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년마령검(千年魔靈劍) (29/37)

천년마령검(千年魔靈劍)

무린이 정적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소생은 성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소생은 기꺼이 그 마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억고성니는 혜광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시주는 천인의 기개가 있군요. 또한 절정신공을 수련한 무시주만이 그 마역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마역에는 과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억고성니는 거대한 본존불상 앞으로 다가갔다.

"빈니가 마역의 입구로 안내해 드리겠어요."

본존불상은 높이가 오 장에 이르는 거불(巨佛)이었다.

억고성니는 불상 앞에 이르자 좌대의 한가운데를 일지강(一指 )으로 가볍게 쳤다.

그러자 한 차례의 미미한 파공음이 울리더니 좌대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컴컴한 암구(暗口)가 나타났다.

암구 속에는 길다란 돌계단이 뻗쳐 있었다.

억고성니는 앞서서 암구 속으로 들어섰다.

"빈니를 따라오세요."

무린은 그녀의 뒤를 따라 암구로 들어섰다.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있었군.'

두 사람은 길다란 돌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돌계단이 끝나자 앞에 석문이 나타났다.

이끼가 퍼렇게 끼어 있는 육중한 석문이었다.

억고성니는 석문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무린을 향해 말했다.

"이제 무시주는 혼자 들어가셔야 해요. 부디 마역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기 바래요. 그러면 틀림없이 마검 외에도 광고(曠古)의 기연을 얻으실 거예요."

무린이 응답했다.

"성니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억고성니는 석문 아래의 석대를 가리켰다.

"저 석대를 밟으면 석문은 저절로 열리게 돼요."

무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석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석대를 밟았다.

그르르릉-!

순간 둔중한 음향이 울리며 육중한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안에서 싸늘한 한풍이 밀어닥쳤다.

무린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체없이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르르릉-!

석문이 저절로 닫힐 때, 억고성니는 뒤에 서서 침중히 불호를 외고 있었다.

"아미타불……."

무린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는 넓고 어두운 회랑이 펼쳐져 있었다. 회랑 좌우에는 거대한 돌기둥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빛이 흘러 들어오는 곳은 없건만 흐릿한 미광(迷光)이 시야를 밝혔다.

무린의 시선은 자연히 좌우의 돌기둥에 미쳤다. 수백 수천 개의 육중한 돌기둥에는 모두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온갖 악마를 양각한 것이었다.

팔만사천마(八萬四千魔)!

싸우고 죽이고 저주하고 울부짖고 광란하는 온갖 악마들이었다.

무린은 저절로 머리가 쭈빗해졌다.

복도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린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심공을 운행했다. 짙은 마기 때문에 정심(定心)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무린의 심신은 이내 물처럼 고요해졌다. 그는 계속 회랑을 걸어나갔다.

얼마 후 그의 앞에 거대한 대전이 나타났다. 수천 명이라도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둥그런 대전이었다.

중앙에는 높다란 석단(石壇)이 보였다. 그런데 석단 위에는 무시무시한 악마상이 우뚝 서 있었다.

<겁천대마황(劫天大魔皇)>

천하의 모든 악마를 다스리는 만마지왕(萬魔之王)이었다. 악마의 황제를 표상한 그 검붉은 겁천대마황상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웅장했다.

천하를 삼킬 듯한 웅자(雄姿)와 역천멸세(逆天滅世)의 위세, 부릅뜬 두 혈안(血眼)에서는 엄청난 마기가 뻗쳤다.

그 혈안에서 뻗치는 마기에 부딪친 순간, 무린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무서운 마기의 엄습이 전신으로 느껴지며 그는 심혼이 크게 진탕되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가공할 마기였다.

무린은 자신의 내부에 극렬한 마심(魔心)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살심(殺心)이 무섭게 끓어오르고 정욕(情慾)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우주광신승과 억고성니도 이 정욕의 불길에 휩싸여서 결국 경추를 낳게 된 것이다.

무린은 대경하여 급히 무궁심공결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무린의 마음은 약간 진정되었다. 그러나 몸은 계속 후들후들 떨렸다.

무궁심공결이 아니었다면 벌써 마심의 폭발로 광란을 일으켰으리라.

무린은 초인적인 정심력(精心力)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며 전내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문득 석단 뒤에 즐비하게 놓여 있는 무수한 흑관이 눈에 띄었다.

수백 개의 검은 관!

관 하나하나에는 섬뜩한 백고루(白 ?)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돌연 무린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이곳은 고루마황교( ?魔皇敎)의 지하밀대(地下密隊)가 아닌가!'

