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情事)의 의미
십삼 인의 허무승.
그들이 앞으로 나서며 장내는 질식할 듯 극렬한 살기가 팽배했다.
휘류류류륭-!
몸서리치는 죽음의 기류가 물결처럼 파동쳤다.
무린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졌다.
'한 명 한 명이 경인할 고수들이다!'
십삼 인의 허무승은 일제히 등 뒤의 철도(鐵刀)를 뽑아 들었다.
이 때 사원과 벽상하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들의 눈동자는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일촉즉발. 온 장내가 살벌하게 얼어붙는데 돌연 우레 같은 폭갈이 터졌다.
"청풍일도합공류(靑風一刀合功流)!"
차차차창-!
철도의 금속성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고막을 찔렀다.
다음 순간 열세 개의 철도는 무린과 사원, 벽상하를 향하여 빛살처럼 뻗어 왔다.
파츠츠츠츳-!
극맹한 도강의 파도가 장내를 온통 뒤집었다. 대기가 갈라지는 듯한 엄청난 공세였다.
찰나지간 사원의 파랑십자도가 허공을 가르며 눈부시게 번쩍였다.
"칠십이만멸백파세도!"
동시에 벽상하의 은섬비도 분수처럼 폭사했다.
쿠우우우웅-!
웅장한 기류의 진탕음이 울렸다.
열다섯 개의 신형이 허공에서 번개처럼 교차되는 순간, 급박하고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크악!"
"크아아악!"
제일 먼저 세 명의 허무승이 죽은 물고기처럼 뒤집혀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목에는 벽상하가 날린 은섬비 한 개씩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그런데 벽상하의 신형 역시 낙엽처럼 뒤집혀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이어서 몇 줄기의 선렬한 피보라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네 명의 허무승이 허리가 양단되어 낫으로 베어 낸 짚단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사원의 파랑십자도가 척추를 자르고 지나간 것이다.
다음에는 사원 역시 피를 뿌리며 갈대처럼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아아, 무시무시한 생사의 대결이 아닌가?
찰나간에 아홉 고수가 생사의 경계를 넘을 때, 나머지 여섯 명의 허무승은 무린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쇄도하고 있었다.
찰나 무린의 상감잠룡신검이 기쾌한 속도로 허공에 둥그런 원(圓)을 그렸다.
무상무궁검!
정종칠대기공 중의 일기공(一奇功)이었다.
카카카캉-!
눈부신 검광이 허공을 완전히 가르는 순간, 날카로운 강철의 마찰음이 울리며 부러진 철도가 어지럽게 난비했다.
이어서 숨통 끊어지는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크악!"
"크으으!"
여섯 명의 회의승은 일제히 신형을 꺾으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들은 땅바닥에 털썩털썩 쓰러지며 선혈을 울컥울컥 토해 내더니 그대로 사지를 쭉 뻗었다.
눈 깜짝할 순간 쌍방 열다섯 명의 고수가 모두 피를 뿌리며 땅바닥에 널려진 것은 실로 일순간의 일이었다.
절정고수들의 대결은 그만큼 극랄하고 급박한 법이다.
이제 장내에는 무린과 삼경자만이 우뚝 서 있었다.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무감동했으나 삼경자의 안색은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열세 명의 허무승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자 그녀도 가슴이 서늘해졌는가?
그러나 그녀는 다시 화사한 미소를 던졌다.
"잔양살막의 십삼대상수(十三大上手)도 당신을 죽이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은 걸 보니 당신은 정말 천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 같군요."
이어서 그녀는 두 눈을 기이하게 번쩍이며 말했다.
"무린, 당신은 나와 본격적으로 흥정해 볼 생각은 없나요?"
갑자기 무슨 흥정인가?
무린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귀하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하잔 말이오?"
삼경자가 요기로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내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요?"
웃음을 멈춘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냉철하게 변했다.
"나는 우문환탑에게 당신을 죽이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나를 살 의사가 있다면 나는 당신 대신 우문환탑을 죽이겠어요."
"……!"
드디어 살인상(殺人商)의 본색이 드러나는가?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려면 본녀를 사는 게 좋을 거예요."
무린이 물었다.
"귀하를 사는 대가는 무엇이오?"
"중원의 삼분지일(三分之一)!"
명료한 대답이 떨어졌다. 중원을 함께 차지해서 나눠 먹자는 얘기였다.
무린이 물었다.
"귀하를 사면 어떤 이득이 있소?"
"본국의 우리 청풍일도문에는 천하무적의 천재인자(天才忍者)들인 무영칠비인(無影七秘人)이 있어요. 그들 하나하나의 살인술은 보이지 않는 신이라도 벨 수 있어요."
