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는 이미 친구가 되었소 (31/37)

우리는 이미 친구가 되었소

중원은 급전직하하고 있었다.

- 궁륭마천부의 대존야는 바로 동방에서 온 응징자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무림인이 어디 있으랴!

삼백 년 전의 전대비사가 모두 밝혀지며 천하는 크게 경동했다.

동방의 응징자는 어떻게 중원을 심판할 것인가?

동방의 응징자 무린이 동방사를 거느리고 대무후제국을 향해 출발했다는 풍문이 무림을 휩쓸기 시작했다.

첫번째 응징은 밀비천전에 떨어지는가?

이 때 중원의 지배자인 궁륭마천부도 놀라운 선언을 했다.

- 궁륭마천부는 십만의 무적대군단으로 제이차 동방대장정에 오른다!

천하는 온통 술렁거렸다.

분명 중원은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폭풍(暴風) 속으로 휩쓸려 들고 있었다.

이제 무림형세는 숨돌릴 틈도 없을 만큼 급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궁륭마천부는 동방대장정에 오르기에 앞서 중원무림을 완전히 평정하기 위한 과감한 행사를 개시했으니…….

돌연 천부대군수 우문검지가 거느린 오만의 무적대군단이 노산(魯山) 추풍곡(秋風谷)을 전격적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노산의 추풍곡에는 백상회의 비밀총단이 있었다.

마침내 삼십 리에 뻗친 거대한 계곡에서는 처절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계곡이 온통 초토로 변하는 가운데 쌍방간에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

땅은 시체로 덮이고 골짜기에는 혈하(血河)가 흘렀다.

피비린내나는 대혼전!

백상회의 기개 넘치는 백도고수들은 결사적인 항쟁을 했지만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오만의 무적군단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백상회의 비밀총단은 폐허로 변하고 살아남은 고수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궁륭마천부의 첫번째 행사는 그야말로 피의 폭풍처럼 백상회를 강타하고 말았다.

백상회는 궁륭마천부의 돌연한 공격에 허(虛)를 찔린 것이다.

이어서 천부대군수 우문검지가 거느린 오만의 무적대군단은 동정호로 방향을 돌려 노도처럼 진격해 갔다.

무린이 거느린 동방사의 천의신기대가 대무후제국으로 가기 위하여 동정호로 향하고 있다는 풍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린과 우문검지는 드디어 숙명적인 대결의 피바람 속으로 빠져드는가?

*          *          *          *

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유유히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벙어리 사내 철묵이었다.

마차 안에는 무린과 노노아가 타고 있었다.

마차는 울창한 숲 속 길을 들어서며 약간 속도를 줄였다.

이 때 숲 속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와 마차의 앞을 우뚝 막아 섰다.

거구의 홍라의여인(紅羅衣女人)!

아름다운 분홍빛 피부에 두 눈에서는 눈부신 혈광이 뻗는다.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이 드는 괴녀였다.

그러나 철묵은 본래 여인과 수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위인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채찍으로 여인을 후려쳤다.

'비켜라!'

쐐액-!

채찍은 여인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한데 그 순간 여인의 일수가 쭉 뻗으며 철묵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어억!"

철묵의 신형은 허공으로 붕 떠올라서 오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털썩-!

그는 선혈을 울컥 토해 내며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엄중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철묵을 단 일 초에 무참하게 거꾸러뜨린 여인.

무린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불괴불사녀 아라로군!'

그는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가까운 숲 속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아난타, 다시 만나게 되었구료!"

순간 하나의 청영(靑影)이 숲 속에서 비조처럼 솟구쳐 무린 앞에 번쩍 내려섰다.

청라의를 입은 절세미녀. 바로 천축공주 아난타였다.

아난타는 나타나자마자 얼음처럼 차갑게 물었다.

"무린, 당신이 나의 오라버님을 죽였나요?"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번에는 본녀가 당신을 죽이겠어요!"

아난타는 즉시 불괴불사녀 아라에게 명을 내렸다.

"아라, 어서 이자를 죽여라!"

아라는 무린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소름끼치는 혈광이 발산되고 있었다.

돌연 그녀는 무린을 향해 쌍수를 쭉 뻗었다.

츠츠츳-!

극맹한 장강(掌 )이 정면으로 쇄도했다.

무린은 급히 일수를 쳐 냈다.

콰르르르- 콰쾅-!

굉음이 울리며 강기가 맹렬히 격탕했다.

무린과 아라는 강한 반탄력에 튕겨져서 동시에 주춤주춤 물러섰다.

