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녀(小魔女)
무린의 신색은 물처럼 고요했다.
우문환탑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존야, 그 동안의 위업을 진심으로 치하하며 대존야의 귀환을 기쁘게 환영하는 바이오!"
무린은 놀랄 만큼 담담했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허리의 황금패검을 풀어 우문환탑에게 내밀었다.
"본인은 이제 천자인검(天子印劍)을 부주에게 돌려드리고자 하오."
천자인검을 돌려주는 것은 대존야의 직위를 사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웅들이 놀람을 금치 못할 때, 무린의 무거운 말이 이어졌다.
"최초로 약속한 대로 본인은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소이다. 본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우문환탑의 어조는 약간 격동되었다.
"대존야, 대존야는 아극타를 처치하여 중원의 커다란 후환을 제거했지만 아직 천하는 평정되지 않고 있소. 지금 본좌는 대존야에게 중원을 맡기고 동방대장정에 오를 계획을 세우고 있소!"
무린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문환탑을 정시하며 싸늘하게 물었다.
"삼백 년 전 원세무황 상관무륭은 부질없는 야망 때문에 동방대장정에 올라 엄청난 천죄를 범하고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소. 부주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무림사적 과오를 되풀이하려 하시오?"
우문환탑은 물론 전내의 모든 군웅들은 크게 놀랐다. 무린에게서 의외의 힐문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군웅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질 때, 무린의 냉엄한 말이 이어졌다.
"지난날 상관무륭은 환단무극경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동방의 환인천제문이라는 한 평화로운 문중을 처참하게 멸문시켰소. 당시에 환인천제문의 삼천 명 문도(門徒)는 모두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에는 죄없는 식솔들 뿐만 아니라 갓난아이들까지 무수히 포함되어 있었소!"
"……!"
"……!"
군웅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우문환탑도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전대비사(前代秘事)가 밝혀지고 있지 않는가?
무린의 눈동자는 비수처럼 차갑게 번쩍였다.
"그러나 환인천제문은 멸망하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러 삼백 년 전 상관무륭이 저지른 천죄를 심판할 동방의 응징자를 중원에 보냈소!"
동방의 응징자!
드디어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무서운 말이 흘러 나왔다.
군웅들은 일제히 안색이 대변했다.
무린은 군웅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동방의 응징자는 앞으로 밀비천전을 멸절시키고 중원을 심판할 뿐만 아니라 환인천제문의 성역인 환단무극경을 침범하려는 무리들을 가차없이 응징하게 될 것이오!"
무린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이 때 그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본인은 동방의 응징자로서 그것을 미리 예고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오!"
오오, 그게 무슨 말인가? 대존야가 동방의 응징자라니…….
모든 군웅들은 귀를 의심했다.
경악의 물결이 전내를 휩쓸어 갔다.
우문환탑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무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빛이 나타났다.
또한 수많은 군웅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심한 충격을 받은 여인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천부대군수 우문검지였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럴 수가…….'
무린은 벌써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 전내의 군웅들은 모두 석상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동방의 응징자라는 한 마디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다.
우문환탑조차도 넋을 잃고 있을 정도였다.
무린이 대정전을 나섰을 때, 한 소녀가 급히 달려오며 환성을 터뜨렸다.
"형,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는 거야?"
바로 노노아였다. 노노아는 무린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자꾸 혼자 돌아다니면 그대로 안 둘 거야, 정말!"
무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노아, 우리는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노노아는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했어, 형……?"
"잘 있어라, 노아."
무린은 노노아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준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갔다.
노노아는 멍해졌다.
"……."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때 한 대의 마차가 무린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마부석에는 벙어리 사내 철묵이 타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어 서며 안에서 세 남녀가 내렸다.
파랑십자도 사원과 만폭왕 당유기, 백파은섬비 벽상하. 바로 그들이었다.
무린은 마차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서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궁륭마천부의 대존야가 아니오. 나는 앞으로 여러분의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을 잊지는 않을 것이오."