"무영칠비인……."
"무영칠비인은 곧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나 나는 우문환탑을 비롯한 중원의 중요 인물들을 남김없이 제거할 수가 있어요."
<무영칠비인(無影七秘人)>
그들은 얼마나 가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렇다면……?"
"나는 무엇보다 그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오."
상대가 여인이고 보면 저절로 얼굴이 붉어질 말이 아닌가?
그러나 삼경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건 조금도 어려울 게 없어요. 사실은 나도 당신에 대해 그런 충동을 느끼던 중이었으니까요."
"……!"
"당신만 좋다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함께 잘 수 있어요."
무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소. 나는 귀하를 사도록 하겠소."
"좋아요. 우리의 흥정은 이루어졌어요."
급전직하! 기괴한 흥정은 일순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두 사람의 속셈은 무엇인가?
삼경자는 동생을 비롯한 십삼 허무승의 시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로별향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먼저 들어가 목욕을 한 뒤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무린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원과 벽상하에게로 다가갔다.
어느 새 철묵과 노노아가 나타나 그들을 부축하고 있었다.
사원은 가슴이 가로로 길다랗게 갈라져 있었다. 회복불능의 치명상이었다.
그는 무린이 다가오자 가늘게 시선을 들며 말했다.
"먼저 갈 테니… 훗날 천천히 오시구려."
그는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길지 않았다.
그는 이내 눈을 스르르 감으며 고개를 푹 꺽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청년검객 사원이 최후를 마친 것이다.
"……."
무린은 착잡한 시선으로 사원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망자(亡者)에게 무슨 말을 하랴?
갑자기 노노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늙은 앵무새 견자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개자식!"
벽상하도 회복불능의 치명상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철묵에게 부축당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파리한 입술을 열어서 띄엄띄엄 말했다.
"철묵… 미안해요. 지난날 당신의 집게벌레를 죽여서……."
놀랍게도 철묵의 거칠거칠한 뺨에는 굵은 눈물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벽상하는 마지막으로 눈을 뜨고 철묵의 우직한 얼굴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철묵… 당신은 정말… 바보야……."
그 말을 끝으로 벽상하의 눈도 스르르 감겨지며 고개가 옆으로 꺾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녀의 갈라진 치마 사이로는 눈부시게 하얀 허벅지가 드어나 옥주(玉住)처럼 빛나고 있었다.
철묵은 투박한 손을 허벅지로 가져가 깊숙이 쓰다듬어 보더니 묵구멍에서 괴이한 소리를 울려 냈다.
"꺼이… 꺼이……."
그러고 보면 철묵과 벽상하는 은근히 서로 좋아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돌연 단조롭고 음울한 고금 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왔다.
딩딩딩- 딩딩딩-!
당유기였다. 그는 줄이 세 개밖에 없는 고금을 튕기며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음의 축복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내린다."
무린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밝아진 천공에는 새벽별들이 창백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무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림은 곧 죽음의 숲이다."
이 때 하나의 회영이 장내에 번쩍 나타났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기도의 회의청년. 바로 유령환등장에서 말없이 사라졌던 백상회의 사찰인 궁천무였다.
무린이 시선을 돌리자 궁천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귀하는 정말 동방의 응징자로 중원에 왔소?"
그는 오늘만큼은 할 말을 하기로 작정하고 나타난 모양이었다.
무린은 선선히 대꾸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귀하는 백상회도 응징할 생각이오?"
여전히 칼로 찌르는 듯한 직선적인 질문이었다.
무린은 또렷하게 응답했다.
"내가 응징하려는 것은 밀비천전, 그리고 삼백 년 전 원세무황이 범한 천죄를 반성하지 못하고 아직도 동방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는 무리들이오. 백상회도 그런 야욕을 지니고 있는 한 나의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오."
궁천무는 무겁게 말했다.
"우리 백상회는 원세무황이 범한 천죄를 알게 되자 모두 부끄러움과 통탄을 금치 못했소. 그리하여 우리는 환단무극경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상감잠룡신검을 추적하는 일을 포기했소."
이어서 그는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말했다.
"불초 궁천무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겠소. 우리 백상회는 지난날 원세무황이 범한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며 앞으로 중원에 진정한 백도천하(白道天下)를 이룩하는 일에 모두 신명을 바치기로 했소."
그는 말을 마치자 무린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무릎을 꿇는 바이오!"
아아, 무림의 영웅이 사부 외의 남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더구나 궁천무 같은 희대의 영웅이 어찌 이방의 한 젊은이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
궁천무는 무릎을 꿇은 채 격정적으로 말했다.
