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1화 (2/18)

1

뿌연 안개로 시계가 혼탁했다. 띄엄띄엄 선 가로등 불빛마저 부옇게 번져 보인다. 밤새 사나웠던 바다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살을 에던 칼바람도 슬슬 잦아들었다. 아침이 오는 신호다.

홀쭉한 담뱃갑을 뒤적였다. 하나 남은 담배가 손끝에 걸린다. 필터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종국엔 밖으로 끄집어냈다.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데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숨 기득 들이켜며 까마득한 바다를 내다봤다 들이치는 바람에 눈알이 시렸다. 슬며시 미간이 구겨졌다. 목깃을 세우며 몸을 좀 더 옹송그려본다.

이윽고 먼 데서 덜그럭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하던 밤의 적막을 깨며 누군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둠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없앴다. 그럼에도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암흑 속을 너끈히 지나온다.

잇따라 몇 대의 수레가 더 포구 앞에 집합했다. 바닷바람에 두꺼워진 얼굴에는 고단함이 가득했다. 서로 눈을 보며 간밤에 잘 지냈는지 안부를 확인할 뿐, 다문 입을 열진 않았다.

물 얼룩 가득한 수레에선 구릿한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익숙해졌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치열한 삶의 냄새임을아는 까닭이다. 그새 약삭빠른 길고양이들이 나타났다. 얻어먹을 것이 없는지 수레 주변을 쉼 없이 어슬렁거린다.

묵직한 고요를 깨운 것은 먼 곳에서 울린 뱃고동 소리였다. 짧아진 담배를 빨며 고개를 들었다. 컴컴한 바다를 수놓은 어선들의 불빛이 보였다.

수레 곁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낙들의 눈알도 덩달아 빛났다. 덜컹거리는 수레를 밀며 저마다 선착장으로 마중 나간다.

꽁초를 획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퉁불퉁한 바닥면에 걸려 지지부진하던 노파의 손수레를 대신 앞으로 밀고 갔다. 그러곤 그것을 노파의 아들이 늘 배를 대는 곳에 놓아둔다. 뒤늦게 쫓아온 노파가 쪼글쪼글한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붙들었다.

어선들의 엔진 소음이 아침을 연다. 주렁주렁 달린 집어등 불빛에 금세 포구가 훤해졌다. 가라앉아 있던 공기도 삽시에 복작복작해진다. 배에서 던져주는 홋줄을 잡아 녹슨 볼라드에 동여맸다. 밤새 잡은 간자미가 부지런히 배 밖으로 내려졌다. 잡어 비늘이 고스란히 붙은 궤짝을 아낙들의 수레에 차곡차곡 실어줬다. 등줄기에 후끈 열이 오른다.

“오, 창수 왔냐”

하적 작업이 일단락되었을 즈음, 임 씨가 인사를 건네 왔다.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도 훌쩍 던져준다. 거기에 손을 닦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네, 형님. 오늘은 어떻게, 많이 좀 잡으셨어요?”

“보면 모르나. 고기 씨가 말랐는지 영 시원찮아.”

임 씨는 혀를 차더니 훌쩍 선착장으로 내려섰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창수에게도 슬쩍 권한다. 재차 꾸벅하며 한 개비 받아들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부터 열었다. 수첩에 적힌 일수 금액을 부지런히 헤아린다.

곁눈질하던 임씨가 픽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구깃구깃한 지폐 뭉치가 잡혀 나왔다. 그는 그것을 창수에게 던지듯 건넸다.

“하여간 쓸데없이 부지런한 새끼. 돈 귀신 아니랄까 봐, 냄새는 기막히게 맡아요.”

“감사합니다, 형님. 좋은 데 알차게 쓰겠습니다”

변죽 좋게 웃으며 구겨진 돈을 편다. 넓적다리에 대고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러도 주름은 여전했다. 기름때 밴 돈에 거침없이 입을 맞췄다. 가방에 챙겨 넣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곁눈으로 지켜보던 임 씨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에라, 화상아. 돈이 세상에서 젤 더럽다더라. 똥간보다 더 하다던데 그래 주둥이를 부비고 싶으나.”

“그래도 많아서 나쁠 건 없잖습니까. 아, 나한테 줘.”

