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신(神)은 잔인했다 (36/37)

운명의 신(神)은 잔인했다

무린은 산곡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비운애(飛雲涯)가 가까웠다!'

이 때 허공에서 괴이한 음성이 들렸다.

"동방의 응징자여, 비운애로 급히 갈 필요가 없다!"

무린은 우뚝 멈추어 서서 시선을 들었다.

천공 높이 하나의 팔각홍사등이 유유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유령사망등이로군!'

무린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고 아난타가 예고한 유령사망등이었다.

유령사망등은 붉은 홍광을 껌벅거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동방의 응징자여, 이제 본 등주(燈主)에게 목숨을 바칠 때가 되었다!"

무린은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도대체 당신은 사람이 얼마나 작기에 그 등불 속에 들어가 있소?"

유령사망등에서는 음산한 괴소가 들려 왔다.

"크크크… 노부의 키는 최소한 넉 자가 넘는다. 그러나 앉으면 두 자 반밖에 안 되므로 이 유령사망등은 충분히 노부의 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난장이로군."

"크크크… 그러나 노부의 나이는 이미 오 갑자가 넘었으니 자네의 고조(高祖)는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일 갑자에 키가 한 자씩도 자라지 않는 셈이구료."

지금 그런 게 문제인가?

유령사망등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시뻘건 홍광을 줄기줄기 뿜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사광(邪光)이었다.

무린은 저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존재다!'

유령사망등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노부 가라마섭(伽羅麻燮)은 절륜대법황의 명을 받들어 그대의 목숨을 취하기 전에 한 가지 수수께끼를 내겠다."

갑자기 무슨 수수께끼인가?

음성이 이어졌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에 따라 노부가 그대를 죽이는 방법이 달라진다. 즉 해답이 맞으면 노부는 그대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죽여 줄 것이고, 해답이 틀리면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여 줄 것이다!"

가라마섭은 아예 무린의 생명을 손아귀에 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린은 고소를 지었다.

"당신은 나이가 오 갑자나 된다고 하면서도 아직 철이 안 든 모양이로군."

"크크크… 노부가 그 긴 세월 허공을 떠다니며 지내면서 계속 생각한 것은 한 가지 기막힌 수수께끼였다. 들어 보겠느냐?"

하긴 허공을 떠다니며 할 일이 없으면 기발한 수수께끼 같은 거나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말해 보시오."

"크크… 그래도 편히 죽고 싶은 생각은 있는 모양이로군!"

이어서 가라마섭의 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반달처럼 둥글길죽하게 생기고 가운데가 갈라져서 매끈하고 촉촉하게 젖었는데, 옆에는 가느다란 털이 나고 그 위에는 짙은 털이 나 있는 아름다운 게 무언지 알겠느냐?"

기막힌 수수께끼가 아닌가!

무린은 아연하여 멍한 표정이 되었다.

"……."

가라마섭은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모르겠느냐? 때때로 열렸다 닫혔다 하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의 그것을……."

무린은 할 말을 잃었다.

"……."

오 갑자나 묵은 늙은 난장이가 그 따위 유치하고 음탕한 수수께기나 늘어놓고 있다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은가.

가라마섭은 다시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역시 그대도 답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긴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모두 답을 맞추지 못하여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 크흐흐……."

무린이 노성을 터뜨리려고 할 때, 가라마섭이 기고만장하여 소리쳤다.

"답은 여자의 눈이다. 미녀의 아름다운 눈 말이다!"

무린은 입을 딱 벌렸다.

"……!"

과연 눈은 반달처럼 생겨서 가운데가 갈라져 매끈하고 촉촉하게 젖은데다가 속눈썹과 눈썹의 털이 나 있지 않은가!

가라마섭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크크크… 카카카카……."

이 때 무린이 낭랑하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나도 수수께끼를 한 가지 내겠소. 만약 당신이 답을 알아내면 즐겁게 웃으면서 죽게 해 줄 것이고, 알아내지 못하면 지옥의 고통 속에서 죽게 해 줄 것이오!"