"부디 지난날의 중원무림이 동방에서 범한 가증할 죄를 용서해 주시오. 우리 백상회는 귀하가 원한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소!"
"……."
무린은 무릎을 꿇고 있는 궁천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궁천무는 분명 뜨거운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무린의 마음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궁천무를 비롯한 정도의 인물들에게는 죄가 없다. 아득한 선대 무림인들의 죄를 대신 빌고 있을 뿐이다.
무린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궁사찰, 일어나시오. 우리 환인천제문은 본래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문중이니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응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오."
비로소 궁천무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감격하여 말했다.
"고맙소이다. 백상회는 이제 귀하와 손을 잡고 중원 땅에서 패도와 사마의 무리를 몰아 내고자 하오. 그리하여 동방과의 사이에 영원한 평화와 우정을 이룩하는 게 우리의 소원이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회의 진정한 뜻이 그렇다면 본인은 거절하지 않겠소."
"고맙소이다!"
순간 두 사람의 손은 굳게 잡혀졌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 부딪쳐서 뜨겁게 타올랐다.
동방의 환인천제문과 중원의 백도무림은 이렇게 하여 일맥이 통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천하무림의 형세는 또 한 차례 거대한 변화를 겪게 되는가?
천하무림사의 새로운 한 장이 급속히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궁천무가 심각한 빛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궁륭마천부의 부주 우문환탑이 십만의 무적대군단을 거느리고 대무후제국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가 본회에 들어왔소이다."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대무후제국을……!"
"우문환탑은 먼저 밀비천전을 장악하여 귀하의 동방사와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을 일시에 제거한 뒤 그대로 동방대장정에 오를 계획이라 하오."
무린의 눈동자는 무섭게 타올랐다.
"음."
마침내 우문환탑이 직접 몸을 일으켜 대진군(大進軍)을 개시한 것이다.
궁천무가 말을 이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또한 오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들이닥칠 것이오."
"그건 본인도 알고 있소."
"백상회의 총단은 우문검지의 대군단에 의해 초토로 변했으나 아직도 그들에 대항할 고수들이 무수히 건재하고 있소이다."
"……."
"그리하여 오늘 밤 백상회의 최고고수들은 이곳에서 우문검지와 일대결전을 벌인 뒤 대무후제국을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 있소이다."
무린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면 동방사는 백상회와 연합하여 궁륭마천부를 격파하도록 하겠소."
"고맙소이다!"
무린과 궁천무의 시선은 다시 뜨겁게 부딪쳤다.
동방사와 백상회의 연합!
천하대세는 의외의 방향으로 급속히 흐르고 있었다.
궁천무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불초는 이만 돌아가서 귀하의 뜻을 본회에 알리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예를 표하고 장내에서 번쩍 사라졌다.
뜰은 겨우 조용해졌다.
철묵은 사원과 벽상하를 묻어 주기 위해 정원 한쪽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무린은 백로별향 안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아늑한 정실.
무린이 들어섰을 때 삼경자는 목욕을 마치고 거의 알몸으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자태는 요염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하얀 어깨 위에 폭포처럼 늘어뜨리고 대리석 같은 다리를 꼬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자태가 아닌가?
붉은 천이 가슴과 비소(秘所)만을 겨우 가리고 있을 뿐, 눈처럼 희고 매끈한 나신이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벗어제낀 옷가지는 침상 아래 되는 대로 흩어져 있었다.
삼경자는 매력적인 미소를 던졌다.
"무린… 어서 오세요."
무린은 침상 옆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의 표정은 의외로 무심했다.
무린은 침상에 이르자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삼경자의 가슴을 가린 붉은 천을 잡아 거침없이 벗겨 냈다.
사르륵-!
천이 벗겨지며 탄력 있게 부풀은 젖무덤이 출렁 흘러 나왔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육봉이었다. 거기에는 작은 포도색 젖꼭지가 선정적으로 솟아 있었다.
무린은 삼경자의 가냘픈 허리를 와락 끌어당기며 한 손으로 육봉을 잡았다.
"으음……."
삼경자는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무린의 목을 안았다.
무린의 손길은 약간 거칠었다. 그는 풍염한 두 개의 젖무덤을 마음대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삼경자는 호흡이 급속히 거칠어져서 무린의 옷자락을 헤쳤다.
"하아……."
무린의 입술이 여인의 목을 타고 미끄러져 가슴을 덮었다. 작은 포도알을 빨아들이며 그의 손길은 벌써 여인의 비소를 가린 마지막 천을 벗겨 내고 있었다.