뒷정리하던 선원에게서 양동이를 받아든다. 찰랑대며 넘친 물이 셔츠 적셨지만, 그런 것쯤은 손끝으로 가볍게 털어냈다.

그때마다 손목의 금팔찌가 찰랑거렸다. 단추를 두세 개쯤 풀어둔 실크 셔츠도 비늘처럼 매끌매끌 빛났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은 한 올도 예외 없이 뒤로 넘겨 고정했다. 칙칙한 작업복 무리 속에서 단연 눈에 띄는 차림새였지만, 누구도 현란함의 절정인 그를 의아해하지 않았다. 되레 창수야, 편히 부르며 돕기를 부탁하기 일쑤였다.

조업은 어획을 마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시 내일을 준비하려면 배도 청소해두어야 하고, 그물을 포함한 장비들도 점검해야 한다. 첫새벽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오후 두세 시가 되어야 끝나기 마련이었다.

“여 봐. 날도 추운데 한 잔씩 걸치고 시작하지?”

달게 넘기는 술 한 잔은 고단한 삶을 단비처럼 적시곤 한다. 뱃사람 중에 술 담배를 미처 못 배운 치는 있어도, 안 하는 치는 없을 거였다. 내심 기다렸던지, 하나둘 사양하지 않고 모여든다. 창수도 와라, 하는 소리에 지체 없이 드럼통 앞으로 엉겨 붙었다. 땔감을 적당히 쌓아올린 드럼통 안에 손수 불도 지핀다.

누군가가 배에서 소주 댓 병과 막걸리를 꺼내왔다. 수레에 실어 보내고 남은 잔챙이들이 새카맣게 그은 석쇠 위에 얹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투명한 비늘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튀었다. 고소한 풍미가 난다 싶더니, 금세 생선 눈알이 하얗게 튀어 올랐다. 냄새를 맡은 길고양이들이 야옹야옹 안달을 낸다.

이가 나간 사발에 걸쭉한 막걸리를 콸콸 들이붓는다. 먼저 한 모금 목을 축인 임 씨가 곁에 선 창수에게 사발을 건넸다. 굽실거리며 두 손으로 받아 달게 입가심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개운하게 목을 타고 내려간다. 노릇하게 익은 이름 모를 생선은 노랗게 알까지 배어 안주로 손색이 없었다.

불가에 선 얼굴들이 하나같이 떼꾼한 게, 개성이라곤 없다. 살갖은 보는 것만으로도 촉감을 알 수 있을 법했다. 돌섬처럼 굳은 낯들은 실없는 농에도 깊은 주름을 만들며 풀어지곤 했다. 겉이 반질반질한 것만 빼면, 창수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뭣 모르는 샌님들이 순박하다, 무식하다 지껄이지만 바다에 적을 두고 살면 다 그렇게 된다. 체념하는 것에도, 욕심을 버리는 것에도 금세 익숙해지는 거다.

“문어 있어, 문어?”

부녀회장이 종종걸음으로 나타난 건 동이 튼 직후였다. 속곳도 못 추스르고 뛰어온 모양새였다. 밤새 눌린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두 눈도 잠기운을 여실히 담은 채 퉁퉁 부었다. 모여 있는 인사들을 일일이 붙들며 때아닌 문어를 찾는다.

“임 씨, 오늘 문어 못 잡았어?”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문어. 어디 맡겨 놨어?”

“아이, 참. 있어야 하는데. 누구 잡았단 얘기 못 들었고?”

“있어도 한참 늦었지. 지금 시간이 몇 신대.”

골똘히 지켜보던 창수가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가방도 겨드랑이 밑에 살뜰히 낀다. 그러곤 우왕좌왕하는 부녀회장의 머리카락을 대강 매만져주었다. 경황이 없어서인지 부녀회장은 힐금 창수를 볼뿐, 그의 성가신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낙지는 안 되고?”

“그래도 귀한 손님 오시는데 낙지가 다 뭐래.”

“귀한 손님 누구? 집에 잔치할 일이라도 있어?”

핀을 새로 꽂아주며 은근슬쩍 묻는다 임 씨가 대신 타박하듯 대꾸했다.

“몰라서 물어? 오늘 보건지소에 선생님 오시는 날이잖아.”

“보건소? 거길 오겠다는 치가 있었대?”

“치가 뭐야, 치가. 선생님한테.”