웃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가라마섭의 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건방지구나. 그러나 노부는 워낙 수수께끼를 좋아하니 한 번 들어 보도록 하겠다."

무린의 수수께끼가 떨어졌다.

"오 갑자 묵은 늙은 난장이가 웃을 때, 그의 쪼그라진 입 속에는 이빨이 몇 개나 보이겠소? 참고로 한 가지 알려 주면 그의 웃음소리는 비루먹은 늙은 당나귀가 우는 것처럼 듣기가 거북하오."

가라마섭을 철저히 희롱하는 수수께끼였다.

가라마섭은 대노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기로 작심을 했구나!"

돌연 팔각홍사등의 광채가 기이하게 파동치기 시작했다. 가라마섭의 음산한 괴성이 뒤를 이었다.

"동방의 응징자 무린, 유령사망등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다음 순간 허공에서 수많은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으흐흐흑……!"

"흐흐흑……!"

동시에 허공에는 무수한 미녀들의 환영이 나타났다. 미녀들은 슬프게 흐느끼며 무린에게로 훨훨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울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호호호호……."

"오호호……."

그들은 미친 듯 염소(艶笑)를 터뜨리며 너훌너훌 춤추듯 다가오고 있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엷은 옷 속으로 뇌쇄적인 알몸이 훤히 비쳐 보이는 무수한 미녀들이었다.

무린은 싸늘하게 웃었다.

"가라마섭, 당신은 저 수많은 미녀들로 하여금 본인의 수청을 들게 할 생각이오?"

그러나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미녀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촤촤촤촤-!

불가사의한 강기가 노도처럼 줄기줄기 뻗쳐 왔다.

도대체 허공에 떠 있는 환영이 어떻게 강기를 발출하는가?

무린은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그는 맹렬히 쌍수를 쳐 냈다.

"가라마섭, 장난은 그만하고 모습을 나타내시오!"

촤아앗-!

무린의 손에서 일섬광이 뇌전처럼 뻗쳤다.

"크아악!"

"아악!"

무린에게 덮쳐 오던 미녀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산산조각으로 찢겨서 피를 뿌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들은 분명 실체가 아닌 환상이므로…….

그런데 한 번 찢겨서 흩어진 미녀들은 순식간에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아 더욱 맹렬한 기세로 덮쳐드는 게 아닌가!

쐐애애액-!

엄청난 강기의 파도가 태산을 날려 버릴 듯 쇄도했다.

무린은 약간 당황했다. 그는 재차 절초를 펴 냈다.

"태극비홍검!"

그의 쌍수에서는 극맹한 검강이 무지개처럼 뻗쳐 나갔다.

"크아악!"

"으악!"

이번에도 무수한 미녀들이 갈기갈기 찢겨져서 흩어졌다.

허공이 온통 피비로 뒤덮이며 처절한 비명이 지옥의 아우성처럼 울렸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허공에는 다시 무수한 미녀들이 나타나서 맹렬히 공세를 취해 오고 있었다.

오히려 미녀들의 숫자는 더욱 많아져서 헤일 수 없이 많은 옥수(玉手)가 무린에게로 뻗쳐 오고 있었다.

가라마섭의 음산한 괴소가 울려 왔다.

"크크… 그런 무공은 통하지 않는다!"

일순 무린은 공포를 느꼈다. 무공으로 파괴되지 않는 환상을 어떻게 처치하는가?

이 때 무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우렁찬 일갈을 터뜨렸다.

"무상폐공결(無上閉功訣)!"

환인천제도결(桓因天帝道訣)의 최고현공이 전개된 것이다.

촤아아앗-!

한 줄기 눈부신 백광이 천공으로 쭉 뻗치며 장내는 백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공(眞空) 상태로 변해 버렸다.

허공에서 덮쳐 오던 무수한 미녀들의 환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무상폐공결은 모든 무공과 강기를 파해하는 절대무쌍의 신비기공(神秘奇功)이 아닌가!

