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
이 때 사대살성도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염화천강기(炎火天 氣)!"
"겁륜신공(劫輪神功)!"
"악령사황장(惡靈邪皇掌)!"
찰나지간 무린의 우수에서 괴이한 섬광이 쭉 뻗쳤다.
번쩍-!
그 섬광은 마치 한 자루 검처럼 염화살성의 목을 관통해 나갔다.
"크아아악!"
염화살성은 시뻘건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무너졌다.
순간 겁륜신공과 악령사황장이 무린의 가슴에 작렬했다.
콰르르- 콰쾅-!
그러나 무린의 제이초가 그보다 조금 빨랐다.
번쩍-!
두 줄기 섬광이 뻗치며 숨통 끊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크악!"
"으악!"
겁륜살성과 악령살성의 신형은 두 쪽으로 갈라져서 땅바닥에 고깃덩이처럼 처박혔다.
마지막 남은 천멸살성은 공포조차 느낄 틈이 없었다.
"천명개세도!"
그의 일곱 자 길이 청강도(靑鋼刀)가 번개처럼 무린의 허리를 잘랐다.
파츠츠츠츳-!
무린의 좌수가 또 한 줄기의 섬광을 뻗쳐 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영화검(無影化劍)!"
번쩍-!
눈앞이 아찔해지는 섬광이었다.
천멸살성의 청강도는 그 섬광에 부딪쳐 두 토막으로 부러졌다. 그와 함께 천멸살성의 가슴이 가로로 쫙 갈라졌다.
"크으윽!"
선렬한 피보라를 뿜으며 그의 신형은 베어진 고목처럼 뒤로 거꾸러졌다.
아아, 전설적인 공포고수인 유계사대살성은 일순간에 모두 목숨을 잃고 찢어진 걸레조각처럼 땅바닥에 널려졌다.
진정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아닌가!
조광화원에사 환인천제문의 최고현공을 모두 수련한 무린의 일신무공은 실로 상상하기도 어려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우주향까지도 안색이 핼쓱하게 질렸다.
'무서운 극공(極功)이다. 어쩌면 여왕보다 강할지 모른다!'
갑자기 우주향의 눈동자에는 싸늘한 이채가 스쳐 갔다. 그녀는 무린에게 급히 전음을 보냈다.
"무린, 지금이 여왕을 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에요. 여왕을 처치하고 천명수령검을 차지하면 밀비구대무신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가 있어요."
무린의 검미가 가볍게 치켜올라갔다.
"……!"
우주향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황보옥황이 가슴 철렁한 교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호……."
심혼을 진탕시킬 듯 영롱하게 울리는 교성. 어떤 의미를 지닌 웃음소리인가?
황보옥황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얼음처럼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주향, 그대는 본후가 남의 전성(傳聲)까지 들을 수 있는 천이신통(天耳神通)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아, 남의 전성까지 들을 수 있는 신공을 익혔다니…….
순간 우주향의 절염한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여… 여왕전하!"
황보옥황은 천천히 천명수령검을 치켜들었다.
"우주향, 본후는 그대가 사랑에 빠진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본후를 배신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우주향이 본능적인 공포로 주춤주춤 물러날 때, 황보옥황은 천명수령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우주향, 잘 가거라!"
찰나 우주향 옆에 탑처럼 우뚝 서 있던 뇌정이 자전철사극을 꼬나쥐고 여왕을 향해 맹렬히 덮쳐들었다. 여주인을 위한 대담무쌍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천명수령검의 위력은 상상을 극한 것이었다.
파아앗-!
한 줄기 금광이 뇌전처럼 흐르자 유계삼대마병 중의 하나인 자전철사극이 엿가락처럼 부러지며 숨통 끊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크아아악!"
화강암처럼 강인한 뇌정의 신형은 두부처럼 부서져 멀리 나가 떨어졌다.
진정 전율할 광경이었다.
우주향은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혼신의 공력을 다해 필사적인 절공을 펼쳐 갔다.
"마마환사기(魔魔幻邪氣)!"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은환(銀環)이 떠오르며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촤르르르-!
거대한 은환은 황보옥황을 향해 환영처럼 미끄러져 갔다.
황보옥황이 싸늘한 교갈을 터뜨렸다.
"우주향, 그대가 어찌 본후의 상대가 될 수 있느냐!"
동시에 그녀의 천명수령검이 눈부신 금광을 무지개처럼 폭사했다.