말을 마친 무린은 궁문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
"……!"
철묵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사원, 당유기, 벽상하도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무린은 이미 밖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돌연 노노아가 마차에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철묵, 어서 형을 따라가요!"
철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채찍을 힘차게 휘둘렀다.
두두두두-!
마차는 곧 궁문 밖으로 급히 달려 나갔다.
노노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늙은 앵무새가 흥분했는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개자식!"
사원, 당유기, 벽상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대정전의 모든 군웅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문환탑의 표정은 여전히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이 때 하나의 흑영이 전내에 소리 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혈향흑장미 삼경자였다.
삼경자는 우문환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부주, 귀하가 원한다면 본인이 동방의 응징자를 제거해 줄 용의가 있소!"
"……!"
"……!"
군웅들은 흠칫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우문환탑도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삼경자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인은 혈향흑장미라 불리는 사람이오. 부주와는 좋은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왔소."
군웅들은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혈향흑장미!'
우문환탑은 삼경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과연 고금제일의 여류살수다.'
우문환탑은 삼경자가 불세출의 천재살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도 즉각 알아보았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가공할 예기(銳氣)를 꿰뚫어 본 것이다.
우문환탑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동왜 출신이오?"
삼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우문환탑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잔양살막과는 어떤 관계가 있소?"
"본인의 행사는 잔양살막과 별다른 관계가 없소."
"……!"
삼경자는 허리춤의 흑검을 툭툭 쳤다.
"부주가 원한다면 나는 동방의 응징자를 처치하는 대신 한 가지 요구를 하고 싶을 뿐이오."
우문환탑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삼경자를 똑바로 정시하며 물었다.
"한 가지 요구란 무엇이오?"
삼경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환단무극경에의 동행(同行)!"
우문환탑의 짙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삼경자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제의를 하는가? 무림의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단순한 동경인가?
전내에는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우문환탑의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문득 우문환탑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이채가 스쳐 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본좌는 귀하의 제의를 수락하겠소."
삼경자는 화사하게 빙긋 웃었다.
"부주는 과연 현명하군요."
두 사람의 이상한 거래는 의외로 쉽세 이루어졌다.
우문환탑은 혈향흑장미 삼경자의 힘을 빌어 무린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침내 무린과 우문환탑 사이에는 숙명적인 피의 대결이 시작되었는가?
우문환탑의 눈동자는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궁륭마천부의 천년패도천하를 제지할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는 동방의 응징자나 밀비천전이 궁륭마천부의 앞을 가로막을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드디어 파세천무황 우문환탑도 그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년패도천하!
그 거대한 야망의 발톱이 칼날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모든 군웅들의 눈동자도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는데, 갈등과 고뇌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한 여인은 다만 천부대군수 우문검지였다.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광막한 벌판을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벙어리 사내 철묵이었다.
마차 안에는 누가 타고 있는가?
물론 무린이 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노노아가 앉아 있었다.
노노아는 불꺼진 곰방대를 기분좋게 빠끔빠끔 빨고 있었다.
그녀는 무린과 억지로라도 함께 가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이다.
무린이 무슨 목적으로 어디를 가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건 철묵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무린이 이 세상의 유일한 친구였다.
무린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러나 그의 성목은 심유하게 빛나고 있었다.
'추격대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이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동시에 뒤쪽 지평선에서 황토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며 거대한 대군단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군단은 마차를 향해 노도처럼 말려오고 있었다. 분명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이었다.
순식간에 일만 기(騎)에 이르는 대군단은 해일처럼 급박한 기세로 밀어닥쳐서 마차를 완전히 에워싸고 말았다.
구름 같은 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솟아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마차는 대군단에 겹겹으로 포위된 채 멈추어 서 있었다.
마차 앞에는 한 은갑패검의 무장이 우뚝 서 있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마차를 응시한 채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 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무린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무린은 우문검지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대군수, 본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소?"