이제 허공에는 유령사망등 하나만이 떠 있을 뿐 환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가라마섭이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제법이구나. 그러나 유령사망등의 무서움은 지금부터 알게 된다!"

말이 끝나자 갑자기 유령사망등에서 휘황한 혈강(血 )이 거대한 광주(光柱)처럼 폭사했다.

번쩌억-!

순간 무린은 위험을 직감하고 황급히 제이초를 펼쳤다.

"무상폐공결!"

한 줄기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촤아아앗-!

눈부신 백광이 천공으로 뻗치며 유령사망등에서 폭사된 혈강이 산산이 깨어져서 사라졌다.

파파파팟-!

허공은 붉은 첨광의 파편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유령사망 등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유령사망혈폭기(幽靈死亡血暴 )!"

가라마섭의 기괴한 외침이 울리며 엄청난 혈강이 계속 쇄도했다.

파츠츠츠츳-!

무상폐공결도 소용이 없었다. 유령사망등의 공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맹렬해졌다.

누가 이 무시무시한 공세를 감당할 수 있으랴!

무린의 신형은 크게 흔들렸다. 아득히 천공에 떠 있는 유령사망등까지는 무린의 출수가 미치기 힘들었다.

가라마섭의 괴소는 연속 듣기 거북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크크크… 그대는 유령사망등 아래서 목숨을 잃는 삼천 번째의 제물이 될 것이다!"

무린은 완전히 혈강의 폭포 속에 휩쓸렸다.

위험천만!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 순간 무린의 소맷자락이 힘차게 펄럭였다.

"수정비혼접!"

파르르릇-!

동시에 한 마리의 투명한 나비가 천공을 번개처럼 솟구쳤다. 나비는 유령사망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이내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파파팟-!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크악!"

유령사망등은 풍선처럼 파열하여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 왜소한 난장이가 목에서 피를 뿌리며 추락하는 게 보였다.

수정비혼접이 정통으로 가라마섭의 목줄기를 꿰뚫고 지나간 것이었다.

가라마섭은 나비에 의해 목줄기가 꿰뚫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땅에 떨어진 가라마섭은 찢어진 걸레조각처럼 널려졌다.

쿠웅-!

고목의 껍질처럼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하고 부릅뜬 두 눈은 공포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무린은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괴상망측한 늙은이였다.'

그는 다시 산곡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이 때 괴이한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무수한 남의인(藍衣人)이 그림자처럼 앞을 막아 섰다.

순간 무린의 표정은 기이하게 굳어졌다.

'드디어 나타날 사람들이 나타났군.'

그 남의인들은 누구인가?

선두에는 한 중년인이 침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구문철인(九門鐵人) 동일비( 一飛)였다.

바로 궁륭마천부의 금령밀전 전주였다.

동일비 옆에는 한 냉철한 인상의 소년이 보였다.

노노경(魯魯景)!

금령밀전의 제이인자이며 노노아의 오빠인 노노경이었다.

그 외에 이십여 명의 남의인이 엄중히 늘어서서 무린의 앞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난날 무린의 동료와 친구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일제히 모습을 나타냈는가?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무린을 죽이러 나타난 것이다.

본래 금령밀전은 궁륭마천부의 가장 무서운 특수 살인기관이 아닌가?

장내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난날의 동료와 친구가 오늘은 적으로 만난 것이다.

장내에는 무겁고도 음울한 적막이 흘렀다.

이윽고 침묵을 깨뜨리며 구문철인 동일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은 우리의 운명일세. 우리가 어떻게 운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동일비는 지난날 무린의 상관이다. 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우리는 아무도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오."

동일비가 다시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가 죽게 될지는 알 수 없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생사를 결정짓는 게 좋겠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이니까."

무린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죽고 죽이는 일만이 남았다.

