의 심판자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또한 너에게 일 년 간 중원무림을 경험하게 한 것도 완벽한 응징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비밀은 모두 밝혀졌다.
무린은 동방의 응징자로서 중원을 심판할 거대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무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질 때, 청유수사의 장중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린아, 너는 오늘부터 환인천제문의 제이십대 문주이다. 그리하여 너는 중원을 응징할 권한과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의 단호한 결언(決言)이 떨어졌다.
"너는 중원을 심판하여 가차없이 응징하라!"
오오, 무서운 말은 드디어 떨어지고 말았다.
- 중원을 심판하여 가차없이 응징하라!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할 한 마디가 아닌가?
돌연 무린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패자(覇者)의 기도가 뻗쳤다. 천하를 압도할 엄청난 기도였다.
그는 힘있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자는 반드시 중원을 심판하여 가차없이 응징하겠습니다!"
이 순간 중원무림인들이 무린의 엄청난 기도를 목격했다면 모두 공포의 식은땀을 흘렸으리라.
고려충과 고려금은 감격과 경외의 시선으로 무린을 우러르고 있었다.
'과연 천의자이시다!'
이 때가 바로 천하무림의 운명이 거대한 대변환으로 접어드는 무림사적 순간이었다.
훗날 중원무림인들은 알게 되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중원무림의 흐름이 급전직하하는 무서운 일장(一章)이었다는 것을!
무린은 부친과 함께 한 밀실로 들어갔다.
천의실(天意室).
조광화원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비밀석실이었다.
청유수사는 석실로 들어서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곳에는 환인천제문 최고의 현공(玄功)이 소장되어 있다."
석실 중앙에는 탁자 위에 하나의 목합이 놓여 있었다.
청유수사는 목합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얇은 화선지로 된 고서(古書)가 두 권 들어 있었다.
청유수사가 다시 말했다.
"이 두 권의 비급을 공부하면 우리 동방의 무학이 외화허영(外華虛榮)한 중원무학이나 교간(巧奸)한 동왜무공에 비해 한 차원이 높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린은 부친의 말에 경건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드디어 환인천제문 무학의 정수에 접하게 되는구나!'
청유수사의 음성은 싸늘한 한기를 띄기 시작했다.
"중원이나 동왜에서 우리 환인천제문을 멸문시키려 한 것도 동방의 정오심현(精奧深玄)한 무학에 질투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한 권의 고서를 집어 무린에게 건네 주었다.
"먼저 이 비급을 살펴보아라. 너는 이미 모든 무공의 근본을 수련했으니 곧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무린은 공손히 비급을 받았다.
책자의 표시에는 여섯 글자가 새겨 있었다.
<환인천제도결(桓因天帝道訣)>
무린은 표지를 넘겼다.
비급은 오 장으로 되어 있었다.
무린은 은연중 긴장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일장 무궁심공결(無窮心功訣)>
<제이장 홍단운공결(紅丹運功訣)>
<제삼장 대기기공결(大氣氣功訣)>
<제사장 만류합공결(萬流合功訣)>
<제오장 무상폐공결(無上閉功訣)>
내용을 살펴보는 무린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이것은 중원무학과는 그 기본원리가 완전히 다르다!'
진정 환인천도결은 신비롭고도 불가사의했다. 세상에 이러한 무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원무림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 것인가?
무궁심공결!
무린이 이미 수련한 천지무궁심법의 근본이 되는 심공이었다.
중원무학은 심공의 최고경지를 무아(無我)에 두고 있으나 무궁심공의 근본은 유아(有我)에 있었다.
무아란 일종의 허구이며 환상이며 유아에서 모든 운공의 출발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놀랍고도 파격적이고 실제적인 원리였다.
이 심공을 완성하면 영원하고도 본질적인 실체를 정립하여 완전한 신인경(神人境)에 이른다.
홍단운공결!
단전운공법(丹田運功法)보다 한 차원 높은 운공법이었다.
일신의 진기를 회로역주천(回路逆週天)시켜 운행할 수 있으므로 진기운용(眞氣運用)이 무한무극경(無限無極境)에 이른다.
대기기공결!
경이적인 신비공이었다. 대기에 합류될 뿐만 아니라 대기를 다스리는 천기합일공(天氣合一功)으로 모든 강유기공(强柔氣功)이 여기서 출발한다.