우문검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대존야께 한 가지 말씀을 전하라는 아버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무린이 말했다.
"본인은 이미 대존야가 아니오. 그러나 영존께서 어떤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지 들어 보도록 하겠소."
우문검지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아버님께서는 궁륭마천부와 대존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존의 말씀을 명심하겠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
"……!"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무린과 우문검지 역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이 된 것이다.
돌연 우문검지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다음 순간 우렁찬 울음을 토한 말은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도 일제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순식간에 대군단은 왔던 길을 되돌아 썰물처럼 멀어져 갔다.
구름 같은 황토먼지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며 무적대군단은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무린은 그 자리에 서서 급속히 사라져 가는 대군단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문검지… 부디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오.'
이 순간 무린의 얼굴에는 착잡한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아득히 수평선 너머로 미친 듯 말을 달리는 우문검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흐르고 있는 것을 그가 어찌 알 수 있으랴?
무린은 발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이 때 이번에는 앞쪽에서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황토먼지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두두두두-!
동시에 약 일천의 기마대(騎馬隊)가 모습을 나타냈다. 기마대는 마차를 향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일진선풍! 마치 한 줄기 선풍처럼 급박하게 밀어닥치는 기마대였다.
그 기마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순식간에 일천 기마대는 마차 앞에 이르러 일제히 멈추어 섰다.
히이이잉-!
우렁찬 말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한 중년인이 보였다.
구 척 거구의 중년대한!
석탑처럼 강인한 체구에 철사같이 뻣뻣한 고슴도치 수염은 천하대역사(天下大力士)의 위맹무쌍한 풍모를 지녔다.
두 눈은 횃불처럼 이글거리고 등에는 거대한 강철대궁(鋼鐵大弓)을 매고 있었다. 그의 위세는 가히 태산을 뽑아 낼 듯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무린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동방사 총사령(總司領), 고려웅(高麗雄)이 문주님을 뵙습니다!"
아, 그는 바로 동방사의 영도자인 총사령이었다.
총사령 고려웅의 뒤를 이어 고려충과 고려금이 모습을 나타냈다.
고려충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문주님의 신변을 걱정한 아들이 굳이 영접을 나온다고 하기에 노신도 함께 왔소이다."
총사령 고려웅!
그는 바로 고려충의 아들이었고 고려금의 부친이었다.
물론 위풍당당한 일천 기마대는 경천동지할 무공을 지닌 동방사의 정예였다.
<천의신기대(天意神騎隊)>
바로 동방의 응징자를 보위할 환인천제문의 절정고수들이었다. 앞으로 중원천하를 광풍노도처럼 종횡할 천의신기대인 것이다.
무린은 천의신기대의 늠름한 용자(勇者)를 대하자 가슴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중원이여, 너는 곧 나의 응징을 받게 되리라!'
무린은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중원을 응징할 것인가?
그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나는 먼저 대무후제국을 찾아가 밀비천전을 멸절시키고 말리라. 다음에는 중원천하를 내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게 하리라!'
진정 무서운 결심이 아닌가!
이윽고 천의신기대는 마차를 호위하여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광막한 벌판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운명의 장이 열리는 웅장한 소리였다.
* * * *
계림곡.
수려한 계곡으로서 숲은 아름답고 물은 깨끗하다.
그런데 지금 계곡에는 빗발이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쏴아아아-!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빗발 속에서 계림곡 전체는 짙은 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머리가 쭈빗해지는 기괴한 살기였다.
짙은 먹구름으로 가려진 하늘, 계곡은 어두컴컴하게 잠겨 있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
이 때 곡구(谷口)에 하나의 흰 구름덩이가 나타났다.
백무(白霧)! 그것은 분명 하얀 운무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백무는 계곡으로 들어서서 서서히 다가왔다.
도대체 백무의 정체는 무엇인가?
가까이 올수록 백무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아, 그것은 하나의 백교(白轎)였다.
