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꽃 같은 여자 (35/37)

불꽃 같은 여자

무린은 엄청난 화염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다.

우르르릉- 콰콰쾅-!

대무후제국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궁성은 완전히 붕괴되어 초토로 변해 가고 있었다.

궁성 안으로 밀물처럼 진격해 들어온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은 의외의 재앙에 휩쓸려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처참한 대겁난이었다.

무린은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연기를 뚫고 비조처럼 천공으로 솟구쳤다. 찰나간에 그는 궁성 밖의 숲 속으로 번쩍 날아들었다.

이 때 한 여인이 그의 앞을 성큼 막아섰다.

"멈춰요!"

벽안의 절세미녀. 바로 천축공주 아난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기이한 냉소를 지으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무린, 대무후제국의 천붕천주탑을 파괴하여 궁성을 초토로 만든 것도 당신의 걸작(傑作)인가요?"

무린은 담담히 응답했다.

"아니오. 그것은 소소라는 여인의 작품이오."

"소소……?"

"그녀는 대무후제국의 인물이나 여왕을 증오했기 때문에 탑을 파괴시킨 것이오."

"그녀는 왜 여왕을 증오했죠?"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오."

"사랑……!"

"소소는 밀비천전의 본래 전주(殿主)인 상관룡(上官龍)의 정인이라고 했소."

"……!"

무린은 아난타를 정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소?"

아난타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에요!"

무린은 고소를 지었다.

"지난 번에 나는 아난타가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소. 그러나 아난타는 나를 죽이지 않았지 않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어요!"

"사정이 어떻게 달려졌단 말이오?"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어요!"

"음."

무린은 나직이 침성을 토했다.

아난타는 절륜대법황의 명을 받고 무린을 죽이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아난타가 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도 물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겠지요?"

자신에게 순순히 죽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무린의 음성은 침중했다.

"아난타, 지금은 아난타에게 나의 생명을 줄 수 없소."

"그건 무엇 때문이죠?"

"나는 운명적으로 처리해야 할 천하대사(天下大事)를 눈앞에 두고 있소. 이 대사를 완전히 처리하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죽을 수 없소!"

"천하대사란 동방의 응징자로서 중원을 철저히 심판하는 일 말인가요?"

"그렇소."

"대사가 끝나면 당신은 나에게 목숨을 줄 수 있나요?"

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순간 아난타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뜨겁게 번쩍였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릴 수 없어요. 사부님은 당장 당신을 죽이라고 나에게 명하셨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되고 보면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

아난타는 만면에 살기를 띄고 서서히 다가왔다.

그녀의 쌍수가 은은한 벽옥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극강공(極 功)을 끌어올리고 있는 중거였다.

무린은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돌연 아난타가 번개처럼 일수를 펼쳤다.

"사벽파옥수(巳碧破玉手)!"

새파란 청광(靑光)이 살아 있는 뱀처럼 쭉 뻗쳤다.

무린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는 급히 신형을 틀며 완만하게 우수를 쳐 냈다.

비홍수검인 일 초였다.

쿠콰콰콰콰-!

두 줄기 강기가 부딪치자 기류의 맹렬한 진탕음이 고막을 울리며 강기가 무섭게 파동쳤다.

찰나지간 아난타의 싸늘한 교갈이 터졌다.

"무린, 나에게 목숨을 바쳐요!"

그녀의 전광석화처럼 빠른 제이초가 무린의 가슴에 작렬했다.

콰르르릉- 콰앙-!

그런데 이 순간 무린의 좌수가 지극히 완만하게 허공을 가르며 일호선(一弧線)을 그었다.

다음 순간 고통스런 신음성이 흘렀다.

"으윽!"

동시에 아난타의 날씬한 교구가 물고기처럼 뒤집히는 게 아닌가!

그녀의 신형은 허공에서 커다랗게 회전하여 무성한 수풀 속에 털썩 떨어졌다.

"으으음……."