그야말로 대자연과 인간이 서로 합일되는 무상현극공(無上玄極功)이었다.
만류합공결!
천하의 모든 무공에 통달할 수 있다는 만종일도원본결(萬宗一到元本訣)이었다.
이 요결을 깨우치면 천하만류공에 무불통소한 전능인이 될 수 있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신지도(武神之道)였다.
무상폐공결!
환인천도결의 최고궁극(最高窮極)적인 천공(天功)이었다.
인간이 창출한 모든 무공을 폐쇄하거나 파해시키는 불가사의한 공능을 지니고 있다.
결국 무상폐공결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무공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환인천도결을 살펴본 무린은 비로소 동방의 무학이 중원이나 동왜의 무공에 비해 한 차원 높다는 이유를 분명히 깨달았다.
'환인천제문의 무학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무학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치되고 조화되는 무학이다!'
무린은 성목을 형형히 빛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환인천제문의 무학이야말로 천하유일의 진정한 무학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중원이나 동왜의 무공이 사람을 살상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비해 우리 동방의 무공은 그것을 제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유수사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린아! 너는 환인천제도결을 한 번 훑어보고 그것을 이내 깨달았으니 진정 놀라운 오성을 지니고 있구나!"
이어서 그는 엄숙한 신색으로 말했다.
"환인천제문의 개문(開門) 목적은 오직 홍익인간(弘益人間)에 있으니 그 무학 역시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이로운 것이어야 하느니라."
<홍익인간(弘益人間)>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이롭게 한다.
과연 중원천하에 수없이 널려진 무림대소문파 중에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지닌 문파가 몇 개나 될까?
오직 야망과 탐욕과 은원의 피비린내나는 소용돌이 속에 무섭고 추악한 살상과 음모만이 난무하는 무림이 세계가 아니던가?
무린은 무한한 감동을 느꼈다.
'환인천제문이 그토록 위대하고 숭고한 문중일진대… 이제 내가 제이십대 문주가 되었으니…….'
무린은 아득한 동방의 어딘가에 있을 환인천제문을 생각하며 가슴 속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때 청유수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상론(理想論)만 가지고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엄중히 응징하는 것이 바로 천리에 따르는 것이니라!"
그는 나머지 한 권의 비급을 무린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하여 환인천제문은 응징자가 사용할 무공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응징자가 사용할 무공. 무린은 긴장하여 비급을 받았다. 비급의 표지에는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상감잠룡신검법(象嵌潛龍神劍法)>
무린은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검보(劍譜)는 사 장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장 비홍운검법(飛鴻運劍法)>
<제이장 무영화검법(無影化劍法)>
<제삼장 정정심검법(靜靜心劍法)>
<제사장 태극검보(太極劍譜)>
역시 중원의 검공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불가사의한 검법이었다.
비홍운검법!
검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천하만류검공(天下萬流劍功)의 기본원리였다.
이 운검법의 수련만으로도 일류 검인(劍人)이 될 수 있다.
무영화검법!
검이 없어도 일신의 진기로써 모든 검공을 펼칠 수 있다.이미 검신경(劍神境)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정정심검법!
마음만으로 검공을 펼칠 수 있으니 일반 무림인은 이해할 수도 없는 환상검(幻想劍)이다. 능히 천지를 제압할 수 있는 최고궁극경(最高窮極境)이었다.
태극검보!
태극검보는 구체적인 일곱 가지의 검식(劍式)이었다.
제일식 일선풍(一旋風), 제이식 일기개(一氣蓋), 제삼식 일섬류(一閃流), 제사식 멸절강(滅絶 ), 제오식 환영강(幻影 ), 제육식 회광천(回光天), 제칠식 태극천(太極天).
태극검보의 칠 검식이 어떤 영능을 지니고 있는지는 펼쳐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원을 응징하기 위하여 특별히 창안된 검식이라면 그 무서운 위력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훗날 중원천하는 이 칠 검식의 공황(恐慌)적인 절대력 앞에 전율의 몸서리를 쳐야 했다.
청유수사가 말했다.
"이 칠 검식은 물론 검 없이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상감잠룡신검을 사용하면 열 배의 위력을 얻을 수가 있다. 때문에 상감잠룡신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무린의 눈동자는 심유하게 번쩍였다.
