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비구대무신(密秘九大武神) (33/37)

밀비구대무신(密秘九大武神)

동정호 북동 호변에서 벌어졌던 궁륭마천부와 백상회, 동방사의 무서운 대혼전은 막을 내렸다.

서서히 어둠이 찾아올 무렵, 호변에는 무수한 대선단이 일제히 돛을 올리고 수평선을 향해 출발했다.

그 대선단에는 무린을 비롯한 동방사의 모든 고수가 타고 있었고, 궁천무를 비롯한 백상회의 모든 고수도 타고 있었다.

동방사와 백상회의 전 고수가 대무후제국을 향해 출발을 개시한 것이다.

거대한 운명의 태풍은 대무후제국으로 그 방향을 잡았는가?

그런데 양대세력의 장엄한 연합대선단이 수평선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할 때, 홀연 다른 쪽 수평선에 한 척의 괴선이 무수한 대선단을 거느리고 유령선처럼 출현했다.

신비로운 핏빛 후광을 은은히 발산하는 혈홍색의 호화거선!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난날 아수파라호에 출현했던 그 불가사의한 천룡밀궁전이 아닌가!

천룡밀궁전!

아극타의 사부이자 천축무림의 절대지존인 절륜대법황(絶輪大法皇)이 타고 있는 움직이는 신비궁전(神秘宮殿).

이 천룡밀궁전이 대선단을 거느리고 유령선처럼 출현하는 순간, 갑자기 앞쪽 수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산더미 같은 파도가 갈라지며 물 속에서 거대한 붉은 성채가 섬처럼 불쑥 솟구치는 게 아닌가!

쿠쿠우우웅-!

그것은 바로 사령파황루였다.

지난날 백상회의 장강대선단을 궤멸시킨 적이 있던 공포의 천하무적선. 그 사령파황루가 천룡밀궁전을 맞이하기 위하여 거대한 웅자를 드러낸 것이다.

이윽고 천룡밀궁전은 사령파황루와 대선단을 거느리고 유유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검푸른 파도가 쫙 갈라지며 두 척의 웅자한 초거선은 나란히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분명 천룡밀궁전과 사령파황루는 동방사와 백상회의 연합대선단이 사라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절륜대법황 역시 대무후제국을 향해 출발을 개시했는가?

또 하나의 거대한 태풍이 몰려가고 있었다.

*          *          *          *

대무후제국.

무한한 신비와 비밀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별세계.

대무후제국의 수려하고 장엄한 궁성에 밤이 찾아들고 있었다. 궁성의 밤은 오색등롱이 휘황하게 밝혀진 환상의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신성옥황전(神聖玉皇殿).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 있는 곳이다.

이상하게도 내전에는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호화롭기 짝이 없는 내전의 대리석 기둥과 온갖 보석장식은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번쩍이고 있었다.

밤은 서서히 깊어 가고 있었다.

널다란 내전을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걷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우아한 궁장에 불가사의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신성대무후 황보옥황. 바로 그녀였다.

중원무림에 천년여왕천하를 건립한 대야망을 품고 있는 당세제일의 신비여걸.

지금 황보옥황은 어두운 내전을 홀로 거닐며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

그녀의 전신에는 여전히 신비로운 운무가 감돌고 있어 마치 천상의 선녀가 인계(人界)에 하강한 듯했다.

운무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환영처럼 흐릿하게 보여 그 표정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창가로 다가가서 어두운 천공을 올려다보던 황보옥황이 문득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아아……."

나직하고 쓸쓸한 탄식. 천하를 움켜쥐려는 희대의 여걸에게도 어떤 감상이 있는가?

황보옥황은 나직한 독백을 토해 냈다.

"요즘은 왜 아득하게 잊어버렸던 옛기억이 문득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일까? 이미 십칠 년이나 흘러간 꿈 같은 옛기억이건만……."

어떠한 옛기억인가?

독백은 한숨과 함께 계속된다.

"아… 내가 어릴 때 살던 그곳은 어디일까? 세 살 때 사부님에게 이끌려 떠나야 했던 그곳… 분명히 중원은 아니었건만……."

황보옥황은 아련한 시선으로 천공을 별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내가 자라면 나보다도 더 어리던 그 아이와 혼인을 하게 된다고 누군가가 말했지. 그 때는 혼인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황보옥황의 눈동자에는 꿈결 같은 미소가 피어나는 듯했다.

'그 어린애는 내 손목을 잡고 방긋방긋 웃었지. 정말 깨물고 싶도록 예쁘고 귀여웠던 어린애… 나는 그 어린애에게 몰래 입맞추어 주었지.'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아. 더는 알 수가 없어. 모든 게 아득하게 사라져 버린 꿈과도 같아."