파츠츠츠츳-!
마마환사기와 금광이 부딪치자 무시무시한 기류의 역탕이 일어났다.
쿠르르르- 콰쾅-!
대기가 온통 뒤집히는 듯 파동치며 금빛과 은빛 광채가 현란하게 명멸하여 허공을 가득 채웠다.
다음 순간, 그 장려한 보광(寶光)의 명멸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울렸다.
"으으윽!"
마마환사기가 조각조각 깨어져 흩어지며 우주향의 늘씬한 교구가 낙엽처럼 뒤집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허공에서 신법이 어지럽게 무너지며 그대로 추락했다.
털썩-!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 그녀의 가슴은 피로 물든 채 아직도 선혈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우주향은 역시 황보옥황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가?
황보옥황은 우주향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녀의 신색은 어느 새 조용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쓸쓸한 시선으로 우주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주향, 그대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렸으니 어쩌면 행복한 여인인지도 모르오. 본후는 그대의 명복을 빌어 주겠소."
황보옥황의 말 속에는 처량한 우수(憂愁)가 깃들어 있었다.
우주향의 눈동자에는 이슬방울이 맺혔다.
"여왕전하… 천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벌써 죽음의 그림자가 덮여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무린을 뚫어지게 한 번 응시한 뒤 눈을 스르륵 감더니 고개를 푹 꺽었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너무나도 허망하고 처연한 최후가 아닌가!
일세의 여걸 우주향은 천하를 종횡하며 대야망을 펼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라난 사랑의 싹 때문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인의 숙명이었던가?
무린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우주향의 죽음은 그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그러나 그의 신색은 물처럼 고요했다.
'우주향,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정에 휩쓸려서 움직일 수는 없었소.'
무린은 황보옥황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황보옥황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
"……!"
무린의 주위에는 이미 수천 명의 홍의여검수들이 겹겹으로 대라망(大羅網)을 펼치고 있는데, 두 남녀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쳐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작렬했다.
문득 무린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황보옥황, 그대의 진면목을 보고 싶소!"
황보옥황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게 최후의 소원이라면 기꺼이 들어 주겠어요!"
말이 끝나자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운무의 회오리가 서서히 사라지며 황보옥황의 진면목이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한한 신비의 수수께끼 속에 묻혀 있던 황보옥황은 어떤 진면목을 지니고 있는가?
그녀의 진실한 모습을 대한 순간, 무린은 기이한 충격을 받았다.
아아, 황보옥황의 용모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이 시리도록 절염하고 혼이 흩어지는 듯 절미한 얼굴.
천상의 선녀라 한들 이토록 아름다울까?
그러나 무린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황보옥황의 용모와 자태는 무린의 마음을 일시에 사로잡는 기이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린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 본 얼굴이 어찌하여 몹시 낯익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늘 보았던 얼굴처럼…….'
그렇다. 황보옥황의 아름다운 모습은 무린에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섬세한 버들눈썹,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그녀의 아름다움은 결코 요염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차라리 청순하고 고아하다고 할까?
천하를 움켜쥐려는 엄청난 야망을 지닌 대여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규중에서 곱게 자라난 얌전한 소저의 풍모인 것이다.
황보옥황이 생긋 웃었다.
"무린, 제 얼굴을 보고 실망했나요?"
미소를 지으니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덧니가 살짝 드러났다.
덧니가 난 여왕!
무린은 다시 한 번 기이한 충격을 받았다.
'저 미소 또한 조금도 낯설지 않다. 저 귀여운 덧니까지… 아아, 나는 저 여인을 꿈 속에서 보았단 말인가?'
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황보옥황, 당신의 그 덧니는 언제 났소?"
아니 세상에 그런 이상한 질문도 있는가?
황보옥황의 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감히 본후를 희롱할 셈인가요?"
그녀는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천하의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 덧니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무린의 태도는 진지했다.
"나는 그대를 언젠가 많이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오. 마치 아득하게 잃어버린 꿈 속의 기억처럼……."
황보옥황의 표정이 약간 기이하게 변했다. 그녀는 새삼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나도 사실은 당신을 아득한 꿈 속에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두 남녀의 시선은 다시 부딪쳐 기이하게 타올랐다.
이 때 멀리서 은은한 함성이 들리며 기류가 무섭게 역탕하는 파공성이 울려 왔다.