<고루마황교( ?魔皇敎)>

팔백 년 전 천하만마(天下萬魔)가 모두 모여 세웠던 거대한 마교(魔敎)이다.

세상을 온통 뒤덮을 듯 창궐한 마의 세력. 천하무림은 존폐(存廢)의 위기를 느끼고 정사양파의 최고고수 삼만 명이 연합하여 일대 기습을 감행했다.

무림사상 미증유의 혼세대혈겁(混世大血劫)이 벌어졌다.

결국 일만의 고루마황교 교도(敎徒)는 전멸하고 무림의 거대한 후환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무린은 겁천대마황상이 우뚝 서 있는 석단을 새삼 살펴보았다.

'틀림없다. 저곳은 바로 악마의 제단이다!'

수백 개의 흑관에는 지난날 몰살당한 고루마황교 고수들의 시체가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고루마황교의 비밀 지하무덤이 틀림없었다.

이 때 무린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

석단 옆에 단정히 정좌해 있는 한 기승을 발견한 것이다.

기승은 짙은 자주색 얼굴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은 사악하면서도 신비로운 위엄이 흘러넘쳤다.

일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알몸이었다.

무린은 그 기승이 오래 전에 죽은 유해(遺骸)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불문마종의 원세조종이라는 겁천마불존(劫天魔佛尊)이다.'

<겁천마불존(劫天魔佛尊)>

전설 속의 마불이자 불문 최대의 이단자(異端者)이다.

세상의 불마공(佛魔功)은 모두 그로부터 창시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기승이었다.

무린은 겁천마불존을 향해 다가갔다.

'겁천마불존이 고루황마교와 관계가 있었구나.'

겁천마불존의 자세는 기이했다.

그의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고, 왼손은 겁천대마황상의 심장 부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한 권의 서첩(書帖)이 들려져 있었다.

무린은 호기심을 느끼고 서첩을 살며시 빼냈다. 낡아서 바스라질 듯한 서첩이었다.

표지에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제자(題字)였다.

<천년마령검공(千年魔靈劍功)>

표지를 넘기자 서언(序言)이 나타났다.

<노납은 일찌기 불문마종을 창시하였으나 세상이 공포의 혼돈 속으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 바, 모든 불마공(佛魔功)을 폐기하였도다.

다만 천년마령검공 한 가지를 남겨 두니 이것은 오직 사도(邪道)을 제압하는데 사용해야 하리라.>

무린은 겁천마불존의 진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겁천마불존은 평범한 마승(魔僧)이 아니었다.'

무린은 서첩을 넘겼다. 본문이 나타났다.

<천년마령검공은 본래 불문최고의 검공인 수미천불검공(須彌天佛劍功)을 깨뜨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검공을 수련하려면 먼저 마정가랍결(魔精伽臘訣)을 익혀야 한다.>

무린은 매우 놀랐다. 수미천불검공은 중원불문의 최고검공이라 알려진 잔양살막의 절대신공이었다. 그런데 천년마령검공은 그것을 깨뜨리기 위한 검공이라는 것이다.

서첩을 넘기자 다시 또렷한 다섯 글자가 나타났다.

<마정가랍결(魔精伽臘訣)>

무린은 요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정가랍결은 모든 기의 방향을 바꾸어 역류시키는 공능이 있다!'

마정가랍결은 모든 기를 격탕시켜서 거꾸로 역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결과를 일으킬 게 아닌가?

무린은 다시 서첩을 넘겼다.

예상대로 검공의 요결이 나타났다.

<천년마령검공결>

이 요결의 위력은 직접 시전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수미천불검공을 꺾을 수 있는 검공이라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서첩의 마지막 장에는 결언(決言)이 적혀 있었다.

<고루마황교에는 한 가지 절대마병(絶對魔兵)이 있으니 바로 천 년의 극고한 마령이 깃들어 있는 천년마령검(千年魔靈劍)이다.

이 천년마령검을 얻는 자만이 진정한 겁천대마황이 되리라.>

무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천 년의 극고한 마령…….'

그러면 천년마령검은 어디에 있는가?

문득 무린의 시선이 겁천마불존의 왼손에 미쳤다.

겁천대마황상의 심장 부위를 가리키는 손.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돌연 무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즉시 겁천마불존의 왼손에 한 줄기 진기를 주입했다. 그러자 그 손에서 한 줄기 섬광이 뻗쳤다.