그녀는 다시 내전을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만이 미미하게 들릴 뿐, 사위는 밤의 적막에 잠겨 쥐죽은 듯 고요했다.

문득 황보옥황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런데 왜 옛기억을 떠올리면 그 사람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그녀의 독백은 이상하게 낮아졌다.

"궁륭마천부의 대존야… 아니, 이제는 동방의 응징자가 된 그 사람 무린……."

왜 갑자기 무린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가?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황보옥황은 깊은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내전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이 때 한 흑의여인이 내전에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다.

처염하도록 아름다운 절세미녀. 바로 대무후제국의 제이인자인 승상 우주향이었다.

우주향은 황보옥황 앞으로 다가와서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여왕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우문환탑이 거느린 궁륭마천부의 십오만 무적대군단이 구룡비협(九龍飛狹) 가까이 접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황보옥황이 서서히 시선을 들자 우주향은 보고를 계속했다.

"그들은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으며 내일이면 본 제국까지 침공해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동방사와 백상회, 천축고수들이 일제히 밀어닥칠 것 같습니다."

놀라운 보고가 아닌가?

그러나 황보옥황의 태도는 물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영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밀비천전을 열 때가 되었소."

아아, 중원무림 천년대운명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 밀비천전은 마침내 그 문을 활짝 열게 되는가?

밀비천전.

지금 그 거대한 대전 안에는 불가사의한 기운이 충만해 있었다.

휘류류류류-!

대전의 기류가 물결처럼 파도치며 기나긴 삼백 년의 침묵이 두터운 얼음처럼 깨어지고 있었다.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은 하나의 보검을 허공 높이 치켜들고 아홉 개의 투명한 빙관(氷棺)이 놓인 빙대(氷臺)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휘황찬란한 황금검(黃金劍)!

그 황금검은 눈부신 보광(寶光)을 줄기줄기 뻗쳐 내고 있었다.

천하무쌍의 신검임이 분명했다.

그 황금검은 무엇인가?

천명수령검!

바로 밀비구대무신을 깊은 잠 속에서 깨워 지배하게 된다는 천명수령검이었다.

그리고 아홉 개의 빙관 속에는 밀비구대무신이 죽음처럼 깊고 긴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중원무림사의 가장 위대한 아홉 개의 최고봉이다.

<정정무신(正頂武神)>

<선공무신(禪功武神)>

<불유무신(佛儒武神)>

<마극무신(魔極武神)>

<사령무신(邪靈武神)>

<묵도무신(墨道武神)>

<혈황무신(血皇武神)>

<환상무신(幻想武神)>

<지옥무신(地獄武神)>

과연 천명수령검은 그들의 영원한 잠을 깨워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황보옥황의 신색은 무한히 엄숙하고 장엄했다. 그녀는 지금 혼신의 진력을 검신에 모으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천명수령검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쿠르르르르-!

대전의 기류가 더욱 급박하게 물결치며 검신에서 휘황하게 눈부신 광채가 뻗었다.

츠츠츠츳-!

대전이 온통 황금빛 검광(劍光)으로 가득 찼다.

그 장엄한 금광(金光) 속에 우뚝 서 있는 황보옥황의 입에서 불가해(不可解)한 구결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영령만겁기(靈靈萬劫氣) 빙정구궁심(氷精九宮心)……."

그녀의 영롱한 음성은 천상에서 들려 오는 천음(天音)처럼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천명수령검에서 뻗치는 금광은 더욱 눈부시게 찬란해져서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황보옥황의 모습도 금광 속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구결의 암송 소리만이 섬뜩한 요기를 띄운 채 계속 흘러 나왔다.

"천년잠운기(千年潛雲氣) 개안주행공(開眼週行功)……."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황보옥황의 날카로운 외침이 대전을 진동시켰다.

"밀비구대무신이여, 모두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시오!"

휘황찬란한 금광은 여전히 눈부시게 뻗치고 있는데, 기이한 음향이 들리기 시작했다.

삐꺽- 삐이꺽-!

그것은 빙관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아닌가?

과연 밀비구대무신은 죽음의 잠 속에서 깨어나고 있는가?

이 때 대전을 가득 채웠던 눈부신 금광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전내의 광경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오, 경이와 경악!

밀비구대무신은 빙관 속에서 모두 몸을 일으켜 불사조처럼 우뚝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부릅뜬 눈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일시에 동결시킬 듯한 한광(寒光)을 줄기줄기 뿜어 내고 있었고, 몸에서 뻗치는 가공할 잠강(潛 )은 대전의 기류를 무섭게 격탕시키고 있었다.