금령밀전의 고수들은 서서히 출수할 태세를 갖췄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무감동했다. 그러나 어찌 사나이들의 가슴에 격동이 없으랴.

다만 그 격동을 내색하지 않기 위하여 애써 무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무린도 출수할 태세를 갖췄다.

이번 싸움은 무린이 무림에 출도한 이래 최대의 위기가 되리라.

금령밀전의 고수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초절정 살수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대결은 결코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이 괴롭고 착잡한 대결을 빨리 끝내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내의 기류는 질식할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무린은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했고 시선은 조용히 지면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자세였다.

한 동안의 질식할 듯한 정적이 흘렀다.

"……."

"……."

마침내 날카로운 일갈이 그 정적을 갈기갈기 찢었다.

"타아앗!"

이십여 개의 인영은 한꺼번에 무린을 향해 폭사했다. 엄청난 살강(殺 )과 폭풍이 쇄도했다.

파츠츠츠츳-!

찰나지간 무린의 낭랑한 외침이 천공을 쩌렁 울렸다.

"정정심검공(靜靜心劍功)!"

이와 함께 거대한 백검(白劍)의 환영이 허공을 둥그렇게 쓸어 나갔다.

상감잠룡신검법의 신비절공!

그것이 끝이었다.

"크윽!"

"컥!"

"크아!"

현란한 피비가 거꾸로 솟구쳐서 쫙 뿌려지며 이십여 개의 인영이 허공에서 낙엽처럼 뒤집혔다.

무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금령밀전의 고수들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운명이 그 참담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문철인 동일비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린…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약속대로 자네를 원망하지 않고 가겠다."

말을 마친 동일비는 뒤로 쿵 쓰러졌다.

무린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노노경이 역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노노경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님… 형님은 역시 강하십니다."

아무 사심 없는 깨끗한 미소였다. 노노경은 곧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형님… 노아를 형님께… 맡기고 갑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무린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나는 운명의 신(神)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오늘 알았다."

*          *          *          *

궁륭대선단과 천축대선단.

쌍방은 무시무시한 접전을 계속하며 벽라하구를 향해 접어들고 있었다.

물결은 붉은 피로 물들어 파도치고, 즐비하게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역(江域)을 온통 뒤덮었다.

전선(戰船)은 무수히 깨어지고 파도 속에 휩쓸려들고 있었다.

이 때 홀연 벽라하구의 한쪽 강안(江岸)에 수천 명의 청의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스스스스-!

그들은 모두 대월화전궁(大月火箭弓)을 들고 있었다.

<대월화전궁(大月火箭弓)>

화전(火箭)으로 화약암기를 발출하는 무수한 대궁(大弓)이다. 천축 특산의 공포스런 무기였다.

그들은 유령처럼 출현하더니 누군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무수한 대월화전궁이 빗발처럼 화전을 폭사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슉-!

화전은 모두 궁륭대선단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내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콰르르- 콰콰쾅-!

대월화전궁에 격중된 전선은 시뻘건 불기둥을 뿜으며 산산이 깨어져 파도 속에 잠겨들었다.

궁륭대선단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대월화전궁을 쏘는 청의인들은 절륜대법황이 매복시킨 천축고수들이 분명했다.

이 때 우렁찬 함성이 울리며 또 다른 고수들이 배후에서 구름처럼 밀려 나왔다.

"이국의 잡초들을 남김없이 쓸어 버려라!"

그들은 천축고수들을 향해 노도처럼 쇄도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우문환탑이 잠복시켜 놓은 무적대군단의 일만 별군이었다.

즉시 쌍방간에는 피비린내나는 혈전이 벌어졌다.

결국 강안 일대도 무서운 혼전장으로 변하여 비명과 함성이 지옥의 아수라처럼 울려 퍼졌다.

그런데 이 때 지축을 올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군의 기마대가 밀물처럼 질주해 왔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또 누구인가?

아, 그들은 동방사의 천의신기대였다.