그녀는 고통스럽게 꿈틀거릴 뿐 한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역시 그녀는 무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무린은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아난타, 그대는 나의 초수(招手)에 의해 기해혈(氣海穴)과 기호혈(氣戶穴)이 동시에 격중되었소. 앞으로 수일 간은 공력을 운행하지 못할 것이니 무리하지 마시오."

아난타는 놀라고 당황한 가운데도 노기충천했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반드시 당신을 죽이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린에게로 사납게 덮쳐들었다. 공력을 잃었으면서도 그녀의 기세는 무서웠다.

맹렬한 육탄돌격! 일순간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수풀 위로 쓰러졌다.

아난타는 무린의 몸을 휘감으며 목에 입을 대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죽이겠어요!"

공력을 잃은 그녀는 이빨로 무린의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것이다.

무린이 피할 사이도 없이 아난타는 무린의 목을 꽉 물어 버렸다.

개가 사람을 물어 죽인 일은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물어 죽인 일은 아직껏 없었다.

이빨 자국이 꽉 찍힌 무린의 목에서는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린은 나직한 고통의 신음을 흘렀다.

"으음."

그러나 무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난타는 다시 한 번 물어뜯으려 입을 딱 벌렸다.

이 순간 두 남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

"……!"

무린은 담담히 그리고 쓸쓸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부딪친 아난타는 그만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린의 목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려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갑자기 아난타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침내 양쪽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흐흑……."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더니 입술을 무린의 목에 대고 흐르는 피를 빨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무서운 흡혈귀(吸血鬼)가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무린은 아난타의 울먹이는 어깨를 말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난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입술은 목을 더듬어 올라가 무린의 입술로 다가갔다.

이윽고 두 남녀의 입술은 하나로 겹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으흠……."

아난타는 달콤한 비음을 토하며 목마른 사람처럼 무린의 입술을 빨았다. 본래 그녀는 정애(情愛)에 목말라 있었던가?

무성한 수풀 속에서 뒤엉킨 두 남녀는 오랫동안이나 뜨겁고 열렬한 입맞춤을 계속했다.

하늘에는 서서히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난타는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무린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무린, 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게 기뻐요. 어서 나를 가지세요. 완전이 당신의 여자로 만들어요."

아난타는 스스로 자신의 옷자락을 풀어 헤치며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무린, 나중에는 기회가 없어요. 지금 나를 가져요. 나를 당신의 여자로 만들어 줘요."

아난타는 대담하게 옷자락 속에서 가슴을 드러냈다. 탄력 있게 부풀은 두 개의 육봉이 출렁이며 나타났다.

아난타는 무린의 얼굴을 끌어당겨 두 육봉 사이에 묻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가져요. 당신 거예요."

무린은 여체의 향긋하게 짙은 살냄새를 맡았고 그 녹아날 듯한 감촉과 탄력을 느꼈다.

그의 피는 뜨겁게 끓어올랐다.

무린의 입은 그녀의 두 육봉을 거칠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아난타는 그 애무의 쾌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기쁨을 표시하는 숨가쁜 신음을 토해 냈다.

"으으음……."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몸에 걸친 모든 옷을 플어 헤치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 속에 벗겨진 옷가지가 어지럽게 흩어지며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아난타의 나신이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의 뜨거운 폭풍의 시간이 지나고 물결처럼 일렁이던 수풀은 겨우 조용해졌다.

아난타는 아직도 무린과 찰삭 밀착된 그대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무린의 목을 휘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무린, 이제 됐어요.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확인됐어요."

무린은 침묵 속에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

문득 아난타가 물었다.

"무린,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무린은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소."

아난타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마 나의 사부님에게 죽게 될 거예요!"

"……."

"사부님의 유령사망등이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날 때, 당신은 틀림없이 죽음을 당하게 될 거예요!"

"……."

아난타의 음성은 비에 젖은 듯 나직해졌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고 그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태어난다고 우리 천축인들은 믿고 있어요."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소."

