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고성니(億古聖尼)
거대한 폐찰(廢刹).
지난날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고찰(古刹)이 지금은 폐허로 변해 황량하게 서 있다.
무너진 석탑, 떨어져 나간 산문, 경내에는 깨어진 기왓장만이 굴러다니고 잡초가 무성하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황량한 폐찰. 그러나 그 육중한 돌기둥과 주춧돌이 지난날의 웅장한 모습을 말해 준다.
세상에 알려진 이 거대한 폐찰의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폐불사(廢佛寺).
황폐한 절이라는 뜻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본래의 이름조차 망각 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폐불사에는 한 가지 희미한 구전(口傳)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
<오백 년 전, 한 천고기승(千古奇僧)이 마령(魔靈)을 통해 오도(悟道)하여 불문마종(佛門魔宗)의 원세조종(元世祖宗)인 겁천마불존(劫天魔佛尊)이 되었다. 그의 비전(秘傳)은 폐불사의 어딘가에 비장되어 있다.>
무서운 전설이었다.
폐불사에는 마령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무림의 이름난 고수들이 수차 폐불사를 샅샅이 수색해 보았으나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폐불사는 아무 쓸모없는 폐허,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영원한 폐찰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폐불사는 어찌하여 이토록 황폐한 폐허로 변하고 말았는가?
거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반(夜半).
기이하게도 폐불사 경내의 한 깊은 선방(禪房)에서 흐릿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인적이 끊어진 지 오백 년이 지난 폐찰에 웬 불빛인가?
선방 안, 소박한 침상 위에 한 절세의 미공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그 수려한 용모에도 불구하고 파리한 얼굴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
병자인가?
찢어진 문틈으로 흘러드는 바람결에 송유등(松油燈)의 불꽃이 춤추듯 일렁거린다.
사위는 한없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죽음과도 같은 심야의 정적이다.
이 때 문이 살며시 열리며 한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인상은 매우 괴이했다. 깜찍하도록 예쁜 용모를 지녔으나 전신에서 불가해한 마기가 뻗친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는 새파란 불꽃이 일렁거리는 듯하다.
쪽-!
소녀는 미공자 옆으로 소리 없이 접근하더니 번개같이 입을 한 번 맞추고는 기괴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히히……."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교소였다.
그러자 미공자가 눈을 스르르 떴다. 그의 눈빛은 심유했으나 약간 암울하게 느껴졌다.
그의 파리한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경추… 왔느냐?"
힘없는 음성이었다.
그러면 미공자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물론 소녀는 마불소랑 경추였다.
경추는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로 무린을 빤히 내려다본다.
"오빠… 아직도 아파?"
무린은 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다."
경추는 갑자기 푸른 단약 한 알을 불쑥 내밀었다.
"이 고죽불령단(古竹佛靈丹)을 먹어."
<고죽불령단(古竹佛靈丹)>
불문 전래의 성약(聖藥)으로 기사회생의 효험을 지녔다.
천하오대영단(天下五大靈丹) 중의 한 가지였다. 복용하면 무한한 내공의 정화까지 이룰 수 있다.
무린이 머뭇거리자 경추는 고죽불령단을 자신의 입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우물거리더니 입을 무린의 입에 덥썩 포갰다.
그녀의 혀가 꼬물거리며 파고드는가 하는 순간, 향긋하고도 청량한 액체가 무린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고죽불령단이 녹은 액체였다.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액체를 삼켰다. 순간 가슴이 시원해지며 머리가 거울처럼 맑아졌다.
방심한 순간에 초절무비한 절대공력을 지닌 아라에게 당한 내상이 겨우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경추는 잠시 동안 혀를 제멋대로 휘저은 뒤에야 입술을 떼어 냈다.
"호호히히… 오빠, 기분이 어때?"
그녀는 빨간 혀로 입술을 빨며 교소를 터뜨렸다.
무린이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
"성니(聖尼)께서 영단을 주셨느냐?"
경추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갑자기 침구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무린의 품속으로 앙증맞게 파고들었다.