"으음……."

"음……."

두 남녀의 공력은 백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라는 무린을 단숨에 격살할 듯 무서운 기세로 맹공을 개시했다.

츠츠츠츳-!

쌍수에서 엄청난 장강이 폭사하며 그녀의 장대한 신형이 사나운 독수리처럼 덮쳐들었다.

무린은 아라를 경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죽일 수 없고 상하게 할 수도 없다는 불괴불사녀이기 때문이다.

무린은 번개처럼 환인천제문의 절기를 펼쳐 냈다.

"비홍수검인!"

그러자 대기가 진탕하는 음향이 울렸다.

쿠우우우웅-!

다음 찰나 아라가 발출하는 장강이 물결처럼 쫙 갈라지며 무린의 우수가 일직선으로 뻗어 갔다.

완만하면서도 기이하게 쾌속한 신비공이 아닌가!

아라의 신형이 주춤했다. 찰나 그녀의 목줄기에 선혈이 분수처럼 뻗었다.

무린의 비홍수검인이 정확하게 그녀의 목을 관통한 것이다.

아라의 장대한 신형이 휘청하며 숨막히는 신음이 흘렀다.

"크윽!"

그러나 아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라는 더욱 가공할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화염처럼 이글거렸고 전신에서는 숨막히도록 극렬한 사기가 뻗어 나왔다.

아라는 본래 백 명의 동정혈정을 취하여 생명을 얻은 피의 여인이다. 때문에 피를 보자 본래의 무서운 사기가 격발한 것이다.

돌연 아라의 홍라의가 팽팽히 부풀어오르며 소름끼치는 장소성이 허공을 울렸다.

"호호호호……!"

아라는 쌍장을 활짝 펼치며 덮쳐들었다.

츠츠츠츠츳-!

폭풍 같은 기세였다.

무린은 위험을 느꼈다. 그는 급히 절공(絶功을 펼쳐 냈다.

"불세연화기공!"

그것은 정종칠대기공 중의 하나로 사공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공능이 있다.

허공엔 무수한 연꽃의 환영이 나타나며 기류가 진탕하는 음향이 뇌성처럼 울렸다.

쿠르르릉-!

그러나 아라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쌍장에서 발출되는 극맹한 초강기가 태산을 엎어 버릴 듯한 기세로 밀려왔다.

쏴아아-!

연꽃의 환영이 갈기갈기 찢어져 흩어지며 피보라 같은 혈강이 폭포처럼 쇄도했다.

츄우우웃-!

과연 불괴불사녀의 능력은 경혼탈백할 정도였다.

일순간 무린은 눈부신 혈강에 휩싸여 파도에 휩쓸린 듯 휘청거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과연 무린은 패배하는가?

이 때 무린의 입에서 낭랑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무상폐공결!"

마침내 환인천제문의 신비현공(神秘玄功)이 펼쳐졌다.

돌연 허공은 백색 광채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쿠르르르-!

동시에 거대한 기류의 역류(逆流)가 천공으로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천공을 울렸다.

"크아아악!"

이어서 한 줄기 피분수가 붉은 무지개처럼 선렬하게 허공에 뿌려졌다.

이미 불괴불사녀 아라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홍라의가 눈송이처럼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 줄기 피분수로 변하여 허공에 뿌려진 것이다.

아아, 무상폐공결의 가공할 위력이여!

본래 환인천제문의 무상폐공결은 사람을 살상하지 않고 상대방의 무공만을 파해하는 현공이다. 하지만 불괴불사녀 아라는 백 명의 동정혈정을 흡취하여 생명을 얻은 혈녀이기 때문에 무공이 완전히 파해되는 순간 온몸이 피로 변하여 사라진 것이다.

놀라운 괴사(怪事)가 아닌가?

이 광경을 보고 제일 경악한 사람은 물론 아난타였다.

"저… 저럴 수가……."

갑자기 그녀는 무린을 향해 미친 듯 덮쳐들었다.

"무린, 본녀에게 생명을 바쳐라!"

위맹급박한 공격이었다.

무린은 아라와의 격전으로 미처 숨을 돌리지 못한 상태여서 이 급격한 공격을 피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일수를 쳐 냈다.

콰르르- 콰콰쾅-!

엄청난 강기의 폭발음이 울렸다.

찰나 고통스런 두 마디 신음성이 동시에 울렸다.

"으윽!"

"으헉!"

무린과 아난타의 신형은 서로 충돌한 듯 튕겨져 양쪽으로 날아갔다.