'그렇다면 아난타가 지니고 있는 상감잠룡신검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청유수사가 다시 말했다.
"린아, 너는 빠른 시일 안에 이 두 권의 비급을 연성하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너는 완전한 동방의 응징자로서 탄생되는 것이다!"
무린은 힘있게 대답했다.
"소자는 아버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청유수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나는 네가 중원을 단호히 응징한 뒤 동방의 환인천제문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는 약간 처량한 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우리의 혈육과 고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있다. 우리의 과거와 그리고 미래가……."
"……!"
"또한 너에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이 그곳에 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바로 너의 혼약자(婚約者)이다."
무린은 흠칫했다.
"혼약자……!"
청유수사의 음성은 나직해졌다.
"그녀의 이름은 보옥(寶玉)이라고 하며 고려국(高麗國)의 왕족(王族) 출신이다."
'보옥이라…….'
"그녀는 황실의 불행한 변란에 의해 갓난아이 때 환인천제문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너의 배필로써 마음을 정했다."
"……."
무린은 계속 놀라운 사실을 듣고 마음이 기이하게 파동쳤다.
청유수사는 다시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녀는 세 살 때 의문의 실종이 되고 말았다."
'실종……!'
"우리가 동방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드시 그녀를 찾아 내야 한다. 그녀는 하늘이 맺어 준 너의 배필이라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
청유수사가 입을 다물자 실내에는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린의 표정은 약간 복잡했다.
그는 두 살 때 떠났다는 환인천제문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득한 때의 일이 아닌가?
무린의 눈동자에는 꿈꾸는 듯 망연한 빛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 가려진 듯 희미한 기억…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문득 무린은 부친을 향해 물었다.
"아버님, 환단무극경이란 어떠한 곳입니까?"
청유수사는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곳은 환인천제문의 절대성역(絶對聖域)으로 나 또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상감잠룡신검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만 알 뿐이다."
"……."
실내에는 다시 침묵이 흐르고 무린의 눈동자는 점점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
* * * *
아수파라호(阿秀波羅湖).
중원의 아득한 서쪽, 대강(大江)의 최상류에 있는 거대한 호수(湖水)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호(淸湖). 그러나 이곳은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깊고 한적한 절역(絶域)이다.
호수 위에 아침의 햇살이 눈부시게 비칠 무렵, 홀연 수평선에 한 척의 거선이 나타났다.
혈해(血海) 속에서 솟아오른 듯 온통 붉은 빛 일색의 거선이었다.
거선은 대강으로 흘러드는 협구(峽口)를 향해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뒤를 이어 무수한 괴선(怪船)들이 모습을 나타냈으니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대선단이었다.
호수를 새까맣게 뒤덮고 출현한 정체불명의 대선단. 붉은 거선은 가까이 올수록 그 웅자(雄姿)가 뚜렷이 드러났다.
현란하도록 아름답고 장려한 모습이었다. 움직이는 거대한 궁전(宮殿)이라고나 할까?
호화홉고 웅장하기 짝이 없는 거선이었다. 그러나 중원의 배와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거선의 내전.
내전에는 기이한 혈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부시게 뻗어 오르는 혈광, 그 혈광 속에 한 거대한 혈포인의 환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섬뜩한 사기(邪氣)를 발산하는 무서운 환영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환영 앞에는 열 명의 여인이 석상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전신에서는 은은한 황금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황금광채의 나녀들, 그들에게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요기와 염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풍만한 유방, 대리석 기둥같이 미끈하게 뻗은 사지, 폭포처럼 흘러내린 머리결은 아랫배까지 늘어져 일렁거리고 있다.
엄청난 유혹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여체들이었다.
홀연 붉은 환영 속에서 가슴이 철렁하도록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본좌 절륜대법황의 천룡밀궁전(天龍密宮殿)이 이제 중원으로 들어간다!"
아아, 환영 속의 혈포인은 바로 아극타왕자의 사부이자 천축무림의 대지존(大至尊)인 절륜대법황이었다.
마침내 그가 중원대장정에 오르기 위해 아수파라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천룡밀궁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붉은 거선을 일컫는 말이다. 움직이는 거대한 궁전. 천룡밀궁전이 중원에 모습을 나타내면 천하의 형세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환영 속에서 다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들 혈금십천사령(血金十天邪靈)은 이제 중원을 마음대로 짓밟을 기회를 얻게 된다!"