"오빠, 추아는 오빠하고 같이 자고 싶어!"
천진하다고 할까, 아니면 당돌하다고 할까?
그녀는 무린의 목을 얼싸안으며 간지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오빠, 추아를 꼭 안아 줘!"
그녀의 입에서는 따뜻하고 풋풋한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파란 불꽃이 일렁거리는 그녀의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분명 사요한 염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제법 향긋한 체향이 풍겼다.
갓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의 말랑한 육봉은 무린의 가슴을 짓눌렀다.
일순 무린은 당혹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경추의 몸을 떼어 내며 엄숙하게 말했다.
"경추, 너는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라. 성니께 혼이 나고 싶으냐?"
경추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흥! 그 늙은 여중의 잔소리는 듣기 싫어!"
그녀는 아쉬운 듯 침상 아래로 내려서더니 번개같이 다시 한 번 무린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밖으로 나갔다.
"호호히히… 오빠는 내 거야!"
그녀의 교소가 적막한 폐찰 안에 요기롭게 울려 퍼졌다.
무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추는 정말 대마녀로 변신할 운명이란 말인가?'
우주광신승은 경추가 나중에 무림의 우환이 될 테니 처치해서 없애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심공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무린은 행공을 마치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선방을 나섰다. 몸은 이제 날아갈 듯 가벼웠다.
황폐한 뜰로 내려서자 무성한 잡초 속에서 처량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천공에는 가느다란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무린은 뜰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넓은 폐찰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이 때 한없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무시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이리 들어오세요."
"……."
무린은 몸을 돌렸다.
황폐한 정원 건너편에 거대한 법당이 솟아 있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폐불사의 목존불상(木尊佛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음성은 그 안에서 들려 온 것이었다.
무린은 그리로 다가갔다.
대웅보전 역시 퇴락할 대로 퇴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칠이 벗겨진 기둥, 돌계단은 금이 가고, 지붕의 기와도 반이나 벗겨져 나갔다.
장려한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괴물처럼 시커멓게 솟아 있을 뿐이다.
무린은 대웅보전을 향해 걸어갔다. 법당에는 불빛도 없었다. 반쯤 떨어진 법당문이 밤바람에 덜렁거릴 뿐이었다.
무린은 계단을 올라 법당으로 들어섰다.
전내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바닥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이고 사방의 갈라진 벽에는 거미줄이 수없이 널려 있다.
좌대의 본존불상만은 크고 웅장했다. 그러나 역시 두터운 먼지에 덮여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쪽 팔마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런데 대전 한가운데에는 한 여승이 불상을 향해 합장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성결하고도 고고한 풍모의 중년여승!
그녀에게서는 위엄과 혜지(慧智)가 풍겼다.
무린은 여승을 향해 공손히 예를 표했다.
"소생이 성니를 뵙습니다."
여승이 물었다.
"무시주의 몸은 완쾌하셨나요?"
몹시 자비로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기이한 위엄이 깃들어 있어 듣는 사람에게 저절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무린이 대답한다.
"성니께서 은혜를 베푸신 덕분에 완쾌되었습니다."
"다행이로군요. 아미타불……."
여승은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이 여승은 누구인가?
<억고성니(億古聖尼)>
그녀는 불문사상 가장 특출한 자질을 지닌 니승(尼僧)으로 알려졌다.
묘령에 출가한 이래 불문의 모든 진리에 통달하여 희대의 절세고승(絶世高僧)들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십오 년 전부터는 일체 세상에 출현한 적이 없다.
무린이 아라와의 충돌에서 내상을 입고 쓰러질 때 그를 구하여 폐불사로 온 여승이 바로 억고성니였다.
그러면 억고성니는 어떻게 이 황폐한 폐불사에 경추와 함께 머물고 있는가?
억고성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빈니가 무시주를 부른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위해서에요."
무린은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어떤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억고성니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본 폐불사의 지하에 있는 무서운 마역(魔域)에 대한 이야기에요."
마역이라니? 혹시 그것은 폐불사에 얽혀 있는 무서운 전설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가?