백교의 형태는 커다란 연꽃을 닮았고, 주위에는 운무가 이상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없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백교. 그러나 그 백교는 알 수 없는 사기(邪氣)와 요기(妖氣)로 감싸여 있었다.
또한 그 백교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교자(轎子)가 있었던가?
그 백교에는 누가 타고 있는가?
더욱 괴이한 일은 백교가 다가오는데 따라 주위의 기류가 이상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휘류류류-!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도 백교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백교가 다가오는 속도는 매우 느린 듯했지만 사실상 매우 빨랐다.
어느 새 백교는 계림곡 한가운데 이르렀다.
곡내의 기류는 괴이한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 갔다. 동시에 계곡에 충만해 있던 살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질식할 듯한 긴장이 팽배했다. 이 긴장된 살기는 무엇인가?
그러나 백교는 당장 폭발할 듯 팽팽히 당겨진 살기 속에 계속 미끄러지듯 전진한다.
돌연 이 때 울창한 숲 속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찢었다.
"제일진(第一陣), 쳐라!"
순간 숲 속에서 무수한 인영이 허공을 튕겨져 올랐다.
파아아앗-!
약 백여 명의 기습자, 그들은 백교를 향해 사납게 덮쳐 갔다. 그 번개 같은 신법으로 보아 모두가 일류고수임이 분명하다.
백교는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는가?
그런데 이 순간이었다.
츄리리리릿-!
백교에서 눈부신 옥섬(玉閃)이 전광처럼 뻗었다. 이어서 대기를 역류시키는 굉량한 음향이 울렸다.
콰우우우웅-!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일제히 거꾸로 솟구쳤다.
백여 명의 기습자는 일제히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엄청난 기류의 파동 속에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심맥이 끊어져서 날아가고 있었다.
모든 기습자가 시체로 변해 사방에 널려졌을 때, 백교 앞에는 한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장대한 체형에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기이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은 꿈꾸는 듯 몽롱하다.
이 신비괴이한 여인은 누구인가?
숲 속에서는 경악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무서운 마녀다. 제이진 쳐라!"
그러자 숲 속에서는 약 이백 명의 인영이 맹렬히 솟구쳤다.
파아아아앗-!
그들은 여인을 향해 노도처럼 덮쳐갔다.
여인을 단숨에 처참하게 격살할 기세였다.
순간 여인의 섬섬옥수가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츄리리리릿-!
눈부신 옥섬이 뻗치며 대기를 격탕시키는 굉량한 음향이 울렸다.
콰우우우웅-!
기류의 엄청난 파동 속에 이백 명의 기습자는 찰나간에 낙엽처럼 뒤집혀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역류하는 빗줄기가 거대한 분수처럼 흩어졌다.
쏴아아아아-!
이번에도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일순간에 이백 명의 기습자는 곡내 여기저기에 시체가 되어 널려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칠공이 무참하게 파열되어 있었다. 엄청난 기류의 파동에 내력이 완전히 격탕된 것이다.
숲 속은 조용해졌다.
쏴아아아-!
거꾸로 치솟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게 쏟아질 뿐이었다.
이 때 마차 안에서 영롱한 음성이 울렸다.
"아라, 숲 속을 모두 쓸어 버려라!"
아, 세상에 그토록 감미롭고 아름다운 음성이 있을까?듣는 사람의 뼛골을 녹일 듯한 교성이었다.
누구나 그 교성을 한 번 들으면 혼이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라는 바로 겁겁회아루에서 완전한 불괴불사인으로 태어난 그 공포스런 여인이 아닌가!
그녀는 바로 불괴불사녀 아라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은 허공을 가볍게 솟구쳤다.
그녀는 허공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숲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그녀의 쌍수에서 장내를 대낮처럼 밝히는 수천 줄기의 옥섬이 뻗었다.
츄리리리릿-!
대기가 뒤집히는 굉음이 뒤를 이었다.
콰우우- 콰우우우웅-!