털썩-!

그들은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더니 선혈을 울컥울컥 토해냈다.

아난타의 필살지공(必殺之功)에 각기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마차 안에서 태연히 곰방대를 빨고 있던 노노아가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형……!"

앵무새 견자도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개자식!"

노노아는 급히 무린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부축했다.

"형… 정신차려!"

이 때 사방 숲 속에서 무수한 검은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스스스슷-!

노노아의 얼굴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잔양살막……!"

검은 그림자 같은 흑의인들의 가슴에는 섬뜩한 핏빛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계이대공포 중의 하나인 잔양살막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무린을 향해 서서히 접근해 왔다.

소름끼치도록 음산한 살기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무린은 아직 내상의 충격으로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돌연 노노아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곰방대를 번쩍 치켜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든지 형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죽인다!"

앵무새 견자도 덩달아 부르짖었다.

"개자식!"

노노아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녀에게서는 이제 공포의 빛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무린을 보호하겠다는 결사적인 빛이 보일 뿐이었다.

과연 노노아가 아닌가!

그러나 잔양살막의 살수들에게 나이 어린 소녀의 존재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들은 노노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도(奇刀)를 치켜든 채 무린을 향해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올 뿐이다.

생사관두! 이제야말로 무린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살수들의 기도가 일제히 무린에게로 뻗어 가는가?

바로 이 순간 허공에서 눈부신 은빛 광채가 번쩍이며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슈슈슈-- 슈슈슈슉-!

다음 순간 대여섯 명의 살수가 한꺼번에 짚단처럼 거꾸러졌다.

"컥!"

"크윽!"

그들의 목에는 정확하게 비수 한 개씩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나머지 살수들의 신형은 번개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차차차창-!

그들의 기도는 비수가 날아온 쪽으로 살처럼 뻗어 갔다. 기쾌무쌍한 반격이었다.

한데 이 찰나 뒤쪽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졌다.

"칠십이만멸백파세도법!"

동시에 한 줄기 도강이 그들을 뇌류(雷流)처럼 쓸어 나갔다.

쿠쿠쿠쿵-!

이내 숨통 끊어지는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크윽!"

"크아악!"

살수들은 허공에 떠오른 채 가랑잎처럼 뒤집혔다.

비명과 도광이 뒤섞여 허공에 충만할 때였다.

후두둑- 후두두두둑-!

벌써 허공에는 피비가 소나기처럼 뿌려지며 갈기갈기 찢어진 육골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 잔양살막의 초극고수들을 이처럼 풀잎을 베 듯 처치해 버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지며 한 쌍의 남녀가 유유히 모습을 나타냈다.

예리한 인상의 청년도객과 요염한 자태의 홍의낭자.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파랑십자도 사원과 백파은섬비 벽상하였다.

노노아는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바로 당신들이었군. 그렇지 않아도 내가 혼자 적을 모두 처치하기에는 약간 벅차지 않을까 했었는데……."

늙은 대머리 앵무새 견자도 흥분한 듯 다시 한 번 부르짖었다.

"개자식!"

이 때 무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고통스런 표정이었으나 신색은 담담했다.

사원과 벽상하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 때였다.

디딩딩- 딩딩-!

다시 느릿한 고금 소리가 울리며 얼굴이 넙적한 사내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무린 앞으로 다가왔다.

"무린… 혼자 떠나면 우리는 심심해서 어쩌란 말이오?"

만폭왕 당유기. 바로 그였다.

순간 무린과 그들의 시선이 서로 뜨겁게 뒤엉켰다.

"……!"

"……!"

당유기가 다시 말했다.

"무린… 우리는 앞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미 친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소."

사나이의 무거운 이 한 마디.

- 이미 친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소!

무린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사나이의 격정이 무섭게 파동치고 있었다.

이윽고 무린은 발길을 돌려 아난타에게로 다가갔다.

철묵도 고금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부시시 일으켰다.

아난타는 아직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창백하게 핏기를 잃은 얼굴이었다.

무린은 아난타를 품에 안고 마차로 올라갔다.

노노아를 비롯한 당유기, 사원, 벽상하 등이 모두 마차에 올랐다.

철묵이 마부석에 올라 힘차게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숲 속 길을 뚫고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대머리 앵무새 견자의 날카로운 외마디 울부짖음이 울렸다.

"개자식!"

*          *          *          *

동정호변의 백로별향.

지난날 무린이 대무후제국으로 가는 길에 우주향과 함께 들렀던 곳이다. 백상회의 동정호 분단이기도 하다.