순간 황보옥황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무린, 시간이 없어요. 본후가 이제 당신을 죽일 최후의 순간이 왔어요!"
그녀는 천명수령검을 높다랗게 치켜들었다.
그녀의 신색은 이미 덧니 때문에 부끄러워하던 소저의 그것이 아니었다.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무서운 천년여왕의 위풍이었다.
황보옥황은 천명수령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무린, 본후가 당신을 죽인 뒤 우주향과 나란히 묻어 주겠어요!"
그녀의 샛별 같은 눈동자는 섬뜩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무린은 운명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그는 허리춤에서 상감잠룡신검을 뽑았다.
환인천제문의 세문보검(世門寶劍)!
천명수령검과 상극을 이루는 그 보검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감잠룡신검이 찬란한 보광을 뿌려내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황보옥황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천명수령검 못지않은 보검이다!'
무린은 상감잠룡신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황보옥황, 그대 말대로 최후의 순간이 왔소. 나는 동방의 응징자로서 그대의 목숨을 거두고 밀비천전과 밀비구대무신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애 버릴 것이오!"
무린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신위가 풍겼다. 천하를 심판할 절대자의 기도였다.
일순 황보옥황은 무린의 엄청난 기도 앞에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아…….'
그러나 다음 순간 황보옥황의 두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피어 올랐다.
'죽이리라!'
바야흐로 두 남녀의 대결이 벌어질 즈음, 주위에 겹겹이 대라망을 펼친 수천 명의 홍의여검수들은 이 미증유의 대결을 긴장하여 지켜보고, 멀리서 들려 오는 함성과 기류의 진탕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
그 본진 오만은 대무후제국의 동쪽 궁문(宮門)을 향해 성난파도처럼 밀려가고 있었다.
범람하는 해일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은 단숨에 대무후제국을 초토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때 대무후제국의 웅장한 궁성 위로 몇 개의 인영이 비조(飛鳥)처럼 떠올랐다.
아홉 개의 괴영(怪影). 그들은 노도처럼 진격하는 대군단의 정면을 향해 살처럼 쏘아 오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밀비구대무신!
그들은 바로 황보옥황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밀비구대무신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대군단 앞으로 쇄도했다.
순간 처절한 비명과 말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악!"
"크아악!"
대군단의 선두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밀비구대무신이 대군단의 한가운데를 파도처럼 가르며 출수를 개시하자, 천번지복할 굉음 속에 거대한 강기의 기둥이 폭풍처럼 그들을 쓸어 나갔다.
콰우우웅-!
우르르르- 콰쾅-!
"크아아악!"
"크헉!"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 꼬리를 끌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아, 진정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이었다.
밀비구대무신은 대군단을 가로 세로로 종횡하며 무자비하게 도살하기 시작했다.
동방의 응징자를 제압하여 중원의 만년영화를 수호하기 위해 부활한 밀비구대무신이 중원의 정예를 무차별 도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한 번 스쳐 가는 곳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지고 산사태처럼 허물어졌다.
갈기갈기 찢어진 살과 뼈가 허공에 눈보라처럼 난비하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혈우는 하늘을 시뻘겋게 뒤덮었다.
오오, 대겁난이여!
원세무황 상관무륭은 밀비천전을 건립할 때, 삼백 년 후에 벌어질 이 무서운 대겁난을 어찌 예측이나 했으랴!
이것은 그가 천죄를 범한 데 대한 하늘의 징벌인가?
밀비구대무신은 계속 대군단을 폭풍처럼 휩쓸며 도륙하고 있었다.
처참무인지경! 오만의 대군단은 불과 아홉 명의 무혼인(無魂人)에 의해 처절하게 파괴되어 유린당하고 있었다.
일찍이 무림사상 이토록 무섭고 가공할 대량 잔살이(殘殺)이 있었던가?
밀비구대무신은 지옥에서 부활한 불사마(不死魔)였고 천하를 폐허로 만들 저주의 악신(惡神)들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영혼 또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호라! 훗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은 이 때의 대겁난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그러나 우문환탑이 펼치는 대인해전략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은 곳곳에서 치열한 혈전에 부딪쳐 무수한 희생자를 내면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파도는 부서져도 다시 모여서 밀려간다!
무적대군단은 시체로 땅을 뒤덮으면서도 대무후제국을 향해 계속 파도처럼 밀려가고 있었다.