"당신은 아마 진강(鎭江) 하류의 벽라하구(碧羅河口)에 있는 비운애(飛雲涯)에서 유령사망등과 부딪치게 될 거예요."

"비운애……."

아난타는 쓸쓸한 한숨을 토해 냈다.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는데… 오히려 당신에게 비밀을 이야기하고 말았군요."

"……."

아난타는 무린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

"무린, 당신은 내가 먼저 죽으면 슬퍼하겠어요?"

무린이 되물었다.

"무슨 뜻이오?"

아난타의 눈빛은 심유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당신은 나의 오라버님을 죽인 원수에요. 그리고 사부님은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나에게 내렸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정말 그런가?

아난타의 눈동자는 다시 기이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무린은 희미한 격동을 느끼며 그녀의 몸을 안았다.

"아난타……."

"무린, 내가 죽어도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 때는 이승의 은원(恩怨)이 모두 사라지므로 우리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그녀의 믿음인가?

아난타는 무린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무린, 한 번 더 사랑해 주세요. 뜨겁고 격렬하게… 마지막으로……!"

그녀는 미친 듯 열렬히 무린의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무린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격정! 무린은 새로운 열정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린은 아난타의 달콤한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두 남녀는 이내 하나가 되어 환희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아난타는 육체의 환희를 마음껏 받아들이기 위해 온몸을 활짝 열었다.

무린은 격정의 불꽃을 태우며 그 불꽃 속으로 정신없이 함몰되어 갔다.

환희의 절정!

육체의 환희는 곧 영혼의 환희였다.

아난타는 영육(靈肉)이 하나로 되는 그 사랑의 절정, 그 극점(極點)에서 숨막히는 신음을 토하며 전율했다.

다음 순간 무린의 열정이 뜨겁게 폭발하며 아난타는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이윽고 온몸에 힘을 빼고는 조용해졌다.

폭풍이 지나간 것이다.

무린은 그녀의 이마에 진주처럼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 주며 긴 숨을 토해 냈다.

이 때 무린의 검미가 꿈틀했다.

"아난타, 그대는……."

아아, 아난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녀는 절정의 환희가 끝나는 순간 스스로 경혈(經穴)을 폐쇄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무린의 전신은 격동으로 부르르 떨었다.

"아난타!"

아난타는 자신이 조금 전에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미 숨이 끊어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아니, 그녀의 얼굴에는 잔잔한 만족의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분명 그것은 사랑의 완성을 만족해 하고 확신하는 미소였다.

무린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아난타의 몸을 안은 채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난타, 그대는 너무나 사랑스런 여인이었소.'

휘이이이-!

밤바람이 무성한 수풀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녀의 사랑은 짧았으나 불꽃처럼 찬란하고 눈부시게 명멸해 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불꽃 같은 사랑의 광휘만이 영겁(永劫)의 암흑 속에서 끝없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감히 아난타의 이 믿음을 부정할 수 있으랴?

때로 인간의 죽음은 삶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법이다.

불꽃 같은 여인 아난타.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거대한 회오리 혈풍은 진강 줄기로 접어들어 동해를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대무후제국 일대에서 벌어진 엄청난 대혼전은 헤일 수 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 십오만은 불과 오만으로 줄어들었다. 우문환탑이 예상한 두 배의 희생자를 낸 것이다.

대무후제국의 궁성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백상회의 고수들도 무수히 쓰러졌다.

무림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혈겁이었다.

산하는 시체로 덮이고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대혈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거대한 혈겁의 회오리는 최후의 대종말을 향해 동해의 벽라하구로 밀려가고 있었다.

벽라하구는 바로 환단무극경을 향해 펼쳐지는 동방대장정의 출발지였기 때문이었다.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

그 대군단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지만 아직도 호호탕탕히 밀려가는 바다 같은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

무서운 혈해를 헤쳐 나온 오만의 대군단이 진강 줄기를 따라 진군(進軍)하자, 그 위세는 여전히 산하를 뒤엎을 듯했다.

