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장(終章) (37/37)

종장(終章)

황보옥황도 표정이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무린은 그녀에게 무감동한 한 마디를 던졌다.

"황보옥황, 이제 본인과 밀비구대무신의 마지막 대결이 남았소."

일순 황보옥황의 아미가 칼날처럼 치켜올라갔다. 그녀는 서릿발처럼 차갑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나는 당신이 과연 밀비구대무신의 상대가 될 수 있는지 보겠어요!"

이어 그녀는 천명수령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영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밀비구대무신이여, 동방에서 온 응징자를 처치하여 중원의 영광을 무림사에 영원히 떨치도록 하시오!"

그러자 밀비구대무신은 무린을 향해 일제히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무린도 상감잠룡신검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아아,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온 것이다.

삼백 년 전에 예비된 무서운 숙명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휘류류류류-!

장내의 기류는 다시 무섭게 파동치기 시작했다.

밀비구대무신은 무린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무린은 그들에게서 뻗치는 엄청난 잠강(潛 )을 느꼈다. 그는 혼신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밀비구대무신이 일제히 출수를 개시했다.

쿠구구구궁-!

무린은 즉시 상감잠룡신검을 힘차게 쓸어 냈다.

"일선풍(一旋風)!"

돌연 맹렬한 선풍이 휘몰아치며 무린의 신형은 허공으로 수십 장이나 솟구쳤다.

그의 뒤를 따라 밀비구대무신도 일제히 천공으로 솟구쳤다.

고오오오-!

엄청난 강기의 파도가 맹렬한 기주(氣柱)처럼 천공으로 뻗쳐 올라갔다.

무린과 밀비구대무신은 아득한 천공에서 거대한 원을 그리며 교차되었다.

"일기개(一氣蓋)!"

다시 무린의 낭랑한 호통이 터졌다.

쿠콰콰콰콰-!

노도 같은 검기가 밀비구대무신을 해일처럼 쓸어 나갔다.

그러나 밀비구대무신은 불사신 같은 기세로 무린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쿠쿠쿠- 쿠쿠쿠쿵-!

대기가 온통 역탕되어 뒤집히며 천번지복할 잠강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찰나지간 비운애 상공은 무서운 혼돈의 세계로 변했다.

콰르르르- 콰콰콰콰-!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음향이 울리며 지면의 수목이 뿌리째 뽑혀져 허공으로 솟구쳤다.

천지종말(天地終末)이 왔는가?

그 무시무시한 혼돈 속에서 무린의 호통이 연속 터졌다.

"일섬류(一閃流), 멸절강(滅絶 )!"

태극검보의 일곱 가지 검식이 연속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황보옥황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찬란한 보광이 하늘을 가린 가운데 흐릿한 환영이 그림자처럼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쿠르르르릉-!

한 차례 웅혼한 굉음이 터지더니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아아, 그는 정정무신이었다.

"환영강(幻影 )!"

이어서 또 한 차례 호통이 터졌다.

"크으으!"

"크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 울렸다.

선공무신과 불유무신의 신형이 풍선처럼 파열되어 흩어지는 게 보였다.

"회광천(回光天)!"

상감잠룡신검의 찬란한 보광이 아침 해처럼 붉게 작렬하며 마극무신과 사령무신의 신혀이 거꾸로 뒤집혀져 날아갔다.

"으아악!"

"크으으윽!"

그들의 심장은 거대한 구멍이 뚫려서 허수아비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황보옥황은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밀비구대무신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있는가?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돌연 그녀는 천명수령검을 수직으로 높다랗게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은 한 마리 비조처럼 무린에게 날아갔다.

"천명종말검(天命終末劍)!"

가공할 기세였다.

찰나 무린의 마지막 호통이 천공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태극천(太極天)!"

검강의 대폭발 속에 천지가 검강의 파도로 뒤덮이며 처절한 비명이 연속 울렸다.

"으악!"

"크아아!"

허공에서 어우러졌던 모든 인영이 폭풍이 휩쓸린 가랑잎처럼 뒤집혔다.

그것은 바로 동방의 응징자 무린이 밀비구대무신의 중원무학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 콰콰쾅-!

기류의 마지막 폭발음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이윽고 비운애에 평온이 찾아왔을 때 장내에는 시체만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묵도무신과 혈황무신의 몸은 허리가 양단되어 통나무처럼 구르고 있었다.

환상무신과 지옥무신은 갈기갈기 찢긴 채 흩어져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아, 일천 년 비장되어 온 중원무공의 최고봉은 무참하게 허물어져 버렸다. 동방의 응징자 무린에 의해서…….

무린은 천신(天神)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상감잠룡신검은 아직도 찬란한 보광을 줄기줄기 뻗쳐 내고 있었다.

무린은 중원의 삼백 년 죄업(罪業)을 완전히 심판한 것이다.

무린의 앞에는 황보옥황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두 동강으로 부러진 천명수령검이 땅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무린의 마지막 검초에 격중되어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이 때 최후의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우문환탑이 비통한 부르짖음을 토했다.

"무공자… 그대의 응징은 완전했소. 중원은 철저히 심판당했소. 철저히……."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고목처럼 쿵 쓰러졌다.

허망한 최후! 천하를 지배하던 당세 무림천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중원은 완벽하게 응징당한 것이다.

황보옥황은 처량한 시선으로 무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린…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의 뜻은 이루어졌어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죽음의 체념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장내에는 많은 인영이 모여들고 있었다.