질풍처럼 밀려온 천의신기대는 쌍방의 고수들은 무인지경처럼 휩쓸기 시작했다. 쌍방의 고수들은 추풍낙엽처럼 흩어져서 거꾸러졌다.

천의신기대!

그들은 쌍방의 모든 고수들을 멸절시킬 생각인가?

강안에는 온통 피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벽라하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운애.

지금 비운애의 높다란 암벽 위에는 기이한 녹무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휘리리리-!

그 녹무 속에 하나의 연화보교가 환영처럼 떠 있었다. 연화보교 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거구의 혈포괴인.

절륜대법황! 바로 그가 아니고 누구랴!

연화보교 뒤에는 일곱 명의 홍의인이 엄중히 늘어서 있었다.

천축삼대법왕!

그들은 천축의 최고고수들인 천축삼대법왕이었다.

그들은 형형한 사안(邪眼)을 번쩍이며 하구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혼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혈금오천사령이 늘어서 있었다.

이 때 허공에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한 무리의 인영이 거대한 독수리 떼처럼 날아와서 장내에 우뚝우뚝 내려섰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우문환탑이 거느린 궁륭마천부의 최고수뇌부였다.

마침내 쌍방의 최절정고수들이 비운애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장내는 갑자기 무시무시한 긴장의 물결이 파동쳤다.

휘류류류류-!

기류가 팽팽히 당겨져서 물결쳤다.

이 때였다.

"오호호호… 모두 여기에 있었군요!"

심혼을 진탕시키는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동시에 한 절세미녀가 천상에서 선녀가 하강하듯 천천히 몸을 날려 장내에 내려섰다.

그녀의 뒤에는 비범절륜한 신태의 아홉 기인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이었다.

그러면 그들의 뒤를 따르는 아홉 기인은 누구인가?

밀비구대무신!

그들은 바로 중원의 천년대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부활한 밀비구대무신이었다.

황보옥황이 그들을 대동하고 출현한 순간, 비운애의 대기는 더욱 무겁게 파동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또다시 호쾌한 웃음소리가 천공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 만날 사람은 여기서 모두 만나는구료. 하하핫……."

동시에 한 백의문생을 필두로 이십여 명의 인물이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은 또 누구인가?

동방의 응징자 무린!

백의문생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무린이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인물들은 백상회의 회주인 선기은유자 섭해군, 만겁삼군, 천령이공, 궁천무 등이었다.

드디어 무린도 비운애에 그 늠름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아아, 당대무림의 절대자들은 모두 비운애에 출현한 셈이었다.

이제 천하무림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대도박이 벌어질 판이었다.

비운애의 기류는 급박하게 파동치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한 동안 기이한 적막이 흘렀다.

숨막힐 듯한 긴장된 고요. 마침내 그 질식할 듯한 적막은 우문환탑에 의해 깨어졌다.

우문환탑은 무린을 향해 장중하게 입을 열었다.

"무공자, 본좌와 무공자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심판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의 말이 위엄 있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전에 본좌는 중원무림을 무단히 침범하여 대겁난을 일으킨 절륜대법황과의 문제를 먼저 처리하고 싶소!"

중원의 지배자다운 늠연한 신위였다.

무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본인은 부주가 그 문제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겠소."

그의 태도는 냉철하고도 무감동했다.

"고맙소!"

우문환탑은 절륜대법황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안광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돌연 절륜대법황이 괴이한 광소를 터뜨렸다.

"크와왓… 우문환탑, 본좌 역시 그대부터 제압하여 중원의 무림천자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만천하에 보여 주겠다!"

그의 전신에서는 섬뜩한 혈광이 더욱 눈부시게 뻗쳐 오르고 극렬한 사기를 동반한 녹무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모든 중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절륜대법황이 발산하는 사악한 기운은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싸늘하게 동결시켰다.

우문환탑은 천자인검을 허공 높이 치켜들었다.

"절륜대법황, 본좌는 중원을 지배하는 무림천자의 신분으로 귀하를 징벌하겠소!"