우문환탑은 진강 일대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룬 뒤 그대로 벽라하구를 떠나 동방대장정에 오르려는 계획인 것이다.

밀비구대무신!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 거느린 그들 아홉 고수는 궁륭마천부의 무적대군단을 무인지경처럼 휩쓸어 버린 뒤 홀연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 역시 벽라하구를 향해 밀려가는 것은 분명했다.

동방사의 천의신기대!

질풍처럼 혈전장을 누비던 천의신기대와 백상회의 고수들도 혼전이 끝난 뒤 홀연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 또한 비로(秘路)를 따라 벽라하구로 밀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쫓기고 누가 쫓는지조차 알 수 없는 회오리 혈풍은 동해의 벽라하구를 향해 급속히 몰려가고 있었다.

*          *          *          *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질풍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벙어리 사내 철묵이었다.

마차 안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무린과 당유기, 노노아 그들 세 사람이었다.

마차는 칼날처럼 솟은 절벽 위의 협로(峽路)를 질주하고 있었다.

절벽 밑으로는 새파란 강줄기가 비단폭처럼 뻗쳐 있었다. 동해로 흘러가는 진강이었다.

그러면 마차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물론 그 목적지는 벽라하구였다.

서서히 황혼이 밀려올 무렵, 마차는 절벽 끝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절벽 밑에는 거대한 하구가 펄쳐져 있었다.

시뻘건 석양으로 불바다처럼 장엄하게 보이는 동해의 수평선이 멀리 보였다.

벽라하구.

드디어 마차는 벽라하구에 도착한 것이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무린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뒤를 이어 당유기와 노노아가 마차에서 내렸다.

무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벽라하구 일대를 죽 둘러보았다.

"……!"

장려하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하구였다.

하구 중앙에는 거대한 만년 암초가 석산(石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문득 무린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당유기, 저 하구 한가운데 솟아 있는 암초와 이 절벽을 한꺼번에 폭파시킬 수 있겠소?"

무서운 말이었다.

당유기는 고금을 딩딩 튕기며 히죽 웃었다.

"저 암초와 이 절벽을 폭파시키면 벽라하구는 완전히 초토로 변하여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이 봉쇄되고 말지."

더욱 무서운 말이 아닌가!

당유기는 벽라하구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나 폭파 시간을 잘 선택해야 하오."

불꺼진 곰방대를 빠끔빠끔 빨던 노노아가 한 마디했다.

"그럴 듯한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대머리 앵무새 견자가 공연히 한 마디 부르짖었다.

"개자식!"

철묵은 무슨 뜻인지를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아아, 무린은 그 장려하게 펼쳐진 벽라하구를 완전히 초토로 만들 셈인가?

대선단! 거대한 대선단이 검푸른 강줄기를 따라 전진하고 있었다.

약 오백 척의 질서정연한 대선단은 강을 뒤엎을 듯 위풍이 당당하다. 그들은 바로 동방대장정에 오를 궁륭마천부의 궁륭대선단(穹?大船團)이었다.

궁륭대선단!

동해를 가로질러 동방의 환단무극경을 찾아갈 우문환탑의 직속 대선단이었다.

진강 유역을 가득 채우고 호호탕탕하게 전진하는 궁륭대선단의 중앙에는 한 척의 호화로운 금포범선(錦布帆船)이 나아가고 있었다.

금포범선은 오백 대선단을 압도할 듯 웅장했고, 오색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금포범선의 널따란 갑판.

그곳에는 한 백의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우뚝 서서 강변 일대를 유유히 들러보고 있었다.

그의 일신에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제왕의 기도가 흘러넘쳤고, 그의 눈동자는 형형한 신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파세천무황 우문환탑!

그는 바로 당대의 무림천자인 우문환탑이었다.

우문환탑의 뒤에는 궁륭마천부의 최고수뇌부가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천부사대분궁주, 천부육대원주, 천부십이장, 천부이십사영 등 그밖에 오파일방의 장문인까지 엄숙한 신색으로 늘어서 있었다.