과연 천하의 지배자인 우문환탑만이 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대전략이 아닌가!
한편 무린과 황보옥황, 두 남녀는 보검을 겨눈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대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결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장내의 기류는 당장 폭발할 듯 팽팽히 당겨지고 그들의 검에서는 가공할 예기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이 때 사위에서는 무서운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엎어 버릴 듯 울려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이 온통 흔들리며 기류가 사납게 파동쳤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이 궁성을 향해 노도처럼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궁성 바로 앞에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급박한 형세였다.
일순간 황보옥황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이더니 낭랑한 교갈이 터졌다.
"천명파세검(天命破世劍)!"
천명수령검은 무린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찔러 왔다. 눈부신 금광이 무지개처럼 뻗었다.
찰나지간 무린의 상감잠룡신검은 뇌류(雷流)처럼 허공을 가르며 천명수령검에 부딪쳐 갔다.
"일섬류(一閃流)!"
태극검보의 제삼식이었다.
두 줄기 검기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대기가 무섭게 격탕하며 괴이한 음향이 고막을 울렸다.
쿠쿠쿠- 쩌쩌쩌쩍-!
그것은 마치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었다.
돌연 장내는 눈부신 첨광(尖光)으로 가득 차고 허공은 거대한 두 개의 검영(劍影)으로 완전히 가려졌다.
두 남녀를 에워싼 수천 명의 홍의여검수들은 일제히 돌풍에 휩쓸린 갈대처럼 쓰러졌다. 엄청난 검강(劍 )의 파도가 그들을 돌풍처럼 쓸어나간 것이다.
무린과 황보옥황은 눈부신 첨광 속에서 비조처럼 교차되며 제이초를 나누었다.
"천명멸백검(天命滅魄劍)!"
"환영강(幻影 )!"
다음 순간 그들의 신형은 허공에서 서로 격렬히 튕겨져서 가랑잎처럼 뒤집혔다.
건곤일척의 생사대결!
그들은 각기 극심한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며 땅 위에 내려섰다.
황보옥황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무린, 당신의 검공은 정말 대단하군요!"
무린의 신색은 여전히 냉철했다.
"그대의 검공 또한 대단한 것이었소."
"이제 본녀는 최후의 절초를 펼쳐 당신의 생명을 취하겠어요!"
황보옥황은 다시 천명수령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바로 이 때 궁성의 한가운데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콰콰쾅-!
동시에 하나의 웅장한 고탑(高塔)이 허공으로 그림처럼 떠올랐다.
다음 순간 허공에 떠오른 고탑은 산산이 부서져서 우박처럼 흩어졌다.
황보옥황은 안색이 대변했다.
"아니? 천붕천주탑이……!"
궁성 전체의 기관을 지배하는 천붕천주탑이 폭발한 것이다.
물론 소소가 무린과의 약속에 따라 천붕천주탑을 폭발시킨 것이다.
이어서 대무후제국의 호화로운 궁성은 무섭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쿠쿠쿵-!
성벽은 쩍쩍 갈라져 무너지고 전각과 누대는 산사태처럼 붕괴되어 쓰러졌다.
오오, 실로 무서운 광경이 아닌가!
천붕천주탑이 폭발하자 궁성 전체의 기관이 제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르르르릉- 쿠쿠쿠쿠쿵-!
웅장한 궁성이 마치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처절한 아우성과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
대무후제국의 호화로운 궁성은 일순간에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황보옥황도 경악의 표정을 지은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소소의 가슴 속에 맺힌 서릿발 같은 한이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돌연 황보옥황은 하늘을 태울 듯 솟구치는 화염 속으로 미친 듯 몸을 날려갔다.
"무린, 당신과의 대결은 뒤로 미루겠어요!"
그녀의 모습은 찰나간에 구름처럼 피오 오르는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궁성은 계속 무섭게 붕괴되고 있었다.
마침내 궁륭마천부의 대군단은 궁성 안으로 노도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랴?
그들에게 덮쳐든 것은 산사태처럼 붕괴되는 성벽과 지옥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화염이었다. 그것은 진정 무시무시한 한 폭의 지옥도였다.
무린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의 징벌이다!'
이 때 허공에서 괴이한 음성이 울려 왔다.
"흐흐흐… 대무후제국과 중원천하는 동시에 멸망하고 있다. 크흐흐… 장엄한 대멸망(大滅亡)이다!"