그는 절륜대법황을 향해 천자인검을 쭉 뻗었다.

장내가 얼어붙듯 긴장되는 순간 우문환탑의 우렁찬 호통이 쩌렁 울렸다.

"혼혼폐황신검공!"

촤아아아-!

천자인검은 절륜대법황을 향해 빛살처럼 뻗쳐 갔다.

순간 절륜대법황의 연화보교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크와와왓… 그렇다면 본좌의 혈혈태양사령천공(血血太陽邪靈天功)을 견문해 보라!"

갑자기 허공은 눈부신 혈광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엄청난 혈강의 파도가 사위로 줄기줄기 파동쳐 나갔다.

파츠츠츠츳-!

그러나 우문환탑의 천자인검은 그 혈강의 파도를 가르고 연화보교를 향해 일직선으로 폭사해 갔다.

절륜대법황의 광소가 다시 터져 나왔다.

"크와와와왓… 검이 어찌 태양을 벨 수 있는가!"

광소가 끝나며 혈광 속에서 엄청난 열류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과연 불타는 태양이 회오리치며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우문환탑의 신형은 허공중에서 크게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궁륭마천부의 모든 고수들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들은 황급히 출수할 태세를 갖추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천축삼대법왕이 일제히 앞을 막아 섰다.

"너희들은 본왕들이 맡겠다!"

동시에 그들은 맹렬한 선공(先功)을 펼쳐 왔다.

"사라파천공(邪羅破天功)!"

"대락환환도(大樂幻幻刀)!"

"혈상마극기(血象魔極氣)!"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늘어서 있던 혈금오천사령은 그 선정적인 나신을 날려 백상회의 고수들에게 사납게 덮쳐들었다.

콰우우우우-!

비운애에서는 일순간에 무시무시한 대격전이 벌어졌다.

극맹한 강기의 파동, 현란한 도검의 광채. 고금미증유의 절세고수들이 펼치는 운명의 결전이었다.

무린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차라리 담담하게까지 보였다. 안광만이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

황보옥황도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한성(寒聲)처럼 싸늘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

그녀의 뒤에 늘어서 있는 밀비구대무신은 아홉 그루의 고목처럼 묵중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혼전은 점점 치열해졌다.

"크악!"

"크으으!

이내 숨막히는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보라가 솟구치며 걸레처럼 찢어지고 구겨진 신형이 어지럽게 거꾸러졌다.

아아, 처참한 대혈겁이여!

이제 우문환탑과 절륜대법황의 대결은 그 최후의 순간으로 급박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혈혈태양멸폭기!"

절륜대법황의 천둥 같은 호통이 천공을 쩌렁 울리며 엄청난 열강의 기둥이 천지를 태워 버릴 듯 우문환탑의 전신으로 엄습했다.

"으윽!"

우문환탑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하며 신형을 뒤집었다.

찰나지간 그의 손에서 떠난 천자인검은 절륜대법황의 심장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패애애앵-!

우문환탑이 혈혈태양멸폭기에 격중당하는 순간, 혼신의 공력을 다해 비류검(飛流劍)을 날린 것이다.

절륜대법황은 당황하여 황급히 쌍장을 쳐 냈다.

콰우우웅- 콰쾅-!

벼락 같은 굉음이 터지며 기류가 미친 듯 회오리쳤다. 기류의 무시무시한 대폭발이었다.

이 때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끌고 울려 퍼졌다.

"으아악!"

"크으으!"

치열한 혼전을 전개하던 쌍방의 고수들은 일제히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천축삼대법왕, 천부사대분궁주, 혈금오천사령, 백상회의 만겁삼군과 천령이공 등이 모두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거꾸러졌다.

이어 허공에 둥실 떠 있던 연화보교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며 절륜대법황의 거대한 신형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오오, 그의 가슴에는 천자인검이 깊숙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우문환탑이 마지막으로 날린 비류검에 정통으로 심장이 격중된 것이다.