소름끼치도록 사유한 음성이었다.
황금광채의 나녀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처절한 요기는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혈금십천사령(血金十天邪靈)>
그 황금광채의 나녀들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천룡밀궁전은 거대한 대선단을 거느리고 대강의 협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강줄기를 계속 따라가면 결국 중원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중원은 알고나 있는가? 아수파라호로부터 엄청난 태풍의 핵이 급속히 밀려오고 있음을…….
* * * *
천하무림은 기이한 침묵과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조락의 가을이 왔는데, 중원천하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것은 태풍전야의 음산하고도 불길한 적막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화약고(火藥庫)를 향해 도화선(導火線)이 급속히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적막이었다.
* * * *
중원의 절대권자가 있는 동백산의 웅장한 궁성도 아직은 조용했다.
궁륭마천부.
그곳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성역인 옥황궁.
그 아름다운 옥황궁의 정원에도 서서히 조락의 빛이 찾아들고 있었다.
만발했던 온갖 꽃들은 시들어 떨어지고 한여름의 영화를 자랑하던 푸른 잎들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시들어 가는 화목 뒤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인영이 불쑥 나타나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요즈음은 옥황궁의 주방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고급 우육완자를 도통 만들지 않으니… 요즘 같으면 정말 사는 재미가 없군."
동그란 얼굴에 살짝 치켜들린 코, 깡총한 바지를 입고 허리춤에 큼직한 공방대를 꽂고 있는 소녀.
바로 노노아였다.
어깨 위에는 여전히 늙은 대머리 앵무새 견자가 앉아 있다.
노노아는 풀밭 위에 벌렁 드러눕더니 곰방대에 불을 붙여 빠끔빠끔 빨기 시작했다.
연기를 푸푸 내뿜으며 그녀는 다시 투덜거렸다.
"젠장… 요즘은 담배도 별로 맛이 없단 말씀이야."
그녀는 맑은 가을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형을 만나본 지도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 소식조차 없으니… 형은 언제나 보고도 없이 돌아다니는 게 큰 탈이라니까. 이번에 나타나면 크게 혼을 내주어야지. 뒤에서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해 줘야지."
그녀는 연신 투덜거리며 불만이 대단하다. 무린이 좀체로 돌아오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분명하다.
무린은 아직 궁륭마천부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노노아는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어디서 웬 여자와 그러쿵 저러쿵 하느라고……."
이 때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언니로군."
정원 건너편에 하나의 백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풍도가 비범한 절세미녀!
바로 천부대군수 우문검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희미한 우수의 빛이 떠돌고 있었다.
노노아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곰방대를 뒤로 감추고 우문검지에게로 타박타박 다가갔다.
우문검지는 노노아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노아로구나."
노노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언니, 언니도 무린형이 나타나지 않아서 기분이 우울한 모양이죠?"
"……."
우문검지는 대답하지 않고 살며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에는 분명 미묘한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노노아가 다시 말했다.
"형이 설마 어떤 여자와 재미보느라고 안 나타나는 건 아닐 테고…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마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럴 때는 그저 한 잔 쭉 하고……."
노노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울창한 수목 쪽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그러자 수목 뒤에서 하나의 흑영이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냈다.
"꼬마아가씨가 이목이 매우 예리하군."
전신이 흑빛 일색인 미청년이었다.
그는 검은 무복에 검은 가죽신을 신었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두 자 길이의 흑검(黑劍)을 꽂았고, 검은 섭선을 들고 있었다.
얼굴만은 여인처럼 희고 화사해 대단한 미남자였다.
비수처럼 가느스름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서는 기이한 염기까지 느끼게 한다.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청년이었다. 미청년은 우문검지를 향해 말했다.
"불초는 부주(府主)를 찾아온 사람이오."
노노아가 다시 날카롭게 힐문했다.
"당신은 내가 누구냐고 묻는 말이 들리지 않나요?"
미청년은 매력 있게 싱긋 웃었다.
"나는 삼경자(三鏡子)라고 한다. 이제 만족했는가?"