선두에는 한 고아한 중년 선비가 보였다. 그는 무린의 부친인 청유수사 무군이었다.

그의 뒤에는 고령충, 고려웅, 고려금 등 동방사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청유수사 무군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황보옥황의 앞으로 급히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옥… 너는 보옥이 아니냐?"

황보옥황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나의 어릴 때 이름을……?"

청유수사는 격동하여 소리쳤다.

"보옥이 틀림없구나! 너는 세 살 때 떠난 동방의 환인천제문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순간 황보옥황의 창백한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동방… 환인천제문……!"

"보옥! 너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린 너를 항상 안아 주던 무대숙(武大叔)이다!"

"무대숙……!"

갑자기 황보옥황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광채가 나타났다.

"아아, 기억이 나요. 무대숙님… 기억이 나요!"

그녀는 청유수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불타오르는 눈동자는 무린에게로 향했다.

"무대숙님, 그렇다면 저 무린은……."

청유수사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너의 혼약자인 무린이다!"

"아아……."

순간 황보옥황은 의식을 잃고 혼절해 버렸다. 극도의 충격과 놀람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무린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오오, 황보옥황이 바로 나의 혼약자인 보옥이었다니……!'

괴이하고도 무서운 운명의 미로(迷路)였다.

신성대무후 황보옥황은 환인천제문에서 세 살 때 실종된 보옥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석상처럼 굳어져 있을 때,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

이어서 엄청난 대군단이 지평선 쪽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대군단은 성난 파도처럼 비운애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구름처럼 밀려오는 대군단!

그 정체는 무엇인가?

중인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순식간에 대군단은 비운애에 이르러 중인 앞에 일제히 멈추어 섰다.

선두에는 은갑패검의 늠름한 무장이 마상에 높이 앉아 있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 바로 그녀였다.

우문검지가 오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비극의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우문검지는 놀랄 만큼 무표정했다. 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부친의 시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혀 우문환탑을 품에 안아들었다. 결국 그녀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버님…….'

그러나 그녀는 늠름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부친의 시체를 품에 안은 채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무린을 뚫어지게 한 번 응시하더니 말머리를 휙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 미친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모든 대군단도 일제히 방향을 돌려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순식간에 대군단은 지평선 쪽으로 아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자욱한 황토먼지만이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인들은 여명을 바라보며 해변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린은 황보옥황을 품에 안고 있었다.

황보옥황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띈 채 무린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무린… 당신은 왜 웃지 않으세요?"

그녀의 미소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들고 있었다. 그러니 무린이 어찌 웃을 수 있으랴.

황보옥황이 다시 속삭였다.

"무린… 제가 죽으면 동방의 환단무극경에 묻어 주세요. 그 영원히 신비롭고 고결한 땅에……."

무린은 머리를 저었다.

"보옥, 당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오."

중인이 해변에 이르렀을 때 흰 돛을 단 십여 척의 범선이 푸른 파도를 가르며 다가왔다.

동방사의 모든 인물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갈 배들이었다.

높다란 절벽.

한 늠름한 은갑패검의 무장이 마상에 우뚝 앉아 동해의 수평선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부대군수 우문검지였다.

말 옆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마차 옆에는 세 사람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만폭왕 당유기, 벙어리 사내 철묵, 그리고 노노아였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수평선 쪽에 못박혀 있었다.

수평선에는 십여 척의 하얀 범선이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무린을 비롯한 동방사의 모든 고수들이 탄 배였다.

그들이 떠난 것이다. 고향을 찾아서. 동방의 영원한 이상향 환단무극경을 찾아서…….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 찬란한 아침이 오는 나라를 찾아가는 것이다.

문득 노노아의 뺨으로 눈물이 주를 흘러내렸다.

'형은 떠났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 제기랄! 나를 버리고 갔어.'

이 때 우문검지가 갑자기 말머리를 휙 돌렸다. 그녀는 돌연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순간 노노아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언니는 북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동방으로 가는 것이다!'

돌연 그녀는 철묵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철묵, 어서 마차를 몰아요! 언니가 형을 따라가고 있어! 우리도 어서 따라가야 돼!"

"……?"

철묵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껌벅했다.

노노아가 다시 소리쳤다.

"철묵, 이 멍청아! 어서 마차를 몰란 말이야! 북동쪽 대평원을 십만 리만 달리면 동방까지 갈 수 있어!"

"……!"

철묵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급히 마부석에 오르더니 채찍을 미친 듯 휘두르기 시작했다.

노노아가 마차에 뛰어오르며 괴성을 질렀다.

"우리도 간다! 흥흥, 자기네들만 갈 줄 알고……!"

두두두두두-!

마차는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흥분한 늙은 대머리 앵무새가 덩달아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우문검지와 마차는 순식간에 북동쪽 지평선으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그들도 떠난 것이다.

십만 리 대평선을 가로지르는 동방에의 길을 홀연히 떠났다.

이제 절벽 위에는 당유기 혼자 남아 있었다.

그의 넙적한 얼굴은 무심했다.

문득 그는 고금을 퉁기며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축복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내린다.

그러나 죽음은 영원한 망각이 아니다.

망각 속에서도 천 년의 혼(魂)은 불사조처럼 되살난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은 허망한 환상이며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딩딩딩- 디디딩딩-!

그 음울하고 단조로운 고금 소리는 무한한 고독과 우수를 싣고 허공에 울려 가고 있었다.

大尾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