잠자코 듣던 부녀회장이 찰싹 등을 때린다. 창수는 오만상을 구기며 온 몸을 꼬물거렸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얇은 셔츠 때문에 안 그래도 매운 손이 더 차지게 엉겼더랬다. 부녀회장은 죽겠다고 끙끙거리는 창수의을 재차 갈겼다.

“아, 옷 좀 단단히 입고 다녀. 젊을 때 철모르고 멋 부리다간 늙어서 뼈 시려서 고생해. 인석아”

“왜 또 그래요, 누님.

“누님은 얼어 죽을. 내가 너만 한 딸이 있는데. 이 치렁치렁한 것들은 뭐야? 머리 꼴은 그게 또 뭐고.”

“왜, 되게 세 보이잖아.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데.”

제 꼴이 만족스러운지 한껏 으스댄다. 그 능청스러움이 기어이 매를 불렀다.

“어이구. 양아치도 생양아치가 따로 없네. 그 미끌미끌한 윗도리 좀 벗으라니까?”

“멋이라니까요. 누님이 뭘 모르시네.”

“머엇? 세상에, 장님 아니고서야 어떤 여자가 그딴 걸 좋다고 해? 장가안 갈 거야?”

“장가 못 가면 누님이 딸 주시면 되겠네. 서울서 대학 다닌다며.”

“지랄 맞은 놈이, 꼭 맞을 소리를 해요”

찰싹찰싹 등짝 후려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죽을상을 한 창수의 몸이 제철 장어처럼 꾸물거렸다. 모여 있던 인사들은 낄낄 웃으며 저마다의 어선으로 향했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그물을 정리할 시간이다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주다가 저만치 달아난다. 부녀회장은 조금 따라는 시늉을 하다가 눈을 홀겼다. 그 기저엔 나름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얼마쯤 거리가 벌어지자 창수가 서서히 뒷걸음치며 제 일수 가방을 흔든다.

“누님, 오늘 치는 내일 한꺼번에 받아갈게.”

“그러지 말고 이따 들러. 밥이나 먹고 가.”

“봐서. 나, 가요.

계속 팔을 흔들며 뒷걸음질 졌다. 부녀회장과 몇몇 인사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더 큼직하게 팔을 젓다가 훌쩍 돌아서서 뛰어갔다. 신선한 아침공기가 기분 좋았다 슬슬 그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은 읍내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30년도 더 된 제분소 간판은 당장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금이 간 벽돌 사이사이엔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쇳내가 나는 좁은 층계는 대낮에도 어두컴컴 하기만 했다. 좁고 가파른 층계를 성큼성큼 뛰어 올라간다.

벌컥 문을 열자 만용이 고개를 들었다. 다짜고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진다. 피하지 않았다면 또 명패에 맞을 뻔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비위가 거슬린 모양이다. 애꿎은 책상까지 걷어차며 짜증이다.

창수는 익숙하게 바닥에 떨어진 명패를 주웠다. 패고 긁힌 흠이 가득한 그곳엔 '사장 김만용’이라는 글귀가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조용조용 좀 다녀라.”

명패를 내려놓는데, 낮게 으름장을 놓는다. 그조차 속없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미안. 안 들어갔네?”

“영원히 안 들어가고 싶다. 애새끼 우는 소리 아주 돌아버리겠어. 집어서 던질 뻔했다니까?”

“애기가 무슨 죄야. 니 새낀 좆만 했을 때 안 그랬을 거 같냐?”

“씹할, 알게 뭐야.”

본디 기질이 예민한 인사다. 지금처럼 지랄병이 도질 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생리하는 여자처럼 대해주는 수밖에.

오냐오냐 어르며 수금해 온 돈을 건넸다. 돈만 보면 사족을 못 쓰던 치가 제 코를 비틀어쥐며 고개를 돌렸다.

“아, 비린내! 존나 토할 거 같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돈이면 다 같은 거 아닌가. 은행에서 나온 새것이든, 똥 묻은 것이든. 냄새 좀 난다고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여간 유난스럽다.

“와 씨, 어질어질하네. 너, 그거 싹싹 빨아서 말려놔.”

“응. 근데 보건소에 의사 선생 온다던데. 들었어?”

돈을 도로 챙겨 넣으며 물었다. 만용은 짜증스럽게 창문부터 턱짓했다.