유난히 짙은 숲이었다. 삼경자도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금침 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무린의 몸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무린… 당신도 벗어요."
곧 두 남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금침 속에서 꽃뱀처럼 서로 휘감겼다.
* * * *
두두두두-!
엄청난 대군단이 광막한 평야를 질주하고 있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
천부대군수 우문검지가 거느린 오만의 대군단이었다.
산하를 뒤덮고 해일처럼 밀려가는 대군단. 그들은 동정호의 북동면을 향해 급속히 밀려가고 있었다.
* * * *
두 남녀는 한 몸이 되어 쾌락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무린의 질주가 힘차게 계속되며 삼경자는 아득한 절정의 쾌감을 향해 급속히 떠올라가고 있었다.
"하아아……."
거칠은 호흡은 턱에 닿을 듯 급박해지고 쾌감에 휩쓸린 여체는 물결처럼 파동치며 흔들렸다.
무린은 무자비하게 여체를 공략하고 있었다.
여체는 산산이 해체되어 부서지며 폐부 깊숙이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을 토해 냈다.
"으흐흑… 흐윽……."
* * * *
두두두두-!
산하를 뒤덮은 오만의 무적대군단은 범람하는 바다처럼 무서운 기세로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뿌연 황토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올라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며, 그 먼지구름은 광막한 황야를 온통 뒤덮고 동정호의 북동면을 향해 급속히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 * * *
무린의 맹렬한 질주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인은 미칠 듯한 쾌감의 파도 속에 몸부림치며 더욱더 높은 절정을 향해 정신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아아… 아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풀잎처럼 흩어지고 관능의 환희에 점령당한 여체는 끊임없이 물결쳤다.
쾌락의 파도. 그 파고(波高)는 점점 높아지더니 마침내 현란한 물보라를 뿜어 내며 폭발했다.
"하아악!"
삼경자는 숨막히는 비명을 토하며 몸을 활처럼 굽혔다. 격렬한 절정의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의 몸은 전류에 관통당한 물고기처럼 퍼덕이며 까무러쳤다.
겨우 실내는 조용해졌다.
폭풍처럼 격렬한 정사는 끝났다.
삼경자는 아직도 무린의 등에 손톱을 꽂은 채 내리감은 속눈썹을 잔물결처럼 떨고 있었다.
쾌감의 격정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시고 젖가슴 사이에는 땀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완전히 유린되고 해체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린의 표정은 어찌 그리 무감동한가?
그는 여인의 몸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삼경자의 희디흰 허벅지 밑에 붉게 피어난 몇 떨기의 앵화(櫻花)가 보였다.
그러나 무린은 여전히 무감동한 얼굴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삼경자는 눈을 스르르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달착지근한 관능의 쾌감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나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남자란 생각보다 좋은 것이로군."
"……."
무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안광을 기이하게 번쩍이며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로소 삼경자는 아득히 먼 곳에서 지축을 흔들며 다가오는 웅장한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대지가 온통 진동되는 듯한 그 음향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린은 곧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삼경자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하얀 금침에 피어난 앵화를 발견하고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이제 보니 꽃이 떨어졌군."
도대체 무린과 삼경자의 돌연한 정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백로별향 뒤에는 높다란 암벽이 솟아 있었다.
암벽 위에서는 호면 일대가 멀리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금 암벽 위에는 두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무린과 궁천무. 그들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뿌연 황토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고 있는 남서쪽 지평선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지축이 무섭게 진동하며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급속히 밀려오고 있었는데 문득 궁천무가 입을 열었다.
"풍유림(風柳林)에 매복해 있는 우리 백상회의 오천 정예는 적의 십분지일(十分之一)에 지나지 않소이다."
그는 장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산개격파진(散開擊破陣)을 펼쳐 일단 공격이 개시되면 오만의 대군단도 일시에 산사태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오."
무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천무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오만의 대군단을 반 이상 궤멸시킬 수는 있소."
무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는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불세출의 명장(名將)이오. 그녀의 군단전략(軍團戰略)과 진법조예는 아무도 경시할 수 없소."
"……!"
"그녀가 필사의 생사대진(生死大陣)을 펼친다면 우리 동방사의 천의신기대(天意神騎隊)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음."
궁천무의 표정은 약간 굳어졌다.
두두두두-!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은 광야를 온통 뒤덮고 계속 밀물처럼 쇄도해 오고 있었다.
이 때 전방 오른쪽의 울창한 숲 속에서 우렁찬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
동시에 눈부신 도검의 광채가 번뜩이며 무수한 인영이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바로 백상회의 오천 정예였다.
그들은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을 향해 노도 같은 기세로 부딪쳐 갔다.