다음 순간 울창한 숲이 풀포기처럼 뽑혀져 날아가며 수백의 인영이 돌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허공중에 흩어졌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미친 듯 소리쳤으리라.
-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악몽 속의 환영이었다!
콰콰콰콰-!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음향이 길게 꼬리를 끌며 방대한 숲은 순식간에 초토로 변해 버렸다.
가공전율! 진정 일장의 악몽인가?
이 때 하나의 인영이 아라를 향해 날아왔다.
"아라, 그대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계곡을 지나다가 우연히 아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주인인 아난타공주를 만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순간 아라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는지 무린을 향해 쌍수를 쭉 뻗었다.
찰나적으로 무린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는 아라가 무조건 출수히라하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급히 쌍수를 쳐 냈다.
"격공(擊功)!"
쿠르르르르-!
기류가 무섭게 파열되는 음향이 울렸다. 이어서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쾅-!
그러자 놀랍게도 무린의 신형이 거꾸로 뒤집혀서 튕겨지며 고통스런 신음이 울렸다.
"으헉!"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왈칵 뿜어지며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솟아올랐다.
진정 예기치 못한 경악할 일이 아닌가!
아라의 공력은 그만큼 가공무쌍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라도 몇 걸음 비틀비틀 물러섰다.
바로 이 때 하나의 날씬한 인영이 아라를 향해 맹렬히 덮쳐들었다.
"호호히히… 내가 너를 죽이겠다!"
가슴 철렁한 교소가 울리며 그 날씬한 인영은 날아드는 기세 그대로 사납게 쌍수를 쳐 냈다.
"단천마황공!"
아아, 그 날씬한 인영은 바로 마불소랑 경추였다.
그녀는 아직도 우주광신승의 지시대로 아라를 죽이기 위해 뒤를 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라의 몽롱한 표정에는 순간적으로 공포의 빛이 나타났다.
찰나 그녀는 번개처럼 옥수를 뻗었다.
콰우우웅-!
이내 대기가 온통 뒤집히며 계곡 전체는 완전한 혼돈의 세계로 함몰되었다.
숲 속의 무수한 고목이 거꾸로 솟구치며 거대한 강기( 氣)의 해일이 계곡을 맹렬히 휩쓸어 나갔다.
무린은 어떻게 되었는가?
무린의 신형이 허공을 부유하듯 아래로 추락할 때, 돌연 그의 몸은 빨리듯 한쪽으로 날아갔다.
다음 순간 그는 한 여승의 품에 가볍게 안겨 있었다.
성결하고 고고한 회의여승, 무한히 신비로운 기품과 위엄을 지닌 중년여승이었다.
여승은 무린을 품에 안자 나직이 소리쳤다.
"경추, 그만 돌아오너라!"
그러자 마불소랑 경추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에 입가에는 선혈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경추는 여승 앞에 이르자 힘없이 쓰러졌다.
여승의 얼굴에 고통스런 빛이 나타났다.
"경추……."
그녀는 경추도 품에 안았다.
두 남녀를 품에 안은 여승의 전신에서 이상한 서기가 뻗었다. 동시에 그녀는 구름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계곡은 평온을 되찾았다.
쏴아아아-!
여전히 빗줄기만 거세게 쏟아질 뿐이었다. 그러나 방대한 숲과 계곡은 완전히 초토로 변해 버렸다.
곳곳에는 수많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아라는 여전히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초토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안색 역시 창백했고 장대한 교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린과 경추와의 일전으로 심한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이 때 백교 안에서 그 혼을 앗아갈 듯한 영롱한 교성이 울렸다.
"아라, 그만 돌아오라. 백상회의 암습자들은 전멸되었다."
그렇다. 시체로 변한 암습자들은 백상회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백교 안에서 들리는 음성은 아난타공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라는 몸을 돌려 백교로 다가갔다. 그녀는 곧 백교 안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백교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
이상한 운무의 회오리와 함께 백교는 계곡에서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