쿠르르- 쿠르르르-!

아아, 밀비구대무신은 드디어 부활한 것이다.

중원무림의 천년전설(千年傳說)은 마침내 현실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누가 이 꿈 같은 현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황보옥황은 천명수령검을 허공에 높다랗게 치켜든 채 낭랑하게 소리쳤다.

"밀비구대무신이여, 그대들은 중원의 만년영화(萬年榮華)를 수호하기 위해 영원한 잠에서 깨어났으니 이제 천명수령검의 명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게 되리라!"

밀비구대무신은 천명수령검 앞에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완벽한 생명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천명수령검의 영력에 복종되는 한낱 무혼인(無魂人)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가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천하인들이 안다면, 그들이 천하대세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안다면 그들의 부활은 분명 천하무림사의 공포스러운 일장이 될 것이다.

*          *          *          *

한편 파세천무황 우문환탑이 거느린 궁륭마천부의 십오만 무적대군단은 대무후제국을 향해 노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우문환탑의 전략(戰略)은 간단하면서도 무서운 것이었다.

대인해전략(大人海戰略)!

그는 압도적인 세력의 우세로써 정면공격을 통해 대무후제국을 일거에 궤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우문환탑은 십오만의 정예 중 최소한 오만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무서운 전략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궁륭마천부의 공세가 얼마나 가공무쌍하랴!

그들은 세 갈래의 진격로(進擊路)를 따라 해일 같은 기세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천하의 어떠한 세력이 이 엄청난 공세를 감당하겠는가?

자금성의 황제라 해도 이러한 공격을 당한다면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부들부들 떨리라.

대무후제국과 궁륭마천부는 마침내 격렬히 충돌하기 시작했다.

구룡비협(九龍飛峽).

삼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진격하던 궁륭마천부의 천부동궁주 제해도왕 이극은 대무후제국의 매복경계대(埋伏警戒隊)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즉시 피비린내나는 대혈전이 벌어졌다.

대무후제국의 경계대는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지형지리(地形地理)에 능통했으므로 효과적인 반격을 펼칠 수가 있었다.

쌍방의 격전 속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속출하며 계곡은 온통 혈하(血河)로 변해 갔다.

혼능애(魂陵涯).

역시 삼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진격하던 천부서궁주 적양지존 등소유도 대무후제국의 매복 석궁대(石弓隊)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본래 석궁은 엄청난 살상력(殺傷力)을 지녔으므로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은 일시에 갈대처럼 쓰러져 갔다.

쌍방의 피비린내나는 혈전이 방대한 혼능애 일대를 온통 뒤덮은 것은 일순간이었다.

사우림(邪雨林).

소림 장문인 무오대선사가 거느린 오파일방(五派一幇)의 일만 정예도 울창한 사우림을 통과하다가 대무후제국의 암습대(暗襲隊)와 부딪쳤다.

천년 고목이 빽빽한 숲 속에서는 처절한 혼전이 벌어졌다.나무는 도검에 난자당하고 수풀은 피로 단풍이 들었다.

그러나 궁륭마천부는 이러한 반격을 뚫고 노도처럼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압도적인 위세는 대무후제국의 숨통을 급속히 조여 가는 것 같았다.

유혼관(幽魂關).

일진의 선풍(旋風) 같은 기마대가 넓은 산곡(山谷)으로 들이닥쳤다.

두두두두-!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天軍)처럼 신위당당한 백의기마대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천의신기대!

그들은 바로 동방사의 절정고수들인 천의신기대였다.

천의신기대의 일천 기마대 뒤에는 백상회의 오천여 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마침내 동방사와 백상회의 연합세력도 대무후제국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동방사의 총사령 고려웅이 거느린 천의신기대는 질풍 같은 기세로 유혼관을 달려 나갔다.

유혼관을 통과하면 대무후제국의 관문인 구룡비협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면 천의신기대는 우문환탑의 배후로 진격하는 셈인가?

이 때 앞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제히 쳐라!"

동시에 엄청난 대군단이 산기슭에서 파도처럼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궁륭마천부의 호법원주인 개세천장 사마주강이 거느린 삼만의 정예였다.

우문환탑은 동방사와 백상회의 내습을 대비하여 무적군단의 일부를 배후에 매복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내 쌍방은 맹렬히 충돌했다.

도검의 광채가 난무하며 비명과 함성이 천지를 엎어 버릴 듯 터져 나왔다.