파츠츳-!

이내 겁천마불존의 유해는 와스스 부서져 흩어졌다. 동시에 육중한 음향이 울렸다.

기기깅-!

그것은 겁천대마황상의 심장 부위가 쩍 갈라지는 음향이었다. 갈라진 틈에서는 눈부신 혈광이 쫙 뻗어 나왔다.

츄우우우우-!

마치 선혈이 뿜어지듯이 뻗어 나오는 혈광. 그것은 엄청난 마기였다.

'으음……!'

무린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극렬한 마기에 의해 심혼이 무섭게 진탕되었다.

무린은 다시 무궁심공결을 운행했다. 심신이 안정되자 무린은 혈광이 뻗어 나오는 곳을 향해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것은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뻐끔하게 벌어져 있었다.

무린의 신형은 그리로 번쩍 날아들었다. 겁천대마황의 가슴 내부로 들어선 것이다.

놀랍게도 거기엔 거대한 심장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붉은 피가 울컥울컥 박동하고 있는 악마의 심장이었다. 그 심장에서는 극렬한 마기와 혈광이 분수처럼 뻗어 나왔다.

일순 무린은 숨이 콱 막혔다. 전신이 부르르 떨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서운 마기… 악령의 본체다!'

선혈이 울컥울컥 박동하는 악마의 심장. 조각상에 어찌 살아 있는 심장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물론 실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심장에는 분명 마의 정수가 깃들어 있었다.

천 년 동안에 응집된 극교한 마령!

무린은 혼신의 심력(心力)을 끌어올리며 악마의 심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때 문득 심장 한가운데 깊숙이 꽂혀 있는 하나의 검이 보였다.

투명한 혈홍색 검!

그 검에서는 소름끼치는 마광이 뻗고 있었다.

무린은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천년마령검이다!'

그는 심장에서 검을 뽑아 냈다. 순간 손을 통해 서릿발 같은 한기가 쩌르르 전해 왔다.

무린의 몸은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그는 천년마령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길이는 불과 한 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마광이 눈부시게 뻗어 나왔다. 과연 악마의 황제가 지닐 만한 광세마병(曠世魔兵)이었다.

천년마령검을 응시하는 무린의 두 눈에 불꽃 같은 광채가 나타났다.

'이 마병으로 천년마령검공을 펼친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결과는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무린은 천년마령검을 천천히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가볍게 허공을 한 번 베어 보았다.

천년마령검공결의 일초식이었다.

쉬잇-!

그러자 허공의 여덟 방향에 거대한 검영(劍影)이 나타났다.

투명한 혈홍색 검영 속에 사위는 눈부신 혈광으로 가득 차고 괴이한 음향이 노룡(老龍)의 울음소리처럼 울려 나왔다.

파우우우웅-!

뒤이어 기류가 무섭게 역탕(逆湯)하는 음향이 울렸다.

무린의 시야는 번쩍이는 혈채(血彩)로 가득 찼다.

이 순간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기류가 역탕하는 음향이 뇌성처럼 고막을 울릴 뿐이었다.

쿠르르르릉-!

이 때 놀랍게도 고루마황교의 거대한 지하밀종은 무섭게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수한 돌기둥이 산사태처럼 줄지어 쓰러지며 역탕하는 기류가 엄청난 기세로 천공을 향해 솟구쳤다.

오오, 천년마령검의 가공할 위력이여!

무린의 신형 역시 역탕하는 기류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칠 때 지하밀종은 마침내 완전한 암흑 속으로 함몰되었다.

쿠르르르르-!

무린은 비조처럼 몸을 날려 붕괴되어 지하로 함몰되는 대웅보전 앞에 우뚝 내려섰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격동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공포의 마병이다!"

만약 마정가랍결을 연성한 뒤 천년마령검을 십이 성 펼쳐낸다면 그것은 더욱 무서운 위력을 나타낼 것이다.

이 때 억고성니가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무시주, 성공하셨군요!"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나타나 있었다.

무린은 침중하게 말했다.

"천년마령검을 겨우 가지고 나왔습니다."

무린이 건네 주는 검을 받으며 억고성니는 매우 격동된 빛을 보였다.

"아미타불… 정말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마물(魔物)이군요."

이 때 경추가 어느 새 나타나서 다가오며 두 눈을 반짝였다.

"이상한 검이로군!"

순간 억고성니의 안광이 기괴하게 빛나더니 경추를 향해 침중하게 말했다.

"경추야! 우리는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아미타불......"