눈치껏 알아듣고 창문을 연다. 녹슬기도 했거니와 먼지와 한 데 굳은 터라 날카로운 쇳소리만 거푸 낼 뿐, 시원스럽게 열리질 않는다.

“아오, 돌겠네. 진짜.”

만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수를 뒤로 밀쳐냈다. 서둘러 좁은 창문 틈으로 제 고개를 내뺀다. 그러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고정되다시피 한 창문을 주먹으로 흠씬 두드려댔다. 시방 그는 위험한 짐승이다. 눈에 거슬 리는 건 죄 물어뜯을 준비가 된 미친개.

“발에 치이는 게 의사 나부랭인데 뭐 대단하다고 지랄들인지.”

어디 그뿐일까, 제 마음에 안 차는 게. 세상에 사내와 계집이 있는 것 도, 저 아닌 타인이 숨을 쉬는 것도, 이 땅이 대한민국이고 사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인 것조차 거슬릴 거였다. 이럴 땐 적당한 농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다.

“겁나 가슴 크고 섹시한 여의사일 수도 있잖아.”

“이 미친 무식한 새끼야.”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돌아본다. 실패다.

“뇌가 없냐. 뭐 하러 보건소에 오는지 몰라? 빌어먹을 국방의 의무를 다 하러 오는 거 아나, 국방의 의무. 구릿한 좆 냄새 풍기는 놈밖에 안 온다고, 이딴 데는!”

숨도 안 쉬고 뿜어내던 만용이 고요히 분을 억누른다. 그러더니 창수의 얼굴을 뒤로 밀쳐냈다. 그를 담아내는 두 눈엔 하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냄새나니까 발 닦고 잠이나 자.

“밤에 가게 나올 거야?”

“아, 알아서 할 테니까 꺼지라고!”

“새끼 겁나 땍땍거리네.”

중얼거리며 돌아서자 곧장 뒤통수로 휴지가 날아온다. 바로 옆에 놓인 화분이나 명패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풀린 화장지를 대강 말아 문 옆에 내려두곤 쫓기듯 사무실을 나섰다. 쌀쌀한 데서 밤새 떨었더니 몸이 무거워졌다. 당장 뜨뜻한 아랫목에 뻗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귀가하기 전에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읍내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관공서 출근 시간과 학교 등교 시간이 막 끝난 직후라 더 그랬다. 작은 의원들도 이제야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낡은 버스가 탈탈거리며 길 위를 지난다. 장이 서는 날엔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버스는 터미널을 대신하는 구멍가게 앞에 노파 셋을 뱉어냈다. 그중 둘은 방앗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갔다. 짐 내리는 데 만도 한참이 걸린 마지막 노파는 숨을 고르며 건너편 길을 막막히 바라봤다. 오늘따라 등이 더 굽은 듯하다.

불을 붙이려다가 담배를 도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양쪽의 차량 소통을 확인하며 큰길을 훌쩍 건너갔다. 심기일전해 일어나려던 노파가 불쑥 다가온 창수에게 큼직한 보따리를 빼앗긴다. 노파는 아서, 하면서 손사래를 졌지만 그는 이미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있었다. 손을 뻗어 굴러오는 차들을 제지하며 노파의 횡단을 돕는다. 그녀의 지정석인 사거리 약국 앞에 도작해서야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우리 엄마. 욕심도 많으시네. 월 또 이렇게 바리바리 싸 가지고 나오셨어. 힘들게.”

“이놈들 팔아봤자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러니까. 몇 푼이나 된다고 이 고생을 하셔, 그래.”

“집구석에 있으면 늙기밖에 더 해? 사람 보러 나오는 거야, 사람 보러. 이거라도 좀 팔면 할아버지 사탕도 사 드리고.”

“영감님은 잘 지내셔?”

“그 양반이야 누워 있는 게 일이지. 요샌 대답도 겨우 해.”

“빨리 기운 차리셔야 할 텐데. 아아, 앉아 계세요. 내가 할게.”

두런두런 안부를 물어가며 함께 짐을 푼다. 넓게 펼친 보자기 위에 갓 따온 호박, 고추, 토마토, 나물 두어 가지가 놓였다. 정리가 마무리되자마자 자리를 뜨려는데, 노파가 잘 영근 토마토를 손에 쥐여 주었다.