"삼경자? 괴상망측한 이름이로군. 도대체 뭐하러 굴러다니는 사람이오?"
노노아의 무례한 언사에도 미청년의 태도는 지극히 상냥했다.
"나는 주로 사람을 죽이러 다니는 사람이지."
"……!"
우문검지의 수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그러고 보니 미청년의 전신에는 뭐하고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였다.
화사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불가사의한 살기로 보아 세상에 보기 드문 희대의 전문살수가 분명했다.
그러나 노노아가 일개 살수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 그녀는 앞으로 성큼 나섰다.
"당신이 그렇게 사람을 잘 죽인단 말예요?"
여차하면 일수를 펼칠 기세다.
미청년은 다시 싱긋 웃었다.
"나는 필요에 따라 정확하게 죽일 뿐 잘 죽이려고 애쓰지는 않지."
사람 죽이는 일에 대해서 이토록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사내도 세상에 흔치 않으리라. 마치 즐거운 오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 때 우문검지가 돌연 한쪽 수풀 속을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용무가 있으면 본녀 앞에 모습을 보여라!"
그러자 수풀이 기이하게 흔들리며 세 노파가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스스스스-!
음침한 인상에 잿빛 머리카락의 시체 냄새를 물씬 풍기는 팔순 노파들이었다.
미청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옥삼마녀… 사사환미 우주향의 수하들이로군."
미청년의 말대로 그들은 무서운 전대마녀들로 우주향의 수하였다.
하면 그들은 무슨 일로 이곳에 나타났는가?
우문검지가 위엄 있게 물었다.
"본녀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가?"
지옥삼마녀 중의 일마녀가 음산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대무후제국 승상의 명에 따라 대존야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소."
우문검지가 재차 물었다.
"대존야의 행방을 추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대무후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요."
노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구 마음대로 데려가? 내가 있는 한 어림도 없지!"
지옥삼마녀 중의 이마녀가 우문검지를 향해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군수, 지금 대존야는 어디에 있소?"
노노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우리도 지금 그를 찾지 못해 안달인데 당신들까지 나타나서 사람을 귀찮게 할 셈이에요?"
지옥삼마녀는 일제히 노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는 섬뜩한 살기가 나타났다.
돌연 미청년 삼경자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지옥삼마녀, 당신들은 헛수고를 하지 말고 돌아가는 게 좋겠소."
그러자 일마녀가 노하여 소리쳤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삼경자의 화사한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쳐 갔다.
"당신은 생긴 것처럼 입도 거칠군!"
지독한 모욕이었고, 이런 모욕을 받고도 참고 있을 일마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즉시 삼경자를 향해 번개처럼 살수를 뻗어 갔다.
"네놈은 삶에 회의를 느낀 모양이구나!"
신쾌독랄한 살초(殺招)!
순간 삼경자의 오른손이 가볍게 허리춤의 흑검을 잡는가 싶자 한 줄기 묵광이 허공에 번쩍였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일마녀의 신형이 짚단처럼 뒤로 넘어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의 일신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마녀와 삼마녀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저럴 수가……!"
두 마녀는 앞뒤를 생각할 틈도 없이 삼경자를 향해 좌우에서 사납게 덮쳐들었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찰나지간 삼경자의 흑검이 다시 한 번 싸늘한 묵광을 허공에 뿌려 냈다.
번쩍-!
이내 소름끼치는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크아아!"
"으악!"
이마녀와 삼마녀 역시 세로로 반듯하게 양단되어 짚단처럼 넘어갔다.
놀랍게도 그들 역시 삼경자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했으니, 지옥삼마녀의 육신은 찰나간에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세상에 이토록 절묘하고도 잔혹한 살검을 구사하는 고수가 있었던가?
삼경자는 흑검을 거두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대가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내 취향에 맞지 않지만 피냄새를 맡으면 항상 신선한 느낌이 들지."
그것은 비정한 전문살수의 미소였다. 그리고 천부적인 전문살수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문검지는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지옥삼마녀를 양단한 그 검초는 완벽하게 정확했다!'
또한 삼경자의 검초는 무우를 양단하는 것처럼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무감동안 동작이었다.
그것은 고도의 수련을 거친 전문살수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완전한 검초였다. 아니, 아무리 수련을 쌓는다 해도 천부적인 살수의 자질이 없다면 결코 그러한 검초는 펼칠 수가 없다.