경추는 의혹의 빛을 띄었다.

"어디를 간단 말이에요?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아요!"

"가기 싫어도 가야 된다!"

이렇게 말한 억고성니는 갑자기 천년마령검을 번쩍 치켜들더니 경추의 가슴을 힘껏 찔러 버리는 게 아닌가!

경추가 아무리 마공을 지닌 소녀라고 해도 이 기습적인 공격을 피해 낼 수는 없었다.

"으헉! 다… 당신이……."

경추는 불신과 분노의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억고성니를 노려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아아, 이게 무슨 괴사인가?

억고성니는 피가 뚝뚝 흐르는 천년마령검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추야! 나를 용서해 다오. 나는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경추는 이미 두 눈을 부릅뜬 채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다… 당신이 나를……."

억고성니는 무림의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훗날 마녀로 변신할 운명을 지닌 딸을 스스로 처치해 버린 것이다.

무린은 얼굴이 굳어진 채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억고성니는 무린을 향해 돌아섰다.

"빈니도 이제 갈 때가 되었군요. 부디 이 천년마령검을 무시주께서 없애 버려서 세상에 흘러 나가지 않도록 해 주세요."

말을 마치는 순간 억고성니는 천년마령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으음……."

그녀는 나직한 신음을 토하더니 검을 뽑아서 무린에게 내밀었다.

"부디 이것을… 없애 주세요… 아미타불……."

무린은 미처 그녀를 제지할 틈도 없었다.

천년마령검을 무린의 손에 쥐어준 억고성니는 경추에게로 비틀비틀 걸어가서 푹 쓰러졌다.

그녀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경추를 품에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 딸아… 나와 함께 가자."

살신성인! 그녀는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비록 그녀가 고승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죽인 딸을 혼자 저 세상으로 보낼 수가 없어 함께 동행하려는 마음이었다.

무린은 여전히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비극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무어라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억고성니는 꺼져 가는 생명 속에서 무린에게 희미한 몇 마디 말을 남겼다.

"천룡밀궁사의 소황녀는… 유령환등장에 있을 것이니… 그녀도 제거해야……."

그녀는 말을 미처 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무린은 두 모녀의 시체를 묵묵히 바라보며 무거운 침성을 토해 냈다.

"아아… 마(魔)란 도대체 무엇인가?"

다음 순간 무린은 손에 쥐고 있던 천년마령검을 가볍게 튕겨 냈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검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졌다. 공포스런 마물 역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          *          *          *

동정호.

그 남쪽 호변에는 하나의 괴이한 장원이 있다.

장원이 건립된 지는 불과 삼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장원이 세워질 때부터 사람들은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사방 십 리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 우아하고 특이한 이국풍의 건축, 뭐하고 표현할 수 없는 유현한 분위기. 세인들은 이 장원에 대해서 온갖 추측을 했다.

황실의 별장이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한데 제일 괴이한 것은 이 장원에 밤낮 구별없이 수백 개나 밝혀져 있는 칠색 등롱(燈籠)이었다.

환상적인 칠색 불빛을 뿌리는 무수한 등롱. 밤이면 그 등롱빛은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다.

사람들은 그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등롱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장원으로 몰려들었다.

장원의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방대한 정원이 나타난다.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는 화원이었다.

차라리 선계(仙界)라고나 할까?

정원 곳곳에는 선녀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수많은 분수가 우아하게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맑은 연못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던 사람들은 차츰 괴이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적막과 희미한 꿈 속 같은 환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없이 밝혀진 칠색 등롱의 현란한 광채는 의식을 혼미하게 한다.

마침내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비틀비틀 뒷걸음질친다.

정원 깊숙이 들어선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의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무서운 착란과 환각 때문이다.

무림의 일류고수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장원에는 무서운 이름이 붙었다.

<유령환등장(幽靈幻燈莊)>

그리하여 유령환등장은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금역(禁域)이 되고 말았다.

멀리서 그 칠색 등롱이 아름답게 밝혀진 광경을 구경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랫동안 바라볼 수는 없다. 이상한 환각 속에서 미칠 듯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유령환등장은 이제 완전한 금역이 되었다.

야반(夜半).

칠색 등롱이 휘황하게 밝혀진 이 유령환등장의 대문을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초립인(草笠人)이었다. 그는 단정한 청의(靑衣)를 입고 머리에는 초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단단한 몸매의 청년이었다.

초립인의 일신에는 비범한 풍도가 어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사람같으나 어딘지 모르게 경시할 수 없는 기도가 있다.