산개격파진! 그들의 진세는 십만군(十萬軍)이라도 격파할 듯 대담무쌍했다. 오만의 대군단을 향한 무서운 기습공격이었다.
순식간에 쌍방은 피비린내나는 혼전의 와중에 휩쓸렸다.
비명과 함성, 도검이 난무하고 강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미친 듯한 말들의 울음소리가 광야를 가득 채웠다. 진정 무시무시한 천지대격돌이었다.
이 때 멀리 지평선 쪽에서 또 다른 황토 먼지가 뿌옇게 피어 오르며 일군의 기마대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天軍)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일진의 선풍처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광야를 가르고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는 백의기마군(白衣騎馬軍). 그들의 기세는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 호호탕탕했다.
그 기마군의 정체는 무엇인가?
천의신기대. 그들은 바로 하늘의 뜻에 따라 중원을 응징할 동방사의 천의신기대였다.
천의신기대는 천지를 압도할 기세로 무적대군단의 배후로 진격해 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철탑 같은 거한이 보였으니, 바로 동방사의 총사령 고려웅이었다.
천의신기대는 순식간에 무적대군단의 한가운데로 파죽지도(破竹之刀)처럼 쇄도했다.
무적대군단이 파도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져 무너지며 경악과 혼란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터졌다.
과연 천의신기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양의 무리에 뛰어든 맹수처럼 무적대군단을 종횡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숨막히는 아우성, 난비하는 피보라, 절단된 사지와 수급이 수없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광란하는 말들의 울부짖음은 처절하게 높아만 갔다.
광야를 온통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대혈전이었다.
무린과 궁천무는 여전히 암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일대 혼전장으로 변한 광야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이제는 아수라혈전 속에 뒤섞여 피아(皮我)를 구분할 수도 없고, 싸움의 형세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짙은 피비린내가 구토를 느낄 만큼 밀려오는 가운데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성이 지옥의 아우성인 양 계속 들려 오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궁천무가 입을 열었다.
"불초가 싸움의 형세를 직접 살펴보고 오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 혼전장 한가운데로 번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무린은 묵묵히 혼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약간 복잡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 때 한 필의 준마가 급속히 달려 오더니 무린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마상에는 은갑패검의 한 늠름한 무장이 타고 있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갑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손에 치켜든 패검에도 선혈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살기가 등등하고 눈동자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검지… 그대가 왔구려."
온화하고 담담한 음성이었다.
일순 우문검지는 갈등의 빛을 띄운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대존야… 저는 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대존야를 죽이러 왔어요."
무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 한 마디뿐, 무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문검지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패검을 치켜들었다.
"대존야, 대존야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면 저를 죽여야 해요."
그녀의 음성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무린은 우문검지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문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검지, 그대는 이제 새를 사랑하게 되었소?"
우문검지의 눈빛에는 파동이 일었다.
'새……!'
우문검지의 뇌리에는 한 가지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한 쌍의 새를 수놓은 하얀 비단 손수건에 대한 기억이었다.
무린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하얀 비단 손수건이었다.
지난날 우문검지가 무린의 상처에 난 피를 닦도록 건네 준 그 손수건이었다.
무린은 손수건을 펼쳐서 들여다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 아름다운 손수건에 피가 묻은 것은 바로 오늘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었던가?"
무린이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 손수건은 내가 간직하도록 하겠소. 이것은 검지가 나에게 준 마음의 선물이기 때문이오. 인간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이 손수건을 간직하는 거야 나의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쓸쓸한 탄식이다.
순간 우문검지의 신위가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존야……!'
패검을 치켜든 그녀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녀의 어깨가 격정으로 들먹였다.
돌연 그녀는 말머리를 휙 돌리더니 채찍을 힘차게 휘둘렀다.
히히히힝-!
말은 우렁차게 한 번 울부짖더니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은 혼전장의 황토먼지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무린의 착잡한 시선은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쫓고 있었다.
'검지, 내가 중원에 와서 진심으로 좋아한 여인이 있다면 바로 그대일 것이오.'
그랬던가?
우문검지 역시 눈물 속에 말을 달리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대존야,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은 갑자기 싸움을 중지하고 일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들은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결국 그녀는 대전을 포기하고 후퇴의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새를 수놓은 그 손수건은 무서운 운명의 방향을 살짝 돌려 놓은 것일까?
광막한 평야에는 무수한 시체만이 널려진 채 서서히 고요를 뒤찾기 시작했다.
무서운 태풍이 일과(一過)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더욱 거대한 태풍은 점점 확산되어 천하를 온통 뒤덮을 기세로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