한 정실, 깨끗한 금침 속에 한 여인이 잠자듯 누워 있었다.

창백하도록 흰 얼굴, 그러나 요염하게 아름다운 절세미녀다.

바로 천축공주 아난타였다.

침상 옆에는 노노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난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젠장… 형의 치료를 받았으니 이제 깨어날 때도 됐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여자는 형을 죽이려고 했는데 형은 왜 이 여자를 살려 주는 것일까? 형은 혹시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얼굴이 제법 반반한 편이니…….'

돌연 노노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흥! 마음대로 안 될걸! 내 허락없이는…….'

그녀는 공연히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기랄! 가서 잠이나 자자!"

그녀는 크게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밖으로 터덜터덜 나가 버렸다. 실내에는 이제 잠들어 있는 아난타 혼자 남게 되었다.

밤은 깊어 가고 등촉불도 졸린 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 때 아난타가 눈을 스르르 떴다.

잠들지 않았던가?

그녀의 눈동자는 놀랄 만큼 싸늘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에서 내려섰다.

'반드시 죽이고 만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뻗쳤다.

다른 한 정실, 무린이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밤은 점점 깊어 가고, 등촉불만이 은은히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 때였다.

홀연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아난타였다.

아난타는 무린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앞에 우뚝 멈추어 서자, 무린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순간 눈앞에 일섬광(一閃光)이 번쩍 빛났다.

이 때 벌써 무린의 가슴에는 아난타의 예리한 보검이 닿아 있었다. 아난타가 조금만 힘을 주면 보검은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리라. 아니, 검끝은 이미 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가느다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난타는 검에 서서히 힘을 주며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무린, 당신이 나를 살려 준 것은 큰 실수였어요!"

무린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처럼 고요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난타, 그건 실수가 아니었소."

아난타의 벽안이 무섭게 번쩍였다.

"당신이 지금 나에게 목숨을 잃어도 실수가 아니라고 하겠어요?"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좋아요!"

아난타는 보검을 힘차게 찔렀다. 보검은 무린의 가슴 속으로 푹 파고들었다.

"으음……."

무린이 나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나 무린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보검이 가슴 속으로 세 치나 파고들었다.

아난타의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쩍였다.

"무린, 당신은 아직도 후회하지 않나요?"

무린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난타… 그대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소. 또한 내가 그대에게 목숨을 잃는다 해도 원망을 하지도 않겠소."

"……!"

아난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무린이 다시 말했다.

"아난타,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나를 완전히 죽일 생각이라면 검을 좀더 깊이 찌르시오."

그의 시선은 무심할 만큼 담담하게 아난타를 정시하고 있었다.

"……!"

보검을 잡은 아난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결국 보검을 뽑아 내며 그 자리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흐흐흑……."

그녀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격정에 몸을 떨며 애처롭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우는가?

그것은 바로 깊고 뜨거운 여심의 비밀이었다. 아난타는 무린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린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난타, 무림인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소."

그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아난타의 옷자락을 불게 물들였다.

아난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뺨에는 아직도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보검을 무린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상감잠룡신검이에요. 이것은 본래 환인천제문의 물건이니 당신에게 돌려드리겠어요."

무린은 흠칫해서 보검을 받았다.

"상감잠룡신검……!"

아난타는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무린을 뚫어지게 한 번 바라보더니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말없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무린은 보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이는 약 두 자. 장검이라기에는 짧고 단검이라기에는 길다.

문양(紋樣)은 고아하고도 소박했다.

손잡이에 구름 속에 몸을 숨긴 한 마리의 운룡(雲龍)이 새겨져 있었다.

검신(劍身)은 투명하고 맑은 서기를 뻗어 내고 있었다. 무한한 현기(玄機)를 풍기는 아름다운 보검이었다.

문득 상감잠룡신검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무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

보검의 검신에는 아직도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슴 속의 선혈이 묻은 자국이었다.

그런데 그 핏자국이 기이한 형태의 도형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무린의 안광이 형형이 빛났다.

'상감잠룡신검에는 아무도 풀지 못한 비밀이 있다. 이 도형이 바로 그 비밀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무린은 도형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이상하게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상고무림대신종(上古武林大神宗) 구양상개(歐陽相介)가 남긴 영원불해판(永遠不海版)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지난날 무린은 궁륭마천부의 궁륭추밀탑에서 하나의 석판을 연구한 적이 있다.

바로 상고무림에서 구양상개가 남긴 영원불해판이다.