“됐어, 됐어.”

사양하는데도 한사코 옆구리에 쑤셔 넣는다. 별수 없이 잘 먹을게요, 했다. 돌아서면서는 탱탱한 토마토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과육이 팍 터졌다. 금세 입안이 상큼해지면서 비어 있던 속도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쪼그리고 앉았다. 시골의 가게들은 대중이 없다. 주인 사정에 따라 오픈 시간도 제각각이고, 휴무일도 난데없다 올라갈 기미 없는 셔터를 보며 토마토 꼭지를 잘근거렸다.

무작정 시간을 죽이다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를 꺼냈다. 꾸불꾸불 구겨진 것을 잘 펴서 입에 문다.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쯤 빨았을 때였다.

안에서부터 가게 문이 열리더니, 잇따라 셔터도 올라갔다. 반가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도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곤 멈칫한다. 아까운 마음에 연이어 쪽쪽 빨아들이곤 꽁초를 내던졌다.

“어서 오세요.”

여주인은 무의식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면서도 의외로운 표정이었다. 창수의 차림새를 보고는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창수는 제 셔츠만큼이나 현란한 상품들을 둘러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기는 많이 봤던 것들인데, 당최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 기웃거리고 있으려니 여주인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떤 거 찾으세요?”

“아, 그냥 여자들 입는 거. 브라자 뭐 그런…….”

“누구 줄 건데? 색시?”

“뭐, 그 비슷한데.”

이번엔 애꿎은 이마를 긁적인다. 왜 갑자기 땀이 삐질삐질 나는지 모르겠다. 시종 뻣뻣한 반응에 여주인도 곧 경계를 풀었다 비죽 웃으면서 몇개의 속옷을 꺼내 놓는다. 색색에다 디자인도 다양했다. 골라 봐요, 하는데 답 없는 질문이라도 받은 것 같다. 한참 끙끙거리다 백기를 들었다.

“그냥 누님이 좋은 거로 골라줘요. 여자들이 껌뻑 죽을 만한 거.”

“그러지 말고 총각 눈에 제일 예뻐 보이는 놈으로 골라 봐요. 자고로 속옷은 애인 마음에 드는 게 제일이지.”

“그럼…… 이거?”

개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 밀어냈다. 여주인은 남은 것들을 정리하더니 알아서 포장지를 꺼냈다.

“색시 치수가 어떻게 돼?”

“치수? 음, 이 정도? 젖통은 복숭아 두 개 엎어놓은 거 같고, 궁둥이는 수박만 한데.”

두 손으로 대중을 잡아본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여주인이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괜스레 민망해진 창수는 귓등만 긁적였을 따름이다.

다소 투박한 포장 위에 분홍색 리본까지 붙여준다. 계산하고 나오던 길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도무지 그것 그대로 가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가게를 나서는 창수의 손에는 칙칙한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힐금 그것을 내려다보던 얼굴엔 못내 뿌듯함이 넘실거렸다.

칠 벗겨진 대문은 눈썹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반쯤은 숙여야 한다. 우편함이 각종 고지서로 미어터지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그 곁을 지나쳤다.

“길녀야, 오빠 왔다.”

뱃심 가득하게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떨어진 외투를 익숙하게 집어 빨랫줄에 건다. 슬리퍼와 함께 나뒹굴던 가방은 제 어깨에 메고, 헝클어진 뾰족구두도 바로 세웠다. 닫혀 있던 미닫이문을 발칵 열자, 고꾸라져 잠든 길녀가 보였다. 치마는 반쯤 벗다가 말았다. 진득한 술 냄새가 날카롭게 코를 찔렀다.

“이년 또 꽐라됐네. 얼마나 마신 거야?”

야, 하면서 길녀를 흔들어 깨운다. 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 김에 얼굴이 마주치자 창수의 어깨가 움찔했다. 지우지 못한 화장이 잔뜩 번져 있었다. 귀신 얼굴도 이렇진 않을 거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다가 화장대로 기어갔다. 그곳에서 길녀가 흔히 쓰는 클렌징크림과 휴지를 가져온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푹 떠서 길녀의 얼굴에 치덕치덕 펴 발렸다. 알록달록하던 화장이 번지면서 한 데 뒤섞이기 시작한다.