궁륭마천부의 최고고수가 이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우문환탑의 표정은 의외로 무심했다. 문득 우문환탑은 천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으로 덮여 가는 천공 멀리에 하나의 팔각홍사등이 붉은 빛을 뿌리며 천천히 흘러 가는 게 보였다.

우문환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유령사망등이다. 드디어 절륜대법황이 나타날 모양이군!'

이 때 대선단의 전방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적선(敵船)이다!"

"괴선단(怪船團)이 출현했다!"

과연 궁륭대선단의 앞쪽에서 무수한 횃불이 충천하며 흑빛 일색의 거대한 대선단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분명히 절륜대법황이 아수파라호에서 중원으로 거느리고 들어온 천축대선단이었다.

천축대선단이 홀연 나타나자 궁륭대선단은 일제히 대적진(對敵陣)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문환탑의 뒤에 늘어서 있는 고수들은 모두 긴장의 빛을 띄었다.

그러나 우문환탑의 신색은 지극히 태연했다.

'절륜대법황, 본좌를 가볍게 보았다면 큰 오산을 한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무섭게 반짝였다.

'천축세력이 감히 중원을 넘볼 수는 없다. 본좌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다면 오직 동방의 응징자 무린뿐이다.'

순간 전방에서 요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콰쾅-!

궁륭대선단과 천축대선단이 정면으로 접전을 개시한 것이다.

순식간에 진강 유역은 함성과 비명으로 뒤덮이고 빗발치는 화전(火箭)과 도검의 광채가 어두운 암천을 불꽃처럼 수놓았다.

또 한 차례의 대혈전이 시작된 것이다.

콰르르- 콰쾅-!

굉음이 연속 터지며 쌍방의 무수한 전선(戰船)들이 벌써 산산이 부서져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강물이 온통 뒤엎어지는 듯 무서운 수상전(水上戰)이었다.

우문환탑은 우뚝 서서 전황(戰況)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벽라하구에 이르면 본부의 별동군(別動軍)이 접응하여 일시에 적을 섬멸시키게 된다!'

아, 우문환탑은 별동군을 미리 벽라하구에 잠복시켰는가?

이 때 허공에서 괴이한 파공성이 울렸다.

동시에 열 명의 벌거숭이 나녀가 갑판을 향해 빗살처럼 쏘아왔다. 온몸에서 은은한 홍광을 발산하는 요염한 나녀들이었다.

혈금십천사령!

그들은 바로 절륜대법황이 거느리고 있던 혈금십천사령이었다.

혈금십천사령은 갑판 위로 쇄도하자마자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풍만한 유방이 크게 출렁이며 벌거숭이 나신이 춤추듯 허공을 누비는 순간, 수명의 고수가 한꺼번에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크악!"

"으헉-!"

아아, 혈금십천사령은 가공할 신비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쌍수에서 눈부신 홍광이 현란하게 뻗치며 기괴무쌍한 혈강이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을 사납게 쓸어 나갔다.

차르르- 차르르릇-!

대경실색한 천부이십사영은 황급히 출수를 개시했다.

"일제히 쳐라!"

천부이십사영은 궁륭마천부의 떠오르는 신성(新星)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금십천사령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 기괴한 나녀들이 연속 쌍수를 펼쳐 내자, 그들 대부분은 순식간에 핏떡이 되어 갑판 위에 털썩털썩 쓰러졌다.

"크아악!"

"크으으!"

궁륭마천부의 모든 고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갑판 위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천부이십사영에 이어 천하를 호령하던 절정고수들이 연속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순식간에 갑판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공포와 경악!

혈금십천사령은 궁륭마천부의 최고수뇌부를 일시에 휩쓸어 버릴 기세였다.

이 때 허공에 다시 칠팔 개의 흑영이 나타났다.

나타나는가 싶은 순간, 그들은 빛살처럼 갑판으로 날아들며 괴이한 은망(銀芒)을 뿌려 냈다.

번쩍-!

이내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 울렸다.

"으헉!"

"으허헉!"