갑골문자가 과두문자보다는 더 오랜 고문자(古文字)로 기록되어 있어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석판이었다.

무린의 입에서 미미하게 격동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상감잠룡신검과 영원불해판이 합쳐지니 비로소 해석이 가능해진다."

무린은 우선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요상심공(療傷心功)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이었다.

무린은 아직도 불상처럼 앉아 상감잠룡신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백두영산(白頭靈山)… 천지성담(天地聖潭)… 아침 해… 환단무극경……."

무슨 뜻인가?

무린은 종이를 펼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두영산의 천지성담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

태극(太極)이 갈라지고 무지개가 뻗칠 때 신시(神市)의 환단무극경이 열린다.

천하는 경배하라.

영원한 동방의 정령정토(正靈靜土), 이 세상의 영원한 생명이 이곳에 있노라.>

무한한 신비와 현기를 품은 내용이었다.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뚜렷한 비밀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무린은 격동하여 중얼거렸다.

"환단무극경은 백두영산에 있다!"

백두영산!

아득한 동방의 장백산맥(長白山脈)에 있는 신산(神山)이다.

고대로부터 하늘의 비의(秘意)와 신비를 품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 세상 최고의 영산(靈山)인 것이다.

무린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명의 동천(東天)을 형형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머지않아 환단무극경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그 영원한 동방의 정토에 경배할 것이다!"

아아, 상감잠룡신검의 비밀은 이렇게 벗겨지고 있었다.

그러면 상감잠룡신검과 천적(天敵)이라 일컬어지는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의 천명수령검이 서로 만나면 어떤 무서운 풍운변색이 일어날 것인가?

무린은 상감잠룡신검을 주고 간 아난타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녀는 검을 나에게 넘겨 주고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난타는 백로별향을 떠나 어디론지 가 버렸던 것이다.

무린은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아난타, 그대는 천축으로 되돌아가는 게 좋으련만…….'

이 때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흑영이 그림자처럼 들어섰다. 채 약관이 안 된 흑의청년이었다.

그의 인상은 특이했다. 석인(石人)처럼 완벽하게 무감동한 눈빛과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불가사의한 예기(銳氣)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예기라기보다 차라리 요기로울 만큼 냉정한 무형기(無形氣)였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았고, 단정한 이목구비는 강퍅하고 날카로웠다.

등에는 일자형의 다섯 자 길이의 단목도(檀木刀)를 매고 있었다.

흑의청년이 나타난 순간 무린의 검미가 저절로 치켜올라갔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무서운 첨극고수(尖極高手)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무린은 흑의청년이 불세출의 절대도객(絶對刀客)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전류처럼 부딪쳤다.

"……!"

"……!"

문득 흑의청년이 입을 열었다.

"본인은 잔양살막의 막주(幕主)인 삼경영치(三鏡英治)요!"

순간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입에서는 나직한 침성이 흘러 나왔다.

"으음……."

드디어 잔양살막의 막주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흑의청년 삼경영치가 다시 말했다.

"본인은 동해 청풍일도류의 직전제자(直傳弟子)로서 귀하의 태극비홍검법과 겨루어 보기 위해 찾아왔소."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어서 그는 삼경영치를 똑바로 정시하며 냉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소."

"물어 보시오.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대답해 드리겠소."

삼경영치의 태도 역시 놀랄 만큼 냉철했다.

무린의 첫번째 질문이 엄중하게 떨어졌다.

"십칠 년 전에 잔양살막은 동방의 환인천제문에 침입한 적이 있소?"

삼경영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당신의 잔양살막은 환인천제문의 문주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을 살상하고 상감잠룡신검을 탈취한 적이 있소?"

"있소."

무린의 눈동자는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잔양살막의 막주는 누구였소?"

"바로 본인의 선친인 삼경일부(三鏡一夫)였소."

삼경영치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냉철하게 말을 이었다.

"당시 잔양살막의 고수들도 이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본인의 선친께선 환인천제문의 문주와 동사(同死)하시고 말았소."

"……!"

"결국 환인천제문과 잔양살막은 완전한 승패를 가리지 못한 셈이오. 오늘 본인이 귀하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승패를 완전히 가리기 위해서요."

그에 대한 무린의 응답은 으시시할 만큼 차가웠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기꺼이 승패를 가려 주겠소."

"밖으로 나갑시다."

"좋소."

삼경영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무린은 그의 뒤를 따라 정실을 나섰다.