초립인은 유령환등장의 대문을 들어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릿했으나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대문을 들어서자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유령환등장… 과연 구경할 만한 곳이군."

방대하게 펼쳐진 정원은 신비롭고 장려했다. 온갖 기화요초, 선녀상과 분수, 수없이 세워진 칠색 등롱 등이 진정 환상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초립인은 정원 한가운데의 백석로(白石路)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일순 초립인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음… 사방에 이방의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군."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초립을 좀더 깊숙이 눌러쓰며 다시 중얼거렸다.

"무수한 칠색 등롱은 가공할 환각진(幻覺陣)을 이루고 있군."

하면 그 무서운 절진 속을 유유히 통과하는 이 초립인은 누구인가?

길고도 복잡하게 얽혀진 백석로가 끝나자 앞에 우아하고 장려한 전각이 나타났다. 거대한 학익(鶴翼)처럼 날아갈 듯 솟아 있는 전각이었다.

전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초립인은 전문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갔다.

이 때 전문 안에서 한 소녀가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세요!"

깜찍하게 아름다운 궁장소녀(宮裝少女)였다.

나이는 불과 십이삼 세로 보인다. 그러나 눈매는 비수처럼 예리한데 머리에는 나비모양의 핀을 꽂았다.

소녀는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용무로 본장을 찾아왔나요?"

초립인의 대답은 정중했다.

"본인은 지나가는 과객으로 귀장(貴莊)이 몹시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풍문을 듣고 구경차 왔소."

소녀는 역시 당돌했다.

"그렇다면 먼저 얼굴을 보이고 이름을 밝히세요."

초립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초립을 벗었다.

"얼굴을 보이는 건 어렵지 않소. 그러나 이름은 밝힐 만한 정도가 못 되니 그냥 천하주유객(天下周遊客)이라 불러 주시오."

그의 얼굴이 등롱빛 아래 환히 드러났다.

아, 그는 바로 백상회의 총찰인 궁천무가 아닌가?

그가 초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기며 유령환등장에 나타난 건 무슨 까닭일까?

궁장소녀는 궁천무의 넙적한 얼굴을 유심히 쏘아보더니 더욱 쌀쌀해졌다.

"우리 주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정원의 아납만극대라진(阿納萬極大羅陣)을 파해한 유일한 사람이니, 본장을 찾아온 사람 중 최고의 고수라 했어요. 그런데도 이름이 없다는 거예요?"

제법 날카로운 추궁이 아닌가?

초립인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천하주유객 백명인(白名人)이라고 해 두겠소."

백명인! 역시 이름 없는 백민(白民)이란 뜻이다.

궁천무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소녀는 홱 돌아섰다.

"흥! 아무튼 주인께서 당신을 모시고 오라했으니 따라오세요!"

그녀는 전각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들어갔다.

궁천무는 천천히 그녀의 뛰를 따라갔다. 그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장원의 주인은 어디선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군.'

그런데 두 사람이 전각 안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또 한 명의 백의서생이 전각 앞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은 억고성니로부터 유령환등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무린은 장내를 둘러보았다.

'정말 신비로운 곳이군.'

이 때 한 소녀가 사뿐사뿐 다가오더니 공손히 말했다.

"소황녀께서는 무린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린은 흠칫 놀랐다.

'내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소녀는 발길을 돌리며 교성을 발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무린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린은 그 자리에 주춤 멈추어 섰다.

내전 중앙의 금교의에는 한 여인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홍예채문의 백라의, 구름처럼 틀어올린 머리, 얼굴은 눈처럼 흰 백사로 가려져 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풍기는 그 뇌쇄적인 염기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강렬하게 발산되 처염한 염기였다.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

돌연 여인이 은방울이 짤랑거리는 듯한 염소(艶笑)를 터뜨렸다.

"호호호… 무공자께서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셨군요."

심혼을 산산이 날려 버릴 듯한 교성이었다.

무린은 저절로 마음이 진탕되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우물(尤物)이 아니다!'

여인은 빙어처럼 투명한 흰 손을 들어 자리를 가리켰다.

"무공자, 이리 앉으세요. 본녀는 당신과 한 번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역시 가슴이 쩌릿하도록 달콤하고 영롱한 음성이었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무린은 청옥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여인을 정시하며 물었다.

"그대가 바로 천룡밀궁사의 소황녀요?"

여인은 선선히 응답했다.

"그래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쳐서 전류처럼 작렬했다.

"……!"