삼경자는 의심할 필요도 없는 희대의 천재살수였다.
노노아마저도 안색이 창백해져서 삼경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 무서운 녀석이다!'
삼경자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나는 이만 부주를 만나려 가야겠군."
이 때 허공에서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혈향흑장미… 부주를 만나서 무슨 거래를 할 생각인지 모르지만 천하대사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쉰 목소리였다.
"……!"
삼경자는 흠칫해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득한 허공에 하나의 붉은 등롱이 연(鳶)처럼 떠돌고 있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팔각홍사등(八角紅絲燈)이었다.
대낮인데도 등롱에는 불이 밝혀져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우문검지와 노노아도 흠칫 놀랐다.
"유령사망등(幽靈死亡燈)이다!"
<유령사망등(幽靈死亡燈)>
그것이 출현하는 곳에는 항상 엄청난 대혈겁(大血劫)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유령사망등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왜 출현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혈겁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령(傳令)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유령사망등은 천하제일의 공포금기(恐怖禁忌)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삼경자가 바로 혈향흑장미라는 사실이 아닌가?
혈향흑장미. 피냄새나는 검은 장미라 불리는 고금제일의 여류살수(女流殺手).
천하를 차지하려는 자는 자신을 사라고 광언(狂言)을 했다는 여인. 삼경자는 바로 그 혈향흑장미라는 것이다.
삼경자는 허공에 떠 있는 유령사망등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귀신놀음 따위에는 전혀 취미가 없으니 이야기할 것도 없군."
다음 순간 그녀는 장내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유령사망등도 느릿하게 허공을 흘러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혈향흑장미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지."
남녀를 구별할 수 없는 그 쉰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우문검지의 표정은 약간 굳어져 있었다.
'무림에는 온갖 신비로운 존재들이 계속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대존야께서는 왜 돌아오시지 않는 것일까?'
그 때 노노아가 불쑥 한 마디했다.
"형이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별의별 것들이 다 설쳐 대는군. 젠장!"
그녀는 불꺼진 곰방대를 꺼내어 빠끔빠끔 빨아 댔다.
우문검지는 대정전 쪽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회합시간이 되었다.'
옥황궁의 대정전.
전내에는 궁륭마천부의 최고수뇌부가 총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당대의 중원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상석에는 부주인 파세천무황 우문환탑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만인을 압도할 만한 제왕의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우문환탑의 뒤에는 팔대금위령(八代禁衛令)이 엄중히 늘어서 있었다. 그의 우측에는 네 명의 비범절륜한 자의인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중원을 사분(四分)하여 통치하고 있는 천부사대분궁주(天府四大分宮主)였다.
<천부동궁주(天府東宮主) 제해도왕(制海刀王) 이극(李極)>
<천부서궁주(天府西宮主) 적양지존(赤陽至尊) 등소유(鄧少儒)>
<천부남궁주(天府南宮主) 남패신장(南覇神將) 공손수악(公孫秀岳)>
<천부북궁주(天府北宮主) 운중룡(雲中龍) 제갈무강(諸葛武 )>
우문환탑의 좌측에는 천부육대원주(天府六大院主)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기인(老奇人)들로서 궁륭마천부의 장로급이었다.
<무련원주(武鍊院主) 만수신행(萬秀神行) 남궁상(南宮相)>
<문성원주(文星院主) 무중제일학(武中第一學) 유황(柳黃)>
<백예원주(百藝院主) 요요선자(妖妖仙子) 월빙수(月氷水)>
<천기원주(天機院主) 우기비장자(宇機秘長子)>
<사헌원주(司憲院主) 공선생(空先生) 도경(道京)>
<호법원주(護法院主) 개세천장(蓋世天將) 사마주강(司馬朱江)>
그들은 모두 백 세가 넘은 전대기인들로서 일신의 공력조예가 최극경에 도달해 있었다.
그 외에 천부대군수 우문검지를 비롯한 천부십이장(天府十二將)과 천부이십사영(天釜二十四英)이 한쪽에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궁륭마천부의 최고의 무장(武將)과 고수들이다. 그들의 무공은 일당천(一當千), 그야말로 궁륭마천부의 동장철벽(銅墻鐵壁)과 같은 절정고수들이다.