아아, 이번에 숨통 끊어지는 비명을 토하며 거꾸러지는 것은 뜻밖에도 혈금십천사령이었다.

갑판에 처참한 모습으로 거꾸러진 그들의 복부에는 날카로운 은빛 첨도(尖刀)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일순간에 다섯 명의 나녀가 첨도에 격중되어 사지를 쭉 뻗고 널브러졌다.

이어서 그들의 뇌쇄적인 알몸은 쭈글쭈글 오므라들더니 검붉은 핏물로 변하여 줄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혈금오천사령은 이 광경을 보자 대경하여 허공으로 솟구쳤다.

파아아앗-!

찰나지간에 그들은 암천으로 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덟 명의 흑의인이 갑판 위에 그림자처럼 내려선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선두에는 화사하게 아름다운 여인이 기이한 미소를 띈 채 우뚝 서 있었다.

혈향흑장미 삼경자.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뒤에는 방갓을 쓴 일곱 명의 흑의인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무영칠비인!

그들은 물론 동왜 청풍일도문의 가공할 인자인 무영칠비인이었다.

마침내 삼경자가 무영칠비인을 거느리고 우문환탑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삼경자는 화사하게 웃으며 교성을 던졌다.

"부주, 본녀는 귀하와 한 가지 흥정을 하러 왔어요!"

무슨 흥정인가?

우문환탑이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동방의 응징자 무린을 죽이고 환단무극경까지 동행하기로 본인과 약속이 되어 있소. 그런데 또 무슨 흥정이 필요하오?"

삼경자의 태도는 싸늘해졌다.

"본녀는 당신을 죽이고 중원을 나누어 지배하기로 동방의 응징자 무린과 합의를 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와의 합의는 깨뜨릴 수가 있어요!"

진정 간교하고도 무서운 살인상이 아닌가!

대노한 사헌원주 공선생이 크게 소리쳤다.

"이방의 일개 살수로서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순간 한 줄기 은망이 번쩍 뻗쳤다.

"크윽!"

공선생 도경은 흑벽처럼 뒤로 무너졌다. 그의 입에는 첨도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은 놀라는 가운데도 노기가 충천했다.

무련원주 만수신행과 백예원주 요요선자가 먼저 앞으로 성큼 나섰다.

"용서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삼경자를 향해 번개처럼 출수해 갔다. 그러나 또 한 번 싸늘한 은망이 번쩍이며 그들도 목줄기에 첨도 하나씩이 깊숙이 꽂힌 채 힘없이 허물어졌다.

경이! 무영칠비인의 암기술(暗器術)은 귀경(鬼境) 바로 그것이었다.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은 일순 공포의 몸서리를 쳤다.

우문환탑만은 시종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감동한 음성으로 물었다.

"삼경자, 귀하는 어떠한 더 좋은 조건을 원하오?"

삼경자는 다시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환단무극경의 비밀과 중원 삼분지일의 패권을 우리 청풍일도문에 넘겨 준다면 본녀는 당신을 대신하여 동방의 응징자 무린을 처치해 주겠어요."

돌연 뭇고수들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대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

우문환탑이 앙천광소를 터뜨린 것이다. 암천을 뒤흔드는 엄청난 웃음소리였다.

삼경자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과연 무림천자의 웃음이다!'

웃음을 뚝 그친 우문환탑은 천천히 황금패검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천자인검!

천하무림을 지배하는 무림천자의 검이었다.

우문환탑은 삼경자를 향해 천자인검을 똑바로 겨누며 엄중하게 말했다.

"본좌는 천하무림의 유일한 주인이며 궁륭마천부는 중원의 영원한 패자이다. 어찌 일개 소도(小島)인 동왜의 살수문(殺手門) 따위가 중원의 패권을 넘볼 수 있겠는가?"

만인을 압도하는 무림천자의 신위가 아닌가!

삼경자의 화사한 얼굴은 모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일개 소도라고……!"

순간 삼경자의 날카로운 교갈이 터져 나왔다.