무린은 흠칫해서 시선을 들었다.
"……!"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천공에 하나의 팔각홍사등(八角紅絲燈)이 유유히 흘러 가는 것이 보였다.
무린은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유령사망등이다.'
그것은 무림 최대의 공포금기(恐怖禁忌)인 유령사망등이었다. 항상 죽음의 폭풍을 몰고 다닌다는 유령사망등.
도대체 유령사망등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때 옆에서 맑고도 사유한 음성이 들렸다.
"저 유령사망등의 정체를 본녀는 알고 있어요."
동시에 한 흑영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혈향흑장미 삼경자. 바로 그녀였다.
그녀도 대변겁의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무린은 물처럼 담담한 신색으로 물었다.
"유령사망등의 정체는 무엇이오?"
삼경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유령사망등은 천축무림의 지존인 절륜대법황의 전령(傳令)이에요."
"절륜대법황……."
"절륜대법황도 가까운 곳에 와 있어요. 대변겁의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
"무린, 당신은 본녀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요? 본녀는 약속대로 무영칠비인을 데리고 왔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어느 새 그녀의 뒤에는 일곱 명의 흑의인이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스스스-!
칙칙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일곱 괴인(怪人)이었다. 그들은 모두 방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전신에서 뻗치는 불가사의한 기운은 마치 일곱 자루의 예도(銳刀)가 우뚝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무영칠비인!
그들은 바로 동왜 청풍일도류의 최고살수라는 무영칠비인이었다.
하면 그들은 어떤 가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삼경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본녀는 곧 일에 착수하겠어요."
말이 끝나는 순간 삼경자와 무영칠비인은 무린의 눈앞에서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 일에 착수한다!
그녀가 말하는 일이란 바로 살인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일은 정말 재미있게 되어가고 있군!'
무린의 눈동자에는 싸늘한 냉소가 스쳐 갔다.
그는 즉시 우주향의 시체를 안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장내에서 번쩍 사라졌다.
* * * *
높다란 단애(斷崖).
이상하게도 단애 위에는 흐릿한 녹무(綠霧)가 안개처럼 회오리치고 있었다.
휘리리리리-!
그 녹무 속에는 거대한 연화보교(蓮花寶轎)가 환영처럼 떠있었다.
연화보교에는 한 거구의 혈포인이 타고 있는데, 그의 전신에서는 휘황한 혈광이 뻗어 오르고 있어 무한히 신비롭게 보였다.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음산한 사기(邪氣)였다.
무서운 사기에 휩싸인 혈포괴인!
그는 누구인가?
연화보교의 뒤에는 열 명의 괴녀가 엄중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고 그들의 몸에서는 은은한 홍광이 발산되고 있었다.
열 명의 나녀는 모두 요기롭도록 아름다웠고,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할 만큼 선정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연화보교 위의 혈포괴인은 흐릿한 녹무 속에서 뇌전(雷電)처럼 날카로운 벽안(碧眼)을 번쩍이며 계곡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대한 계곡 일대는 온통 시뻘건 화염의 바다로 변해 가고 있었다.
쿠르르르- 쿠쿠쿵-!
뇌성 같은 음향이 계속 울리며 거대한 궁성이 사나운 불길에 휩싸여 무참하게 붕괴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대무후제국의 궁성이었다.
대무후제국은 완전히 초토로 변해 가고 처절한 비명과 아우성이 지옥의 호곡처럼 아련히 들려 오고 있었다.
문득 혈포괴인의 입에서 음유한 한성(寒聲)이 흘러 나왔다.
"하늘이 본좌 절륜대법황에게 기회를 주는 모양이다. 중원의 모든 고수들을 처치하여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아아, 혈포괴인은 바로 천축의 대지존인 절륜대법황이었다.
그는 혈금십천사령을 거느리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절륜대법황은 다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도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그러나 우문환탑은 결코 한 번 던진 도패를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음성이 이어졌다.
"최후의 결전은 동방대장정의 출발지인 벽라하구(碧羅河口)에서 벌어질 것이다. 결국 진강(鎭江)의 하류에 그물을 치면 수많은 대어(大魚)가 저절로 걸려들 것이다!"
진강의 하류에 그물을 치면 수많은 대어가 걸려든다니 무슨 뜻인가?
연화보교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
혈금십천사령을 거느린 절륜대법황은 이내 단애 위에서 환영처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