그런데 다음 한쪽에는 무림 오파일방(五派一幇)의 장문인들이 보였다.
<소림사(少林寺) 장문인 무오대선사(無悟大禪師)>
<무당파(武當派) 장문인 천령진인(天靈眞人)>
<아미파(峨嵋派) 장문인 화겁사태(化劫師太)>
<공동파( 派) 장문인 상청자(上淸子)>
<장백파(長百派) 장문인 백호상인(百虎上人)>
<개방( 幇) 방주(幇主) 고죽천개(古竹天 )>
오파일방이 이미 궁륭마천부의 일개 분파(分派)로 전락된 현금 무림에서 그들의 위세 역시 지난날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무림에 불쑥불쑥 솟아오른 고봉(高峯)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었다.
그밖에도 전내에는 당대의 중요인물이나 일류고수들이 무수히 배석해 있었다. 하나하나가 절세영웅들의 면면(面面)이었다.
도대체 궁륭마천부는 무슨 일로 이토록 거대한 회합(會合)을 소집했는가?
전내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가득한데 문득 우문환탑이 장중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께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밝히고자 하오!"
"……!"
그의 한 마디가 떨어지자 전내의 모든 군웅들은 긴장하여 숨을 죽였다.
우문환탑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무림의 법이자 진리이다. 그가 중대한 결심을 했다면 그것은 곧 무림의 운명이 되고 만다.
우문환탑의 말이 이어졌다.
"삼백 년 전 원세무황께서는 동방의 환단무극경을 찾기 위해 십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대장정을 떠났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시고 말았소!"
그는 무슨 말을 할 셈인가?
"본좌는 그것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던 바 이번에 환단무극경에 대한 단서를 입수하게 되었소!"
환단무극경에 대한 단서라니, 군웅들 사이에는 기이한 동요가 일어났다.
우문환탑의 장중한 음성은 갑자기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본좌는 지난날 원세무황께서 이루지 못하신 숙원(宿怨)을 풀고자 이번에 다시 십만의 무적대군단을 거느리고 환단무극경을 향한 제이차 동방대장정에 오르기로 결심한 것이오!"
돌연 전내에는 엄청난 동요가 일었다.
"오오……!"
"오……!"
제이차 동방대장정!
우문환탑이 십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중원무림사상 두 번째의 동방대장정에 오른다는 것이다.
모든 군웅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전내의 기류가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이 때 계피학발에 체격이 고대한 한 선풍도골의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노신(老臣)이 감히 진언하건대 현금의 무림형세로 보아 동방대장정을 펼치기에는 시기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그는 사현원주인 공선생 도경이었다.
그는 직책이 직책이니만큼 부주의 어떠한 의견이라도 정면으로 반대할 수는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공선생 도경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현금무림은 대무후제국, 백상회, 천축세력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운데다가 최근에는 동방사라는 심상치 않은 비밀조직의 출현으로 중원형세가 미묘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외다!"
우문환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선생의 말씀은 지당하오. 그러나 그러한 이유 때문에 본좌는 동방대장정이 더욱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세력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바로 환단천극경이기 때문이오!"
우문환탑의 말은 사실이었다.
환단무극경은 천하무림인 모두의 마지막 목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군웅들은 우문환탑의 결단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되면 천하대사는 이미 결정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림사 장문인 무오대선사가 몸을 일으켰다.
"아미타불… 부주께서 중원무림의 삼백 년 숙원을 위해 제이차 동방대장정에 오르신다면 천하인은 모두 그 위대한 장도를 축원할 것이외다!"
우문환탑이 다시 장중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를 대리하여 무림에 출도한 대존야가 귀환하는 대로 우리는 동방대방장정의 장도에 오르게 될 것이오!"
결언은 내려졌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무거운 음성이 전내에 울렸다.
"본인은 이미 돌아왔소이다."
동시에 한 절준한 백의문생이 대전 중앙에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군응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대존야께서 돌아오셨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대존야 무린이었다.
무린은 마침내 조광화원에서의 무공수련을 마치고 궁륭마천부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우문환탑은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존야, 드디어 돌아오셨구료!"
모든 군웅들은 무린을 향해 일제히 예를 표했다.
"불초들이 대존야를 뵙습니다."
무린은 우문환탑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