"……!"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문득 여인은 갸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역시 당신은 아극타를 능가하는 기재로군요. 아극타가 당신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기 힘들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어요."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공자는 이미 대존야를 사직하고 중원과 적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요."

"……!"

"나는 지금 당신에게 무한한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그것은 즉 우리가 친구도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나는 남자에 대한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당신은 꽤 괜찮은 남자에요."

그녀의 태도는 예상외로 은근하고 온유해서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무린이 담담히 말했다.

"호의는 고맙소.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어서 무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사실은 본인도 여자를 보는 약간의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귀하는 그 백사를 올려서 본인의 안목을 시험해 볼 용의는 없소?"

여인이 달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공자, 당신은 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가요?"

"나는 귀하가 본인의 마음에 드는 여자인지를 알고 싶소."

무린은 반격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은 중원에서 본녀의 얼굴을 보는 첫번째 인물이 되겠군요."

"그건 영광으로 생각하겠소."

"그러나 본녀의 얼굴을 보려면 당신은 한 가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돼요."

"한 가지 대가라면?"

"혼(魂)!"

"귀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혼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오?"

"그래요."

여인의 대답은 또렷했다.

혼을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린이 다시 물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오?"

여인의 음성은 은밀하게 낮아졌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혼을 바쳐야 하오?"

"본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않아요."

의미가 아리송한 대화가 아닌가?

무린이 빙긋 웃었다.

"귀하의 말뜻을 알겠소. 귀하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는 사람은 완전히 혼을 빼앗긴다는 뜻이구료."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인가? 그녀는 빙어 같은 손을 들어 백사를 잡았다. 다음 순간 백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설처럼 희고 둥근 턱이, 다음에는 양귀비꽃처럼 붉은 입술이, 그리고 드디어는 여인의 얼굴이 무린의 눈앞에서 환히 드러났다.

"……!"

순간 무린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아아, 여인의 그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어떻게 표현할까?

절염절미절색(絶艶絶色絶美)!

일순 무린은 자신의 혼이 햇살 아래 부서지는 이슬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혼을 바쳐야 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뭐라고 형용할 수조차 없는 현란처염한 아름다움이 진정 보는 사람의 혼을 날리는 듯하다.

"으음……."

무린은 폐부 깊숙이에서 흘러 나오는 침성을 토해 냈다. 그것은 진심을 토해 내는 탄성이었다.

무린이 일찍이 여인의 미모 앞에 이토록 넋을 잃은 적이 있었던가?

무린의 시선은 여인의 얼굴에 완전히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무린의 얼굴에는 한 가닥 한기가 스쳐 갔다.

'이 여인은 지금 기괴한 미공(迷功)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얼굴이 이토록 절미절염하게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하는 미공은 얼마나 신비무쌍한 괴공(怪功)인가?

여인이 돌연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은방울이 짤랑거리는 듯한 교소와 함께 백사는 도로 내려졌다.

사르륵-!

어느 새 여인은 백사를 내린 채 금교의에 비스듬히 기대어 무린을 여유 있게 응시하고 있었다.

무린은 짧은 환각에서 깨어난 느낌이 들자 다시 나직한 침성을 토했다.

"으음……."

여인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공자, 이제 당신의 여자를 보는 안목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로군요."

무린은 성목을 형형히 빛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진정 천하제일미라고 할 수 있겠소. 아직 그대의 진정한 면목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여인이 미공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넌즈시 지적하는 말이었다.

여인은 약간 놀라는 빛을 보였다.

"역시 당신의 안목은 대단하군요."

무린은 물처럼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귀하의 이름을 알고 싶소."

여인의 대답은 또렷했다.

"야율린."

"야율린… 정말 이름까지도 아름답구료."

"당신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요."

무린의 신색이 약간 엄숙하게 변했다.

"나는 귀하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소. 그래서 이곳 유령환등장을 찾아오게 되었소."

야율린의 음성은 여전히 감미롭다.

"그럴 것 같아서 본녀가 당신을 이리로 초청한 거예요."

그러나 실내의 분위기는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야율린이 침묵을 깨뜨리고 본론을 꺼냈다.

"무공자, 당신은 이제 중원과 적대하게 되었으니 본녀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나요?"

무린이 무겁게 응답했다.

"그건 아직 결정할 수 없소. 나는 천룡밀궁사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중원으로 진출하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왔나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야율린은 무린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한 중대한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오늘은 이미 밤이 늦었으니 당신이 푹 쉴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무린은 반대하지 않았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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