대격전! 태풍 같은 대격전이 유혼관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은 압도적인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천의신기대 앞에서 산사태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의신기대는 그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러 나갔다.

아아, 중원의 집법자(執法者)인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이 천의신기대 앞에서는 절벽에 부딪친 파도처럼 깨어지고 있었다.

피보라, 아우성, 잘려진 수급과 사지가 무수히 허공으로 날으고 소나기 같은 피비가 산곡을 온통 뒤덮었다.

천의신기대는 그 무시무시한 혼전을 뚫고 다시 진격을 개시했다. 진정 천의신기대는 중원을 응징할 불사천군(不死天軍)인가?

우문환탑이 이 광경을 직접 보았다면 공포의 식은땀을 흘렸으리라.

*          *          *          *

밀비천전.

그곳은 여전히 고요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적막은 숨막히도록 음산한 태풍 전야의 정적이었다.

밀비천전 앞에는 한 절세미녀가 수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대무후제국의 제이인자인 우주향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우주향의 절염한 얼굴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자전철사극을 꼬나쥔 뇌정이 철탑처럼 우뚝 서 있었다.

지금 우주향은 밀비천전을 경계하고 있는가?

그녀의 눈동자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이 때 밀비천전 오른쪽의 무성한 화목(花木) 뒤에 하나의 인영이 번쩍 나타났다.

절준하고도 늠름한 백의문생. 바로 무린이었다.

무린이 마침내 천하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하여 밀비천전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무린은 밀비천전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밀비구대무신, 그대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내가 왔다!'

무린은 동방의 응징자로서 중워무학의 최고봉들인 밀비구대무신과의 대결을 위하여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진정 중원의 천년대운명을 결정지을 무서운 순간이 도래했는가?

무린은 밀비천전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하나의 인영이 그의 앞을 소리 없이 막아섰다.

투명한 나의(羅衣)를 걸친 요염한 미녀(美女). 바로 소소(素素)였다.

지난날 그녀는 무린에게 여왕을 죽여 주면 평생 노예가 되겠다고 제의하지 않았던가?

소소는 무린의 앞을 막아서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다시 돌아왔군요. 오늘은 꼭 여왕을 죽일 셈인가요?"

"귀하가 여왕을 죽이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오?"

소소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번쩍였다.

"밀비천전의 본래 주인인 상관룡은 나의 정인(情人)이었어요. 그런데 여왕은 나로부터 그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를 죽여 버렸어요. 나는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여왕을 죽여야 해요."

"음."

무린은 나직한 침성을 토했다.

소소는 가슴 속에 무서운 애정의 한(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에게 애정의 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마 없으리라.

소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섬뜩한 살기가 스쳐 갔다.

"나는 대무후제국의 비밀기관(秘密機關)을 알고 있어요."

무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비밀기관……?"

"궁성의 한가운데 있는 천붕천주탑(天崩天柱塔)은 대무후제국의 모든 기관을 작동시키는 중추기관이에요. 천붕천주탑이 있는 한 외부의 적은 절대로 궁성 안에 침입할 수 없어요."

"……."

무서운 사실이 아닌가?

소소가 다시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천붕천주탑의 탑주(塔主)를 매수해 놓았어요. 당신이 행동을 개시한다면 나는 거기에 맞추어 천붕천주탑을 파괴하겠어요."

무린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그대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이어서 무린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말했다.

"앞으로 반시진 후에 천붕천주탑을 파괴하도록 하시오. 나는 그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하겠소."

"좋아요."

소소는 즉시 몸을 날려 화목 뒤로 사라졌다.

무서운 대변환은 의외의 방향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무린은 곧 화목 뒤에서 나와 밀비천전 앞에 서 있는 우주향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린을 발견한 우주향은 흠칫 놀랐다.

"아니? 당신이……!"

무린이 우주향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선다.

"우주향, 여왕은 밀비천전 안에 있소?"

담담하면서도 싸늘한 신색이었다.

우주향 뒤에 엄중히 늘어서 있던 고수들은 일제히 긴장된 빛을 띄었다.

그들 중에서 유계사대살성(幽界四大煞星)은 만면에 소름끼치는 살기를 드러낸다.

문득 우주향의 호목(虎目)에 이채가 스쳐 갔다. 그녀는 무린에게 은밀히 전음(傳音)을 보냈다.

"무린, 당신은 본녀와 협상할 생각이 없나요?"

갑자기 협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무린이 의혹을 느끼고 전음으로 되물었다.

"무슨 협상이오?"