“아, 꺼져.”

잔뜩 성가셔하는 얼굴을 붙들고 휴지로 싹싹 닦아냈다. 진한 화장을 지우자 제법 순한 인상이 됐다.

“좆만 한 게 툭하면 오빠 타령이야.”

주둥이는 아니지만.

길녀는 연신 쩝쩝 입맛을 다시며 좆만 한 새끼, 하고 꿍얼거렸다. 이불을 펴주려는데, 쪽마루에 놓인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하려던 일을 상기하곤 발끝으로 그녀를 툭 졌다

“야, 일어나 봐. 줄 거 있어.”

“돈 아니면 깨우지 마, 병신아.”

왈칵 성을 내며 이불을 끌어당긴다. 몸을 데굴데굴 굴리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 야무지게 감겼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그녀를 넘어 쪽마루로 나갔다 두 발에 슬리퍼를 꿰며 옆에 놓인 봉지를 획 집어 던졌다. 그것은 곧장 길녀의 얼굴로 날아갔다. 여태 인사불성이더니, 단숨에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난다.

“악! 진짜, 뭐야! 죽을래?”

순하다는 것도 취소.

당장에라도 사람 하나 담글 것 같은 얼굴이다.

“생일 축하한다고, 미친년아.”

돌아앉아서 목걸이와 팔찌를 풀었다. 성난 얼굴로 창수를 노려보던 길녀가 그제야 떨어진 물건을 본다. 바스락거리며 봉지를 헤쳐 보니 포장된 상자가 보였다. 짜증만 완연하던 얼굴에 픽 웃음이 번졌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이냐, 간지럽게.”

공격적이던 어조가 한층 누그러졌다. 연신 창수를 야유하듯 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내심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데, 길녀는 속 시원하게 선물을 뜯어보지는 않았다 포장지에 붙은 리본이나 만지작거릴 뿐이다.

“안 풀어봐?”

“그래 봤자 아줌마들이나 입는 빤쓰겠지.”

창수의 등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이년은 돗자리를 깔아야 할 것 같다.

쩝,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닫아버린 문 뒤에서 길녀의 호방한 웃음이 터진다.

찌그러진 대야에 물을 기득 받는다. 두 손부터 뽀득뽀득 소리 나도록 씻었다. 종일 밖으로 나돌다 보면 살갖이 찝찌름해진다. 그게 비단 바닷바람 탓인지, 홀린 땀 때문인지 모르겠다.

뒷목과 귀밑까지 샅샅이 씻고 있는데,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발칵 열렸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느새 속옷을 갈아입은 길녀가 모델처럼 서 있었다.

“어때? 존나 어울려?”

엉덩이를 씰룩이며 갖은 교태를 부려댄다. 그래 봤자 섹시함이라곤 건져 낼 길 없는 순백색 속옷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엔 그럴싸하게 어울리지만. 빤히 보던 창수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응, 존나. 딱딱해지려고 그런다.”

“미친놈이.”

“오빠가 너 한 살 더 먹은 기념으로 뚫어줄까?”

“꺼져, 병신아. 취향도 거지 같은 게. 어디서 이런 아줌마 걸 사 왔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입은 속옷을 낯설게 만져본다. 화사한 옷과 진한 화장이 일상인 그녀였다 이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그런 면 속옷은 입어본 적도 없다. 고작 속옷 하나라도.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해 하는 길녀를 보다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예쁘다.”

작은 소리였음에도 길녀가 하던 행동을 멈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더니 이내 느리게 끔벅거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번만 하자.”

찍 입술을 찢으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새된 욕설이 날 아들었다. 길녀는 벗은 속옷을 빨라며 던져주고는 문을 탁 딛았다. 안에선 연신 아줌마도 이런 거 안 입겠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수는 낄낄 웃으며 속옷을 주워 조물조물 빨았다. 만국기처럼 휘황찬란한 속옷들이 바람결에 나부끼며 말간 물줄기를 똑똑 뱉어냈다.

쪽마루로 옮겨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불 붙이고 한 모금 들이켜는데, 대문 밖에서 골목대장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잠히 눈을 감고 귀 기울이면 멀리서 뱃고동까지 밀려왔다. 그렇게나 작은 마을이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이웃집 사정이 뻔히 보이는.

그럼에도 좋았다. 이곳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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