절륜대법황은 땅에 떨어지더니 거목처럼 쿵 주저앉았다.

밭고랑처럼 깊은 주름이 가득한 그의 위맹한 얼굴은 짙은 흙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으으음……."

그러면 우문환탑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땅에 거꾸러진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으음……."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비오듯 땀이 흐르는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 역시 치명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혼전을 벌이던 모든 고수가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땅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문환탑의 천자인검을 막아 내기 위해 절륜대법황이 쳐 낸 가공할 괴장(怪掌)에 기류가 맹렬히 격탕되며 모두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처참한 결말이었다. 일순간에 무수한 고수들이 이미 시체로 변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무린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그는 벽라하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구 일대에서는 여전히 피비린내나는 수상전(水上戰)이 전개되고 있었다.

궁륭대선단과 천축대선단은 함께 궤멸되고 마는가?

이 때 절륜대법황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보라, 저기 천하무적선이 오고 있다. 본좌는 비록 죽지만 우리 천룡밀궁사는 결국 중원무림을 접수하고 말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동해의 검푸른 파도를 가르며 한 척의 웅장한 섬과도 같은 핏빛 초거선이 벽라하구로 급속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령파황루! 바로 공포의 천하무적선인 사령파황루였다.

사령파황루에는 또 다른 천축의 고수들이 무수히 타고 있으리라.

우문환탑은 안간힘을 다하여 몸을 일으키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절륜대법황… 좋아할 필요 없다. 우리 궁륭마천부에서는 사령파황루를 격파할 비밀선단이 예비되어 있다. 저기를 보아라!"

그는 떨리는 손길로 건너편 암벽 쪽을 가리켰다.

과연 그곳에는 또 다른 대선단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문환탑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잠복시켜 놓은 비밀선단이었다.

진정 그들의 안배는 얼마나 무섭고 치밀한가?

그러나 이 순간 무린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소가 스쳐 가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놀랄 만큼 무감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문환탑, 절륜대법황… 당신들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단 말이오?"

말이 끝나는 순간, 벽라하구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암초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콰콰쾅-!

그 거대한 암초는 마치 환상처럼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다음 순간 암초는 산산이 붕괴되어 흩어지며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아, 그 시간은 마침 사령파황루가 벽라하구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사령파황루는 갑자기 집채 같은 바윗덩이의 소나기를 맞고 무참하게 파괴되어 물 속으로 잠겨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사령파황루의 웅자(雄姿)는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침몰되어 사라졌다.

경악과 충격! 절륜대법황의 벽안이 경악으로 크게 떠질 때, 이번에는 건너편 암벽에서 고막을 찢는 폭발음이 연속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콰콰쾅-!

동시에 그 웅장한 암벽이 모래성처럼 붕괴되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동시에 그 아래 출현한 궁륭마천부의 비밀선단은 고스란히 암벽의 함몰 속에 휩쓸리며 수장(水葬)되고 있었다.

아니, 벽라하구 전체가 천번지복하듯 붕괴되어 함몰되고 있었다.

오호라! 그것은 중원제일의 화약전문가인 만폭왕 당유기의 무시무시한 걸작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궁륭마천부의 천축 쌍방의 헤일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벽라하구의 함몰과 함께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우르르- 콰콰콰쾅-!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징벌인가?

고금미증유의 엄청난 대참극!

그것는 분명 동방의 응징자 무린이 내린 무서운 심판이었다.

절륜대법황의 입에서는 비통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모든 것은 끝났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고목처럼 뒤로 털썩 쓰러졌다.

비참한 최후! 중원을 접수하려는 대야망을 품고 온 희대의 마성(魔星) 절륜대법황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어서 우문환탑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공자… 중원은 무공자의 뜻대로 응징을 받았소. 그러나 본좌는 밀비구대무신이 무공자의 목숨을 빼앗으리라 믿소."

무린은 다시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무린은 황보옥황에게로 시선을 휙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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