억고성니의 말이 이어졌다.
"빈니는 십오 년 전 우주광신승과 함께 그 마역으로 들어간 적이 있어요."
무린의 안광은 형형히 빛났다.
'무언가 깊은 내력이 있구나!'
무린은 억고성니가 우주광신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우주광신승은 겁겁회아루의 회아곡에서 최후를 마치기 전에 억고성니에 대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다가 만 적이 있었다.
억고성니의 음성은 침중해졌다.
"빈니와 우주광신승은 악령이 충만해 있는 그 마역에서 가공할 마기에 부딪쳤어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극렬한 마기였어요."
"……!"
"결국 우리는 마역의 비밀을 풀지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그곳을 탈출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
억고성니의 음성은 더욱 침중해졌다.
"그런데 그 때 빈니와 우주광신승은 마기 속에 휩싸여 한 차례 정욕(情慾)의 지옥불에 빠졌으니… 그로부터 열 달 후에 빈니는 한 아이를 낳았어요."
무린은 안색이 대변했다. 큰 충격이 머리를 친 것이다.
마기 속에 휩싸인 정욕의 지옥불!
거기서 한 절세고승과 여승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억고성니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시주는 이제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경추가 탄생된 비밀을……."
아아, 마불소랑 경추는 그토록 무섭고 처절한 탄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가?
무린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 동안 법당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억고성니는 합장한 채 그린 듯 미동도 없었다.
성결하고도 고아한 그 모습. 그런데 그 고결한 여승의 내부에는 지난 십수 년 간 얼마나 치열한 번뇌의 불꽃이 타올랐던 것일까?
억고성니가 침묵을 깨뜨렸다.
"경추는 가공할 마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앞으로 무서운 마녀로 변신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무린은 침성을 토했다.
"으음……."
"그래서 우주광신승은 무림의 대화근이 된 불괴불사녀 아라와 경추를 동귀어진시키기 위해 겁겁회아루의 회아곡을 찾아갔던 거예요."
그랬던가?
무린은 회아곡에서 최후를 마친 그 절세고승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억고성니와 경추에 대해서도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억고성니는 지금 모든 것을 초탈한 듯 너무나 고요한 신색을 띄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빈니가 그 마역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중원에 출현한 한 무서운 존재 때문이에요."
무린은 형형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억고성니의 말이 이어졌다.
"그 존재는 바로 소황녀(小皇女)에요."
"천룡밀궁사의 소황녀……."
"그녀는 아극타왕자의 사부인 절륜대법황의 딸이에요."
"아……!"
"아극타가 대존야 무시주에게 죽음을 당하자 절륜대법황은 딸을 즉시 중원으로 보냈어요. 물론 그 자신도 곧 뒤따라 오겠지만……."
"음……."
무린은 다시 침성을 토해 냈다. 그러나 무린은 자신이 대존야를 사직했으며 진실한 정체는 바로 중원을 심판할 동방의 응징자라는 사실은 밝힐 수가 없었다.
억고성니의 입에서 다시 놀라운 말이 흘러 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무서운 절대염향(絶對艶香)을 지녔다는 소문이에요."
"절대염향이라면……?"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본 사람은 아무도 그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요. 미공(迷功)을 사용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처염무쌍하여 모든 사람의 혼을 일순간에 앗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
"그러나 그녀가 더욱 무서운 것은 가공할 마공(魔功)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억고성니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이 폐불사의 마역에는 하나의 공포스런 마검(魔劍)이 있는데 그녀는 이 마검을 노리고 있어요. 그녀는 머지않아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 그래서 경추로 하여금 그 백교를 공격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요."
무린은 비로소 불괴불사녀 아라를 만났던 곳에서 목격한 이상한 백교 안에 그 소황녀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폐불사에 있는 마검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억고성니가 무린을 정시하며 다시 말했다.
"무시주께서 마역으로 들어가 그 마검을 꺼내 오시면 그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빈니가 조처를 취하겠는데……."
억고성니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역으로 들어가는 게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