"당신은 여왕이 거느린 밀비구대무신을 절대로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나 본녀와 손을 잡는다면 그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어요."

무린은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소."

우주향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변했다.

"우리가 손을 잡기만 하면 우리는 단숨에 대무후제국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무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대는 여왕을 배신할 셈이오?"

우주향의 전음은 심유하게 고막을 울려 왔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무린으로 인해 여왕을 배신하다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무린이 다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우주향의 응답은 또렷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거예요."

아아, 우주향은 무린을 사랑하게 되어 여왕을 배신할 결심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여인의 애정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우주향 같은 절세여걸도 일단 사랑의 그물에 빠지게 되면 이토록 놀랍게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린은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우주향, 나는……."

우주향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무린, 빨리 마음을 결정하세요. 곧 여왕이 나타날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우주향이 재촉했다.

"무린, 어서 대답하세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바로 이 때 밀비천전의 육중한 석문이 열리는 음향이 울렸다.

구구구궁-!

순간 우주향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스쳐 갔다.

'늦었다!'

이내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 대전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일신에는 여전히 기이한 운무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휘리리리-!

그녀의 뒤에는 풍모가 절륜비범한 아홉 명의 기인이 따르고 있었다.

밀비구대무신!

중원무림사의 최고봉들. 바로 천명수령검의 영력을 받아 부활한 밀비구대무신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심장을 동결시킬 듯 으시시한 한기가 뻗쳤고, 그들이 발산하는 괴이한 잠강은 기류를 무섭게 격탕시키고 있었다.

무린의 신색은 저절로 굳어졌다.

'드디어 밀비구대무신이 출현했다!'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황보옥황은 무린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우주향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녀는 무린에게 최후의 순간이 닥쳐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황보옥황에게 급히 몸을 굽히며 보고를 올렸다.

"여왕전하께 아룁니다. 우문환탑이 거느린 무적대군단의 오만 본진(本陣)이 뜻밖에도 궁성의 동쪽에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동문을 향해 급속히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우문환탑이 직접 모습을 나타냈는가?

황보옥황은 심유한 음성으로 응답했다.

"승상, 우문환탑보다 더욱 무서운 적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소?"

우문환탑보다 더욱 무서운 적이한 바로 무린을 가리킨다.

순간 우주향의 교구가 부르르 떨렸다. 그녀에게도 최후의 결단이 내릴 순간이 온 것이다.

우주향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돌연 그녀는 뒤에 늘어서 있는 수하들을 향해 엄중히 명을 내렸다.

"일제히 쳐라!"

그러자 무수한 고수들이 무린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악령오나찰, 구유마파, 유령사녀 등 무서운 전대마녀들이 이중 삼중으로 무린을 포위하는 순간, 고막을 찢는 폭갈이 터지며 그들은 일제히 출수를 개시했다.

"악령살강(惡靈殺 )!"

"구유사사기(九幽邪邪氣)!"

"탈혼마공(奪魂魔功)!"

그들의 가공할 합공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있을까?

이 순간 무린의 쌍수가 완만하게 허공을 갈랐다.

"비홍수검인!"

그의 쌍수는 합공을 전개한 무수한 고수들을 한꺼번에 쓸어 나갔다.

느릿하고도 평범한 출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크악!"

"아아악!"

"크으!"

처절한 비명을 울리며 무수한 고수들이 한꺼번에 짚단처럼 거꾸러지는 게 아닌가!

그들은 모두 날카로운 도검에 잘린 것처럼 수급이 절단되고 사지가 분리된 채 피분수를 뿜어 내며 쓰러졌다.

무린의 비홍수검인은 진정 공포의 동방절기(東邦絶技)였다.

전설적인 사극고수인 유계사대살성조차 일순 공포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계사대살성은 급히 무린의 사위를 에워쌌다.

염화살성, 겁륜살성, 천멸살성, 악령살성들은 지옥으로부터 왔다는 이백 년 전의 절대사신(絶對死神)들이 아닌가!

유계사대살성은 혼신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를 뻗쳐 내며 무린을 향해 접근해 왔다.

이 때 돌연 황보옥황이 금빛 찬란한 천명수령검을 허공으로 치켜들며 영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밀비구대무신이여, 동쪽에서 진격해 오는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을 가차없이 섬멸시키시오!"

그러자 밀비구대무신은 일제히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들은 동쪽으로 거대한 독수리 떼처럼 몸을 날려 갔다.

오오, 밀비구대무신은 드디어 그 가공할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무린은 우문환탑이 직접 지휘하는 무적대군단의 본진(本陣)이 대무후제국의 궁성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

'대결전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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