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시즌] 달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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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에 무안이 표시되기 시작한 건 출발한 지 꼬박 세 시간 만이었다. 힐금 내비게이션을 봤다. 예상 도착시간까지는 앞으로 40여 분 남짓. 낮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젖혔다 가도 가도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는다. 단조로운 주행으로 쌓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눈도 뻑뻑하고, 어깨는 굳어버린 지 오래다.
역시 버스를 탈 걸 그랬나. 슬슬 후회될 때쯤, 휴게소 표지판이 나타났다. 고민 없이 차선을 변경했다.
평일 낮임에도 주차 공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구석진 자리에 겨우 차를 댔다. 내내 구겨져 있던 몸이 지독히도 찌뿌듯했다.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사위를 둘러본다. 그늘 쪽 자리엔 덤프트럭들이 전세를 내고 있었다. 무리 지어 선 관광버스도 여럿 보였다.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다가 휴게소 건물로 향했다. 규모가 작아서 그 흔한 간이 카페도 보이지 않는다. 별수 없이 자판기에서 커피 한 진을 뽑았다. 종이컵이 내려 오고, 잇따라 거스름돈도 떨어졌다. 하지만 으레 나야 할 마찰음은 들리지 않았다.
의문스러운 눈길로 반환구를 내려다봤다. 이내 저절로 미간이 구겨진다.
어디에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더라니, 반환구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두 개나 있는데도 그랬다. 이럴 때 보면 인간의 심리란 참 으로 난해하다.
손을 넣어보려다가 몇 백 원쯤은 그냥 체념한다. 종이컵만 빼 든 채 한적한 벤치에 앉았다.
주차장을 가득 채운 차량에 비해 인적은 드물었다. 응달에서 한뎃잠 자는 장거리 운전사들만 심심찮게 눈에 띌 뿐이다. 바로 옆 도로에선 차량이 빠르게 지나는데, 오직 그곳만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숫제 환청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등을 물렸다. 잠시 쓰고 있던 안경도 벗어둔다. 의식 없이 뻑뻑한 눈가를 쓸었다. 그런다고 특유의 건조함이 가실 리없다.
슬며시 고개를 젖히고 허공을 봤다. 마천루에 가려 손바닥만 하던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랑에 눈알이 시렸다. 눈꺼풀도 마저 닫아본다. 가는 바람에 이름 모를 풀꽃이 거푸 누웠다 일어난다. 지척에서 짙은 풀냄새가 났다. 인조잔디와는 사뭇 다른 녹음의 냄새다. 흙 특유의 비릿함도 콧속 점막에 달라붙는다.
느낄 수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다.
- 뭐? 전남? 어쩌다 그렇게 됐어.
소식을 들은 동기들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지원했다는 소리엔 무턱대 고 이마부터 짚어봤다.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피할 수 있다면 꼭 그러려는 일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전남 지역에 귀속된 수많은 섬 때문이다.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작은 섬에서 3년을 묶이고자 하는 이는 아무래도 없다.
물론 전남이라고 다 시골 발령이 예정돼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지역처럼 큰 도시에서 편하게 대민 봉사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최악의 상황부터 고민하곤 한다.
- 왜 그 고생을 해?
- 두메산골, 오지에 있는 것만 보건소나? 그런 거 이제는 별 이력도 안 된다더라.
- 내가 가 봐서 아는데, 그런 데서 일하면 영혼까지 세탁되고 좋을 거 같지? 막 날 밝을 땐 좋은 공기 마시고, 그림 같은 풍경 보면서 휴양하고, 밤이면 별 세면서 심신 치유하고 그럴 거 같지? 글쎄, 그게 그렇게 낭만적 이지가 않아요.
픽 웃으며 기했던 몸을 바로 했다. 낭만. 그곳에 그런 게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안다. 늘 의료 지원이 절실한 곳이지만. 딱히 영웅 심리가 발동된 것도 아니다.
그저…….
벗었던 안경도 도로 쓴다. 살짝 번져 보이던 구름이 더욱 선명해졌다.
빈 종이컵을 구기며 일어났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엔 큼직한 지역 관광안내도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눈동자가 조용히 구르며 지도상의 해안선을 덧그렸다. 머지않아 작은 섬 하나가 망막에 맺혔다 그곳과 관련해선 마땅한 지명조차 나와 있지 않았다. 주변의 화려한 관광지 소개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원래 그런 곳이다.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고, 소박한. 화도였는지, 청도였는지. 부르는 사람마다 명칭이 달랐다.
한참 만에야 시선을 수습하고 발길을 옮긴다. 차를 타려는데 문득 약한 체기가 느껴졌다. 딱히 먹은 게 없는데도 그랬다. 뭔가가 은근히 얹힌 듯 거북한 느낌. 목구멍까지도 갑갑해져 온다. 슬슬 명치를 문지르며 차에 올랐다. 착각처럼 얇은 살갖 위로 기묘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낮게 심호흡하곤 시동을 걸었다. 왕복 4차선 고속도로엔 탱크로리와 트레일러가 제각각의 덩치를 자랑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간간한 차량 행렬 속으로 차츰 섞여 들어간다. 단지 하행선을 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 시간을 역행하는 기분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