새벽의 정적이 깃들어 있는 넓은 뜰에는 또 한 명의 흑의인이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검은 장갑에 검은 가죽신, 흑검(黑劍)을 소유한 자. 바로 혈향흑장미 삼경자였다.

비록 남장을 하고 있지만 그 화사하고 교염한 자태는 기이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동왜 출신의 가공할 여류살수. 바로 그녀였다.

삼경자의 뒤에는 열세 명의 회의승(灰衣僧)이 죽 늘어서 있었다. 남루한 가사에 다 떨어진 죽립을 한 화상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체취를 전연 느낄 수 없는 목석인간들 같았다.

허무승(虛無僧)!

그들 역시 동왜 출신의 수도자들인 허무승이었다.

그들 앞에는 한 쌍의 남녀가 대치하듯 우뚝 서 있었다.

파랑십자도 사원과 백파은섬비 벽상하.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장내에는 싸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린과 삼경영치가 뜰에 나타나자 그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데 삼경영치와 삼경자는 어떤 사이인가?

삼경영치가 삼경자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누님, 제가 만약 대결에서 패하거든 누님이 막주가 되십시오."

삼경자는 무감동하게 대꾸했다.

"알았다."

두 사람은 남매사이였던가?

삼경영치는 더 말하지 않고 무린과 마주 섰다.

무린과 삼경영치의 대치!

거리는 이 장 정도였다.

삼경영치가 천천히 등 뒤의 단목도를 뽑았다. 그는 단목도를 수평으로 뻗어 무린을 겨누었다.

무린도 상감잠룡신검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검단(劍端)이 수직으로 세워져서 천공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기류가 싸늘하게 동결되는 듯한 순간이었다.

중인의 표정은 저절로 굳어졌다. 장내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무린과 삼경영치가 당대의 무적고수라는 사실을…….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은 대치한 그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타 들어가는 듯한 순간의 흐름을 끊고 문득 삼경영치가 음냉하게 입을 열었다.

"본인은 쾌도를 구사하므로 한 번 도식(刀式)이 펼쳐지면 귀하는 검을 전개할 기회가 없소. 그러므로 귀하는 먼저 공격을 하시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무린의 대꾸는 담담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으니 먼저 도식을 펼쳐도 좋소."

그의 신색은 물처럼 고요해서 도저히 무서운 생사의 대결을 벌이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삼경영치의 눈동자에 비수 같은 살광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의 단목도가 바람을 탄 듯 부르르 떨렸다. 찰나지간 쩌렁 울리는 일갈이 장내를 울렸다.

"청풍일도류!"

그의 단목도는 전광같이 수직으로 뻗었다.

번쩍-!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쾌도식(極快刀式)! 눈부신 도광은 정확하게 무린의 심장을 관통했다.

세상에 그 누가 이 가공할 쾌초를 피할 수 있으랴!

무린의 신형은 뒤로 휘청 쓰러졌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상감잠룡신검에서 한 줄기 첨광(尖光)이 전류처럼 뻗쳐 허공을 갈랐다.

차앙-!

맑은 음향이 울리며 중인의 시야가 눈부시게 밝아지는 찰나였다.

"크악!"

외마디 단말마가 터지며 선렬한 피보라가 천공으로 쭉 뻗었다.

삼경영치의 신형은 정확하게 세로로 갈라져 흑벽처럼 뒤로 무너졌다.

털썩-!

신형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핏물이 확 튀어올랐다.

그의 두 눈은 불신의 빛으로 크게 부릅떠져 있었고, 갈라진 심장에서는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아났다. 짙은 피비린내가 확 퍼졌다.

무린은 어느 새 신형을 바로 세워 삼경영치의 처참한 시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무린의 태극비홍검법은 삼경영치의 청풍일도류를 일순에 격파한 것이다.

사원과 벽상하는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놀란 사람은 삼경자일 것이다. 그러나 삼경자의 태도는 놀랄 만큼 무감동했다.

그녀는 동생이 무우처럼 베어져 쓰러졌는데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섬세한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무감동하게 한 마디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환인천제문의 검법은 역시 강하군."

문득 삼경자는 무린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던졌다.

"당신의 무공은 진정 당대제일이라고 할 만하군요. 우리 잔양살막이 당신에 의해 무참하게 파해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어서 그녀는 기이한 냉소를 흘려 냈다.

"그러나 당신의 그 정도 무공은 사실상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곧 가르쳐 주겠어요."

말이 끝났을 때 그녀의 교염한 얼굴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석상처럼 늘어서 있던 열세 명의 허무승이 소리 없이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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