"쳐라!"

그녀의 교갈이 터짐과 동시에 무영칠비인은 빛살 같은 기세로 우문환탑을 향해 폭사했다.

번쩍-!

오직 한 줄기 흑섬이 뻗치는 것을 느꼈을 뿐, 궁륭마천부의 고수들은 무영칠비인이 어떤 신법과 무공을 사용하는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위기의 순간 천자인검에서 눈부신 예광(銳光)이 분수처럼 쫘악 뻗쳤다.

"크윽!"

"윽!"

짧은 외마디 비명이 연속 울렸다. 동시에 무영칠비인이 모두 피보라를 뿜으며 사방으로 날아가는 게 아닌가?

그들은 가슴이 쩍쩍 갈라진 채 난자당한 물고기처럼 갑판 위에 널려졌다. 갈라진 가슴에서 붉은 피가 샘처럼 솟구친다.

청풍일도문의 최고인자 일곱 명이 찰나간에 우문환탑의 일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과연 무림천자의 탈백경혼할 무공이 아닌가!

삼경자는 비로소 우문환탑의 가공할 공력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우문환탑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어깨와 가슴은 피로 물들어 있어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영칠비인 역시 무서운 고수들임에 틀림없었다.

일순 삼경자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나타났다. 그녀는 흑검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우문환탑, 과연 무림천자답군요. 그렇다면 본녀가 당신을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하겠어요!"

으시시한 한성과 함께 그녀의 흑검이 파르르 떨렸다.

"청풍일도류!"

마침내 고막을 찢는 교갈이 울리며 한 줄기 묵광이 번개보다도 빠르게 우문환탑의 목을 꿰뚫었다.

파파팟-!

세상에 이런 극쾌검(極快劍)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문환탑은 위험을 직감하고 쾌속하게 신형을 틀며 힘차게 일검을 펼쳐 냈다.

채챙-!

파아아앗-!

두 줄기 검기가 뇌전처럼 충돌하자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선렬한 핏줄기가 뻗치며 잘려진 팔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으윽!"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우문환탑의 신형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팔 하나가 잘려진 사람은 바로 우문환탑이었다.

만인경악할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대노한 우문환탑의 폭갈이 천공을 쩌렁 울렸다.

"혼혼폐황신검공(混混閉荒神劍功)!"

이와 함께 천자인검의 휘황한 광채가 강변 일대의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츠츠츠츳-!

엄청난 검강의 기둥은 삼경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폭사했다.

제이초를 펼쳐 내려던 삼경자의 교구가 주춤하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울렸다.

"크아악!"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두두둑-!

소나기 같은 핏물이 한 차례 휘날리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삼경자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아, 희대의 여류살수 삼경자는 우문환탑의 절세검공 아래 피이슬(血露)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혼혼폐황신검공!

궁륭마천부의 그 독문검공은 진정 상상을 불허할 무서운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천하를 흥정하려던 혈향흑장미는 찰나간에 갈기갈기 찢어져 땅에 떨어진 것이다. 비릿한 혈향만을 남긴 비참한 최후였다.

무린은 삼경자의 이러한 최후를 미리 예견했기에 목숨을 살려 두었던 게 아닐까?

팔 하나를 잃은 우문환탑은 아직도 노기충천해 있었다.

뭇고수들이 급히 달려나와 지혈을 시키고 상처를 동여매자 그는 하나 남은 팔로 천자인검을 높다랗게 치켜들며 성난 용처럼 부르짖었다.

"지금부터 본좌는 적을 찾아 내어 남김없이 주살하리라! 모두 본좌를 따르라!"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뱃전을 박차고 허공 높이 솟아올랐다. 이어 그는 강변 쪽으로 한 줄기 유성처럼 쏘아나갔다.

궁륭마천부의 최고 수뇌부는 크게 격동했다. 그들은 우문환탑의 뒤를 따라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독수리떼처럼 암천을 질주해 갔다.

최후의 결전은 예상보다 급속히 다가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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